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레이디의 진실
2017.04.03.
뭐야 쟨, 소파에 삐딱하게 앉아서 고개를 들어 황태자를 바라보니 황태자가 더욱 진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앉아 있는 소파 앞에 와 섰다.
깔끔하게 넘겨진 머리, 훤칠한 외모. 분명 호감 어린 얼굴임에도 루시펠라는 어쩐지 가슴이 옥죄어오는 듯한 기분 나쁜 찝찝함을 느꼈다. 별로 저 남자가 무서운 건 아닌데 가슴이 뛰었다.
“왜 그러고 있어?”
“…….”
“루시, 아직도 화가 나 있는 거야?”
“…….”
화가 나 있냐니. 그쪽한테 사랑을 구걸하다 뛰어들었다는 여자에게 단순히 ‘화가 나 있냐고’고 물어보는 게 정상인가?
“그보다 루시, 네 눈짓만으로 신호를 알아차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 자꾸 황족 휴게실에 오면 곤란해.”
어쩐지 맨 끝방이더라니, 여기가 황족 휴게실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저 자식은 대체 왜 이곳에 온 거지? 루시펠라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경계 어린 표정으로 관찰했다.
“황후나 이오지프가 들어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지? 내가 들어와서 다행이었지, 앞으로는 생각해서 행동해.”
눈앞에 서 있는 것은 황태자이다.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되는 상대이기에 루시펠라는 침묵을 택했다.
“뭐라고 말을 해봐.”
말을 해보라고는 했지만 꼭 명령을 내리는 듯 강압적이었다.
그래도 루시펠라가 대답이 없자 황태자는 그녀의 옆에 앉아 그녀의 턱을 쓸다가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을 만진 뒤, 어깨 아래로 내려갔다.
뭐 하는가 보자 싶어 가만히 있던 그녀가 그 은근한 손짓에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쳐내려 하자 그가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
“앙탈도 자꾸 하면 재미없어.”
“무슨 짓……!”
루시펠라가 일어나려 하자 황태자가 엄청난 악력으로 그녀를 밀어 강제로 소파에 눕혔다. 육중한 남자의 육체가 그녀를 짓눌렀다.
“그리웠어. 어? 아주 보고 싶었단 말이야.”
몸을 뒤틀며 벗어나려고 했지만 황태자는 손을 뻗어 엄청난 힘으로 그녀의 팔을 찍어 눌렀다.
순식간에 억지로 입술이 벌려지고, 혀가 밀려들어 왔다. 그와 동시에 나머지 한쪽 손이 그녀의 가슴을 만지작거렸다.
제기랄! 루시펠라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화가 나 있냐고 물어오더니 다짜고짜 이런 짓을 벌이다니, 얀스가르 놈들은 모두 제정신이 아닌 건가.
“여자를 죽이고 다녔다는 그 쓰레기 놈한테 무슨 일을 당한 건 아니지? 넌 여전히 나만의 루시일 거야.”
“이거 놓으라고……!”
이 미친놈이! 루시펠라가 밀어내려 했지만 그녀의 힘은 너무나 약했다. 이렇게나 여자와 남자의 힘 차이가 심한 것이었나.
루시펠라는 이 짜증 나고 기분 더러운 상황에서도 왠지 모를 분함을 느꼈다. 똑같은 인간인데 어떻게 이렇게 힘이 다를 수 있나.
다시 입을 맞추려고 해 머리를 흔들며 저항하자, 황태자가 혀를 차며 얼굴을 떼며 루시펠라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의 기색이 역력했다. 저렇게 화내는 표정을 보니 완벽하게 미친놈 같았다.
“그만 화내라고 내가 말했을 텐데.”
“화……?”
“너의 사랑은 내게 충분히 와 닿았어. 그러니 이제는 얌전히 내 사랑을 받아들여야지.”
“사랑이 와 닿다니?”
“정말 감동이었어, 루시. 설마 나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 약한 몸으로 호수에 뛰어들다니.”
루시펠라는 얼굴을 찌푸렸다. 분명 루시펠라는 황태자에게 사랑을 구걸하다가 황궁 호수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한데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호수에 뛰어들다니, 무언가 더 있는 건가? 기억을 더듬으려던 그때였다.
“아윽!”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그녀가 신음을 흘리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딘가에서 황태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황태자의 입은 그대로인 것을 보아 분명 이건 머릿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낯선, 에스텔이라는 인물이 전혀 알지 못하는 장면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간절함. 그 간절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진짜 루시펠라는 황태자를 보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공공연하게 알려지긴 했지만 루시펠라는 그들이 연인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그렇게 된다면 재수 없는 사교계의 계집들, 특히 클로렌스 공녀를 눌러줄 수 있으리라. 그러나 황태자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그로 인해 그들은 싸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태자가 루시펠라를 버렸다는 소문이 사교계에 퍼졌다. 그리고 지금, 황태자는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망신 주고 있었다.
“귀찮게 굴지 말고 당장 꺼져 줬으면 좋겠는데.”
그 말에 황태자를 둘러싼 이들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녀는 간절한 표정으로 그가 자신을 보며 웃어주기를, 정식으로 연인이라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영애는 자존심도 없나? 왜 이렇게 끈질기지?”
마음을 후벼 파는 말에도 루시펠라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그 말을 듣고 루시펠라는 오히려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너무나 기뻤다. 황태자, 테미르가 그녀에게 신호를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다투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황태자와 루시펠라는 비밀의 장소에서 만남을 가졌다.
황태자는 그녀에 대한 사랑이 변하지 않았음을 고백하며 황후의 자리를 약속했다. 그러곤 루시펠라에게 조건을 내걸었다.
“목숨을 건 네 사랑을 보여줘, 루시. 알다시피 우린 외로운 시간이 너무 길어 사랑을 믿지 못하잖아. 그러니 네 사랑을 증명해 줘. 내 평생의 반려로, 얀스가르의 황후로 맞이할 만한 믿음을 내 앞에서 보여줘.”
루시펠라는 믿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황태자가 말했다.
“루시, 이제부터 잘 들어, 나는 널 차갑게 대할 거야. 하지만 그건 아바마마나 황후가 널 못마땅하게 여겨서 널 지켜주려는 것뿐이야.”
황제는 자신을 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고, 황후는 어떤 인물인지는 몰랐지만 테미르가 못마땅하게 여긴다고 했다면 그런 것이었다.
“나로서도 네 사랑을 받아들일 명분이 필요하니까 말이야.”
“어떻게?”
“연회에서 내가 ‘사라져’라고 말하면 네 나름의 증명을 내게 보여줘.”
루시펠라는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 그렇게 할게. 테미르, 네가 원한다면 몇 번이고 난 그렇게 할 거야. 네 옆에 있을 수 있다면, 서로 아무런 방해 없이 사랑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외롭지 않을 수 있다면.
그랬기에 루시펠라는 황태자의 모욕에도 활짝 웃었다. 그러곤 그녀는 망설임 없이 황궁의 호수에 뛰어들었다.
황태자에게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신은 목숨을 걸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물에 빠진 그녀가 최후에 본 것은…….
“이거 순 개새끼 아니야?”
“아악!”
진짜 루시펠라의 기억을 본 루시펠라, 아니, 에스텔은 분노했다. 그리하여 그녀의 발길질은 망설임 없이 황태자의 두 다리 사이를 가격했다.
고통에 찬 황태자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휴게실에 울려 퍼졌다.
몸을 더듬던 손길이 그 중요 부위를 감싸느라 떨어지고 황태자는 휴게실을 데구루루 구르며 꽤액 비명을 질렀다.
황궁 호수에 뛰어든 루시펠라가 물속으로 가라앉으며 마지막으로 본 것은, 죽어가던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웃음을 터뜨리는 황태자의 모습이었다.
루시펠라는 죽기 전에 사랑하던, 목숨을 바친 자신의 연인이 자신을 농락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
제드는 오늘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오늘은 그가 이 황궁에서 두 번째로 싫어하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가 첫 번째로 싫어하는 루이르크 공작은 이번 연회 때 황궁 경비 총괄을 자처해서 경비 구역으로 가지 않는 이상 그 면상을 볼 일이 없었다.
그건 좋았다. 그러나 황제의 초대 때문에, 그는 그 인간, 황태자 테미르와 억지로 대면했던 것이다.
연회가 열리기 몇 시간 전, 황제는 제드를 불러들였다. 도착한 응접실에는 황태자 테미르와 2황자 이오지프가 있었다.
황태자와 얼굴을 마주하자 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려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오랜만이네, 공작.”
“오랜만입니다, 전하.”
그 웃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어차피 제드의 약혼녀가 루시펠라라는 것은 이미 모두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루시펠라가 그렇게나 목을 맨 전 연인이 황태자라는 것도.
황태자는 그것을 조롱하고 있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저 성격 더러운 인간이 그걸 그대로 넘어갈 리가 없었다.
황후가 몸이 안 좋은 루시펠라 아이딘에게 초대장을 보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제드는 절대 그것을 믿지 않았다. 저놈이 수를 쓴 게 뻔했다. 황태자의 비틀린 성격을 모르던 바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황태자는 원래부터 자신에게 살갑지 않은 선대 하인트 공작과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제드 역시 포악하며 난잡한 황태자를 싫어했다.
제드를 눈앞에 둔 황태자는 제드와 루시펠라의 약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현명한 것이었다.
만약 약혼녀와의 이야기를 꺼내며 그를 모욕하다가는 옆에 있는 황제가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 분명했을 테니까.
이번 황태자가 벌인 행동은 제드의 심기를 직접적으로 건드렸다. 이것은 루시펠라뿐만이 아니라 제드마저 조롱한 것이었다.
제드를 불러낸 황제는 황태자와 제드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선대 공작, 자신의 아버지의 유언으로 억지로 맺은 약혼 때문에 혹 황태자에게 반감이라도 품고 있나 확인하고 싶은 거겠지.
“오랜만입니다, 공작.”
그때 2황자 이오지프가 그에게 악수를 청하며 인사했다. 그의 두 눈에 있는 검은 안경이 흘러내렸다.
제드는 저 어설픈 모습을 보고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저 꼴을 언제까지 봐야 할지 아득했기 때문이다.
“그새 눈이 더 나빠지신 모양이군요.”
“아무래도 책을 많이 봐서요.”
제드는 이오지프의 장갑 낀 손을 일부러 꽉 쥐었다. 그에 이오지프가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의 가벼운 인사가 끝났을 때 황제가 입을 열었다.
“하인트 공.”
“네, 폐하.”
딱딱한 가면을 쓴 황제의 얼굴이 대번에 풀렸다. 늙은 황제는 미소를 지었다.
“녀석, 그렇게 딱딱하게 굴 필요 없다.”
선대 하인트 공작과 황제는 막역한 사이였다. 그리고 황제는 어린 제드를 귀여워했다. 황제는 아들을 보는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제드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아무리 그래도 황제는 황제였다.
“선대 공이 실수를 한 것 같구나. 네가 곤란해할 약혼을 해버리다니 말이야.”
“그렇지도 않습니다. 무슨 이유가 있으셨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무슨 이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빌어먹을 상황에 자신을 처하게 했다면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안 그럼 뒤집어 버릴 테니까.
“테미르 녀석과 그렇다고 불편한 관계가 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그렇지?”
그에 제드는 미소를 지었다.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일 뿐입니다. 이 일로 전하와 사이가 어긋나지는 않습니다.”
그의 대답에 황제가 껄껄 웃었다. 황태자 역시도 마주 보며 웃었다.
“다행이로군, 공작, 나는 공작을 잃을까 봐 염려했다네.”
잃을까 봐라니. 자신과 하인트가는 처음부터 황태자의 것도 아니었다. 황태자에게 대놓고 힘을 실어주려는 황제의 행위에 그는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제드는 황태자, 테미르를 보았다. 머리를 단정하게 넘긴 청년은 번듯한 외모에 그림으로 그린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드는 언제나 의문이었다.
왜 저자가 황태자인 거지?
바이두 황제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1황자인 테미르를 황태자로 지목한 것일까. 얀스가르의 황위 승계는 장자가 우선되었지만, 말 그대로 ‘우선’이었다.
황제는 자신의 후계자를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러모로 자질이 모자라 보이는 황태자를 지목한 것은 황태자를 낳은 1황후에 대한 사랑 때문일까.
황제는 열 살인 테미르를 황태자로 지목했고, 철이 들 무렵부터 그는 자신의 세력을 꾸준히 모으고 있었다.
제드는 2황자 이오지프를 보았다. 이오지프는 선량한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약간 모자라 보이는 게, 유순한 이오지프가 제국을 이끌어갈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게 황제의 생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황제는 황태자보다는 이오지프가 더 낫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제드는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 황족들을 보았다. 닮았으면서도 닮지 않은 모습이었다.
소소한 이야기가 끝나고 시간이 되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족들을 따라 연회장에 도착한 제드는 슬쩍 연회장을 훑어보았다.
사람들이 많은 그 귀찮은 곳에는 오늘 춤을 춰야 하는 자신의 약혼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약혼녀를 금방 찾았다.
약혼녀의 눈에 띄는 아름다운 외모야 뭐, 그가 칭찬하면 입이 아플 정도였다.
원래부터 아름다운 사람이었고,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걸친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너무나 당연했으니. 이건 팔불출적인 생각이 아니라 객관적인 평가였다.
황족들이 있는 곳은 단 위. 높은 곳에 위치했으므로 제드는 사람들을 내려다볼 수 있었는데, 그는 루시펠라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좋은 일은 당하고 있지는 않았을 터였다. 몸이 안 좋다던데 저쪽도 나름 고생이군.
그때 루시펠라가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약혼자라고 봐주는 건가?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으며 그 여자의 시선은 바로 옆, 황태자를 향해 옮겨갔다.
저럴 줄 알고는 있었다. 알면서도 저러니 기분은 더러웠다. 약혼자의 체면은 지켜줘야 하는 거 아닌가.
황태자 역시도 그 시선을 눈치챘는지 루시펠라를 한 번 쳐다보고 제드를 보았다. 그 승리감 어린 미소에 제드의 기분은 급속도로 더러워졌다.
참으로 기분 더럽게 일편단심인 여자였다. 제드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굳이 황후의 초대장이 아니더라도 루시펠라는 이곳에 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드는 일부러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 정도는 신경 써야 하는 게 아닌가. 저렇게 대놓고 황태자를 보니 사람들이 대놓고 수군거리고 있지 않나.
아니면 사람들의 시선엔 상관없다는 건가? 하긴, 상관이 있었으면 호수에 뛰어들지도 않았을 터다.
아이딘 백작은 뭐 하고 있나. 저렇게 딸을 방치해도 되는 건가. 아이딘 백작 쪽을 바라보자, 그는 이드리스 공작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다른 곳으로 향했다.
무엇을 하려는 거지? 제드가 얼굴을 찌푸리며 그녀를 보자, 그녀가 2층으로 올라갔다.
제드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녀가 서 있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 입방아를 찧고 있었다. 루시펠라에게 비호의적인 시선을 보내던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가 나왔는지 모두 제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제드는 그들이 기대하는 표정이 아닌 무표정을 유지했다. 개중에 집요하다시피 쳐다보는 이들에게는 경고의 시선을 던져 주었다.
“목이 마르군요.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한참 서 있던 황태자가 연회장으로 내려갔다.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다가온 사람들의 인사를 받은 뒤 그 무리에 섞였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2층으로 사라졌다.
루시펠라를 만나려고 가는 걸까. 아까 그녀가 황태자 쪽을 바라봤던 것은 만나자는 신호였던 것인가.
빌어먹을! 놀 대로 놀라지.
제드는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혼인을 언제할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먼 훗날이 될 것이고, 하자마자 이혼해 귀족들의 명부에 길이길이 남게 해주겠다.
참 불명예스러웠으나, 이런 장면을 계속 보는 것보다는 명예로우리라.
그러다 그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생각해 보니 괘씸했다. 자신과 오늘 춤을 추기로 약속되어 있는데, 눈앞에서 버젓이 밀회를 가져?
그러다 그는 이오지프와 눈이 마주쳤다. 빙그레 웃는 그 얼굴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마음을 읽히는 것은 당연히 더러웠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던 그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2층으로 향했다.
연인의 부정을 캐내러 가는 사람의 심정이 이렇게도 더러운 건가.
제드는 만약 자신이 다른 여자를 사귀게 된다면 여태 그래 왔던 것처럼 임자가 있는 이와는 절대 사귀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나 더러운 기분을 경험하는 것은 자신만으로 충분하니까.
아직 연회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휴게실들과 연결되어 있는 복도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루시펠라와 황태자를 찾았다. 그러나 루시펠라는 2층에는 없는 듯했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맨 끝 방에 닿았다. 황족들의 휴게실이었다. 제드는 눈썹을 찌푸리며 그곳으로 향했다.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제드는 그곳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황제도 황후도, 이오지프도 연회장에 있으니 분명 이곳에 있는 것은 황태자일 것이다. 그와 더불어, 분명 여자의 목소리도 들렸다.
누구의 목소리일지 보나마나 뻔했다. 의심할 수 없는 부정에 제드는 짜증과 함께 뒤따라오는 분노를 가라앉혀야 했다.
그때 문이 열렸다.
뭐지? 문 사이로 고통의 고함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제드는 그에 얼굴을 찌푸리며 그곳으로 다가갔다.
“죽여 버릴 거야! 너 감히 내게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제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황태자는 분명히 고통과 분노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에 루시펠라의 목소리가 뒤이어 들렸다.
“죽일 테면 죽여보든지.”
“으으, 으윽!”
“여자한테 개만도 못한 짓을 저지르다 거시기를 뻥! 차였다고 폐하께 말하시던지요. 난 떳떳하거든.”
그녀의 말은 지나치게 명료하고 저급한 언어의 나열이었지만, 제드가 알고 싶어 하던 이 상황에 대한 핵심어가 다 담겨 있었다.
방에서 나오던 루시펠라는 제드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꼭 범죄 행위를 들킨 이의 얼굴이었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