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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12화 (12/173)

#12화 다시 받은 초대

2017.04.10.

밤이 오며 하늘은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연회장에서 멀어지자 눈을 부시게 했던 찬란한 황금빛 역시 점차 시야에서 사그라들었다.

제드는 곧바로 루시펠라를 찾았다.

걸음이 꽤나 빠른 편인지 그녀는 벌써 회랑을 걸어가고 있었다. 제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왠지 모를 위화감에 얼굴을 찌푸렸다.

치마에 가려져서 눈치채지 못했지만 어째 발걸음이 부자연스러웠다. 아까 걸을 때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빠르게 걷자 발걸음이 묘하게 남성스러운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이상한 걸음은 아닌 게, 아무래도 그녀의 특색이지 싶었다.

제드는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따라잡았다. 뛰지 않았던 것은 꼭 그녀에게 안달이 나 쫓아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뭐야, 왜 따라왔어?”

“……약혼녀를 혼자 보냈다가 무슨 비난을 들으려고?”

그 대답에 그녀는 피식 웃더니, 다시 그대로 걸어갔다. 다행히 따라오지 말라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잠깐. 다행이라고?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제드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루시펠라를 따라잡은 제드는 그녀와 함께 회랑을 걸었다. 루시펠라는 그와 별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지 입을 다물었다. 심지어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래서 제드는 곁눈질로 마음 놓고 루시펠라를 바라볼 수 있었다. 외모 하나만은 기가 막힌 사람이다.

아버지가 외모로 약혼녀를 선정했다면 왜 이 여자가 약혼녀가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외모였다.

밤처럼 까만 머리카락, 우유같이 흰 피부, 오밀조밀하고 섬세한 선을 가진 이목구비. 가냘프지만 부드러운 목선과 드러난 쇄골. 뭇 남자들이 정신을 못 차릴 것 같은 외모였다.

그러나 제드에게는 외모보다는 눈, 정확히는 눈빛, 그 눈빛이 묘하게 시선을 잡아끌었다. 춤을 출 때 분명 그녀의 눈동자는 환한 빛을 머금고 반짝거렸다.

지금 그녀의 눈동자는 이번에는 고고한 달빛을 눈에 담고 있었다.

분명히 루시펠라와는 초면이 아님에도, 약혼이라는 관계로 묶여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일말의 사건 때문인지 달라 보였다.

별을 박아 넣은 듯한 그 눈은 마치, 그래, 마치…….

그러다 제드는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그러곤 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루이르크 공작의 목소리였다.

경비를 선다더니 경비 구역이 이쪽이었나 보다. 그는 기껏 좋아졌던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돌연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제드에게는 그 목소리가 어디서 왔는지 명확했지만 신체가 단련되지 않은 루시펠라는 인기척으로만 들리는 모양이었다.

“영애가 신경 쓸 소리는 아니야. 가지.”

“아니,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아. 누구 목소리지?”

“신경 쓸 소리가 아니라니까.”

제드는 그녀의 팔을 살짝 잡아끌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벌어진 스킨십이라 이 둘은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다.

루시펠라는 호기심이 죽지 않는 것인지 자꾸 뒤를 돌아보려 했다. 그것이 좀 집요할 정도였지만, 제드는 굳이 그놈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놈을 만나서 역겨운 면상을 보며 인사치레할 생각을 하니 절로 기분이 더러워졌기 때문이다.

“누군데 그래.”

“있어, 황궁의 개.”

제드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그로서는 자신도 모르게 격렬한 혐오감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는 본디 남에 대한 혐오를 낯선 이에게 함부로 말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어째서인지 그녀 앞에서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황궁의 개?”

그 모욕적이고 상스러운 표현에도 루시펠라는 놀라거나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되물었다.

이런 표현을 하면 자신들의 부하나 보좌관 빼고는 대부분은 불편한 표정을 지었는데, 루시펠라는 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제드는 어딘지 그 부분이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막상 루시펠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황궁의 개라니. 그렇게 따지면 이 남자도 마찬가지 아닌가? 동족 혐오란 저런 건가?

자신도 얀스가르의 개새끼인 건 마찬가지일 텐데 개가 개라고 하니 웃기네, 하는 생각이 떠올랐으나 그녀는 그런 말을 하지 않을 정도의 분별은 있었다.

“어찌 되었든 나와 약혼한 사이라면 알아둬. 나는 그 녀석을 아주, 아주아주, 싫어하니까. 얀스가르 제국에 제일 싫어하는 놈이 있다면 바로 그놈이야.”

“그놈이 누군데?”

“이름을 부르는 것도 싫다.”

아까 황태자의 거시기 차기도 그렇고, 뒷정리까지 해주는 제드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제드의 이글이글한 눈빛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이름을 알아서 마음껏 불러주겠다고 다짐하며.

그녀는 치마를 붙잡고 황궁 계단 아래를 내려가다 긴 치마 때문에 자칫 넘어질 뻔했다.

그것을 본 제드가 손을 내밀었다. 루시펠라는 흘끗 그 손을 보고는 보란 듯이 치맛자락을 걷은 채 다시 사뿐사뿐 내려갔다.

이 정도는 남자의 도움 따위 필요 없다, 라고 생각할 때 그녀는 발을 헛디뎠다. 균형 감각 따윈 이 몸에 존재하지 않는 탓이었다.

제드가 재빨리 한숨을 쉬며 팔을 잡아 지탱해 주었다. 루시펠라는 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손을 뺄까 했지만 또 몸이 흔들렸다.

분명 여기서 넘어진다면 꼴사납겠지. 그녀는 울며 겨자 먹기로 그의 팔에 몸을 기댈 수밖에 없었다. 적합한 자세를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손을 잡았다.

계단을 다 내려가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아이딘 백작가의 마차를 부르러 사라졌고, 그들은 또 단둘이 되었다.

루시펠과 제드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제드는 무슨 말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루시펠라는 좀 전의 소리, 아주 멀리서 잔잔하게 들리던 목소리에 대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루시펠라는 자신이 여전히 제드와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손 좀 놔주겠어?”

이제 사람들이 보는 것도 아닌데 지나치게 다정할 필요가 있나. 고마운 게 있어 얌전히 따라왔지만, 여기까지다.

괜히 약혼자랍시고 진짜 연인처럼 달라붙는 건 딱 질색이었다. 그녀의 매몰찬 태도에 제드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루시펠라를 보았다.

조금 누그러져 있던 분위기가 다시 팽팽하게 당겨졌다. 루시펠라가 얌전하게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이곳은 나댈 수 없는 황궁 무도회였고, 그와 춤을 춰야 했으며, 황태자 사건의 뒤처리를 해주겠다고 했기에 그런 것이다.

‘이걸 호감으로 착각하면 곤란하지. 하여튼 예쁜 여자라고 챙기기는.’

루시펠라는 이놈과 친하게 지낼 생각 따윈 없었다. 제드 역시 그녀의 눈빛을 눈치챈 듯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루시펠라는 제드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앞으로도 이렇게 강제로 연회에 초대되는 일이 아니라면 이 남자와도 만날 기회는 거의 없겠지. 물론 초대해 줄 사람도 없겠지만 말이다.

마차가 그들 앞에 도착하자 루시펠라는 제드의 도움 없이 마차에 올랐다. 그러곤 의자에 기대 고된 한숨을 쉬었다. 문득 창문 밖을 바라보자 제드의 모습이 보였다.

제드 역시 그녀를 보고 있어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마차에 올라 창문이 그들 사이에 자리하니 그제야 루시펠라는 그를 제대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훤칠한 키에 준수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남성적인 강인한 선을 가진 턱, 조각으로 새긴 듯 번듯하고 또렷한 코. 그의 적갈색 두 눈은 여전히 또렷하며 강렬했다. 불빛에 어두운 청동색 머리카락이 빛났다.

“잘생기긴 했네.”

루시펠라가 무심결에 내뱉은 감상이었다.

***

수확제 기념연회에서 돌아오고 난 다음 루시펠라는 바로 답답한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휴식을 취했다. 원래부터 연회 이후엔 며칠 앓았는지 약이 곧장 대령되었고, 하녀 중 한 명이 살살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그녀는 잠에 취해서 멍하게 생각했다.

황궁에 갔더니 갑자기 루시펠라의 기억이 떠올랐고, 루시펠라의 감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에스텔이 절대 가질 리 없는 백작에 대한 서운함을 품었고, 에스텔이 절대 알 수 없는 휴게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곤 황태자를 만나서 에스텔이 절대 경험하지 않았던 최악의 경험을 했다.

어쩐지 강한 거부감이 느껴졌다. 자신의 기억과 감정이 아닌 것이 자꾸 떠오르는 게 거슬렸기 때문이다.

내 기억과 감정은 나만의 것인데, 왜 다른 사람의 기억이 멋대로 그것을 침범하는 것인가.

그 찝찝함에 루시펠라는 침대에 누워 반쯤 눈을 감고 있으서도 좀처럼 잠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아, 백작이 이마에 뽀뽀를 하자 그녀는 으악, 경악하면서 잠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분명 부녀의 다정한 아침 인사였겠지만 아직도 낯선 아저씨의 뽀뽀를 받는 것은 어색해서 몸이 배배 꼬일 정도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잘 잤니?”

“언제 들어오셨어요.”

“좀 늦게 들어왔단다. 먼저 가게 해서 미안하구나.”

“괜찮아요.”

그때 하녀가 젖은 물수건을 가져왔다. 백작이 그것을 받아 들어 직접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거참, 이런 건 나도 할 수 있는데.

그러나 백작이 해주고 싶어 하는 것 같기에 그 손에 몸을 맡겼다.

백작의 손길은 아주 부드러웠다. 그에 루시펠라는 도저히 어제 백작이 자신을 사람들 사이에 두고 가버렸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이런 걸 보면 아직도 아이인 것 같은데.”

“……?”

“어느새 어른이 다 되었구나. 점점 루아나를 닮아가.”

루아나가 누구지? 루시펠라가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뇌자 ‘어머니’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또 에스텔로선 알지 못하는 사실이 떠올랐다. 기분이 나빠졌으나, 루시펠라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백작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백작의 얼굴에 서린 씁쓸한 감정에 루시펠라는 내심 당황했다. 다 자란 자식을 보고 부모가 느끼는 그 감정은 에스텔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가까이서 본 가족, 칼리드 부자의 모습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으니까.

가족이란 참 이상했다. 백작의 아버지로서의 면모를 보면 가브라인 가문과 자신이 이상한 건지, 아니면 이 백작이 남다른 건지 생각했다.

“어제 하인트 공작이 널 바래다주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단다. 하인트 공작이 잘해주는 것 같구나.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이다.”

백작의 말에 루시펠라는 미소를 지었다. 결혼하자마자 이혼하자고 첫 만남부터 말했다고 하면 뒷목을 잡고 쓰러지겠지.

아니, 일단 루시펠라가 없고 웬 이상한 얼샤의 기사가 그 속에 있다고 하면 더욱더.

얼굴을 닦던 수건이 사라지고, 루시펠라와 백작은 얼굴을 마주 보며 웃었다. 이상하게도 그 미소에 마음속으로 따스함이 퍼졌다.

“오늘은 하루 종일 같이 있자꾸나. 네가 좋아하는 쇼핑이라도 갈까?”

루시펠라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체력이 안 좋아 쉬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도 백작의 제안은 기뻤다. 그간 예절 수업을 배우는 동안 그녀가 답답해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나 보다.

“아버지도 쉬셔야죠.”

그 말에 백작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정말 철이 들었어. 다 자랐어.”

백작은 루시펠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둘이서 소소한 아침을 먹고 차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하녀가 루시펠라에게 온 서신을 들고 와 건네주었다. 루시펠라는 그것이 황실에서 온 것이라는 것을 알고 경악했다.

―지난밤에는 아쉽게도 한마디 말도 나누지 못했군.

짐은 영애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다.

오늘 정오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영애를 보고 싶군.

설마, 황태자에게 저지른 짓 때문에 이러는 것인가. 수치스러워서 말을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버지에게 일러바쳤나 보지? 생각보다 더 찌질한 놈이었네.

당혹스러움에 루시펠라의 손끝이 약간 떨렸다. 백작 역시 그 서신을 보더니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폐하께서 널 찾으시던데, 이렇게 초대까지 할 줄은 몰랐구나.”

“절 찾으셨다고요?”

그녀가 묻자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화라도 나셨던가요?”

“아니, 그건 아닌 것 같다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아니면 아이딘 백작에게 감정을 숨겼던 것일까. 황제의 의중을 알 수 없으니 이 초대가 께름칙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루시펠라는 황가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원래는 별이 하나였던 얀스가르의 인장이 별이 두 개가 되어 있었다.

오망성과 육망성.

각 나라를 상징하던 하나의 상징이 두 개로 합쳐져 있다는 것은, 오망성을 나라의 상징으로 삼던 얼샤가 얀스가르의 손에 들어왔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편지를 꾸깃하게 쥐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라는 말 때문에 루시펠라는 졸지에 혼자 입궁하게 되었다.

백작이 따라온다고 했으나 황제가 ‘단둘’이서 보자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 거절했다.

***

루시펠라는 자신이 다시는 황궁에 오게 될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인생은 알 수 없는 법이다.

시종을 따라간 그녀는 황궁을 순찰하는 기사들과 마주쳤다. 황궁의 경비를 살펴보는 것은 그녀의 직업병과도 같았다.

남자들은 모두 자주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때 연쇄살인사건 때 본 하인트 공작의 제복은 분명 검은색이었다.

그럼 저 자주색을 입은 사람들은 직급이 다른가? 역시 기사단이 다른 거겠지?

“무슨 일이십니까, 영애?”

“아, 아닙니다.”

시종의 말에 루시펠라는 자신이 멍하게 생각에 잠겼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얼샤의 기사들은 모든 기사단의 제복 색이 같았다. 단지 견장과 망토의 색으로 서로를 구분했을 뿐이다.

그때 자주색 제복을 입은 기사들과 눈이 마주쳤다. 루시펠라가 의례적으로 눈인사를 하자 그들은 얼굴을 붉히며 흠흠, 헛기침을 하며 지나갔다.

알현실과 통하는 복도를 걸어가며 루시펠라는 자신이 할 말을 점검했다.

아니요, 몰라요, 설마요, 제가요? 어떻게 그런 심한 짓을!

에스텔이라면 몰라도 루시펠라가 그렇게 눈물바람으로 가증을 떨면 황제도 믿겠지. 믿을 거야.

역시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으려나? 황제의 성격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땐 그저 입을 다무는 것밖에 별수가 있겠는가.

그렇게 복잡한 생각 끝에 복도 끝에 다다르자 화려한 문이 보였다. 알현실의 문이었다.

암갈색 문에 양각된 별, 그리고 금이 입혀진 문은 한눈에 봐도 얀스가르 제국 황실의 위엄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었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문이 열리고, 루시펠라는 발걸음에 주의하며 천천히 벨벳 카펫을 밟았다.

그러다 잠시 멈칫했는데, 얼샤의 상징인 오망성인 별, 하조하르(Ha―zohar)와 그 위에 얀스가르의 상징인 육망성 하바히르(Ha―Bahir)가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얼샤의 별을 밟지 않고 조심스럽게 피해갔다. 어차피 치맛자락에 가려서 그녀가 발걸음의 방향을 바꾼 것은 잘 보이지 않았다.

시선을 들지 않았기에 루시펠라의 시야에는 단상의 계단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섯 계단 위, 황좌의 다리와 더불어 황제의 발이 보였다.

루시펠라가 바로 앞으로 다가왔음에도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던 루시펠라는 결국 치맛자락을 잡아 들고, 레이디들의 인사법으로 정중하게 인사했다.

“얀스가르의 태양이여, 영원하라. 폐하의 존안을 뵙습니다.”

절대 나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인사가 매끄럽게 나왔다.

“짐을 보거라.”

그녀는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좌에 앉은 황제의 모습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강건한 노인이었다.

백발이 성성했지만, 그 눈만은 만만찮은 예기를 가지고 있었다. 과연 스무 살 때부터 정복전쟁을 벌였던 군왕다운 모습이었다.

얼샤의 마지막 왕과는 전혀 다른 체격도, 감정을 알 수 없는 얼굴도, 위압감부터가 차이가 났다.

“짐이 영애를 몇 살 때 처음 보았지?”

“열두 살 때입니다, 폐하.”

자신도 모르게 대답이 술술 나왔다. 아니면 뭐 어떤가. 기억 못 했다고 하면 되지. 황제도 일개 영애의 나이나 기억할 정도로 한가하진 않을 것이다.

“그래, 그랬었지.”

뭐야, 맞았어?

그러다가 루시펠라는 자신이 맞는 대답을 하는 것은 이 몸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도 루시펠라의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아이딘 백 뒤에 숨어서 짐을 보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나는군. 그러나 지금은 짐을 이렇게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영애는 이제 짐이 두렵지 않은가?”

이제 자신이 두렵지 않냐니. 의미 모를 애매한 질문이었다. 역시 황태자와의 일을 되짚으려는 것인가.

황제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만만치 않은 사람이다. 머리를 굴리던 루시펠라는 후, 하고 몰래 심호흡을 하고는 말했다.

“폐하는 제가 폐하를 두려워하길 바라십니까?”

그 말에 황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짐은 질문했다. 그대가 답할 차례다.”

말장난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순간적으로 잔잔했던 분위기가 긴장으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황제의 위압에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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