#19. 나는 증오한다, 고로 존재한다
2017.05.04.
“이제 출발해도 될까요, 아가씨?”
로이자의 물음에 루시펠라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자가 루시펠라의 인상을 살폈다. 루시펠라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심기가 불편한 듯 굳은 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 하면 아가씨의 기분이 풀릴지 고민하고 있었다.
마차의 바퀴가 천천히 굴러가고, 이내 성문을 벗어날 때였다. 별안간 루시펠라의 입술에 붉은 곡선이 새겨졌다.
“푸훗.”
웃음을 참으려 노력하는 듯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
“아가씨?”
걱정스러운 로이자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계속 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게, 머릿속이 시원해졌기 때문이다.
죽음을 맞이하며 육체도, 에스텔을 상징하던 검술도 잃어버렸다. 그래서 에스텔은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의심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칼리드를 이렇게나 증오하는 자기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칼리드를 보았을 때 그 아련한 과거에 가슴이 아팠고, 복수심에 심장이 뛰었으며, 그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검게 타올랐다.
이런 생생한 감정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에스텔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설령 에스텔이 죽어 사라졌고, 이것이 에스텔의 정보라고 할지언정, 이 선명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한 에스텔은 에스텔이었다. 어디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푸하하하!”
그 간단한 사실을 왜 몰랐을까! 칼리드와 대화하고, 그에 대해 끓어오르는 감정을 느끼고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은 에스텔이다. 에스텔은 이렇게 살아남아 루시펠라의 몸에 자리해 있다. 자신은 에스텔이다. 이것은 불변의 사실이었다.
그녀는 칼리드에게 복수할 것이다. 에스텔이니까. 그것이 에스텔을 에스텔로 만들어주는 이유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루시펠라가 되어야 했다.
기사였던 에스텔이 루시펠라라는 레이디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루시펠라는 마차 창문 안에 있는 커튼을 쳤다. 그러자 눈에 시리도록 새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자신 안에 느꼈던 깨달음을 즐기려 할 때였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아가씨?”
“그래.”
루시펠라의 미소에 로이자가 망설이는 듯하더니 물었다.
“그런데 ‘그때’라니, 공작 각하와 무슨 일이 있었어요?”
“어?”
“죄송해요, 마차 안에서 기다리다 보니 공작 각하의 목소리가 들렸거든요.”
“일은 무슨 일. 그냥 그 녀석이 함부로…….”
그렇게 무심하게 말하던 루시펠라의 얼굴이 점점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머릿속에 그때의 그 입맞춤이 재생되었던 탓이다. 멋대로 키스를 시도하고, 제드가 입을 맞춰오고. 제드가 말했던 ‘행실’이란 그런 것이었다.
완전히 잊고 있었다. 루시펠라는 자신의 치맛자락을 꾸깃꾸깃해지도록 꾹 잡았다. 이렇게나 중대한 일이었는데!
“어, 어떻게!”
어떻게 이걸 잊을 수 있지? 심지어 자신이 먼저 유혹해 입을 맞췄다. 키스, 제대로 된 키스도 안 해봤는데 무슨 자신감으로!
그때 화가 난 표정으로 돌아가던 제드의 표정이 떠올랐다. 다행히 다시 만난 그는 덤덤해 보였지만, 그 녀석이 태연하다고 해서 그녀가 부끄럽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으악! 내가 왜 그랬지?”
“네?”
루시펠라는 마차의 창문에 머리를 쾅! 박았다. 그러나 루시펠라는 수치스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사과라도 했어야 하는데…….”
루시펠라의 행동에 로이자는 다시 아가씨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역시 아가씨는 미친 게 아닐까? 제발 아니기를 로이자는 빌고 또 빌었다.
***
제드는 떠나가는 마차를 보고 난 후 다시 말에 올랐다. 이오지프가 따라붙으려 했으나, 그는 냉정하게 황자를 쳐냈다.
그는 루이르크 공작, 칼리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언제나 미소를 짓던 칼리드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그에 제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의 약혼녀는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에게 엿을 먹이는 묘한 재주가 있었다. 마음은 복잡했지만 저런 면상을 보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이오지프가 황실에서 나갔다는 소리를 듣고 혹시나 해서 와봤는데 역시나 잘되었다. 다행히 무슨 일은 벌어지지 않는 모양이고, 루시펠라 역시도 상태가 약간 이상하긴 했지만 멀쩡해 보였다.
‘지나치게 멀쩡했지.’
그래서 문제였다!
제드는 얼굴을 찡그렸다. 아니, 왜 멀쩡하지? 기억을 못 하는 건가?
“하다못해 사과라도 했어야 하는데…….”
황태자를 잃은 마음의 후폭풍을 감당하지 못해 앓아누웠던 사람이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입을 맞추려 달려들었다.
어찌 되었든 ‘외로워서’ 대용으로 그를 찍고 입을 맞춘 건 그도 알고 있었다. 조금 놀려줄 생각으로 입을 맞췄던 건데, 입맞춤을 하다 자신도 모르게 매료되었다.
아니, 아니다. ‘놀려줄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솔직해지자. 이미 루시펠라가 웃으면서 유혹했을 때 거기에 넘어가 버린 것이다.
아픈 사람이 금화 100개를 준다고 그걸 덥석 받아버리면 그건 쓰레기나 할 짓이다. 버나드는 그렇게 말했다.
아무리 오는 여자를 안 막아도 아픈 여자는 좀 막아야 하는 게 정상이 아닌가. 당시 루시펠라가 놀란 모습을 보고 제드도 정신을 차렸다. 그는 아픈 루시펠라보다 짐승같이 멍청한 자신에게 화가 나 있었다.
“미친.”
그는 아직도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때의 그 어설픈 유혹의 미소보다 가을 연회, 춤을 출 때의 그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더 떠올랐다.
그때 루시펠라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따윈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눈, 그 두 눈만은 이상하게 기억이 남았다.
마치, 그래, 마치……
죽어버린 얼샤의 기사, 에스텔 슈페르트의 눈처럼.
“미친 거지.”
어떻게 여자임에도 기사가 되었던 그 대단한 사람과 자신의 약혼녀를 비교한단 말인가. 공통점을 눈 씻고 찾아봐야 겨우 성별 하나밖에 없는 인간을. 그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에스텔이라는 인간은 그의 뇌리에 가장 깊숙이 박혀 있기에, 좀처럼 쉽게 빠져나가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이미 죽어버렸기에, 아마 영원히 특별하게 남게 되겠지.
에스텔을 떠올리던 제드는 다시 루시펠라를 떠올렸다. 어찌 되었든 자신을 이상하게 자극하던 약혼녀가 사라졌으니 속 시원했다.
이제 자기 영지에서 사고 치지 않고 좀 조용히 지내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는 공작가로 향하는 말을 세차게 몰았다. 더 이상 통제하지 못할 연유 모를 감정에 휩싸이지 않기를 바라며.
***
번들거리는 대리석을 밟는 발소리가 서늘하게 복도에 울려 퍼졌다.
남자의 발걸음은 어딘지 모르게 느릿했다. 그는 불안한 눈으로 자신의 크라바트를 가다듬으며 화려한 복도의 외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목적지인 어떤 방문 앞에 다다른 순간, 그는 들릴 듯 말 듯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초대가 달갑지 않았던 탓이다.
커다란 문의 좁은 틈에서는 황금색 빛과 더불어 떠들썩한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자 가운데에 붉은 의자 위에 앉아 있는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한눈에 봐도 여유로운 자세로 다리를 꼬고 앉은 청년은 그 자세에 그 특유의 오만함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상징과도 같은 뒤틀린 미소가 서려 있었다.
청년의 시선이 들어온 남자를 향했다. 그의 얼굴이 환하게 물들었다.
“어서 오시오, 당숙!”
“황태자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방문객, 아이딘 백작이 허리를 숙이려 하자 테미르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 사이에 무슨 인사입니까.”
테미르는 퍽 다정하게 손을 저으며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 바로 옆에 마련된 의자를 가리켰다.
“이리 오십시오.”
황태자의 바로 옆자리다. 보통은 그의 외숙부인 이드리스 공작이 옆에 앉았으나, 오늘은 어째서인지 자리가 달랐다. 눈치를 보듯 이드리스 공작을 바라보자 그가 허락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앉으시게.”
그에 아이딘 백작은 자리에 앉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두운 자주색 제복을 입은 2기사단이 서 있었다.
“보석 광산 일로 바쁩니까?”
“작은 광산에 관련된 일입니다. 뭐가 그렇게 바쁘겠습니까.”
백작의 말에 황태자가 미소 지었다. 아이딘 백작령에 있는 쌍둥이 산 중 하나에 작은 보석 광산이 발견되었다. 그 작지도 크지도 않은 광산은 가난했던 백작령을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
“그래도 당숙께서 제게 금전적으로 이렇게나 도움을 주시니 언제나 든든합니다.”
“전하께 당연한 일입니다. 비록 조그마한 광산이지만 분명 힘이 될 것입니다.”
그 덤덤한 말에 황태자가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테미르는 버릇대로 다리를 떨면서 팔에 턱을 괴며 말했다.
“당숙, 루시가 영지로 내려갔다지요?”
“네.”
“참 아쉽군요. 가는 길에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
“현명하신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쳤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수도에 더 있어봤자 무얼 합니까. 웃음거리만 될 테지요.”
그는 백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에 방 안에 앉아 있던 다른 이들이 동조하듯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에도 백작의 표정은 변함 하나 없었다.
“가엾게도, 많이 힘들었나 봅니다. 뭐, 무리는 아니죠. 하지만 저는 잊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그때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2기사단의 기사들이 한 여자를 끌고 오고 있었다. 하녀의 행색을 한 여자는 덜덜 떨고 있었다. 아이딘 백작이 의아한 표정으로 보았다.
“아, 실례합니다. 아랫것이 차를 가져온다고 했다가 제 앞에서 그릇을 깨버렸지 뭡니까. 이런 건 바로 체벌을 해야죠.”
하녀의 머리카락은 밤처럼 검은 흑발의 미형의 여자였다. 그것을 본 아이딘 백작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쩐지 찝찝했던 탓이다. 그것이 마치……. 아니, 착각이겠지. 아이딘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당숙도 같이 봐주십시오! 이건 제 얼마 안 되는 여흥이라서요.”
킥킥거리던 테미르가 신호를 하듯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그에 하녀가 손을 싹싹 들고 빌었다. 그러나 테미르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본디 자신보다 아랫사람, 특히나 여자에 대한 학대를 가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역시 오늘은 황태자가 기분이 나쁜 날이었나 보다. 아이딘 백작은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이드리스 공작은 무표정하게 하녀를 보고 있었고, 바반드 백작은 겁에 질린 표정이었고, 포에르 백작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가학적인 흥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곧이어 제2기사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채찍을 들어 하녀에게 체벌을 가했다. 휘리릭, 허공을 가르는 채찍이 여자의 가녀린 몸을 때렸다.
“아아악!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하녀가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억센 채찍이 사정없이 내려쳐졌다. 그 한 번만으로도 하녀가 입고 있던 옷은 찢어졌다.
다시 몇 번, 여자에게 채찍이 내려쳐졌다. 이윽고 피가 튀기 시작했다.
“더 세게!”
테미르의 얼굴이 가학심으로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당숙, 보이십니까? 저 소리 이상한 것 좀 보십시오! 나중에는 짐승같이 소리를 내게 될 거랍니다!”
가련하게 맞는 하녀를 바라보고 있는 테미르의 초록색 눈은 흥분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더욱더 억센 채찍 소리가 나며 하녀는 이제 말도 못 한 채 맞고만 있었다.
그 후로도 한참 동안 태자궁의 응접실에선 다 죽어가는 여자의 신음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테미르가 고개를 돌려 바로 옆에 있는 아이딘 백작을 올려다보았다. 아이딘 백작은 그에 당혹스러워졌다. 뱀과 같은 그 두 눈은 희열로 번뜩였으며, 마치 백작의 반응을 관찰하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이딘 백작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애써 감추며 검은 머리의 하녀가 맞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이 자리에 칼리드 루이르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통 이런 회합에는 모습을 드러내던 이였다.
어디에 있을까? 그의 두 눈이 불안하게 맞고 있는 하녀에게로 옮겨갔다. 하녀는 황태자의 말대로 이제 사람이 내는 소리가 아닌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다음에는 더 재미있는 모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기대되지 않습니까?”
백작은 황태자가 또 시작이려니, 하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
“주무시는가?”
“주무시네요.”
영지 관리인인 맷시 자작이 로이자를 보며 말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한 뒤 한숨을 쉬었다.
루시펠라는 영지로 내려오는 며칠 동안 내내 마차에서 꾸벅꾸벅 졸더니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져 버렸다. 거의 10년 만에 백작의 성에 오는 아가씨를 기다리며 저택을 꾸며놨던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그래도 뭐, 이젠 잠은 편하게 주무시네요.”
“언젠 안 그랬었나? 지금 자는 모습을 보면 언제나 잘 주무시는 것 같은데.”
그에 로이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때 사고가 난 뒤로부턴 잘 주무시지 못했거든요.”
앓아누웠을 때도, 그렇지 않을 때도 루시펠라의 표정을 자세히 보면 눈썹이 찌푸려져 있었다. 마치 잠을 자는 게 싫은 듯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정말 깊게 주무시니 좋아요.”
아주 살짝 미열이 있긴 했지만, 루시펠라는 편안한 얼굴로 잠을 자고 있었다. 이전과는 꼭 다른 것처럼.
“아가씨가 이 영지를 마음에 들어 하셔야 할 텐데.”
“마음에 들어 하실 거예요.”
맷시 자작은 로이자의 확신에 의아했다. 그가 관찰해 온 아가씨는 이곳을 분명 싫어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기억을 잃으셨다더니 성격이 많이 변하셨나 보군.’
시중을 드는 하녀들의 평온한 모습도 그렇고, 생각했던 것보다는 커다란 문제는 없을 모양이었다.
“으아아∼ 잘 잤다!”
기지개를 켜던 루시펠라는 신음 소리와 함께 허리를 붙잡았다. 너무 힘주어 몸을 폈더니 허리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이 몸은 살인범을 만났을 때 살아남았던 게 기적일 정도로 너무나 나약했다.
마차 안에 있는 것이 너무 답답해서 나중에 익숙해지면 말을 타겠다고 결심했지만, 결국 실행하지 못했다. 이 몸은 너무 약해서 장시간의 마차 여행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루시펠라는 도착했을 때 거의 반시체였다. 영지가 어떤 모양인지, 성이 어떤지 따윈 전혀 알 여유가 없었다.
그저 그녀는 인사고 뭐고 어서 끝내고 침대에서 편안하게 잠을 자고 싶었다.
‘이 꼴을 봤다간 리엄이 또 웃겠지.’
사흘 밤낮을 새고 말을 탔던 강행군이 아닌, 겨우 마차 여행으로 거의 쓰러지다시피 했으니 말이다.
루시펠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거의 사흘을 내리 잔 것 같다. 루시펠라는 욱신거리는 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일어났다.
마음이 편해지니 잠도 자연스레 늘었다. 자신의 정체성이 확실해지자 이 몸이 요구하는 휴식도 자연히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루시펠라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화려한 저택과는 달리 이곳은 확실히 소박한 곳이었다. 금색으로 번쩍번쩍 거려 눈이 아팠던 저택과는 많이 차이가 났다.
어찌 되었든 자신이 온다는 말에 부랴부랴 준비를 했는지 이불은 화려한 편이었지만 어딘지 성안 전체의 풍경은 어설펐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은 개운했다. 어차피 좀 걸으면 다시 앓아눕겠지만.
루시펠라가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자 하녀들이 놀라서 달려왔다.
“아, 아가씨!”
“아가씨!”
성에 있는 하녀들은 루시펠라가 어렸을 적에 본 하녀들과 전혀 다른 하녀들이었다.
잠깐? ‘전혀 다른 하녀들’이라니? 아무래도 성에서의 루시펠라의 기억이 또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세상에, 아가씨!”
수도에서 온 하녀들이 그녀 쪽으로 달려와 성의 하녀들을 제치고 루시펠라를 에워쌌다.
뭐지? 고개를 갸웃하며 루시펠라가 하녀들을 보자, 하녀들이 알게 모르게 눈짓을 하고 있었다. 꼭 그것이 기사들의 알력다툼을 보는 것 같았다.
수도에서 선별된 기사들과 지방 군소 귀족들이 선별한 기사들은 당연히 격에도 차이가 났으나, 꼭 무가로 유명한 가문의 기사들은 자신들의 수준이 수도의 정예기사들과 다르지 않다며 그들과 마주칠 시 기 싸움을 벌이고는 했다.
하여튼, 이곳이나 저곳이나 다 똑같다니까. 루시펠라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