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황궁의 개
2017.04.17.
“그래, 칼리드 루이르크. 자신의 나라를 팔아넘기고 적국의 공작위를 얻은 황궁의 개 나으리지. 뭐, 정확히는 황궁이 아니라 ‘형님’의 개겠지만.”
머릿속의 모든 생각이 사라져 갔다. 루시펠라는 발코니의 창틀을 잡은 손이 하얗게 될 정도로 힘을 주며 그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목소리를 내려 입을 벌렸지만 숨이 턱 막혀 잘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하려는지 스스로도 몰랐다. 그녀는 난간에 상반신을 기댔다.
위태로운 바람이 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만나야 한다. 칼리드를 잡아야 한다. 아니…….
“영애?”
난간을 밟고 위로 올라선 그녀는 뛰어내리려고 했다. 두려움 따윈 없었다. 아니, 두려움을 느낄 생각조차 없었다.
괜찮다. 여긴 기껏해야 3층이니까. 높은 높이도 아니다. 에스텔은 자신이 뛰어내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왜냐면 난 ‘에스텔’이니까.
“영애, 잠깐만!”
루시펠라는 뛰어내리려는 자신의 허리를 잡는 손길을 매섭게 뿌리치려 했다.
칼리드가 저기 있다. 칼리드가, 잠시라도 시선을 돌리면 사라질 것 같았다. 지금 당장 이야기를 해야 했다. 지금 당장, 어서 그 면상을 봐야 했다. 면상을 봐서……
죽여 버릴 것이다.
“칼리…… 드!”
마치 입에서 끓어오르는 듯, 원한에 찬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온 마음을 다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공작, 공작이라고? 네가 얀스가르의 공작이라고? 지금 이 황궁의 개라고? 네가 지금, 지금!
나를 죽이고 네가 살아 있었다고?
“칼!”
“영애!”
여자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상당한 실례라지만, 이오지프는 지금 이 순간 필사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한 번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죽여 버릴 거다. 죽여 버릴 거야. 살아 있다니, 네가 이렇게 살아 있다니 죽여 버릴 것이다!
“이거 놔!”
“영애, 지금 미친 건가?! 여긴 3층이야! 죽는다고!”
흥분으로 시야가 붉게 물들다 하얗게 물들고를 반복한다. 필요 이상으로 분노해 버린 몸에 호흡은 과해지고 그녀의 정신이 몽롱해졌다.
“칼리드!!”
드디어,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이미 이오지프가 허리를 세게 잡아당긴 뒤였다. 덕분에 그녀는 뒤로 넘어져 바닥으로 굴렀다.
그러나 아픔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엉금엉금 기어 난간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칼리드와 그녀의 시선이 마주했다.
칼리드가 정확히 루시펠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자색의 눈동자가 보인다. 그 얼굴이, 이윽고 그녀를 가리키며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나중에 사과하지.”
그때, 그녀의 뒷목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끝까지 발버둥 쳤다.
안 돼! 이제야 봤는데. 저 녀석의 면상을 이제야 봤는데! 저기 바로 눈앞에 있는데!
그러나 그녀의 시야는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그러곤 어느 순간 꺼먹한 어둠이 찾아오며 그녀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
제드는 자신의 인생에서 더러운 꼴을 많이 보았다고 자부했다.
그는 전쟁터의 참혹함을 몸소 목격했고, 마물과의 토벌전에서 마물이 얼마나 혐오스러운지를 목격했다. 그러나 가장 추악한 것은 바로 ‘인간’ 그 자체였다.
전쟁이 격화되어 식량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서로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마물을 잡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분명 사람들끼리 서로 연합해서 맞서 싸울 수 있음에도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사람이 사람을 미끼로 삼고 도망가 버렸다.
그것이 계속 반복되었고, 그 상황 아래서 사람들은 마물뿐만이 아니라 사람들마저 적으로 돌려야만 했다. 그리하여 상황은 더욱더 최악이 되었다.
결국, 이러한 사태를 수습하는 것은 제드를 포함한 황실에서 파견 나온 기사들이었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 가장 참혹하고 기분 더러운 장면을 꼽는다면 바로 3년 전의 일이었다.
얼샤가 얀스가르에게 정복되던 날. 성문을 열고 황제는 제드와 함께 얼샤의 수도인 오트로프에 입성했다. 얼샤의 모든 이들이 투항했다. 심지어는 국왕도.
혹시나 모를 일에 대비해 제드의 군대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방패를 든 병사들이 황제(그 당시는 왕이었다)의 주변을 둘러쌌다.
정복자들의 발걸음 소리는 우울하고 무자비하게 왕궁에 울려 퍼졌다. 그들이 알현실로 들어가던 날, 제드는 가장 추악한 장면을 보았다.
“…….”
여자의 목이 어떤 남자의 손 위에 들려 있었다. 여자의 머리카락은 잿빛이었으며, 그마저도 피에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제드는 그 머리를 보고 있었다. 황제와 얼샤 최후의 국왕의 대화는 들리지 않았다. 제드의 시선은 오로지 한곳, 그 남자의 품에 안긴 머리로만 향해 있었다.
떽떽거리던 그 얼굴이, 한시도 같은 표정이 아니었던 그 얼굴이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평온해? 살해당했는데 평온? 제드는 갑자기 울컥 분노가 치솟았다.
“저 여자는 얼샤의 이슈타르(Ishtar:샛별, 전쟁의 여신)가 아닌가?”
황제의 말에 제드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렇습니다.”
목을 든 남자가 조용히 대답했다.
“충성스러운 얼샤의 기사가 왜 목이 잘린 거지?”
황제의 말에 남자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목을 든 남자의 새하얀 얼굴에 드리운 미소는 부드러웠지만, 두 눈은 음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최후까지 항전을 주장했으니, 말이 통하지 않아 목을 잘랐습니다.”
“그대의 이름은 익히 알고 있다. 칼리드 가브라인. 제3기사단, 시토라 기사단의 부단장.”
“그러합니다.”
“그리고 그대가 들고 있는 이의 목은 에스텔 슈페르트, 시토라 기사단의 단장이지.”
“그러합니다.”
“그대가 직접 상관의 목을 베었나?”
“그러합니다.”
세 번째 ‘그러합니다’라는 대답에 고요한 침묵이 입성한 이들을 감쌌다.
제드는 그제야 에스텔의 머리에서 눈을 떼고,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옅은 푸른 머리카락이 특징적인 미형의 기사였다. 제드는 그를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죽은 저 여자가 얼마나, 얼마나 신뢰가 깃든 눈으로 그를 보았는지도…….
“상관의 목을 치다니, 개보다도 못하군.”
혐오감을 버리지 못하고 제드가 씹어 내뱉듯 하는 말에 모든 이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모욕적인 말에도 칼리드의 얼굴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모두 개죽음을 당할 테니까요. 어리석은 상관 때문에 죽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개보다 못한 이유를 말하는 칼리드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것을 본 황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목숨을 연명하고 싶었다라……. 그렇다면 칼리드 가브라인, 그대는 얀스가르의 개가 되어도 살아남고 싶다, 이 말인가?”
“개가 되라면 그리하겠습니다. 절 죽이지 않으신다면 주인을 무는 일은 없을 겁니다.”
칼리드가 담담하게 말했다.
제드는 그 담담함에 이가 갈렸다.
그때 칼리드가 걸어 나오더니 그녀의 머리를 황제의 앞에 던졌다. 그에 제드는 당장에라도 그 목을 자르고 싶은 충동을 참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남자는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칼리드 가브라인은 얼샤의 공작이기 전 나라를 지키는 검인 기사였다.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겠다고 맹세한 한 나라의 기사가, 지금 타국의 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패전한 국왕이 무릎을 꿇은 것보다 더욱 충격적인 일이었다.
“명예는 이 여자의 목을 잘랐을 때 버렸습니다. 제게, 남은 명예는 없습니다.”
그러곤 그는 이마를 바닥에 찧고 황제에게 항복의 절을 했다. 참으로 비굴한 모습이었다. 역겨울 정도로.
남자를 불쾌하게 여기는 것은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의 황제였다면 그는 칼리드의 목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제드는 황제의 얼굴에서 몹쓸 호기심이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가브라인 가문이라면 얼샤 왕국의 방계지. 그렇다면 얀스가르의 왕가와도 먼 혈통은 아닐 터.”
“전하!”
제드가 말리듯 그를 보았지만 황제의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노인의 몹쓸 호기심이었다.
죽여야 한다. 주인을 무는 개새끼는 죽여야 함이 옳았다. 그러나 제드의 말에도 황제는 비틀린 충동을 이기지 못했다.
“이제부터 가브라인이 아니라 그대에게 루이르크라는 성을 하사한다. 비록 땅은 그대로 주진 않겠지만 작위는 그대로 유지시켜 주지.”
“…….”
“그리고 살아남는 얼샤의 왕족은 그대 하나뿐이다.”
황제의 말에 제드는 이를 갈았다. 그 말이 주는 의미가 너무도 명확했다. 황제가 제드에게 눈짓했다.
제드는 황제의 명을 따라 얼샤 국왕의 목을 잘랐다.
그리하여 얼샤는 멸망했고, 나라를 지키려던 기사는 죽었고,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상관을 배신한 개새끼는 살아남았다.
만약 그 새끼가 죄책감으로 괴로워 보였다면 제드도 그자, 칼리드에 대해 그렇게 거부감과 적개심은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인간적으로 고민하고 있는지 그도 숱하게 봐왔으니.
그러나 칼리드는 달랐다. 그 남자는 자신이 저지른 짓에 후회 따윈 느끼지 않고 있었다.
그가 죽은 여자에게 느낀 감정은 그조차 규정할 수 없었다. 동정인가, 연민인가, 아니면 그 어리석은 모습으로 죽어버린 그녀에 대한 비웃음인가. 아니면 애도인가.
끝까지 나라를 지키고자 했으나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 얼샤의 이슈타르. 그 기사의 모습은 아직도 가끔 머릿속에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
“그래도 그쪽에게 신세를 졌으니 친히 갚아주도록 하지. 다음번을 기약할게.”
그녀가 마지막으로 제드에게 한 말이었다. 그녀와의 재회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참 더럽고 추악한 형태로.
상념에 빠져 있던 제드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보좌관 버나드였다. 버나드가 소식을 전하자 제드의 눈이 커졌다.
“황궁에 갔다고? 영애가?”
이런. 어제 저지른 일을 황제가 알아버린 건가. 황제의 성격상 제아무리 백작의 영애라도 그녀는 처벌을 피하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차도 왜 거길 차서는……. 쯧.’
그는 혀를 차며 입궁 준비를 했다. 뒤처리를 맡아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이번에는 제드 역시도 가만있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황태자가 난잡하며, 그녀에게 어떤 행동을 했는지 루시펠라에게 들은 것을 그대로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황제도 크게 화를 내진 못하겠지.
이번에 도와준다면 루시펠라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다음번을 기약할게.’
그렇게 말할까? 그러다 제드는 자신이 루시펠라가 아닌 에스텔을 떠올렸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저었다. 그 인간은 왜 떠올라 그를 괴롭히는 것일까.
“재수가 없으려나.”
잿빛 머리카락에 반짝이는 호박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러다 이내 그의 머릿속에는 춤을 출 때 샹들리에의 빛을 머금고 반짝이던 은청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제드는 다시 한 번 혀를 차며 준비를 서둘렀다.
그리고 제드의 귀에 들려온 것은, 루시펠라의 발작 소식이었다.
***
“내가 아니야.”
이오지프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는 자신의 안경을 손으로 굴리고 있었다. 제드의 시선이 매섭게 이오지프를 향했다.
“폐하께서도 친히 추궁하셨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이야.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어. 길을 잃은 영애에게 길을 안내해 주다가 황궁 정원이 보고 싶었는지 발코니로 향하더군. 그러다가 갑자기 뛰어내리려고 했어.”
“…….”
너 같으면 그 말을 믿겠냐는 제드의 시선에 이오지프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사실 무슨 일이 있긴 했지만, 영애의 개인사를 위해 더 말하고 싶지는 않아.”
“개인사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이용할지 보류해 놓는 거겠지.”
“부정하지는 않을게.”
그가 느른한 표정으로 소파 등받이에 기대며 말했다. 제드의 입속에는 또다시 욕설이 맴돌았다. 어려서부터 피치 못할 사정으로 가까이 지내게 되었지만, 가까이하기 싫은 놈이었다.
“내가 영애에 대해 알려주면, 넌 내가 원하는 걸 들어줄 거야?”
“미친놈.”
결국 제드의 입에서 욕설이 나왔다. 그 말에 이오지프는 눈을 접어 웃었다. 그 모습은 정말 말 그대로 온화한 2황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비록 약혼 관계지만 네 부탁을 들어줄 정도의 사이는 아니라고 굳이 말해야 하나?”
“이렇게 찾아와서 나에게 캐물을 정도의 사이이기도 하지.”
한마디도 지지 않는 이오지프의 얼굴을 보고 제드가 얼굴을 찡그렸다. 이오지프가 손장난을 치던 안경을 다시 쓰며 말했다. 그에 날카로운 눈매가 다시 가려졌다.
“형님만 쫓아다니는 골빈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 영애 보통이 아니더군.”
“보통은 아니지.”
“내가 검을 쓴다는 걸 알아챈 것 같은데?”
“뭐?”
“‘검 좀 잡아봤다는 거 알고 있으니까 어설픈 척 개수작 부리지 똑바로 말해’라던데? 도대체 어디서 눈치챘을까. 난 나름 철저했단 말이야.”
“하.”
제드는 그 말에 피식, 하고 웃었다. 어떤 말투로 말했는지 상상이 갔기 때문이다.
루시펠라는 그가 말하고 싶었던 거나 행동하고 싶었던 것을 대신 해주는 신기한 능력이 있었다. 발작을 일으켜서 뛰어내리려고 했다는 것치고는 참으로 그녀다운 행동이었다.
“어차피 영애가 그걸 말해봤자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테니 부정하진 않았지. 그런데 문제는 그 후에 뛰어내리려 해서 그 난리를 피웠으니까.”
“…….”
“2기사단이 고생했어. 루이르크 경이 수습했지.”
그에 제드의 얼굴이 구겨졌다.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듯한 얼굴에 이오지프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루이르크 공작을 정말 너무 싫어하는군.”
“주인을 문 개새끼는 딱 질색이라서.”
“루이르크 공작은 얀스가르에 3년을 살았어. 이제는 우리 제국민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야.”
“퍽이나.”
제드는 짜증이 난 모양인지 자신의 앞에 있는 찻잔을 손가락으로 퉁기며 밀어냈다.
“그러고 보면 루이르크 공작과 아이딘 백작 영애는 서로 알고 있던 사이일까?”
“무슨 개소리야?”
“루이르크 공작은 형님의 개고, 아이딘 영애는 형님의 애인이었으니 말이야.”
“날 기분 나쁘게 하려면 오늘 정말 성공했군, 이오지프.”
그의 매서운 얼굴에 이오지프가 피식 웃었다.
“아니, 농담이야. 둘은 전혀 모르는 사이야. 영애는 ‘황궁의 개’라는 말도 몰랐으니 말이야.”
“아아, 그래?”
이오지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마셨다. 제드는 갑자기 왜 루이르크와 루시펠라가 동시에 언급된 건지 짜증이 났다.
“영애에게 가봐야 하지 않겠어?”
“그 정도 사이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하지?”
제드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러다 제드는 하늘을 보았다. 청명한 가을 하늘에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날씨마저도 빌어먹을 정도로 좋군. 어둡게 물든 하늘을 보며 제드의 짙은 눈썹이 모아졌다.
***
비가 오고 있었다.
루시펠라는 눈을 느릿하게 껌뻑였다. 그녀는 시야에 들어오는 창밖을 보였다. 하늘은 환했으나 시야는 뿌연 안개가 낀 것 같았다.
투둑, 투둑.
빗소리가 고요한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있는 곳이 황궁이 아닌 자신의 방이라는 것을 알았다.
용케도 그 난리를 피우고 방으로 돌아왔구나.
루시펠라는 피식 웃었다. 아직도 얻어맞은 뒷목이 뻐근했다. 침대에 앉아 등을 기댄 그녀는 계속 그 빗소리를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쓰러지기 전에 보았던 모습을 떠올렸다.
발코니 아래에서 그는 낯선 제복을 입고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여전히 똑같은 얼굴로, 가증스럽게도 그렇게.
“칼리드 루이르크.”
루이르크, 루이르크, 루이르크.
루시펠라는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칼리드’라는 이름은 익숙한데, 혀끝이 이빨에 닿아 말하는 ‘루이르크’라는 말은 계속 발음했지만 섬뜩하리만치 낯설었다.
그 말을 중얼거리던 그녀는 어느 순간 푸흐, 하고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다 그녀는 입술을 비틀어 올리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우습다. 우스워 미칠 것 같았다.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침대에서 떨어졌다.
해가 떠오르는 듯 꺼먹한 하늘은 점점 밝아졌다. 루시펠라는 웃었다.
당연했다. 칼리드를 보는 순간, 그가 살아서 걸어 다니는 걸 목격한 순간, 그녀는 자신안의 가장 멍청한 부분을 발견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상하리만치 칼리드에 대해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알아보려면 알아볼 수 있었다.
분명 그녀라면, 루시펠라의 신분이라면 어렵지 않게 칼리드 가브라인의 행방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리엄에 대해 들었을 때와 달리 그녀는 칼리드라는 인물의 정보를 수집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그러면서 루시펠라에게 적응한다고 칼리드에 대해 알아본다면 수상하게 여겨질지도 모른다는 같잖은 핑계를 댔다.
사실은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것도 알지 않으면 어떠한 것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슬퍼하는 것도, 증오하는 것도.
적응하면서 숨 쉬듯 칼리드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그의 꿈을 꾸면서도, 그를 존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칼리드가 죽었기를 바랐다. 그녀는 그녀가 당한 뼈아픈 배신에 제대로 직면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 이 얼마나 멍청한가. 그녀는 계속해서 웃음을 터뜨렸다. 조용히 퍼져 나가던 웃음소리는 어느새 흐느낌이 되었다.
그가 가브라인이 아니라 루이르크라는 성을 하사받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는 이미 결론을 내렸다.
그녀의 목을 잘라 황제에게 바친 것은 칼리드이다. 그리고 그 대가로 공작위를 받은 것이다. 그는 얼샤 왕가의 혈통이었기에 황제는 그를 남기고 대신 국왕 전하를 죽인 것이다.
그랬다. 그런 것이다! 그녀의 목숨을 대가로 그는 목숨을 부지하고, 여전한 권력을 손에 넣었다.
“에스텔.”
환하게 웃던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언제나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서로를 믿고 있었다. 끝까지 함께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을 배신하고 얀스가르의 황궁의 개로 살아가는 친우. 너무나 소중했던 사람.
그가 낯선 얼굴로, 낯선 성을 가지고, 낯선 옷을 입고, 낯선 나라에서 목숨을 부지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허울 좋은 공작이라는 작위까지 그대로 받아가면서.
나는 대체 누구와 살아왔던 거지? 누구와 함께해 왔던 거지?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기에 한 몸이라 여겼었다. 서로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조차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함께해 왔다.
한데 그 시간 자체가 거짓이었던 것일까. 전쟁이 일어나고, 언제 마음이 변했던 것일까. 처음부터 변했던 것일까.
루시펠라는 다시 에스텔로 돌아와서 울음을 터뜨렸다.
동료들의 배신을 알게 된 순간 말로 하지 못할 배신감을 느꼈다. 그러나 ‘칼리드’라는 인간의 배신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녀는 무너져 내리고야 말았다.
루시펠라로 살려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어떠한 지향점도 없이 ‘적응’만을 하려고 했다. 그저 어렴풋이 동료들을 만나야지, 생각했다.
이 얼마나 안이했는가. 칼리드를 보니 그녀는 자신이 겪었던 죽음과 더불어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비가 내리는 새벽. 사용인들조차 잠들어 버린 이 시간에 누구도 그녀를 말리는 이는 없었다. 몸은 더없이 연약해져 비틀거렸지만 정신만은 또렷했다.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죽임을 당했으니 갚아주면 된다. 자신의 목이 베인 것이라면 그놈의 목도 베어버리면 된다.
너무나 간단한 일이다. 그러니, 어서 가야만 한다.
“칼리드…….”
그녀는 그 이름을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로 흡사 미친 듯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어서 죽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한 저택의 복도를 헤매 다녔다. 그러곤 드디어 눈여겨봐 두었던 예식용 검이 있는 곳에 다다랐다. 발돋움을 해 검에 손을 뻗어 그것을 들자 묵직한 무게감에 순간 몸이 휘청였다.
루시펠라는 이를 악문 채 그것을 들고 다시 복도를 걸어 현관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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