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죽음
2017.04.20.
쏴아아.
강한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네글리제 차림이라는 것도 모른 채 검을 안고 바깥으로 나섰다. 비가 쏟아져 그녀의 머리를 적시고, 하얀 네글리제를 적셨다.
맨발인지도 모른 채 그녀는 땅바닥을 걷기 시작했다. 비에 젖어 축축한 흙이 새하얀 맨발을 더럽혔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에스텔.”
환하게 웃고 있던 칼리드의 얼굴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차가운 호수와 같은 옅은 머리카락. 아름다웠던 자색의 눈동자.
에스텔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면 망설임 없이 칼리드를 꼽을 수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녀는 힘겹게 발을 내디뎠다. 그 빗속 너머에 칼리드가 서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기이한 살의와 몸을 잠식한 슬픔에 그렇게 젖어서.
“에스텔, 괜찮아? 구하러 왔어!”
마물들 속에서 고립되었을 때, 지원을 거부하던 군대를 결국 끌고 왔던 칼리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상처투성이였고, 에스텔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칼리드가 가장 먼저 확인했던 것은 그녀의 부상 여부였고, 그녀가 무탈하다는 것을 확인하자 환하게 웃었다.
그녀가 잠시나마 칼리드를 불신해 그가 도망갔다고 오해했던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상하게도 그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날 때마다 그에 대비해 증오는 더욱 짙어져 갔다. 화려한 검집에 감춰진 날카로운 단검이 결국 뽑혀 버린 것처럼.
루시펠라의 껍데기 안에 가려져 있던 에스텔의 감정이 강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백작가의 정문을 향해 다가가던 그녀는 비에 젖은 진흙에 미끄러졌다. 편의를 위해 마련된 돌길을 걷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루시펠라에게 당연한 일이었지만 에스텔에게 당연한 일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진흙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일 따윈 없었다. 검과 함께 미끄러진 루시펠라는 땅에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넘어졌을 뿐임에도 몸은 꽤나 심한 충격을 받았는지 쉽게 일어나지지가 않았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젖어서 시야를 가로막았다.
그녀는 검을 지지대 삼아 일어나려 했지만, 다시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녀는 욕설을 내뱉었다. 계속 일어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결국 땅을 지지했던 검이 미끄러져 그녀는 다시 넘어지고야 말았다.
고꾸라진 그녀는 팔로 땅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던 그녀의 시선이 바르르 떨리는 자신의 팔에 닿았다.
창백한 피부. 가녀린 손목. 너무나도 약한 그녀의 육신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비를 맞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음에도 그 몸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문득 깨달아 버린 사실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는 이러지 않아. 이건, 이건! 내 몸이 아니었다. 이건 내 몸이 아니야!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아, 어서 이 악몽이 빨리 끝나 버렸으면!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바라보았다. 꺼먹한 잿빛구름은 여전히 비를 토해내고 있었다.
하얀 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곤 방금 깨달은 사실을 부정하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려 발을 디뎠다.
조급함을 가지지 않고 천천히 일어났기에 그녀는 이번엔 의외로 쉽게 일어날 수 있었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검을 뽑으려 했다. 그러나 검은 뽑히지 않았다. 몇 번이고 뽑으려 했지만 겨우 검신의 일부만 보일 뿐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검을 들어 올리는 것조차 버거웠다. 살상용이 아니라 강철로 제련되지 않은 예식용 검이라 가벼움에도 불구하고.
아아…….
그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검을 떨어뜨리고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적당히 체력을 회복하고 몸을 단련시킨다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녀 특유의 긍정적인 생각은 그녀를 깊은 고찰 없이 안이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죽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알아버렸다.
에스텔이 비록 검술에 있어서 천재일지언정 지금 루시펠라는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단련된 근력과 날쌘 발, 생존본능으로 예리해진 기척을 느끼는 감각, 검의 궤적을 간파하는 시력. 그것은 에스텔이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던 것이기도 했으며, 살아오면서 습득한 것이기도 했다.
그녀의 검술은 에스텔, 그녀의 인생이 담긴 모든 것의 산물이었으나 레이디 중 레이디였던 루시펠라의 것은 아니었다.
검술의 천재이던 에스텔은 죽었다.
칼리드에게 살해당했다. 죽어서 다신 돌아오지 않는다. 그녀의 정신이 이렇게 살아서 여기 눈을 뜨고 있더라도, 이전의 에스텔이 아니다.
죽음이란 그런 것이다. 겨우 체력을 회복하고 검술을 다시 되살려 이전과 똑같은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가.
그녀는 역사서에 새겨진 기록이나 칼리드의 존재가 아닌, 자신에 대한 무력함을 깨달은 이제야 자신의, 에스텔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빼앗긴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아아아아!”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비통의 눈물을 흘렸다. 부하의 배신에 충격을 받았을지언정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그녀였다.
한데 이제야 그녀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였다.
그녀는 에스텔로 살 수 있는 권리를, 그녀의 인생을 바쳐 얻었던 명예를, 신뢰로 맺어져 있던 동료를,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심지어 그녀는 나라를 잃은 기사조차 될 수 없었다. 기사인 에스텔은 이미 죽어버렸기에.
루시펠라의 기억이 아닌 에스텔의 기억은 이렇게나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는데, 에스텔의 치열한 삶과 배신에 대한 감정은 이렇게나 선명히도 타오르는데 자신은 지금 에스텔이 아니다.
나는 그럼 누구인가. 루시펠라인가. 아니면 루시펠라의 탈을 뒤집어쓴 에스텔인가.
그녀는 처음으로 고민하고, 절규했다. 비는 계속해서 쏟아져 내렸고, 루시펠라의 육신을 차갑게 식어내리게 했다.
***
보고를 들은 제드는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의 보좌관인 버나드는 자신의 주군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이것은 그의 심기가 편치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말 가지가지 해대는군.”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앉은 제드는 중얼거리며 창밖을 보았다.
바깥에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여유로운 자세였건만 그는 검지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내려쳤다. 조용한 집무실에서 울리는 톡톡거리는 소리는 느리다고는 할 수 없는 템포로 퍼져 나갔다.
“그래, 아이딘 백작 영애가 미쳤다고?”
“미친 게 아니라 실성했다고 합니다.”
“그 표현이 뭐가 다른지 모르겠군.”
그가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아이딘 백작가에서는 쉬쉬하고 있으나, 아무래도 소문이란 빠른 법이니까요.”
“그래, 새벽에 검을 들고 맨발로 정원에 나가 잠옷 차림으로 비를 맞고 울고 있었다니 그럴 만도 하군. 나라도 미쳤다고 생각하겠어.”
이쯤에서 버나드는 그에게서 아이딘 백작 영애와의 약혼에 대해 회의적인 이야기가 나올 거라 생각했다. 미친 여자와 약혼을 한다는 것은 하인트 공작가로서도 엄청난 웃음거리가 될 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대체 아이딘 백작은 사용인들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지? 아픈 주인 아가씨가 나가는 것도 모르고 입단속도 안 하는 모양이군. 나였으면 가만두지 않았을 거야.”
그는 버나드의 예상대로 짜증 섞인 말을 내뱉었으나 내용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오히려 그것을 퍼뜨린 사용인들을 질책하는 말투였다.
“대체 그 인간은 또 왜 그런 미친 짓을 벌인 거지?”
그 인간?
버나드는 그가 말한 ‘그 인간’이 아이딘 루시펠라라는 것을 깨달았다. 버나드는 제드를 바라보았다.
“왜?”
“아니, 영애께서 실성을 하셨다는데 각하께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겁니까?”
“그걸 굳이 말해야 하나?”
백작의 적갈색 눈이 불길한 빛을 머금었다. 버나드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도 호기심을 가질 만한 것이, 분명 제드는 소문을 퍼뜨린 사용인들을 ‘먼저’ 질책했고 그다음 아이딘 백작 영애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분명 불만의 우선순위가 바꼈던 것이다.
“영애는 무엇을 하고 있나?”
이것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그는 영애에 대해 욕을 하기는커녕 안부를 묻고 있었다. 제드는 지금 루시펠라를 걱정하고 있었다.
“열감기에 앓고 계십니다. 원체 몸이 약하셔서 심각하다고…….”
“비를 맞았으니 그렇겠지.”
쯧, 그는 혀를 찼다.
“그 실성했다는 소문은 어느 정도 퍼져 나갔지?”
“아직 퍼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사용인들이 식료품을 사다가 무심결에 흘린 모양이니까요. 그게 저희 정보통에 우연히 걸려든 것뿐입니다.”
“단속해.”
버나드는 어리석게 그 말에 ‘네?’라는 반문은 하지 않았다. 제드가 루시펠라에게 가지는 감정은 불확실하지만 버나드는 자초지종을 아주 약간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바깥으로 나갔다.
제드는 책상에 앉아 멍하게 창밖을 보았다.
원래부터 제정신은 아닌 것 같긴 했지만 이번엔 왜 또 뛰어나가려 했단 말인가. 게다가 빗속에서 그렇게 울었다니. 정말로 황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그가 알기로는 황태자는 루시펠라에게 그 치욕을 당한 이후 자신의 궁에서 거의 나오지 않고 있었다. 패악을 부리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그저 그뿐, 루시펠라와 그날 마주치진 않았다.
그렇다면 황제와의 대면이 그 이유인 것일까?
그러나 이오지프가 봤던 루시펠라는 길을 잃었고, 조금 심란해 보이긴 했지만 정상이었다고 했다. 심지어 그 특유의 말투로 이오지프가 단련된 것을 간파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유가 뭘까? 이오지프는 어쩐지 무언가를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말을 해주진 않을 것 같았다.
진짜로 발광이라도 해버린 것일까. 미친 약혼자는 사양하고 싶은데.
그러다가 제드는 자신이 루시펠라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감정을 부정하거나 놀라지 않았던 것은 딱히 그녀에게 향하는 관심이 그릇된 방향도 아니었으며, 어찌 되었든 약혼자라고 묶였는데 관심을 가지는 게 뭐가 나쁜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혼을 꺼낸 건 그쪽이지만 아직 이혼은 안 했으니, 자신은 뭐, 그 안에서 하고 싶은 대로만 하면 된다.
알고 지내던 사이고 같은 비밀을 공유한 사이인데 뭐 이런 걸 하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단 말인가?
당당히 자기합리화를 마친 제드는 이젠 노골적으로 루시펠라에 대해 생각해 봤다.
예전에 그는 루시펠라와 몇 번 마주한 적은 있었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지나칠 정도로 관심이 없었다.
제드가 뭇 남성들처럼 루시펠라의 아름다운 외모에 매혹된 적도 없었고, 루시펠라 역시 황태자에게 향하는 시선을 그에게 나눠준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루시펠라가 황태자를 향한 시선을 떠올려 본 제드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설마 괜찮다고 말했는데 괜찮지 않았던 게 아닐까? 사실 본인은 괴로워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이 바닥은 감정을 숨기는 게 철칙이었다. 일리 있었다.
황태자의 거시기를 찰 정도라면 꽤나 커다란 원한을 품었다는 이야기인데. 루시펠라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최악의 배신을 당한 것이었다.
갑자기 사랑 때문에 죽네 사네 했던 자신의 부하가 떠올랐다.
제드는 ‘사랑’이라는 게 어떤 건지 한 번도 제대로 느껴본 적은 없었지만, 사람이 미친놈이 되는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한심한 과거사를 그가 위로해 주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지나치게 가볍게 여겼다.
그도 알고 있다. 루시펠라가 황궁 호수에 뛰어들고 나서 사교계에서 입지가 어떻게 줄었는지 정도는.
레이디들에게 있어 사교계는 전쟁터였다. 그런 곳에서 그녀는 이미 무참하게 패배한 것이다.
심지어 황태자는 그녀를 위한 어떤 반응도 하지 않고, 사고를 당했던 그녀를 연회에 억지로 초대했다.
그를 조롱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니 루시펠라에게도 정말 개새끼였다. 한 번만 걷어차이지 말고 좀 세게 걷어차였어야 했는데.
그녀가 이제껏 하지 않았던 기행을 하는 것은 마음의 상처가 사라지지 않아서 그런 것 아닌가. 결국 제드는 루시펠라가 황태자를 잊지 못했다고 결론을 내려 버리고야 말았다.
그래도 아닌 것 같은데……. 그때 루시펠라의 얼굴은 정말 아닌 것 같았지만, 이것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기분이 더러웠다.
“젠장맞을 비.”
제드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
눈을 뜨자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숨이 가빠왔다. 눈을 굴리는 것마저 힘들 수도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자 옆에 아버지가 있었다.
그 얼굴에 서린 걱정과 슬픔을 바라본 그녀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머리에 열이 오르는구나. 열병을 앓았던 것은 아주 어렸을 때뿐이었고, 성장하고 나서는 단 한 번도 이런 열병에 앓은 적은 없었다.
침대는 잘 때를 제외하고 그녀와 인연이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루시펠라가 되고 나서부터 거의 침대에서만 지내고 있었다.
빌어먹게 약한 육체였다. 그렇게 강했던 자신은 사라졌다. 병 역시 하루걸러 오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주의해야 한다.
미련하게 비를 맞았다가는 이런 대가가 돌아온다. 단순히 검을 못 쓰는 것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손가락 하나의 움직임도, 숨을 내쉬는 행위도 모두 다 타인이 하는 행동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루시펠라의 움직임에 아이딘 백작이 고개를 들어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를 보자 어쩐지 마음이 지끈거리며 죄책감이 들었다.
“루시.”
먹먹한 울음이 섞인 부름에 루시펠라는 눈을 깜빡였다. 아이딘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렇게 힘들었던 거냐. 그렇게 힘들었던 거야?”
아이딘 백작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얼굴이 빨개진 채 오열하는 그의 얼굴을 보며 루시펠라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마. 네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마. 그냥 건강하게, 행복하게, 그렇게 살아만 주면 안 되는 거냐.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거냐?”
자신은 건강하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다. 본인이 말하는 게 아주 어려운 일이라는 자각은 있는 것일까. 그녀는 자조했다.
이대로 행복하게 사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에스텔은 이제 죽어버렸으니, 루시펠라로 적응해서 희희낙락하게 사는 것이 행복인 것일까. 이게 그녀가 살아가는 방법일까?
그렇다면 에스텔의 마음은 어디로 가버리는 것일까.
이렇게나 마음은 아픈데, 증오가 끓어오르는데, 슬픔이 넘쳐흐르는데. 부당하게 빼앗겨 버린 인생과 역사에 남은 불명예스러운 죽음. 그 안에서 모든 것이 병들어가고 있는데.
“걱정 마라. 이 아빠가 다 해줄게. 네가 괴롭다면 그 괴로움을 풀어주겠다.”
백작의 말도 그녀의 귓가에 들려오지 않고 바깥에서 맴돌기만 했다.
만약 이것이 그녀에게 또다시 주어진 기회라면, 그녀는 새로운 삶을 부여받은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일어설 수 없었다. 그러나 또 이런 절망을 끌어안고 죽고 싶지는 않았다.
진정한 ‘죽음’을 경험하니 그녀는 인생이 끝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깨달았다. 오히려 그것이 삶의 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살고 싶었다. 만약 이번에 죽는다면 어쩌면 에스텔은 정말 죽어버린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에스텔은, 이번에는 두 번 다시 죽고 싶지 않았다.
절망이 깊어질수록 그녀는 살아가고자 했다. 죽어버리면 절망조차 할 수 없으므로.
그녀는 절망할 때마다 잠에 빠져들었다. 잠에 빠져들면 그녀는 루시펠라의 꿈을 꾸곤 했다. 마침내 죽음을 인정하니 그제야 기억들이 기어들어 왔다.
그녀는 어렸을 적 루시펠라가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보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아이딘 백작은 루시펠라를 방치한 채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는 어머니를 따라가겠노라며 울었다. 그 누구도 ‘자신’을 위로해 주지 않았다.
백작은 그 말 그대로 아내를 따라가고자 했다. 그는 독약을 먹고 자살 시도를 했던 것이다. 쓰러진 아버지를 발견한 것은 루시펠라였다.
자살은 실패했고, 백작은 살아났다. 깨어난 백작은 루시펠라를 발견한 이후 엉엉 끌어안고 울었다.
그는 다시는 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곤 루시펠라에게 언제나 아버지로서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그러나 루시펠라는 그것이 자신을 버리려 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껴서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백작은 한 번 자기를 버렸었다.
언제든지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사람. 그 사랑이 루시펠라를 얼마나 괴로워하게 했는지 백작은 모를 것이다. 그것이 루시펠라를 비뚤어지게 했다.
그렇게 무기력하게 잠을 자면 루시펠라의 기억이 되풀이되었다. 마치 에스텔을 잊으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리하여 루시펠라는 웬만하면 깨어나 있으려고 노력했다.
건강을 위해서, 그리고 남아 있는 에스텔의 자아가 루시펠라의 기억에 매몰되어 버릴까 봐.
그러나 그녀는 계속해서 시달리고 있었다. 왜 이 기억이 밀려들어 오는 것인가. 에스텔에겐 없는 기억이 왜 자꾸…….
종내에 그 기억이 되풀이되자 그녀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는 에스텔인가? 아니면 에스텔의 기억을 가진 루시펠라인가? 루시펠라의 육신을 가지고 루시펠라의 기억을 가진 나는 에스텔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한 번도 제대로 질문한 적이 없는 의문이었다. 그저 그녀는 당연히 자신이 에스텔이라고 생각했다.
육신이 바뀌고 환경이 바뀌었고 에스텔이라는 존재를 인지하는 사람은 없는데 어떻게 자신이 에스텔이라고 생각할 수 있냐는 말이다.
사흘이 지나자 그녀의 열은 생명의 지장이 없을 정도로 내려갔다. 그러자 백작은 다시 궁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일어날 때마다 곁에 있던 백작이 없자 루시펠라는 씁쓸함을 느꼈으나,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루시펠라의 기억 속에서 백작은 언제나 일에 바빴으니. 딸을 사랑하는 것과 일의 중요도는 그에게 별개로 작용했다.
치료를 받기 위해 약을 먹고 식사를 하라는 지시를 얌전히 따르자, 이제 어느 정도 일어나고 거동할 기력이 생겼다.
그러나 끔찍하리만치 약한 몸은 회복되는 시간도 더뎠다. 열은 떨어지는 듯 떨어지지 않았고, 덕분에 루시펠라는 언제나 멍한 상태로 있어야만 했다.
그날은 더욱더 상태가 좋지 않은 날이었다. 루시펠라의 기분은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루시펠라가 사교계에서 괴롭힘을 당했던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하녀들이 그녀를 달래주었지만 소용없었다.
이 나약한 몸과 여자이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 절망하며 누워 눈물만 삼키고 있었다. 나약한 몸을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절망은 더욱더 커져 갔다.
“아가씨, 오셨어요! 어서 준비해야 해요.”
“누가?”
“하인트 공작 각하요.”
왜 준비를 해야 하지? 루시펠라는 멍하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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