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괴상한 춤 신청
2017.04.06.
“아, 진짜, 이 상황에. 재수도 없지.”
그녀는 팔짱을 끼며 한숨을 내쉰 후 손을 뻗어 그의 팔을 껴안더니 잡아끌었다. 문 뒤에서는 아직도 으윽, 하는 신음 소리와 저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드는 우선 얌전히 그 손에 이끌려 갔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일단 대충 내용은 들었으나 제드는 예의상 물어보았다.
“거시기를 차줬어. 개새끼.”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청순한 얼굴에서 걸쭉한 욕이 튀어나왔다. 한번 이해했던 일을 재확인하니 새삼 사태의 중대함에 머리가 아찔해졌다.
황족을 공격하다니, 목이 열 개라도 모자란 건가.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아직도 만족하지 못한 듯했다.
“드디어 제대로 미친 건가?”
제드는 이 상황에 가감 없이, 완벽한 자신의 감상을 말했다. 루시펠라는 개의치 않는 모양인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당신이 지금 여기 있으면 나랑 같이 묶여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거야. 그냥 조용히 지나가는 게 좋을걸.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지금 황태자 거시기를 찼어. 그리고 저놈은 지금 뻗어 있지.”
그놈의 거시기를 찼다는 표현은 이번이 세 번째로 나오는 말이었다. 그는 황태자가 어떤 상태인지 상상했다. 그 고통은 같은 남자로서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다. 그러나 동정은 안 갔다.
“왜 그런 거지? 굳이 그런 행동을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내가 말하면 그쪽이 믿을 건가?”
“뭐?”
제드는 그 말에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직은 이들 사이에는 믿고 믿어주고 할 관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사람이 거짓말을 할까? 한참을 고민하던 제드가 말했다.
“말해봐. 노력은 해볼 테니까.”
루시펠라가 불신의 눈초리로 쳐다보며 살짝 고민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사랑을 증명하라며 자기를 가지고 놀았던 사람을 만나면 그쪽이라면 어떻게 하겠어?”
“뭐?”
“루시펠라, 아니, 내가 황궁 호수에 뛰어든 거 말하는 거야. 그거 황태자가 시켜서 그런 거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사랑이라는 말은 신호였고, 황태자의 장난질에 놀아난 거지. 의식을 잃기 전에 본 게 손가락질하면서 깔깔거리는 모습이었거든.”
“그것참…….”
그걸 믿으라고 말하는 건가. 그러나 루시펠라는 다르게 오해한 듯했다.
“그래, 참 어리석은 짓이었어. 그딴 사탕발림에 넘어가 사람을 믿어버리다니 말이야.”
루시펠라의 어조는 어딘지 모르게 진지했다. 자신을 비난하는 것 같은 그 말에 제드는 어쩐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이 와중에도 루시펠라는 팔을 끌고 황족 휴게실에서 멀어져 무도회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누가 누구를 에스코트하는지 모르겠군. 제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가 하는 대로 끌려갔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찌 된 상황인지는 알겠다. 왜 루시펠라가 확실하지 못한 단어를 쓴 것인지도. 루시펠라로서는 그의 중요 부위를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차도 모자랐다.
그렇다면 아까 황태자 쪽을 쳐다봤던 이유도, 딱히 황태자에게 애절한 마음을 표현하려던 게 아니라 이 짓을 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었을까?
사실 그녀가 황태자를 쳐다봤던 건 애절한 사랑이 아니라 복수를 노리는 이의 집요함이었던 것이다. 완전히 다 믿지는 않았지만 제드는 어느 정도 납득했다.
“푸흡.”
그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저지른 짓이 중죄라는 것도, 어쩌다 보니 황태자와 엮여 버린 이 불쾌한 삼각관계를 떠나서 사실 웃기지 않은가.
진짜로 그렇다고 황족의 거시기를 차버린 것이다! 상상은 해보지만 누구도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일을 그녀가 너끈히 해냈다.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참신하지? 오해가 풀리자 종일 더러웠던 기분은 유쾌함으로 변했다. 게다가 짜증 났던 황태자에게 이렇게 엿을 먹였다니.
“큭큭, 그렇다고 거기를 차다니.”
“그러면 거기밖에 없지 어딜 차는데?”
웃음을 참으려고 했지만 참아지지 않았다. 거기를 찬다는 발상이 대체 어떤 영애의 머릿속에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크게 웃음을 터뜨릴 수 없었기에 그는 그저 소리를 낮춘 채 끅끅거렸다. 황태자가 누워 있는 꼴을 직접 못 본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래서, 황태자 전하께 미련이라도 있는 건가?”
“미련이 있었으면 거길 차지도 않았겠지.”
“푸하하!”
그 말에 제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지나치게 노골적이었지만 가장 확실한 말이었다. 루시펠라는 그를 미친놈을 보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제드는 황태자가 어떻게 나올지 생각했다. 황족에게 상해를 입힌 것은 분명 중죄가 맞았다. 그러나 루시펠라가 공격한 부위를 떠올려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후대에 만인의 지존이 될 남자가 겨우 중요한 부위를 여자의 발에 차였다고 처벌한다면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가 보기에도 황태자는 이 일을 문제 삼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리 황태자가 미련하더라도 자신의 휘하에 있는 가문에게 복수해서 부스럼을 만들지 않을 머리는 있겠지. 제드는 별로 믿고 싶지 않은 황태자의 머리를 믿었다.
그러고 보면 참으로 앞에 있는 이 사람은 별종이었다. 저번 살인범을 만났을 때도 그렇고, 멍청하다 생각했는데 머리가 좋을지도 몰랐다. 한참을 웃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불쑥 말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뒷수습은 내가 해주지.”
“어?”
거시기가 차여 비명을 지르는 황태자의 꼴을 생각하니 속 시원하기도 했고, 그녀의 복수가 나름 명분이 있다고 생각되어 제드는 관대해지기로 했다. 그래서 그런 말이 나온 것이다.
루시펠라는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그딴 무례한 말투, 다른 이들 앞에서 쓴다면 바로 황족 모욕으로 처형이다. 앞으로 조심해.”
“그래, 앞으로 주의할게.”
그녀는 또 순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고집불통 같아 보여도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는 시원스러운 성격인 듯했다.
사람은 겉모습만 보면 판단할 수 없다더니, 누가 저 얼굴에 ‘개새끼’, ‘거시기’라는 단어가 나올 거라 생각했을까. 그는 그 생각에 다시 웃음이 나왔다.
“그만 웃고 얼른 가서 춤추지?”
“뭐?”
루시펠라가 또다시 그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끌어당기는 힘이 달리니 두 팔로 제드의 팔을 꼭 껴안은 채였다.
“춤 말이야. 그거 추겠다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어.”
루시펠라로서는 어차피 할 일도 없는 거, 얼른 춤을 춘다는 목적을 달성하고 쉬는 것이 목표였으나, 제드는 나름 약혼녀가 귀여움을 부리는 것으로 보였다.
“괴상한 춤 신청이군.”
여자에게 이런 식으로 춤 신청을 받다니.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은 건 저 여자가 한 웃긴 행동 때문이리라. 제드는 그녀의 팔을 잡아 홀로 이끌었다.
루시펠라와 제드가 같이 등장하자, 연회장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집중되었다.
그러고 보니 황태자는 어디 갔을까? 많은 사람이 황태자를 찾았지만 황태자는 보이지 않았다.
황태자, 루시펠라, 제드가 셋이 같이 있다면 볼만한 구경거리였을 텐데 참 아쉽게 되었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제드와 루시펠라는 꼭, 의무적인 약혼 관계를 넘어선 연인 사이로 보였다. 꼭 붙어 있는 자세 때문에 그러했다.
표정은 굳어 있었지만 그녀는 제드의 팔을 끌어안고 있었고, 제드 역시 그대로 서서 그녀의 발걸음에 천천히 맞춰주었다.
“그래도 약혼녀라고 챙기는 모양이네.”
하인트 공작이 저런 다정한 모습을 보인 것은 처음인지라 사람들이 모두 흥미를 담은 시선으로 수군거렸다.
제더카이어 하인트는 선대 공작과는 달리 사교계에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인물 중 하나였다.
소년 시절에도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영지에서 검을 단련하며 보냈다. 어느 정도 자라서도 선대 공작이 일부러 부르는 경우를 제외하곤 영지에 남아 기사들과 함께 마물을 토벌했다.
청년이 되자 그는 황제가 일으킨 정복전쟁에 참전했으며, 그때부터 그는 귀족가의 공자가 아닌 피의 기사로서의 또렷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하인트 공자였던 그가 우직한 목석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파티에 그가 나타나면 몰려드는 사람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영애만이 그의 옆에 있을 수 있었다.
화려하면서도 퇴폐적인 이 수도에서 제더카이어 하인트는 아름다움을 뽐내고 싶어 하는 영애의 트로피와도 같은 존재였다.
다른 남자와는 월등히 다른 훤칠한 키와 탄탄한 몸, 그리고 남성 특유의 딱딱한 직선이 서린 잘생긴 얼굴.
그는 딱히 금욕적이거나 보수적이지는 않은 사람이었지만 칼과 같은 서늘한 구석이 있었다.
말수가 적었지만, 가끔씩 입을 열 때마다 나오는 비꼬는 말투는 그에게 달려들었던 하룻강아지 같은 유력 가문의 자제나 매달리던 영애를 얼어붙게 했다.
전쟁터만 전전하는 전장의 흑사자는 젊은 나이에 작위를 물려받아 비로소 수도에 거하게 되었다. 소문이 좋지 않은 약혼녀에게 코가 꿰인 채.
사람들은 모두 제드가 루시펠라를 경멸하고 멀리할 거라 생각했다. 그녀가 저지른 짓이 너무도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루시펠라가 착한 성격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장점은 오로지 얼굴. 아름다운 얼굴뿐이었고, 그것을 잘 알았기에 그녀는 언제나 날카롭고 싸늘하며 신경질적이었다.
그런 이에게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제드의 서늘함은 루시펠라에게도 적용되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저 둘을 보라. 누가 봐도 사람들의 시선에 긴장한 약혼녀와 그를 보호하는 약혼자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제드는 가끔가다 그녀를 돌아보았다. 자세히 보면 손 역시 제드 쪽에서 잡은 모양새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머무르며 웅성거리자, 대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황제의 시선이 그들에게 머물렀다. 제드와 루시펠라는 연주 음악에 맞춰 댄스 플로어에 나가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드가 춤을 추는 것은 거의 없던 일이었다. 그는 조금 어색하게 발을 움직이긴 했지만, 드레스가 물결치며 그럴듯한 그림이 그려졌다. 제드와 얼굴을 마주하던 루시펠라가 환하게 웃었다.
새하얀 한 손은 제드의 허리에, 나머지 한 손은 그의 손을 꽉 잡은 상태였다. 언제나 찡그렸던 그녀가 환하게 웃으니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웠다.
제드 역시 짙은 초록색 연미복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채 루시펠라 아이딘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말로 사랑에 빠진 것처럼 그렇게 서로에게 열렬히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이들이 손을 잡고 춤을 춤으로써 그들의 약혼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몇몇 이는 제드의 운이 좋지 않다며 그를 동정했고, 그에게 마음이 있는 이들은 그녀에게 공작이 너무 아깝다며 그녀를 손가락질했다.
어찌 되었건 이들은 정말로 아름다운 커플이긴 했다. 그 주위만 환하게 빛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물론, 이들이 보는 환상적이고 완벽한 이미지는 착각이었다.
루시펠라가 박자보다 아주 살짝 빠르게 힐을 신은 발을 내딛자 제드가 재빨리 발을 옮겨 피했다. 아쉽다는 듯한 그녀의 표정에 제드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루시펠라는 이레네 부인에게 배웠던 대로 춤을 추고 있었다. 발 박자를 제외하고.
구두가 살짝살짝 드러났기에 티는 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스텝은 때로는 빠르고 때로는 느렸다. 이유는 당연히 그녀가 박자를 몰라서가 아니었다. 목표는 명확했다.
“내 발을 꼭 부러뜨릴 모양인가 보지.”
“아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어째 춤 신청을 순순히 하나 했다. 그는 또 한 번 발을 피했다. 또각, 하고 맑은 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에 루시펠라의 치마가 우아하게 흔들렸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런 짓을 하는 건지 설명해 주겠나?”
기껏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고도 루시펠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크레센도 부분으로 나아가며 음악이 커질 때 그녀가 쿵, 하고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그러나 제드는 가볍게 피했다.
“지금 노리는 게 내 발이었나 보군.”
“맞아. 난 당신 별로 안 좋아해.”
굳이 안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이 행동을 보면 짐작이 갔다. 그래도 가운뎃다리가 아닌 이쪽 다리를 공격받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제드는 어이가 없었다.
“발 한 번 밟혀주는 게 그렇게 어렵나?”
루시펠라가 회심의 일격이 먹히지 않자 투덜대듯 말했다.
“내가 왜 밟혀야지?”
“밟아주고 싶으니까.”
“왜?”
“한 번쯤은 밟아주고 싶었어.”
유치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루시펠라는 정말 그의 발을 콱 밟아보고 싶었다. 예전 에스텔은 제드를 봤을 때 그 면상에 주먹 하나 정도는 꽂아 넣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은 면상에 주먹을 날릴 정도의 힘도 없었고, 이곳에서 황태자와 같은 그곳을 찰 정도로 분별이 없진 않았다.
이 춤 한 번을 위해 일주일간 번거롭게 예법을 배워야만 했다, 따라서 그녀는 발을 콱콱 눌러주는 것으로 소원을 이루고 싶었다.
“참, 영애는 특이하군.”
“정상은 아니겠지.”
웬 기사 하나가 레이디의 몸 안에 들어 있는데 정상일 리가. 춤을 제대로 추고 있는 것도 용한 것이었다.
“아.”
루시펠라가 얼굴을 찌푸리며 아쉬움과 더불어 짜증 어린 소리를 냈다. 또다시 제드가 아슬아슬하게 발을 피했던 것이다.
제드는 그 표정을 보자 이제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부터 여유롭게 피할 수 있었기에 그다지 불쾌하진 않았다.
“내가 영애에게 잘못한 게 있었나?”
“뭐?”
딱히 이 여자에게 저지른 잘못을 되짚어 반성하겠다거나 아니면 분위기를 풀려는 것이 아닌 단순한 궁금증이었다.
“잘못은…….”
그쪽이 얀스가르의 기사라는 게 문제지. 그리고 재수 없는 성격이고.
루시펠라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은 싫지만 루시펠라는 하인트 공작을 좋아했을까.
아니, 기억을 되찾았을 때 어렴풋이 느꼈던 감정을 떠올려 보면 진짜 루시펠라는 황태자에게 미쳐 있었다. 공작과 약혼을 하더라도 아마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저 남자는 불쌍하군. 에스텔이건 루시펠라건 저 남자를 절대 사랑할 일은 없을 테니까.
“내가 그동안 그쪽한테만 관심을 안 가져 줘서 그런 건가? 다른 남자들은 다 영애에게 관심이 있었을 테니 말이야.”
“뭐?”
“해명하자면 나는 내게 다가오는 사람과 놀았던 거야. 그리고 그쪽은 딱히 내게 관심이 없었잖아.”
“그쪽이 누구랑 놀았는지 전혀 관심 없는데 내게 왜 이런 말을 해?”
루시펠라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로 질투라는 그 감정의 쪼가리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제드는 어이가 없었다.
약혼이라는 관계에 묶였다면 어찌 되든 부부로 지내야 할 사이다. 과거는 과거라지만 적어도 그런 것에 대한 껄끄러움은 있을 것이었다.
한데 루시펠라는 정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지금 그녀가 관심이 있는 것은 제드의 발뿐이었다.
“아!”
제드가 뭐라 하려 할 때, 루시펠라가 재빨리 발을 밟았다. 루시펠라의 얼굴에 환하게 미소가 어렸다. 제드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지금 자신이 신고 있는 신발이 두꺼운 가죽신이며, 그녀는 자기 스스로의 몸무게가 가볍다는걸 모르고 있는 건가. 아프지 않다는 건 아니었지만 간지러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목표를 이뤘다는 듯 그녀는 시원스레 웃었다.
그 얼굴을 보니 정말 픽픽 웃음밖에 안 나왔다. 지금 그가 밟힌 발을 들면 중심을 잃어 더 창피한 일을 겪을 텐데.
그것 보라는 듯 루시펠라가 미소를 지었다. 붉은 입술에 걸린 곡선은 상당히 아름다운 느낌을 주었다. 샹들리에 불빛을 눈에 담은 은청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제드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인정했다. 특히나 그 눈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특별한 마력이 있었다.
저 정도의 미소를 본다면 발 한 번 밟히는 거야 뭐, 싼값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다가 그는 순간 자신의 머리를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내가 미친 건가?
“당신이 내게 잘못한 건 없어.”
그녀는 제드를 보며 말했다.
제더카이어 하인트는 루시펠라에게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심지어 에스텔 개인에게 마저도. 오히려…….
그때 곡이 끝나고, 루시펠라는 아주 가볍게 손을 뗐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
“내 발도 밟았고…… 이제 어떻게 할 거지?”
“음, 집으로 돌아가야겠지. 여기 있다간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것 같으니까.”
제드는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들을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루시펠라에게 비호의적인 사람들이었다.
“어쩔 수 없지. 자업자득이야.”
또 시원스럽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니 사람이라는 게 자업자득이라는 생각이 들려다가도 동정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황태자가 시켜 그런 짓을 했다는 이 여자의 말을 믿나?
제드는 믿었다. 그냥 의심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황자가 시켰건 아니건 이 여자의 선택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고, 그녀는 그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응?”
“다음에는 연회에 참석할 때 내게 연락해.”
“왜?”
내가 그땐 같이 갈 테니까. 제드는 그렇게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싫은 사람에게 한 방 먹였다고 지나치게 기분이 들떴는지도 몰랐다.
애초에 책임지지 않을 귀찮은 약속은 하는 것이 아니다. 조금 과잉친절을 베풀었다 싶어 그는 민망해졌다. 그리하여 그는 루시펠라를 빨리 보내기로 했다.
“어서, 집에 돌아가.”
수확제 기념연회에는 거의 모든 귀족이 다 모이기 때문에 황족에게 친분이 있지 않은 이상 따로 인사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그녀가 돌아간다고 해서 문제는 없었다.
“우선 아버지에게…….”
“아이딘 백께는 내가 말해두지. 마차까진 내가 바래다주겠어.”
이렇게 친절한 사람이었나? 아니, 약혼 관계라서 그런 건가? 아니면 여자한텐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지도 모르지.
“원래 이렇게 여자에게 친절해?”
루시펠라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뭐?”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단 말인가. 제드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가 기분이 나빴던 건 루시펠라가 비웃는 듯한 표정이어서 그랬던 것이다. 마치 이오지프가 가끔 지어 보이는 표정처럼 다 알겠다는 듯 말이다.
“지금 그쪽이 얼마 전에 살해당할 뻔했다는 걸 상기시켜 줘야 하나?”
“아, 그렇지. 그러면 혹시 그것 때문에 걱정돼서 데려다주는 건가?”
설령 그런 이유더라도 그런 표정을 짓고 물어보면 괜히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살인범과 마주했던 건 루시펠라가 원인을 제공한 것도 있지만.
심리적 외상이 있을까 봐 나름 배려한 것이었으나 그녀에게 저런 놀리는 것 같은 시선을 받고 있으니 기분이 더러웠다.
“그냥 혼자 돌아가.”
“그러지.”
시원스럽게 말하며 그녀는 휙 등을 돌리며 걸어갔다. 이것은 또 이것대로 기분이 더럽다. 전혀 아깝다는 태도가 아니었다. 너무 산뜻하지 않은가?
제드는 자신이 남자로서 매력이 없는지에 대해 고찰했다. 그리고 결론은 전혀 아니다, 라는 거였다. 그가 사교계에 발을 들이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그럼에도 나올 때마다 접근해 오는 여자는 있었다.
그는 자신이 남자로서 꽤나 매력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루시펠라에게는 그것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정말 자신을 싫어하는 건가? 어떻게 자신이 싫을 수가 있지?
그러다 제드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다. 또 혼자 보내면 싸운 것이라 소문날 게 뻔했다. 제드는 그녀를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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