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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13화 (13/173)

#13화 만남

2017.04.13.

루시펠라는 황제의 의중을 파악하려 했다.

그러나 루시펠라가 태어나기 전에도, 에스텔이 태어나기 전에도 이 사람은 한 나라의 국왕으로 존재하던 사람이었고, 그녀가 대하던 이들과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폐하의 심중을 헤아릴 수 없기에 답할 수가 없습니다.”

그랬기에 루시펠라는 솔직하게 말했다. 만약 이것이 일종의 테스트라면, 답을 모르는데 어떻게 대답하란 말인가.

그녀는 황제의 의중을 알아서 짐작하고 빠져나갈 머리가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나았다.

그러면서도 내심 그녀는 욕설을 내뱉었다. 얀스가르의 황제에게서 살아남기 위해서 이렇게 말을 고르다니, 굴욕적이었다.

“더 말해보라.”

그 말에 루시펠라가 눈을 치켜떴다.

“제겐 제게 주어진 상황과 폐하의 표정만 보고 무언가 짐작해서 완벽한 대답을 할 눈치도, 말재간도 없습니다. 두려우냐고 하신다면, 네, 두렵습니다. 폐하께서는 제 아버지와 저를 벌하실 수 있는 분이시니까요. 그렇지만 이 순간 대화를 나누는 지금 제 앞에 앉아 계시는 분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두렵지 않습니다.”

그 말에 황제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짐의 권력이 무섭지 짐 자체는 무섭지 않다?”

“그렇습니다, 폐하.”

그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거짓이 아니었다. 사실 맞는 말이 아닌가.

황제는 루시펠라를 똑바로 쳐다보았고, 루시펠라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무언의 탐색이 오가고 황제는 손을 들어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 의미 모를 행동에도 루시펠라의 감정은 평온했다. 황제는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루시펠라의 생각이 아니라 에스텔의 직감이었다. 이내 그녀의 예상대로 황제가 입꼬리를 들어 올리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아이딘 백과 하인트 공이 머리깨나 아프겠구나.”

‘거기서 하인트 공작이 왜 나와.’

루시펠라는 속으로 꽁알거렸다. 그래도 다행히 목이 날아갈 말은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기서 내 질문에 대한 정답이 있다면, 그건 없다는 것이다. 그저 나는 질문을 한 것에 지나지 않아.”

그 단순한 질문을 꼭 오만 인상을 다 찌푸리며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면서 해야 했나. 루시펠라는 항의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모든 이들이 짐의 말 한마디 가지고 어설피 의중을 짐작하려 애쓰고는 하지.”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저 자리에 있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목이 날아가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작 내가 말하는 것은 그저 그 말 그대로일 때도 있는데 말이다.”

그는 미소 지은 채 손짓하며 루시펠라를 가까이 다가서게 했다. 루시펠라는 잠시 머뭇거리다 단상 바로 아래까지 걸어갔다.

루시펠라는 황제를 더욱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어딘가 인간이 아닌 존재처럼 보였던 황제는 가까이서 보니 그저 체격만 건장한 노인이었다.

그의 두 눈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짙은 올리브색이었고, 코는 뭉툭했으며 입가 주변에는 주름이 져 있었다.

만약 이 황제가 황좌에 앉아 옷을 입고 있지 않다면 그를 황제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짐의 의중은 특별히 없다. 그냥 나만 보면 아비의 뒤로 숨던 어린애가 지금은 어엿하게 커서 짐을 올려다보니 세월이 흐름을 느껴서 그런 것이다.”

“언제까지 어린아이로만 남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루시펠라가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루시펠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황제는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영애가 테미르 녀석과 각별한 사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짐은 그대를 황태자비로 지목하지 않았지. 왜라고 생각하느냐?”

“제가 마음에 안 드셔서가 아닙니까?”

너무나 시원스럽게 나온 말에 황제가 잠시 동안 할 말을 잃었다. 루시펠라는 지나치게 솔직했고, 돌려 말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녀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자 황제가 말했다.

“……그렇게 생각했었느냐?”

“황태자 전하께서 그리 말씀 하셨으니까요.”

“쯧쯧. 고얀 놈.”

그는 혀를 차며 얼굴을 찌푸렸다.

“짐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저 루아나의 딸인 그대에게 무거운 짐을 씌우고 싶지 않았을 뿐이니, 영애는 황태자비로 적합하지 않다고 말했을 뿐이다.”

루아나? 루아나라면 루시펠라의 어머니의 이름이다.

“네 어미는 무거운 굴레를 싫어했고, 그래서 공작부인의 자리가 아닌 아이딘 백의 옆자리를 선택했다. 그런 그녀의 딸이라면 똑같이 무거운 굴레를 싫어하겠지. 제국의 황후 자리는 무겁다. 그리하여 그대를 잡지 않은 것이다.”

아, 그렇구나. 루시펠라의 엄마가 공작부인보다 백작부인의 자리를 택했구나. 무언가 굉장히 감동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결론을 내리면 ‘네 엄마도 무거운 자리를 싫어했으니 너도 싫어할 거야’라는 말이 아닌가. 그것참, 자기중심적인 해석이었다.

“한데 황궁 호수에 뛰어들 정도의 깊은 마음인지는 몰랐구나. 네가 그런 마음이었다면 짐도 한 번 더 생각해 봤을 것이다.”

황제의 얼굴을 본 루시펠라는 왜 황궁 호수에 뛰어드는 어마어마한 짓을 저지르고도 그녀가 따로 불이익을 받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황제가 모든 것을 눈감으라 지시했던 것이다.

“지금도 테미르를 마음에 두고 있느냐? 원치 않은 약혼이라면 황명으로 파기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황제의 이 말로 루시펠라는 황제는 그녀가 어제 황태자에게 저지른 짓을 전혀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루시펠라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황제가 그녀를 따로 부른 이유는 어떤 방해도 없이 루시펠라의 의견을 물어보기 위함이었다.

황명으로 약혼 파기가 가능하더라도 신전의 인장이 찍힌 유언장을 무효화시키려면 신전 측과 대립을 할 게 뻔한데도 이런 말을 할 정도라니, 루시펠라가 이렇게나 예쁨 받은 사람이었던가?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하지만 이제 정리는 끝났습니다.”

루시펠라의 말에 황제는 의아한 눈빛을 하더니 이내 알겠다는 듯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언제나 잔혹한 줄 알았던 황제의 인간적인 면을 발견하자 그녀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하인트 공은 네게 잘해주더냐?”

“못 해주진 않습니다.”

루시펠라의 말에 황제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이 꼭 마을 할아버지와 같은 소탈한 모습이었다.

“나쁜 녀석은 아니다.”

루시펠라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 표정을 본 황제는 무슨 일인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딘 영애, 그대는 참 감정을 숨기는 걸 잘 못 하는군.”

그건 에스텔이었을 적 거의 매일 들었던 소리였다. 정말 긴장된 상황에서는 알아서 표정 관리가 되었지만, 안전하다고 생각되어 버리면 그녀는 안면 근육 관리를 하지 못했다.

“하인트 가는 남부의 넓은 땅을 가지고 있으며, 가장 강력한 기사들을 키워내는 곳이다. 영지 역시 부유한 편이고, 그 녀석의 얼굴 역시 못난 편은 아니니 그 정도면 좋은 신랑감이 아니겠느냐?”

“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못해 대답하자 황제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혹, 약혼을 파기하고 싶다면 언제든지 짐에게 말하라. 오늘 그대를 부른 것은 그것을 위한 것이었다. 관계가 꼬였으면 바로잡아야지.”

만약 여기서 약혼을 파기해 달라고 한다면, 루시펠라는 그 황태자 놈과 이어지게 되는 건가.

진짜 루시펠라라면 환영할 일이었지만 그녀는 그 이상한 놈과 혼인하는 건 싫었다. 차라리 하인트 공작이 나았다. 루시펠라는 불편해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루시펠라는 얌전하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그래, 그럼 이제 돌아가도록 해라.”

황제는 나가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했다. 황제는 할 일이 많았고, 일부러 그녀를 만나기 위해 시간을 낸 것이었다.

루시펠라는 다시 한 번 인사를 올리고 알현실을 나섰다.

마음이 복잡했기에 그녀는 자신이 벨벳 카펫에 새겨진 얼샤의 별, 하조하르를 밟고 지나간다는 것조차 몰랐다.

시종을 따라 걸어가면서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단순했기에 자신의 감정을 파악하는 것도 쉬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다.

무도회장에서 황제를 봤을 때 어떻게 하면 죽일지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그러나 루시펠라 개인에게 있어 황제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위엄을 벗어던진 그는 그저 다정한 노인네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이끈 군대가 얼샤를 짓밟았다는 원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노를 터뜨리고 싶음에도 어쩐지 그 감정마저 루시펠라라는 육신에 갇혀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황제를 알현했을 때, 적개심보다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우선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

그녀는 혼란을 느꼈다.

“어?”

그때, 그녀는 자신이 복도에 혼자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종이 어딜 간 거지? 그녀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두 갈림길이 나오자 곧장 직진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또 갈림길.

그것을 보자 그녀는 자신이 잘못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있던 장소로 돌아가려 했으나,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상실해 버렸다.

이 넓은 황궁에서 길을 잃어버렸구나.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루시펠라는 일단 지나가는 시종이나 기사에게 물어볼 요량으로 발 닿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한데……

아니, 왜! 대체 왜! 이 넓은 황궁에 지나가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단 말인가.

물론 황제의 집무실 주변으로 모든 인력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건 알고 있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대충이나마 시종을 따라왔던 동선을 떠올리려 하던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길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아무 데로나 발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조금 외진 곳에서 계단을 발견했다.

이곳은 3층이니 1층으로 내려간다면 될 것이다.

그러다가 그녀는 이곳이 정확히 어느 쪽인지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녀는 내려가는 계단이 아닌 올라가는 계단으로 걸어 올라갔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에서도 금지 구역이 있다고 하면, 마땅히 거길 지키는 기사가 있을 테니 그때 길을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계단을 한 층 더 올라간 루시펠라는 다시 복도를 걸었다.

이곳은 폭신한 카펫이 깔려 있어 소음이 나지 않았다. 이러면 인기척을 못 느껴서 호위가 까다로울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다 루시펠라는 복도에서 돌아 나오는 남자를 발견했다.

검은색 안경을 쓴,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발을 늘어뜨린 남자였다.

복도의 창가에서 비쳐 오는 햇살에 남자의 짙은 금발이 반짝였다.

남자는 여러 권의 책을 든 채 힘겹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때 책 너머로 루시펠라와 남자의 시선이 마주했다.

“으아아아아!”

그가 갑자기 맞닥뜨리게 된 그녀의 모습에 당황한 듯 들고 있던 책을 모두 떨어뜨려 버렸다.

카펫이 깔려 있어 커다란 소리는 나지 않았으나, 책은 떨어져 널브러진 뒤였다.

루시펠라는 무심결에 책을 줍기 시작했다. 책을 들여다보니 하나같이 제목부터가 범상치 않은 연애소설이었다.

“아이딘 영애, 이건 무겁습니다.”

나를 아나? 그러다가 루시펠라는 그 남자가 2황자, 이오지프라는 것을 생각해 냈다.

“황자 전하를 뵙…….”

“으아아아아!”

남자는 인사를 생략해도 된다고 손을 내저으려다가 겨우 주운 책을 다시 떨어뜨렸다.

뭐야, 바보 아냐? 그녀는 책을 다시 줍기 시작했다.

“으으, 죄송합니다, 영애.”

얀스가르도 망했구나. 황태자는 인성이 쓰레기고, 2황자는 이렇게 모자란 놈이라니 말이야.

루시펠라는 차갑게 평가했다. 마지막 책에 손을 얹었을 때, 동시에 이오지프의 손이 위에 얹어졌다.

“어……?”

손등에 느껴지는 익숙한 감촉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오지프를 보았다.

그는 그 이유를 모르는지 생긋, 미소 지었다. 루시펠라는 아주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이 남자는 거리를 둬야 하는 사람이었다.

“이리 주십시오, 영애.”

부드러운 목소리에 루시펠라는 얌전하게 책에서 손을 뗐다. 그가 정리한 책을 번쩍 들었다. 그에 루시펠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황궁 도서관까지 영애가 방문할 정도로 찾고 싶은 책이 있는 겁니까?”

그 질문에 루시펠라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가 황궁 도서관이었나 보군요.”

“네, 여기서 꼭대기 층까지 모두 도서관이랍니다.”

이오지프는 루시펠라를 향해 웃어 보이며 말했다.

“여기서 책을 찾는 거라면 제가 찾는 걸 도와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요, 단순히 길을 잃었습니다.”

“으음, 길을 잃었는데 위층으로 올라오시다니 특이한 분이시군요.”

“고층일수록 길을 찾기 쉬우니까요.”

오, 그는 작게 탄성을 내더니 사교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영애.”

“그렇지만…….”

저놈의 책 더미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루시펠라의 시선이 쌓여 있는 책 더미로 향하자 이오지프가 멋쩍게 웃으며 책을 내려놓았다.

꽤나 많았음에도 이오지프의 손에 들린 책들은 거의 흔들림 없이 복도 위에 내려졌다. 아까 힘겹게 책을 들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영애께서 오신 계단은 서재로만 연결되는 계단입니다. 지층에 가셔도 출구가 없을 터이니 절 따라오십시오.”

손을 탁탁 털며 이오지프가 루시펠라의 경계 어린 표정을 보며 웃었다.

“왜 그러십니까? 영애,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는지…….”

“아니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시선이 복도 위에 쌓인 책에 머물렀다.

“여기 잠시 놔두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겁니다. 오래된 책이 아니라 상하지 않을 거예요.”

이오지프는 싹싹하게 루시펠라에게 말했다.

“내려가죠, 영애.”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자에게 길을 안내받는 것도 우습긴 했고, 이 남자는 찝찝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여기 이쪽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꺾었으면 되었을 겁니다.”

얼마 후 그녀는 다시 알현실을 지나갔고, 이오지프는 올바른 길을 설명해 주었다.

루시펠라는 말없이 남자를 관찰했다.

학자풍의 유순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미남. 어투는 황태자나 제드와 같은 강한 힘이 있다기보다는 물 흐르듯 부드러웠다. 그리고 좀 지나치게 수다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구린 구석이 많았다.

“영애?”

“아, 아닙니다.”

그에 이오지프가 다시 웃었다. 루시펠라는 저놈의 얼굴을 보니 어서 황궁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 그런데 길을 찾으러 높은 곳에 올라가 본다는 발상에 깜짝 놀랐습니다. 여행자들이 그렇게 길을 찾는다고 알고 있거든요. 영애도 여행서를 많이 읽나 봅니다.”

“뭐, 그렇죠.”

이젠 여행서에 대해 반짝거리는 얼굴로 말하는 이오지프의 말에 그녀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복도의 거대한 아치형 창문의 유리 너머로 황궁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이 걸어가고 있는, 황궁의 오른쪽 가에 도열해 있는 자주색 제복의 남자들이 보였다. 아까 알현실에 들어가기 전에 본 기사들이었다.

이오지프가 루시펠라의 시선을 따라가다 모여 있는 기사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쉽게도 1기사단이 아니군요. 하인트 공작은 거의 기사단 일을 하지 않아서요. 약혼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참 아쉽죠?”

아, 역시 2기사단인 모양이었다. 루시펠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기사단을 보다 한 지점에 시선이 닿았다. 그리고 우뚝, 발걸음이 멈췄다.

“어? 영애, 황궁의 정원이라도 감상하실 생각입니까? 정원은 황궁의 자랑이죠. 언제 한번 황궁의 정경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장소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이오지프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루시펠라는 갑자기 치마를 걷어 복도 한복판을 뛰기 시작했다. 뛰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복도의 창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영애!”

저 멀리서 자신을 쫓아오는 이오지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목소리 따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 더 저들을 또렷이 볼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그러나 계단을 내려가지 못했던 이유는 그녀가 본 인간이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자신이 봤던 것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주색 제복의 기사들이 모여 있는 곳 바로 위의 창문까지 뛰어갔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그녀는 창문을 열면 바로 발코니가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고 창문의 잠금쇠를 풀었다. 자신의 키만 한 창문을 연 뒤, 그 바로 앞에 마련되어 있는 발코니로 나아갔다.

이오지프의 말에도 들리지 않는 듯 루시펠라는 발코니의 난간에 손을 얹고 몸을 기울였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어느 한곳에 붙박여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어두운 자주색 기사단복을 입고 입은 남자들 중심에 있는 청년.

어떻게 잊겠는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저 모습을, 잊어버릴 수가 있을까.

밝은 푸른색 머리카락이 햇빛에 산산이 빛난다. 유독 유려한 이목구비가 눈 안으로 파고든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그는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다.

기사임에도 더없이 아름답던 얼굴. 큰 키. 우아한 그 손짓 하나까지 그녀는 절대 잊지 않았다. 잊을 수 없었다.

반가움인가? 그리움인가? 원망인가?

“대체 왜 이러십니까, 헉헉…… 영애?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쫓아온 이오지프가 숨을 헐떡이자 루시펠라는 그에게 물었다.

“저 사람, 저 사람은 누구지?”

알면서도 확인하고 싶었다. 목소리가 절로 떨렸다. 시선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오지프가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했다.

“영애, 헉, 저 잠깐만…… 너무 뛰어서…….”

“검 좀 잡아봤다는 거 알고 있으니까 어설픈 척 개수작 부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냉정을 잃어버린 루시펠라의 말에 숨을 헐떡이던 이오지프의 숨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그러곤 눈빛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얼마 안 되는 거리에도 숨을 헐떡이던 허약한 황자였던 그는 놀라울 정도로 흐트러짐 하나 없는 모습으로 변모했다.

온화해 보이는 얼굴에 삐뚜름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그는 신기한 것을 관찰하는 어린아이처럼 루시펠라를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을 아주 흥미로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녀의 손가락 끝이 다다른 곳을 보더니 흐음, 하며 일부러 뜸을 들이다 루시펠라의 살벌한 얼굴을 보며 말했다.

“루이르크 공작이라면 얼굴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닐 텐데 왜 모르지? 아니, 모를 만도 하겠군. 영애는 형님만 바라보던 사람이었으니.”

“……루이르크 공작?”

“그래, 얼샤의 공작이었지. 그리고 지금은 얀스가르의 공작이고. 영애, 하인트 공을 두고 저 남자에게 관심이라도 생긴 건가?”

이오지프의 말에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나갔다. 가슴이 세차게 뛰어 그 고동이 머릿속까지 울려 퍼졌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음에도 입술과 혀는 익숙한 이름을 발음하려 착실하게 움직였다.

“칼…… 리…… 드.”

그것이, 저 남자의 이름이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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