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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17화 (17/173)

#17화 의외의 고민

2017.04.27.

제드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다 겨우 입을 벌리며 물었다.

“대체 왜?”

“그게, 아무래도 소문이…….”

“막아두라고 지시했을 텐데?”

“막아도 쉽지 않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이미 어느 정도 확산이 된 상황입니다. 저번 황궁 호수에 뛰어드셨던 일도 그렇고, 황궁에서 또 투신 시도를 하신 것도 그렇고, 저택에서 벌이신 일도 소문이 퍼져 나갔고.”

“그래서, 정확히 뭐라고 소문이 퍼진 거지?”

“영애께서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소문이 서서히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제드는 계속해 보라는 듯 버나드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수도는 복잡한 곳이니, 아이딘 백작이 그렇게 지시한 모양입니다.”

“그렇군.”

“아무래도 혼인 전까지는 영지에서 머무르시지 않을까요?”

제드는 창문 밖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잿빛 구름을 보면서 그는 검지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톡톡 두드렸다.

“훌륭한 결정이군.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라? 이게 아닌데. 이 담백한 태도는 뭐란 말인가.

내내 창밖을 보고 있던 그가 다시 일에 전념하려는 듯 조용히 서류를 보며 말했다. 버나드는 당황해 그가 몇 번이고 같은 부분을 읽는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버나드.”

한참 후에 제드가 입을 열었다.

“네, 각하.”

“황태자가 그렇게 매력적인 얼굴인가?”

“네?”

제드는 심각한 표정이었다. 버나드는 이게 무슨 개소린가 싶었다.

“나보다 더 매력적인가?”

광증도 전염이 되나? 아이딘 백작 영애에게 전염된 건 아니겠지.

그는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회피하는 모범 답안을 내놨다.

“황태자 전하를 연모하는 영애들이 많죠.”

“그렇다면 나는?”

“각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보다 황태자가 더 인기가 많나?”

“아직 황태자비가 간택되지 않았잖습니까. 모든 영애가 미래의 황후가 되는 꿈을 꿉니다.”

그 말은 황태자가 인기가 더 많다는 소리였다. 황태자 역시 겉은 말끔했으니 여자들이 마음에 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각하가 전쟁터만 전전하셨다는 걸 생각하셔야죠.”

“그래.”

제드는 그것에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그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물었는지 깨닫고 나지막이 ‘미친’이라는, 버나드가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다.

“황후라는 자리가 그렇게 탐나는 자린가?”

“사람에 따라서는 그렇겠죠. 나라의 안주인이자 여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가 아닙니까.”

제드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황태자에게 인간적인 매력이 있나?”

제드의 말에 버나드가 토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제가 얀스가르의 국민이지만 전하에 대해서 좋은 말은 차마 할 수 없군요. 제가 10대였을 때만 해도 그분의 행실과 더불어 여자관계에 대해 접한 정보가 얼마나 많은데, 어떻게 ‘인간적인’ 매력이 있습니까?”

그러다가 버나드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어쩐지 제드의 그다음 질문이 ‘내게 인간적인 매력이 있나?’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똑같이 파탄 난 성격. 줄을 세워봐야 손톱만큼 차이가 나는 걸 비교하는 데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차마 그는 주군더러 ‘인간적인 매력이 있으십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양심에 찔렸다.

자신의 주군은 행패를 황궁이 아닌 전쟁터에서 부리는 인간이었다. 여자관계야 더럽게 맺은 적은 없지만, 언제나 지나치게 깔끔했다.

그런 걸 보면 제드의 인간성이 황태자보다는 손톱만큼은 더 나았다. 그래도 덜 파탄 난 성격이라고 해서 ‘인간적인 매력’이 있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그런데도 대체 왜지?”

이 미친 대화를 어떻게 끝내야 하나. 백작 영애에 대해 말했던 게 실수인가.

그러나 여기서 실수하면 목이 날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던 버나드는 알아서 조용히 했다. 그러다 제드는 다시 생각에 빠지는 듯하더니 물었다.

“아픈 사람이 한 행동은 진심인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어떤 사람이 아픈 상태에서 했던 말과 행동이 진심이냐는 거다.”

“그거야 전쟁터에 계셨으면서 뭘 그렇게 말합니까. 아픈 놈이 진심이라면 헛소리라는 말은 왜 있습니까?”

그 말에 제드는 불쾌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 책상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어떤 인간이 아픈 와중에 금화를 100개 준다고 한다면?”

“받지 말아아죠.”

“금화가 100개잖아.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아픈 사람이 어떻게 명확한 이성을 가지고 판단을 내렸겠습니까? 그걸 준다고 그대로 받습니까? 그게 얼마나 중요한 돈인지도 모르는데.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인간성을 의심해야 합니다. 옳다구나 하고 받는다면 그건 인성이 쓰레기입니다, 쓰레기.”

이번에는 너무나 쉬운 대답이었기에 버나드는 깔끔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젠장…….”

제드가 주먹으로 책상을 쿵, 내려쳤다.

버나드는 어쩐지 주군이 굉장히 상처받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꼭 스스로가 ‘난 쓰레기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금화 100개가 아쉬운 사람은 아니고, 대체 무슨 일일까. 버나드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고민했다.

***

“영지에 내려가는 게 좋겠구나.”

하인트 공작이 방문하고 간 지 이틀 후, 몸이 좀 나아지자마자 백작이 루시펠라에게 한 말이었다.

“어째서요?”

“그게 네게 더 좋을 것 같다.”

걱정스러운 표정과 말투. 그러나 ‘영지에 내려가라’는 말은 자신이 머물러 있는 이 장소를 옮기라는 말이었다.

루시펠라는 불안감을 느꼈다. 아직 이 낯선 나라에 제대로 적응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데 또 다른 곳으로 가라고? 얀스가르의 수도가 아닌 지방으로 간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싫어요.”

“루시.”

백작이 엄하게 말했다. 백작의 은청색 두 눈을 보며 루시펠라는 백작이 이미 결정을 내렸으며, 그녀에게 거부권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살짝 입술을 깨물고 물었다.

“왜죠?”

그 물음에 백작이 난감한 표정을 했다.

“수도와 떨어진 곳에서 쉬면…….”

“그러니까, 제가 왜 수도와 떨어져야 하는 건데요?”

조금 집요하다시피 한 말에 백작이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루시펠라는 그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너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퍼지는 모양이구나.”

“무슨 소문이요?”

“네가,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고.”

그 말에 루시펠라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라는 소문은 모두 그녀가 자초한 것이었다. 심지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자신이 에스텔로 존재하게 하던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육신도, 육체가 가졌던 강함도, 동료들도.

그렇게 죽어버린 에스텔에 대해 허탈해하면서도 그 존재를 의심한다. 그리고 루시펠라는 또 칼리드에게 복수를 원하고 있었다.

존재에 대한 의심과 복수심이 양립했다. 그런 자신이 제정신이겠는가.

그녀는 온갖 비이성적인 행동을 해왔다. 특히나 그날, 제드와 침실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했던 루시펠라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입술과 입술, 가장 예민한 곳을 부딪치며 열기를 나눠 받았던 진한 입맞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허리를 받쳐 들었던 단단한 팔, 보드라운 뺨을 쓸어내렸던 거친 손, 숨소리를 나눠 받는 행위는 너무도 야릇했다.

제드에게 입을 맞췄던 건 자신이 치밀한 계산 끝에 의도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완전히 충동적인, 미친 행동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을 가진 제드에게 질투심을 느꼈고, 복수심에 이기지 못해서 그를 유혹해 자신의 아래에 두며 이용하고자 했다.

화가 난 제드의 표정을 보고 알았다. 그도 눈치챘던 것이다. 자신이 그를 이용하려 한 것을. 그렇게 멍청한 인간은 아니었으니 그런 서툰 짓거리를 간파하는 게 가능했겠지.

남자를 유혹해서 그 마음을 이용해 복수를 이루려 하다니, 정말 갈 데까지 갔구나. 정말로 제정신이 아닐지도. 루시펠라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저를 수도에서 쫓아내시게요?”

“루시.”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가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하십니까?”

루시펠라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마음속이 날뛰고 있었다. 마치 루시펠라의 마음이 항의라도 하는 것처럼 ‘내 아버지에게 항의하지 마’라고.

“…….”

백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침묵 속, 루시펠라는 그의 대답을 읽었다. 분명 백작에게 거리감을 느낀 그녀였지만 꼭 마음 한구석이 어딘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루시펠라는 하,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피식 웃었다.

루시펠라, 너도 정말 불쌍하구나. 정말로 이 인간이 너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랑받는 건 이렇게 잘 알겠는데, 사랑은 받는데 믿음은 얻지 못했나 보구나. 누군가를 믿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그녀는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을 뿐.

“그래서 제정신이 아닌 저를 영지에 두려는 거군요. 아버지에게 방해되니까.”

“…….”

“미안하구나.”

백작이 고개를 숙이며 괴로운 듯 말했다.

그는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백작의 그런 마음은 루시펠라에게 와 닿지 않았다.

백작은 루시펠라를 사랑하긴 했지만, 루시펠라가 어렸을 때부터 정작 가장 중요할 때는 루시펠라가 아닌 다른 것들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별로 알고 싶지 않아요.”

루시펠라는 처음으로 그렇게 차갑게 말했다. 백작은 루시펠라의 날카로운 말에 놀란 듯했다. 그럴 것이다.

그녀가 기억하는 루시펠라의 진짜 모습은 언제나 활짝 웃고, 언제나 귀여운 모습으로 조르며, 투정은 귀여운 수준이었고, 화를 내더라도 아버지에게가 아닌 다른 이에게만 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 백작은 사랑만 하지 행동은 하고 있지 않았다. 왜 그는 그녀가 나으니 다시 황궁으로, 또는 이드리스 공작가로 가버린 건가.

가을 연회 때, 왜 루시펠라를 그 안에 던져 두고 가버렸는가. 그 어린 진짜 루시펠라가 황궁 호수에 뛰어들 때까지 백작은 무엇을 했는가.

루시펠라가 황태자에 대한 마음을 백작에게 고백했을 때도 백작은 그것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심지어 황태자 때문에 호수에 뛰어들었을 때도, 그는 황태자에게 분노조차 하지 않았다.

“루시…….”

백작은 상처 입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진짜 루시펠라는 이것보다 더 많은 상처를 입고 살아왔다. 자꾸만 화내지 말라는 그 요동에 루시펠라는 닥치라고 마음속으로 소리치고 백작에게 말했다.

“저는 전혀 괜찮지 않아요.”

그녀가 진짜 루시펠라에 대해 아는 것은 그리 많지 않지만, 그 포악했던 루시펠라는 백작에게만은 ‘괜찮다’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지금의 루시펠라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백작은 한숨을 쉬더니 손을 뻗어 루시펠라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나중에, 나중에 다 이해할 거란다. 나중에…….”

나중이라는 게 어디 있는 것일까. 결국 백작은 딸을 포기하는 것이다.

루시펠라는 대답 없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그 시선을 피했다. 그 외면에 루시펠라는 딸이 불쌍하지도 않느냐는 말을 하려다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백작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곳에 있다가는 더 미친 짓을 벌일지도 몰랐다. 수도를, 당장 수도를 떠나야 했다.

자신이 에스텔이건 루시펠라건, 지금 그녀가 여기서 더 감정적으로 나가면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이 이상으로 악화되는 것은 피해야만 했다.

루시펠라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애써 차갑게 억눌렀다.

“좋아요, 내려갈게요.”

***

영지로 갈 채비는 빠르게 끝났다. 아무래도 백작은 그녀가 앓아누웠을 때부터 채비를 한 듯했다.

원래는 의원의 권유에 따라 조금 더 누워 있어야 했으나, 루시펠라는 이왕 결정했다면 빨리 떠나겠노라고 말하며 바로 ‘다음 날’에 출발하겠다고 했다. 그에 하녀들과 백작이 만류했으나 소용없었다.

백작으로부터, 황제로부터, 황궁에 있다는 칼리드로부터 떨어져 혼자만 오롯이 남게 된다면, 이 미쳐 가는 이성도 제대로 정신이 차려지지 않을까?

에스텔이라는 존재에 대해 나름 해답을 내릴지도 모르지. 그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떠나는 날, 루시펠라가 탈 마차는 백작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호화스러운 마차였다.

옆에 서 있는 하녀들이 짧게 감탄했다. 마차는 크고, 금색의 섬세한 문양이 세공되어 있었고, 말들은 품질이 좋았으며 바퀴 역시 튼튼해 보였다.

“너를 위해 준비했단다. 저 안에는 새끼 거위 깃털로 채워 넣은 쿠션이 있어. 가면서 잠을 잘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와중에 루시펠라는 저런 화려한 마차는 도적들의 표적이 되기 쉽다는 점을 떠올리며 호위기사가 어느 정도 되는지, 경비 태세는 어떤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히 영지까지 가는 길은 고용한 호위기사들이 있기에 안전할 듯싶었다.

“거기 오랜만에 가면 채광하는 보석도 볼 수 있겠구나, 네가 마음에 드는 원석이 있으면 맷시에게 말하려무나.”

루시펠라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백작이 원하는 게 루시펠라의 ‘괜찮다’는 말과 작별의 미소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백작이 원하는 바는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마차에 오르려 했다. 하지만 어쩐지 마음이 찜찜했다.

루시펠라는 다시 등을 돌려 백작에게 걸어갔다. 하녀들이 길을 터줬다. 백작은 루시펠라를 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 얼굴을 봄에도, 루시펠라의 굳은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아버지.”

이제 아버지라는 단어는 매끄럽게 나왔다.

“저는 괜찮지 않아요.”

백작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그의 얼굴이 어딘지 모를 서글픔으로 물들어갈 때, 루시펠라는 낮게 한숨을 토해내고 말했다.

“하지만 제가 괜찮아진다면, 돌아오게 해주세요. 그땐 이렇게 곤란하게 하지 않을게요.”

이것은 그녀의 다짐이었다. 반드시 괜찮아지겠다는 그녀의 다짐. 만약 수도로 돌아온다면, 더 이상 어설프며 나약하게 행동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해주실 거죠?”

그녀의 말에 백작은 무어라고 말하려 했다. 그것이 거절의 말임을 짐작했으나, 그는 이내 한숨을 쉬며 웃었다.

백작이 그녀의 앞까지 다가왔다. 따스한 압력이 느껴졌다. 백작이 루시펠라를 끌어안은 것이다. 그는 루시펠라의 머리를 아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래, 그러마.”

그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그래야지, 그럼 네가 괜찮다는데.”

품에 안긴 아비라는 사람의 애정을 느끼면서도, 루시펠라는 어딘지 모를 원망과 쓸쓸함을 느꼈다. 그것은 어쩌면 진짜 루시펠라가 백작에게 느꼈던 감정일지도 모른다.

“내 딸이니 그래야지. 꼭 그리하겠다.”

그 대답에 루시펠라는 미소를 지었다. 그 짧고도 긴 작별 인사가 끝나고, 몸을 떨어뜨린 루시펠라는 치맛자락을 붙들곤 우아하게 인사하며 마차에 올랐다.

새로운 곳을 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모든 것에 떨어져서 조금은 여유롭게 생각해 보자. 그리고 건강을 회복해 보자.

그리 많은 시간은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칼리드가 어디로 도망가는 것은 아닐 테니까.

마차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확실히 마차는 편안했고, 영지로 내려가는 긴 여행 동안 편하게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창문 밖으로 수도의 정경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하인트 공작의 마차 안에서도 그녀는 저녁의 수도 풍경을 지켜보았었다.

‘그러고 보니 하인트 공작은 어떻게 되나?’

자신이 미쳤다는 소문이 퍼졌는데, 생각해 보니 그도 그 소문을 들었을 텐데도 와준 건가? 그녀는 순간 깨달은 사실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면 애초에 소문을 믿지 않은 건가?’

하지만 루시펠라의 아버지도 그녀의 정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루시펠라는 그러다가 고개를 이내 저었다.

‘아니, 진짜 미쳤나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겠지.’

그녀는 자조했다. 그러다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더 빠르게 저었다. 그녀가 저질렀던 창피했던 짓이 계속 머리에 떠오르려 했던 것이다.

다시 입맞춤이 떠올랐다. 그녀는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오르던 생각을 없애려 노력했다. 그 과정을 로이자가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그렇게 애써 다른 생각을 떠올리려 하고 있을 때였다.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마차가 멈췄다.

뭐지? 자연스럽게 긴장이 되어 허리를 세웠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앞쪽에 앉았던 로이자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던 그녀가 재빨리 눈을 떠 마차 창문을 열었다.

“2황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호위기사의 말에 루시펠라는 얼굴을 찌푸리며 마차의 문을 열었다. 마차 안에서 불손하게 황족을 맞이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호위기사의 손을 잡고 치맛자락을 살짝 쥐며 내려가자, 백마를 탄 황자의 모습이 보였다. 루시펠라가 그에게 다가가자 이오지프가 말에서 서툰 척 뛰어내렸다.

“이야, 영애 하마터면 못 보고 헤어질 뻔했습니다.”

그는 마치 그림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 굵고 검은 안경테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었다.

길고 진한 금발을 묶은 그는 안경 너머 다정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다 루시펠라의 얼굴을 보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영애의 건강이 너무 염려되지 뭡니까. 그때 그렇게 쓰러져서 저택에 실려가는 통에, 혹시 누가 될까 봐 안부도 묻지 못했습니다.”

루시펠라는 저 의뭉스러운 황자에 대해 속으로 온갖 욕을 다하고 있었다. 저런 꿍꿍이가 있는 사람은 에스텔이 가장 싫어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황자 전하께서는 무슨 용무로 궁 밖으로 나오신 겁니까?”

“아, 저요? 사고 싶은 한정판 책이 있어서 나왔습니다. ‘미몽 속의 유희’의 작가 친필 원고가 발견되었다지 뭡니까! 겸사겸사 영애께서 수도를 떠나시는 것을 보고 이리 급하게 쫓았습니다.”

친필 원고 수집이라니. 거의 한 몸처럼 검을 다루는 수준일 텐데 책벌레로 위장한 거짓 모습을 참으로 견고하게 유지할 모양이었다. 루시펠라의 심드렁한 표정을 본 이오지프가 말했다.

“그래서 2기사단 분들이 상당히 고생했지요. 기억나시죠?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 발코니 아래에 계셨던 분 말입니다.”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풀어져 있던 표정이 날카롭게 굳었다.

루시펠라가 거의 노려보듯 이오지프를 바라보자, 이래도 그런 표정을 지을래? 라고 물어보듯 그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루시펠라의 얼굴을 보며 신이 난 듯 말했다.

“아, 아이딘 영애, 2기사단 단장께서 영애가 쓰러졌을 때 수습에 많은 도움을 주셨답니다. 인사는 드리시는 게 낫겠죠?”

이오지프가 등 뒤를 돌아보며 손짓했다.

“루이르크 경.”

그에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저 2황자 녀석은 자신이 칼리드에게 내보였던 석연찮은 감정의 폭발을 그대로 넘길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던 모양이다.

루시펠라의 이글거리는 시선에도 순박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미소를 짓는 2황자는 유순하고 상냥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뚜벅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루시펠라는 자신의 뒤에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 차마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이딘 영애를 뵙습니다.”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 들렸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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