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레이디와 기사들
2017.05.01.
목소리.
이 얼마나 따스하고 부드러운가. 이 얼마나 다정한가.
그럼에도 마치 뒷목을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 찌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돌아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돌렸다. 어두운 자주색 제복이 보였다.
그가 이렇게 키가 컸던가? 에스텔이었을 적 어깨까지 머물렀던 시야는 이제 그의 가슴팍에 머물러 있었다.
서서히 고개를 들어 시야를 위로 올려보니, 호의적인 미소를 지닌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보라색 눈을 반으로 접은 채 친근하게 말을 건네는 이는 그 옛날 에스텔의 친우이자, 에스텔의 목숨을 손수 거둔 원수였다.
만나자마자 욕을 하고 저주를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
마음속에 맺힌 말은 너무 많았으나, 말하고 싶은 말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큰 힘을 가지고 아우성을 치고 있어 오히려 아무 말도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루시펠라는 눈을 크게 뜬 채 이 낯익고도 낯선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언제나 부드럽게 미소 짓던 그 얼굴이 여기 있었다. 그러면서 루시펠라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에스텔 앞에 웃었던 칼리드, 그러나 그의 모습은 거짓된 모습이었던 것일까.
“영애, 왜 그러십니까?”
이오지프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루시펠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웃음을 본 것만으로도 마치 과거로 돌아가 있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잘못된 것은 없었고, 그는 에스텔을 죽이지 않았고, 에스텔은 살아 있고 그저 피치 못할 이유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처럼.
마치 오래 헤어져 있다가 만나는 것처럼 그리운 기분.
“몸이 안 좋으신 모양이로군요, 영애.”
칼리드의 얼굴이 걱정스럽다는 듯 변했다. 그 순간 루시펠라는 정신을 차렸다.
그는 가식적으로 행동할 때 고개를 살짝 틀어 상대방의 시선을 피해 아래로 눈을 내리깔다가 다시 정면을 쳐다보는 버릇이 있었다. 그 짧은 순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계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칼리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그의 얼굴은 계산되어 있는 다정함이다.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머저리같이 입술이 벌어지며 목소리가 나왔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 그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그가 사람을 깔볼 때의 표정이었다.
“나는, 그러니까…….”
무엇을 말해야 하지? 네가 밉다고, 너를 죽이고 싶다고?
아니, 아니다. 그녀는 자신이 ‘에스텔’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부터가 먼저였다. 미움과 증오를 터뜨리는 것도 에스텔이어야만 가능했기에.
그러나 그녀 자신도 헷갈리는 지금, 어떻게 자신을 에스텔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이딘 영애?”
그러나 루시펠라는 이 태연한 얼굴을 한 존재가 가증스러웠다. 지금 그 목을 찌르면 죽지 않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신의 손에는 무기가 없었다.
“역시 몸이 안 좋으신 모양이로군요. 손 잡으십시오. 마차까지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칼리드는 꽤 정중한 얼굴로 다가와 루시펠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누군가가 루시펠라의 등 뒤에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가 하지.”
“……!”
익숙한 목소리였다. 루시펠라가 고개를 들어 등 뒤를 바라보니, 그녀가 익히 잘 아는 사람이 서 있었다. 루시펠라의 약혼자, 하인트 공작이었다.
“몸이 많이 안 좋은 모양인데, 대화는 이만하고 마차에 타는 게 좋지 않겠어?”
루시펠라는 자신의 어깨 위에 얹힌 그의 손을 보았다. 그와 눈을 마주하자, 불쾌해 보이는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에 신기하게도 루시펠라의 부유하던 정신이 돌아왔다. 생각은 범람했으나, 그녀의 생각은 방금 깨달았던 어떤 사실 때문에 멈추었다.
“하인트 공, 약혼녀를 배웅 나온 겁니까?”
사교적인 표정으로 칼리드가 제드에게 말을 건넸다. 제드가 보이는 노골적인 혐오의 기색에도 칼리드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뭐, 보다시피.”
“하인트 공.”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오지프가 해맑은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이런 데에서 만나는군요.”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제드는 그 반가움과는 반대로 지나치게 딱딱하게 말하며 이오지프에게 예를 차렸다. 이오지프의 얼굴이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이런 곳에서 제 약혼녀가, 저도 모르게 황자 전하를 만나고 계실 줄은 몰랐군요.”
“영애가 걱정되어 배웅을 나온 겁니다.”
“그렇습니까? 전하와 영애가 그렇게 친분이 있는 사이였는지는 몰랐습니다.”
제드가 비뚜름하게 웃었다. 칼리드의 시선이 이오지프와 제드를 훑었다.
“그런 게 아니라, 제 앞에서 발작을 일으켰으니 걱정이 되지 뭡니까. 혹, 질투하는 건 아니겠지요? 질투하는 겁니까?”
초롱초롱한 이오지프의 얼굴을 보며 제드는 면전에 쌍욕을 날리고 싶었지만, 그 역시 사교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질투하면 안 되는 겁니까?”
“엑!”
뻔뻔한 제드의 말에 이오지프가 뛰어오르듯 하며 이상한 감탄사를 냈다.
“전하, 저는 질투심이 아주 많은 사람입니다.”
물론, 진짜로 제드가 이오지프를 질투하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오지프도 제드도 잘 알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을 하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제드의 경고였다. 그것을 알아차린 이오지프가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미소 지었다.
“영애.”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루시펠라는 옆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옆에 있는 것은 칼리드가 아니라 제드였다. 그 이전과는 전혀 반대되는 상황이었다.
“몸이 많이 안 좋나 보군.”
그러나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대답할 기력조차 없나?”
그 목소리도 태도도 상당히 부드러웠음에도 루시펠라는 묵묵부답이었다. 그 대화를 본 칼리드가 눈을 가늘게 접으며 말했다.
“조금 의외로군요. 언제나 여성분들을 대하는 데에 있어서 담백하셨던 분께서 이렇게 다정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비꼬는 것을 알아차린 제드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일부러 저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루시펠라를 깎아내리면 제드를 더욱 깎아내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재수 없는 놈.’
사람들은 언제나 제드가 일방적으로 칼리드에게 날을 세우는 줄 알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제드가 칼리드를 싫어하는 것만큼 칼리드 역시 제드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웃는 낯짝으로 제드의 속을 긁어왔다. 만약 황제가 저 인간을 얼샤에서 데려오지 않았다면, 제드는 그 목을 직접 잘랐을 것이다.
“내가 약혼녀를 대하는 것에 공에게 평가를 받는 일이 될 줄 미처 몰랐군.”
“아니, 조금 특별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특별?”
제드가 비웃듯이 묻자 칼리드는 제드의 말에 대답 대신 루시펠라에게 말을 건넸다.
“하인트 공은 정말로 마음이 넓으신 분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영애?”
그러자 세 남자의 시선이 모두 루시펠라에게 쏠렸다. 루시펠라는 시선을 내리깐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녀는 한눈에 봐도 어딘가 불안정해 보였다.
이오지프는 흥미롭게 그것을 지켜보았다. 만약 이곳에서 루시펠라가 혹 다시 발작이라도 일으키면 제드의 체면만 구겨지는 것이었다.
이오지프로서도 칼리드가 제드를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그는 지금 앞에 벌어진 이 상황이 아주 즐거웠다.
칼리드가 짐짓 안쓰럽다는 표정을 하며 말했다.
“이런, 영애의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미처 제가 생각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대답하기는 힘드시겠지요? 참 아쉽습니다.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습니다만, 영애의 몸 상태로는…… 여의치 않은 상황인 것 같군요.”
그때 루시펠라의 다물린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입이 열렸다.
“저번 황궁에서 절 도와주신 점 먼저 감사드립니다.”
이오지프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어딘지 정신이 없어 보였던 루시펠라의 표정이 변했던 탓이었다.
“또한 제 약혼자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려주신 점 감사합니다.”
루시펠라가 어깨에 얹힌 제드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따스한 감촉이 닿자 제드의 손이 움찔, 하고 떨렸다. 그의 시선이 루시펠라의 작고 하얀 손에 오래 머물렀다.
칼리드는 처음으로 입을 연 루시펠라가 의외로 정상적인 말을 하자 눈이 살짝 커졌다.
“약혼자가 약혼녀를 대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것뿐인데 말입니다. 그게 그렇게 의외이며 공작 각하의 마음이 넓은 것으로 보였나요?”
그녀의 목소리는 또렷했고, 그야말로 아가씨처럼 나긋했다. 제드 역시도 그녀의 의외의 모습에 당황했다. 언제나 내일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래서 자길 숨길 수 있었던 건가.’
지금의 모습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레이디의 모습이었다. 자신이 아는 그녀의 모습과의 괴리에 제드는 기묘함을 느꼈다.
“그 다정함이 조금 의외였을 뿐이랍니다. 하인트 공의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니까요. 영애께서는 사람을 끄는 특유의 아름다움이 있나 봅니다.”
루시펠라가 그에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과거라……. 마치 오래전부터 제 약혼자를 잘 알고 계신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오래전부터 친분이 있던 사이였나요?”
루시펠라는 지금 칼리드의 이 일방적인 조롱을 그대로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것은 그녀의 자존심에 반하는 일이었다.
“아니.”
대답은 칼리드가 아니라 루시펠라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뒤를 살짝 돌아보니 제드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도 아닙니다. 저는 얼샤 왕국의 기사였는걸요. 모르진 않으실 텐데 말입니다. 아니, 관심이 없을 수도 있겠군요.”
그것이 루시펠라를 비웃고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미쳤다는 소문이 돌았다더니, 역시나 이 녀석도 그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루시펠라는 수치스러움에 입술을 깨물었다.
“저라고 모르는 게 아니랍니다. 그렇지만 조금 궁금했을 뿐이에요. 얼샤 왕국의 기사였던 분께서, 멸망한 각하의 모국 작위를 그대로 이어가고 계시니까요. 그렇다는 말은 얼샤에 계셨을 때도 하인트 각하와 같은 분들과 친분이 있었을 수도 있지 않았겠어요?”
그 말에 칼리드의 여유롭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루시펠라는 얼샤에 있을 때부터 칼리드와 얀스가르의 관계를 지적한 것이었다.
칼리드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루시펠라는 입 밖에 당장에라도 나올 것 같은 온갖 비난을 다시 갈무리했다.
“비록 얀스가르의 기사가 되었지만, 전쟁, 그 이전에는 이곳 분들과의 친분은 없었습니다.”
칼리드의 대답에 루시펠라는 피식 웃었다. 그걸 어떻게 믿겠는가. 나라에 등을 돌리고 상관의 목을 잘랐던 사람의 말이다. 칼리드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역겹다. 왜 지금 그가 불쾌해하는가?
자신의 목을 자른 사람은 칼리드다.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을 짓는가? 나라가 없어졌을지언정 결과적으로 칼리드는 아무것도 잃은 게 없다. 그럼에도 이런 조롱에도 불쾌해한다.
“각하, 저는 절 바보 취급하는 것을 아주 싫어해요.”
“칼리드, 나는 날 바보 취급하는 걸 아주 싫어해.”
루시펠라는 의도적으로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입에 담았다. 칼리드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에 루시펠라는 비틀린 통쾌함을 느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바보 취급했는지는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저는 바보가 아닙니다. 공작 각하께서 소문만 믿고 절 바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루시펠라의 말에 이들 사이에 정적이 일었다. 이오지프는 여전히 방관자의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으며, 제드는 그들의 언쟁에 생각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칼리드는 루시펠라를 탐색하듯 보고 있었고, 루시펠라는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려 웃으며 안으로는 입술의 여린 살을 꼭 깨물고 있었다.
“제가 오해할 만한 호의를 내보여 드렸나 봅니다. 영애, 곡해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루시펠라는 그 말에도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이내 생각난 듯 이오지프를 보며 말했다.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전하.”
“더 많은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는데 아쉽군요. 부디 근시일 내로 뵐 수 있길 바랍니다.”
“전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루시펠라는 미소조차 지어주지 않은 채 눈에 힘을 담아 말했다. 이오지프는 어딘지 모를 한기를 느꼈다.
“가지.”
그 목소리와 함께 루시펠라가 잡았던 제드의 손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에 루시펠라는 제드가 자신의 뒤에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제드는 그녀의 뒤에 서 있다가 비로소 그녀의 옆에서 그녀에게 정중하게 손을 뻗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던 루시펠라는 부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도록 미소를 지으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 마치 이전부터 다정한 약혼 관계였던 것처럼.
제드의 든든한 손이 자신을 잡아주었다. 그 온기가 그녀의 터져 버릴 것처럼 위태하게 일렁거리는 감정을 진정시키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제드가 딱히 특별한 행동을 한 것이 아니었지만, 루시펠라는 그렇게 느꼈다.
루시펠라는 뒤를 돌아 칼리드 쪽을 바라보았다. 칼리드의 시선이 이곳에 닿는 게 느껴졌다.
루시펠라는 그 얼굴과 마주할까 하다가 이내 눈을 감고 몸을 빙글 돌리곤 마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드가 그녀의 속도에 맞추어 같이 걸어갔다.
“진짜로 날 배웅하러 온 거야?”
마차를 향해 걸으며 루시펠라가 물었다. 제드는 그에 고개를 끄덕였다.
“약혼녀니까. 먼 길을 떠나는데 그래도 인사 정도는 해줘야 구색에 맞을 것 같아서.”
루시펠라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귀족들에게는 위신이 중요하니 그럴 수도 있겠지. 별로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그녀의 신경은 등 뒤에 있는 칼리드를 향해 곤두서 있었다.
“그래.”
루시펠라가 무미건조한 말을 내뱉자 제드는 우뚝 멈춰 선 채 루시펠라의 얼굴을 보았다.
그에 루시펠라 역시 세 걸음 정도 더 걷다가 그가 따라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제드의 표정은 미묘했다. 그 석연찮은 표정에 그녀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용건이라도 있나?”
그 말에 제드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이내 기분 나쁜 듯 구겨졌다. 그는 허탈한 듯 웃음을 내뱉다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아니.”
무언가 제드와 관련된 아주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 같으나 루시펠라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 안에 끓어오르는 복잡한 감정을 갈무리하기에도 바빴기 때문이다.
루시펠라의 발걸음이 빨라지자 덩달아 제드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마차에 오르기 전 제드가 손을 내밀었다. 루시펠라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 손을 지탱해서 마차에 올랐다.
오늘은 어찌 되었든 제드에게 신세를 졌다. 그녀가 폭주하기 직전에 와서, 그녀는 생각하고 사고할 기회를 얻었다.
칼리드의 앞에 그가 나섬으로써 루시펠라는 자신이 지금 제더카이어 하인트와 약혼한 루시펠라라는 자각을 할 수 있었다.
“고마워.”
이것은 정말로 진심이었다. 그러나 루시펠라의 입에서 나온 말에 제드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그녀가 고맙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무엇이?”
“여러 가지로.”
그에 제드는 무엇인가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결국 무언가 납득이 된 모양인지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겐 예의는 아니지만 영애도 영애 나름의 일이 있겠지.”
칼리드에게 생각을 전념하고 있던 루시펠라는 그에 갑자기 생각이 뚝 멈췄다.
저 인간에게서 왜 갑자기 정상적인 말이 나오는 것인가. 게다가 저 표정은 뭔가. 제드는 복잡한 표정으로 루시펠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지에서 마음 정리를 했으면 좋겠군.”
“……?”
루시펠라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칼리드와 자신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아는 것 같았다. 게다가 이 인간은 대체 내일 죽을 사람처럼 다정한 거지?
“언제 다시 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행실 똑바로 해. 나 역시 약혼자의 의무는 다하도록 하겠어.”
그러나 방금 그 말에 루시펠라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불쾌감이 번져 오고 있었다. 웬일로 다정하나 했다.
“행실을 똑바로 하라니?”
루시펠라의 물음에 제드가 답했다.
“‘그때’처럼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는 말이었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다.
루시펠라는 마차에 올랐다. 그러곤 마지막으로 뒤를 본 순간, 제드는 루시펠라를 보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 루시펠라는 제드의 속을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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