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키스
2017.04.24.
“돌려보내.”
루시펠라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간단히 말했다. 그것을 본 하녀가 대답했다.
“아가씨, 아가씨께서 오셔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루시펠라가 그에 고개를 갸웃했다. 아침쯤에 무언가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은데, 그것인 모양이었다.
“돌려보낼까요?”
다른 하녀들과 달리 로이자가 용감하게 그녀의 의사를 물었다.
루시펠라는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유는 모른다. 그저 그 남자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관리하지 않은 부스스한 머리가 정돈되고, 네글리제 위에는 따스한 털실로 짜여진 두꺼운 겉옷이 입혀졌다. 아직도 열이 남아 있기에 루시펠라는 여전히 몽롱했다.
“내가 내려가?”
응접실로 내려가야 하냐는 물음에 로이자가 고개를 저었다.
“각하가 방으로 올라오셔야죠. 아가씨가 이렇게 아픈데!”
“그래.”
하녀들이 마지막 단장을 끝내자 루시펠라는 멍한 상태에서 바로 옆에 위치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잿빛이었으며, 안개가 끼었는지 모든 풍경이 뿌옇게 물들어 있었다. 루시펠라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에스텔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그것은 그녀가 칼리드를 다시 마주한 후 줄곧 품었던 의문이다. 여전히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때 이쪽으로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그럼에도 루시펠라의 시선은 창밖을 향해 있었다.
“나가 봐.”
익숙한 남성의 목소리가 방 안에 조용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곤 하녀가 인사하는 듯하더니 바깥으로 나가고 문이 닫혔다.
그러자 방 안에 고요가 찾아왔다. 뚜벅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퍼지더니, 이윽고 침대 옆에 머물렀다. 그러곤 다시 정적이 일었다.
아주 작은 한숨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미친 건가?”
“…….”
루시펠라가 고개를 돌렸다. 왕궁에 다녀왔는지 그는 검은색의 제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그 옷에 머물렀다.
“그거 기사단 제복이지?”
“뭐?”
제드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루시펠라를 쳐다봤다. 제드는 루시펠라가 아파서 제정신이 아닌가 보다, 적당히 결론을 내리며 말했다.
“그래, 기사단 제복이지.”
“멋있네.”
이건 갑자기 무슨 소리란 말인가.
제드는 어이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기사단 제복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멋있는 디자인인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말을 듣자 그는 진짜로 이 제복이 그렇게 괜찮아 보이는 건지를 생각했다.
적갈색 눈이 무기력한 표정의 그녀의 얼굴을 훑었다.
“영애, 정말 아파 보이는군.”
그의 말에 루시펠라가 피식 웃었다. 연회 때 보았던 미소와는 전혀 다른 음울한 미소였다. 제드는 도통 이 여자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루시펠라는 제드의 모습을 보았다. 제드는 여전히 루시펠라가 고개를 들어 볼 수 있게 서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반발심이 들지 않았다. 제복. 그것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도 입고 있던 옷이었다.
“오늘은 뭘 했어?”
“뭐?”
“검술을 수련했어?”
“그래, 오랜만에 합동으로 훈련했지.”
“비가 오는데도 부지런하네.”
“그건 기사로서 당연한 게 아닌가?”
제드의 표정을 보고 루시펠라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울컥했던 것이다.
에스텔의 죽음을 받아들였던 그날, 루시펠라는 자신이 칼리드에게 복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복수를 원했지만, 실질적으로 복수할 수 있는 수단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를 에스텔로 있게 해줄 수 있었던 검술은 루시펠라가 되고선 잃어버린 상태였다.
에스텔이었을 적에도 비등비등한 실력이었던 칼리드를 루시펠라가 죽일 순 없었다. 따라서 그에게 복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신은 공작이니 전쟁터가 아니라 이곳에서도 엄청난 힘이 있겠지?”
“…….”
그 말에 제드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빛나는 눈동자가 어쩐지 흐려 보였다. 루시펠라는 의미 모를 눈빛으로 제드를 보고 있었다.
루시펠라는 생각했다. 그렇다고 ‘루시펠라’가 칼리드를 죽이냐, 그것도 불가능했다.
한낱 백작의 영애가 어떠한 권력이 있어서 공작을 죽인단 말인가. 만약 남자였다면 적어도 권력이라도 가져 그를 찍어 누를 수 있었겠지만, 루시펠라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자’였다.
루시펠라는 제드에게서 눈을 떼고 자신의 손을 보았다.
희고 고운 손, 아름답게 잘 다듬어진 손. 흉터와 굳은살투성이였던 에스텔의 손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손이었다.
“지금 이 대화의 의미를 전혀 모르겠군.”
그에 루시펠라가 눈을 돌려 제드를 보았다. 루시펠라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 겨우 말했다.
“그냥…… 당신이 멋있다는 말을 하는 거야.”
그는 화려하진 않지만 품질 좋은 옷을 입었으며, 기사답게 건장한 체격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 제국의 공작이기에 웬만한 정적들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제국의 높은 곳에서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검술의 실력자이고, 나라를 지키는 검을 들고 있으며, 나라를 지켜냈다. 그의 준수한 얼굴에는 남자 특유의 여유가 자리했다.
부, 권력, 명예, 건강, 심지어 조국까지, 그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무슨 소리?”
“당신, 참 잘난 사람이라고.”
부러울 정도로 말이야. 그녀는 제드의 매력을 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가 될 거였다면 차라리 남자가 되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무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당장 필요한 것을 모두 가지고 있는 제드를 보자 질투심이 울컥, 하고 흘러넘쳤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자신은 절대 저 남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에스텔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루시펠라로선 될 수 없다. 검으로 나라를 지키는 것은 고사하고, 칼리드에게 복수할 수조차 없다.
칼리드에게 복수를 하고 싶은데,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딘 영애?”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 안간힘을 쓰며 팔을 받쳐 몸을 일으키려 했다. 욕이 나올 정도로 팔이 후들후들 떨렸다. 그녀의 입에서 가쁜 숨이 흘러나왔다.
“영애.”
제드가 그것을 보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그녀를 일으켜 주었다. 그에 제드와 루시펠라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제드의 적갈색 눈동자와 그녀의 눈이 마주했다. 그 순간 루시펠라의 사고가 멈췄다.
결국 여자로 태어났고, 그놈의 레이디가 되었다면, 그렇다면 이 남자를 유혹해 손아귀에 넣는다면 되지 않을까?
이 남자의 권력을 이용하면 되는 것이다. 이 나라든 저 나라든 여자는 그런 존재니,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은 레이디 중에서도 가장 최고의 가치를 지녔다. 루시펠라는 빌어먹게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분명 이성의 마음을 얻는 것은 쉬울 것이다.
그렇다면 저 사람에게 속해서, 저 사람의 힘을 이용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여자들이 할 수 있는 건 고작 이런 것뿐이니…… 그래, 저 남자를 유혹하면 된다.
그의 손은 단단히 루시펠라의 등을 받치고 있었다. 루시펠라는 그의 팔에 몸을 지탱한 채 손을 뻗었다. 뻗은 손이 천천히 그의 딱딱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지금.”
제드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루시펠라는 팔을 뻗어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무릎을 일으켜 세워 그와 키를 비슷하게 했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그에게 입을 맞췄다.
쪽, 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그들의 귓가에 울렸다.
“싫어?”
제드는 그 질문에 할 말을 잃은 듯했다.
묘한 빛을 머금고 있는 두 눈동자, 새하얀 얼굴, 두 뺨에는 사랑스러운 홍조가 자리해 있었고, 입술 역시 피를 머금은 듯 붉었다. 그리고 그녀의 그 입술에 곡선이 덧그려졌다.
풀어 헤쳐진 긴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그와 대비되는 새하얀 피부. 그 빨간 곡선은 명백한 유혹을 담고 있었다.
제드는 잠시 동안 그 아찔한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 짧고 간단한 도발에 이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글쎄, 어떨까.”
그가 루시펠라의 허리를 끌어당겨 몸에 밀착시켰다. 그러곤 그의 입술이 닿았다.
비록 시작은 그녀가 했지만, 모든 게 그의 손아래서 이루어졌다. 루시펠라가 서툴게 따라가려 했음에도 거치적거릴 뿐이었다. 제드가 뺨에 손을 가져다 댄 채로 루시펠라의 입술을 비집어 열었다.
단숨에 그의 혀가 밀려 들어와 그녀의 고른 치열을 쓸었다. 젖은 부분이 접촉하는 질척한 소리가 귀를 맴돌았다. 그의 살덩이는 뜨거웠다.
“으음!”
그의 목을 감싸던 팔에 힘이 들어갔지만, 제드의 손이 안심시키는 듯 루시펠라의 등을 쓸었다. 그에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검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뺨을 향하던 그의 손이 귀 뒤로 향하며 머리를 쓰다듬더니 이내 목, 그리고 가슴께까지 내려갔다. 그에 루시펠라가 움찔, 하고 떨며 눈을 떨며 몸을 떼려 했다.
그에 제드 역시 눈을 떴다. 순간 적갈색 눈동자에 무언가가 스치더니 입술과 몸이 떨어졌다.
격렬한 키스의 여운으로 루시펠라의 숨은 흐트러져 있었다. 제드 역시 미약하게 숨소리가 빨라져 있었다.
방금까지 입맞춤을 했던 남녀, 방 안에는 야릇한 열기가 자리했다.
제드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참 동안 루시펠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한 손을 뻗어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흘러내린 그녀의 겉옷을 다시 올려주었다.
그는 얼굴을 차갑게 굳혔다. 그의 얼굴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 어떠한 대화도 존재하지 않았다. 달아올랐던 열기는 순식간에 식어 내렸다.
루시펠라는 입술에 손을 댄 채 놀란 표정으로 굳어 있었고, 제드 역시 그 모습을 보고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던 그는 몸을 돌려 방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
버나드는 자신의 주군의 인성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다는 것을 오랜 시간 동안 습득해 왔다.
그래서 상관이 어떤 성질을 부려도 그는 ‘음, 그럴 수 있지. 그분은 어렸을 때부터 좀 직설적인 성격이셨으니 그럴 수 있어.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놀라지 않을 거고 짜증 나지 않아. 짜증을 내는 것은 초짜 중의 초짜지’라는 부관의 소양인 드넓은 마음가짐을 지녔다.
만약, 어느 날 신전에서 ‘신탁이 내려졌습니다. 당신은 신이 내린 성자이십니다!’라고 해도, 그는 놀라지 않으며 그곳으로 갈 자신이 있었다. 자신은 성자였으니까.
주군이 화를 낼 때면 그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별은 별이고 저 사람의 성격은 얀스가르의 흑사자니 그럴 수 있지. 동물은 원래 그러는걸. 저분은 사람이 아니야’ 같은 아주 긍정적인 생각을 했다.
이것은 그가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버나드는 자신을 성자라 지칭하는 것을 과감히 포기했다.
직설적? 저런 말 싸가지가 직설적이라니, 어떤 정신 나간 놈이 그딴 생각을 한 건가!
그리고 흑사자? 흑사자라니, 개뿔! 저 인간은 포효하는 사자가 아니라 어디 승질드러운 까탈쟁이 고양이었다.
‘냐아아 냐아아’거리는 것도 아니고, 기분이 좋지 않다는 기색을 하루도 아니고 거의 만 사흘 동안이나 드러냈다.
이렇게나 그가 날카로웠던 적은 3년 전 얼샤 복속 전쟁이 끝났을 때 이후 처음이었다.
그때 그만둘걸, 이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니, 버나드는 한숨을 쉬었다.
“크레마드 대장장이 길드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용건은?”
그는 책상에 앉아 창밖을 본 채 그 보고를 듣고 있었다. 3일 동안 온갖 패악은 다 떨어놓고, 이제 그는 멍해 있었다.
“이번에 철제 무기 개발에 대해 자금 원조를 부탁…….”
“우리가 자선사업가야? 버려.”
“그게 무슨…….”
무기 제작 길드에 자금 원조를 하지 않는다는 건 자살행위 아닌가. 오랜 전쟁으로 무기의 값은 뛰어올랐고, 특히나 성능 좋은 무기들은 없어서 못 팔았다.
무기 제작자들의 자존심은 하늘을 찔렀고, 이들의 심기를 거스르면 추후 희귀한 무기들을 구하기엔 제약이 따랐다.
이것은 하인트 공작가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저 길드 안에 공작령 출신 대장장이들이 많았지만 이들도 이익을 따르기 때문이었다.
이건 주군의 판단이 잘못된 것이다. 막아야 한다! 감정에 휩쓸린 어리석은 선택을 하면 모두 다 망하는 것이다.
그때 공작의 적갈색 눈동자가 이글거리며 버나드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에 버나드가 움찔했다.
“지금 내 결정이 감정적이고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군. 영토 확장 전쟁이 끝난 지가 언젠데 무기 개발에 열을 올리는 건지 모르겠군. 크레마드 상단 쪽이라면 공성 무기 개발이 주업이 아니던가? 대(對) 마물전 무기도 아니고, 우리가 영지전이라도 벌이나? 쪽박 차고 싶으면 네 돈으로 투자하던지.”
“아닙니다.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앞으로 보고를 하려면 생각이라는 걸 좀 하고 해. 그놈의 머리는 머리카락 키우는 화분인가?”
괜히 말했다가 잔소리까지 배로 얻어들었다.
버나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 이곳을 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가 결혼을 못 한 것은 이 주군 때문에 그럴 시간이 없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다음에는 영지에 주둔하는 상비군 내 풍기문란을 일으킨 혐의가 발각되어 붙잡혔다는 병사들에 대해 보고가 올라왔다.
공작의 짜증이 또 시작되었다. 그는 이번에는 일주일간 탄광 노역이라는 잔혹한 처벌을 내렸다. 볼기짝 몇 번 맞고 끝내는 게 보통인 일이었다.
또한, 공작에게 관심이 많은지 구애하는 예니아 백작 영애의 101번째 편지가 오자 이젠 거절한다고 편지를 쓰는 잉크 값과 시간도 아깝다며 벽난로에 휘리릭 던져 버렸다.
영애의 불꽃 같은 사랑은 벽난로의 진짜 불꽃이 되어 사라졌다.
아무리 그래도 예니아 백작이다, 재무부 쪽에서 일하는 백작이기에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너도 저 땔감이 되고 싶냐는 시선에 그는 알아서 입을 닥쳤다.
불은 뜨거웠고, 버나드는 뜨거운 게 싫었다.
이번에는 티타임이 문제였다.
차, 그놈의 차!
그는 뜨거운 차를 벌컥 마시다가 오만 짜증을 다 냈다. 하녀가 ‘뜨거우니 조심해서 드세요’라고 말한 걸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주군의 잘못이었다. 그러다 그는 창문을 보더니 소리쳤다.
“망할 비!”
그는 이제 비가 온다고 짜증을 내고 있었다.
“빌어먹게도 많이 내리는군!”
아마 이 사람에게 구름이 하얀 것도 짜증이고 하늘이 파란 것도 짜증이고 책상이 나무인 것도, 저 찻잔이 도자기인 것도 짜증이지 않을까? 그런데 왜 스스로가 진상을 부리는 것은 짜증이 나지 않지?
그쯤 되면 자신의 더러운 성격에 회의감을 느껴도 될 법한데.
퇴근하고 싶다.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눈물 나게도 버나드의 거처는 바로 이곳이었다.
버나드는 주군이 왜 그러는지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그가 이상해진 시점은 루시펠라 아이딘의 문병을 다녀온 후였다.
가자마자 바람같이 돌아오더니 이렇게 온갖 짜증이란 짜증은 다 내고 있었다.
도대체 그 미쳤다는 영애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갔다 온 첫날은 저기압을 뿜어내더니 둘째 날부터는 폭발과 분노, 짜증이요, 셋째 날은 고양이처럼 까다로움과 예민함을 폭발시키고 있었다.
설마, 이 콧대 높은 자신의 주군이 루시펠라 아이딘에게 빠진 건 아니겠지?
주군의 배경이 뛰어나기에 아이딘 가문의 배경은 상관없었지만, 그 여자가 미친 여자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들려오는 정보로 그녀는 지금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대체 뭐가 그렇게 매력이 있다는 거지?
“대체 뭐가 그렇게 매력이 있었다는 거지?”
“네. 네?!”
마치 그의 머릿속을 파헤친 듯한 말에 버나드는 하마터면 까무러칠 뻔했다. 드디어 이 주군께서 독심술마저 익힌 것인가. 정말 심장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하인트 공작가 만세, 영원히 번영하라! 그는 재빨리 자신의 주군에 대한 장점을 머릿속에 열거했다. 감히 공작 각하께 고양이 같다는 생각 따윈 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아무 생각도…….
“아무것도 아니다.”
이 남자는 버나드의 머릿속에 그에 대한 어떤 비굴한 찬양이 벌어진지도 모른 채, 어두운 얼굴로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냥 내가 미친놈이지.”
“무슨?”
“내가 뭐가 아쉬워서 제정신이 아닌 사람에게…….”
아직 어떠한 결정적인 정보를 얻지 못했으므로 버나드는 속단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분명 루시펠라와 관련된 일이리라 거의 확신했다.
루시펠라, 라는 말을 들으니 그는 아까 티타임 때, 차 가지고 공작이 난리를 쳤을 때 차마 전하지 못했던 보고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각하.”
대답하라는 듯 무심한 시선으로 공작이 그를 쳐다봤다.
“아이딘 백작 영애 말입니다.”
“뭐? 왜!”
풀어져 있다가 바로 몸을 버나드 쪽으로 기울이고 물어보는 그의 모습을 보고 버나드는 자신의 추측이 거의 정설로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영지로 내려가신답니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