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예상치 못한 승리
2017.03.30.
얀스가르는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활발한 정복전쟁을 치러왔다. 그런 와중에도 바로 옆, 동쪽에 이웃해 있던 얼샤가 살아남은 이유는 얼샤는 한 뿌리에서 나온 형제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나라를 세운 쌍둥이 형제는 자신들을 이슈타르의 자식인 하조하르와 하바히르라 주장하며 그녀가 낳은 쌍둥이 별을 자신들의 나라의 상징으로 칭했다. 얼샤와 얀스가르는 오랜 동맹국이었고, 언제나 서로에게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얀스가르는 끝내 얼샤를 침공했다.
루시펠라는 얀스가르 황궁의 정경을 보았다. 얼샤와 비슷한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을 보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얼샤도 예전에는 이러했다. 얀스가르보다는 소박하고, 크진 않았지만 연회가 열릴 때는 무척이나 떠들썩했다. 물론 연회가 열릴 때 그녀는 언제나 바빴지만.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었다. 제복 대신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백작의 손을 잡으며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 그 별세계 같은 화려한 황궁의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향기로운 냄새와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차가운 대리석 위로 발을 내디딜 때마다 또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백작과 함께 무도회장으로 향하는 회랑을 걸었다.
그곳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전부 조용했다. 모두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시펠라는 그 시선이 호기심과 비아냥이 어린 시선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실 그녀는 단순하긴 해도 이런 시선에 상처를 안 받는 무쇠 튼튼한 정신까진 아니었다.
그러나 일단 저런 시선을 받는 대상이 ‘에스텔’이라는 자신이 아니기에, 기분은 나빠도 위축되지는 않았다.
이윽고 연회장의 문이 열리며 시종이 자신들의 입장을 알리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보았다.
그녀는 느릿하게 한 발 한 발 힘주어 걸으며 얀스가르 귀족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떤 면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사람들은 루시펠라와 시선을 부딪치지 않으려고 시선을 피했다.
가만있을 때는 그렇게 쳐다보더니 막상 바라보니 저게 무슨 꼴인가. 그것이 우스워 피식거리며 아이딘 백작을 바라보자, 아이딘 백작이 염려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저기 벽 쪽에 가 있자꾸나. 그러면 사람들의 시선은 덜 받을 테니.”
백작의 말에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 불편하고 수치스러울 법도 하건만, 백작의 표정은 담담했다. 이렇게 다정한 아버지를 두고 루시펠라는 어떻게 호수에 뛰어들 생각을 했을까.
루시펠라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감내하는 게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아이딘 백작이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백작에게 뭐라 할 사람은 없으니, 자신도 그에 맞서 사고 칠 일도 없을 테고 말이다. 백작 역시 그것을 알고 있는지 루시펠라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백작은 참 이상적이고 다정한 아버지였다. 어떻게 보면 루시펠라로 인해 가문에 커다란 불이익이 갔는데도 백작은 참 한결같이 그녀에게 따스한 애정을 보였다.
그런 그에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는 언제나 바빠 보인다는 것뿐이었다.
루시펠라는 황족들이 자리할 단상 위를 보았다. 아직 비어 있었다. 황제는 아직 오지 않았고, 황태자를 포함한 황자들도 오지 않은 것 같았다. 인간성이 글러먹은 그녀의 약혼자도.
그녀는 그 순간 춤과 예법을 배울 때 받은 짜증을 하인트 공작의 발을 밟음으로써 해소하리라 다짐하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내 지루함을 느끼고는 화려한 옷을 입은 얀스가르의 귀족들을 둘러보다 살짝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사고를 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꾹 참고 있었다.
“아이딘 백!”
저 멀리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백작이 고개를 돌렸다.
누구지? 그녀가 그쪽을 보니 금발의 머리카락과 과할 정도로 화려한 옷을 입은 남자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누구냐고 묻듯이 시선을 보내자 백작이 굳은 얼굴로 대답해 주었다.
“네 당백부구나.”
“네?”
그녀의 머리는 멍청한 편은 아니었지만 에스텔은 이런 촌수에 약했다. 누가 누구와 혈연이고 하는. 당백부면 뭐지?
“이드리스 공작이란다. 그러니까 황태자 전하의 외숙부 되시는 분이지.”
루시펠라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백작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생각에 경악했다.
그렇다면 연인이었다는 황태자와 자신은 친인척 관계였다는 건가?
생각해 보니 그랬다. 그녀가 듣기로는 아버지, 아이딘 백작은 죽은 1황후, 즉 황태자의 모후와 사촌 관계였기에 자연스럽게 황태자파가 되었다고 했다.
왕실의 가계도에도 혈연끼리 맺어지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육촌끼리 사귀었다니, 좀 이상하긴 하다. 이곳은 참 알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럼 저 친척이라는 인간에게 인사를 드려야 하는 게 아닌가? 그녀가 백작에게 눈짓하며 발을 내디딜 때, 이드리스 공작의 얼굴이 노골적으로 찌푸려졌다.
그녀를 반기는 눈치가 아니었다. 이드리스 공작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아이딘 백작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다시 백작을 바라볼 때, 백작도 그녀와 눈을 마주해 왔다. 그 굳은 얼굴을 보며 그녀의 입이 열렸다.
“다녀오세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딱히 그런 말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왜 입이 멋대로 움직인단 말인가?
‘어차피 가지 말라고 해도 가실 거잖아요.’
어라? 방금 머릿속에 든 생각은 뭐지?
그녀는 갑자기 머릿속에서 떠오른 생각에 당황했다.
백작은 그녀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줬다.
“금방 다녀올 테니 친구들과 놀고 있거라.”
그러곤 백작은 그녀에게서 등을 돌려 이드리스 공작에게로 향했다. 루시펠라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과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자신이 타인의 몸속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부분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루시펠라는 죽은 건가? 아니면 이 몸속에 있는 걸까?
방금 그것은 분명 루시펠라의 생각이었다. 그녀가 그 생각에 집중하려 했지만, 생각은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계속 생각해 봤자 별 소용이 없을 것 같아 괜히 기분이 찝찝해진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다 자신을 바라보며 소곤거리는 사람들을 한 번 노려봐 주었다.
백작은 아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왠지 그녀의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백작이 떠나자 그녀는 대놓고 그녀에게 들으라는 비웃음 속에 오롯이 노출되었다.
이건 확실히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그녀는 생각에 잠길 때의 습관처럼 팔짱을 끼려다가 다시 얌전히 손을 모으고 생각했다.
“세상에! 아직도 얼굴을 들고 다닐 줄은 몰랐네.”
“어마나, 뻔뻔스럽기도 하지.”
호들갑스럽게 말하는 여자들의 목소리에 다른 이들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뒤따라 들려왔다. 하지만 루시펠라는 그 노골적인 비웃음에도 태연하게 표정을 유지했다.
시선을 들어 보니, 앞에 나와 있는 것은 여자들 못지않게 남자들 역시 그녀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소문을 좋아하는 건 여자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이제 몸은 괜찮으세요, 아이딘 영애?”
그때였다. 상냥한 목소리에 루시펠라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초록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 한 명이 루시펠라에게 다가왔다.
부채로 얼굴을 가렸지만 그 아래 비웃음이 서려 있다는 것은 눈치가 없는 편인 루시펠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자신에게 향한 질문에도 침묵을 유지해야 하는 건가. 루시펠라는 고민에 빠졌다.
“최근에 영애에게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다던데……. 유명하더라고요. 그 그린힐의 살인마와도 만났다고요? 살인범이 끄는 마차에 타셨다는데, 큰일을 당하신 건 아니겠죠?”
‘큰일을 당했다’라는 말이 주는 의미가 어딘가 찝찝했던 탓에 사람들의 눈빛이 묘해졌다. 루시펠라는 그 말에도 담담한 듯 침묵을 지켰다.
“영애, 설마 목이 졸리셨다고 하던데 목소리가 안 돌아온 건 아니겠죠?”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루시펠라로서 이 사람들의 말은 하등 위협이 되지 않았다. 이 여자들이 혀를 가지고 싸운다면 에스텔은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왔으니.
그러나 때로는 말이 칼보다 더 무섭다는 격언이 괜히 나온 건 아니었다. 저 여자의 말은 분명 거슬리는 구석이 많았다.
“그냥 할 말이 없으신 건가요? 제가 이렇게 걱정되어 물어보는데 말이에요.”
그에 또다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에레네 부인이 입을 다물고 있으라고 했지만, 아무리 봐도 여기서 계속 입을 다물었다간 덜떨어져 보일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내가 말을 안 하는 이유는…….”
루시펠라가 입술을 열었다. 그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 쏠렸다. 그 흥분 어린 시선들에 루시펠라는 여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영애가 누군지 몰라서예요. 누구신데 그렇게 절 걱정하시는 거죠?”
사실 이건 딱히 여자들의 ‘우아한’ 돌려 말하기 화법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쓰이는 비아냥 섞인 받아치기였다.
당연히 유력 가문 자제의 이름을 모른다면 그것 역시 무식하다고 비난받을 만했다. 하지만 그녀도 그녀 나름대로 확신이 있었다.
마치 졸병을 내세우고 뒤에 서서 지휘하는 지휘관처럼, 만약 공작가나 후작가 같은 큰 가문의 여식이었다면 이렇게 나서지 않고 저 여자를 내보냈을 거라는 판단이 섰던 탓이다.
그 증거로 저렇게 긁는 소리를 하는 여자의 드레스는 한눈에 봐도 화려한 자신의 드레스와 대비가 되었다.
루시펠라의 말을 들은 여자의 얼굴이 대번에 붉게 물들었다. ‘어떻게 나를 모르죠?’라고 한다면 꼴만 우스워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영애와 간간이 인사 정도는 나눈 사이였는데, 영애는 절 기억할 정도로 기억력이 좋지 않으셨나 봅니다.”
“그런가 보죠.”
흥분해서 하는 비꼬는 그 말을 담담히 받아치자 사람들 사이에서 피식, 하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시펠라가 자신의 기억력이 좋지 않다고 인정했지만, 어찌 되었건 여자가 먼저 흥분해 버린 이상 무슨 말을 해도 그저 달려드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루시펠라는 이 여자에게 이런 일을 시킨 ‘지휘관’을 찾아 둘러보았다.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중 거슬리는 한 시선이 있었다. 백금발의 아가씨였다. 직감적으로 ‘지휘관’이 누군지 깨달은 루시펠라는 그 여자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영애! 지금 앞에 있는 건 저라고요! 영애는 제 걱정을 무시하는 건가요?”
루시펠라는 그 여자의 말에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무시를 당해 화를 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루시펠라의 시선이 그 백금발의 여자에게 시선이 가자 당황한 듯했다.
문득 루시펠라는 호기심이 생겼다. 이거 물어봐도 되는 건가, 한참의 고민 끝에 결국 이긴 것은 호기심이었다.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이제야 제 이름이 궁금하신가 보죠?”
루시펠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큰일을 당할 뻔한 건 뭐 공공연한 소문이니 그렇다 치고. 제가 그 범죄자의 마차에 탔고 목이 졸렸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셨나요?”
“네?”
의외의 질문에 여자가 당황했다.
“그건 기사들이…….”
“네? 기사들이요?”
황당한 건 루시펠라였다.
“지금 기사들이 말해줬다는 건가요?”
루시펠라가 확인하듯 다시 묻자, 그 여자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기사들이 말해줬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황제 폐하께서 그 살인범을 잡으라고 얀스가르의 기사분들께 직접 명령하셨다는데, 그렇다면 그 수사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비밀로 부친 게 아니었나요?”
여긴 안 그런가? 얀스가르의 기사들의 수사 방식은 다른 건가? 일부러 모든 정보를 공개해서 수사를 진행하는 건가?
루시펠라는 정말로 궁금해졌다. 그때 그녀를 둘러싼 구경꾼들 중 남자들 사이에서 ‘그러고 보니 그러네’, ‘아직도 수사하고 있는 중인데 그걸 어떻게 알아낸 거지?’라는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루시펠라가 표한 의문이 근거 없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루시펠라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뭐야, 그럼 기사들이 입을 싸게 놀렸다는 거네요?”
‘입을 싸게 놀렸다’는 말은 확실히 레이디들이 쓰는 말은 아니었다. 루시펠라의 말투가 갑자기 저급해지긴 했지만, 그녀가 지적한 사안이 사안인지라 사람들은 웅성댔다.
황제가 직접 조사를 지시한 사건에 대한 정보가 퍼졌다는데 이것보다 더 심각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전쟁터에선 그렇게 대단한 척하더니 얀스가르 기사들도 별거 아니었네. 자신의 기사단 내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더라면 땡볕 아래 운동장 백 바퀴에 겨울날 냉수 입수로도 부족했을 것이다.
어휴, 한심해라. 루시펠라는 혀를 찼다.
“아, 아니에요!”
졸지에 얀스가르의 기사들을 모욕한 게 되어버린 영애는 얼굴에 당황이 가득했다. 그 모습이 조금 불쌍해 보이긴 했다. 하지만 루시펠라는 기사들을 비웃을 기회를 차버릴 생각이 없었다.
“얀스가르의 기사들에게 참 실망이로군요.”
혀를 차며 남자들 쪽을 바라보자 기사로 보이는 풍채 좋은 몇몇 귀족 남자가 시선을 피했다. 루시펠라가 다시 백금발의 여자를 바라보자,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무래도 기사로부터 정보를 얻어서 흘린 쪽은 저쪽인 듯했다.
하인트 공작이 이걸 봤어야 하는데. 자기 휘하에 있는 기사들 입 관리를 이렇게 못 했냐고 비웃어줘야 하는데. 그 잘난 척하는 얼굴이 이 말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런데 그 인간은 어디 있는 거야. 루시펠라는 얼굴을 찌푸리며 약혼자라는 놈을 찾았으나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격언대로 그는 이곳에 없었다.
“영애의 약혼자도 기사라는 건 모르세요? 약혼자의 명예를…….”
“공작 각하의 명예를 깎아 먹은 사람은 제가 아니라 영애죠.”
루시펠라는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막말을 했다.
말투는 여전히 직설적이었지만, 어찌 되었건 끝을 부드럽게 하니 루시펠라의 예쁜 목소리와 더불어 참 그럴듯해 보였다. 그 말에 여자가 치잇, 하며 분하다는 표정으로 물러났다.
‘나…… 이긴 건가?’
이들의 얼굴을 보니 의도하진 않았지만 자신이 지금 승리한 듯했다. 이름을 모르는 것은 나름 생각해서 한 번 던진 것이었고, 정보의 출처가 궁금해서 물었다가 기사들을 비웃었을 뿐인데.
그때 나팔 소리가 들리며, 사람들이 모두 연회장 입구를 바라보았다. 나팔이 세 번 운다는 것은 황제가 회장에 들어온다는 뜻이었다.
그에 루시펠라의 정신이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황제. 황제라면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 아니던가.
그렇게나 목을 자르고 싶었던 남자가 저기 오는구나.
어쩐지 조바심이 났다. 또다시 이상한 직업병이 도지고 있었다. 루시펠라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여 장갑을 낀 주먹을 꼬옥 쥐었다.
황제는 멀리서 봐도 풍채가 좋은 노인이었다. 그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으니 알 수 없었다.
대신 걸음걸이만으로도 그녀는 황제가 나이가 어느 정도 있음에도 강건한 남자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얼샤의 마지막 국왕과는 비교가 되었다.
황제의 뒤에는 황후, 황태자와 2황자가 따르고 있었다.
저 금발이 황태자인가? 그녀는 바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그녀는 황자들 뒤를 따라 들어오던 하인트 공작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시선을 피했다.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황제에게 향해 있었다.
황제는 단상 위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인사를 드리러 온 귀족들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죽일까? 죽일 수 있을까? 루시펠라의 마음속에서 에스텔이 갑자기 크게 목소리를 냈다.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우선 무기가 없었고, 살수를 쓸 만한 힘도 없었으며, 황제에게 일정 거리 이상 다가갔다가 황제의 옆에 서 있는 기사들의 검에 목이 잘릴 것이리라. 그 목을 자르는 이 중 한 명이 하인트 공작이겠지.
옆에서는 아직도 간간이 그녀를 향한 비웃음이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왔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황제를 죽일 수 있나 하는 살벌한 생각뿐이었다.
한참 동안 황제를 바라보던 그녀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에게 향하던 사람들의 시선도 황제가 들어오자 그쪽으로 집중되었다.
차라리 이틈에 자리를 피해 있다가 돌아오는 게 좋겠다. 황제 하나 때문에 지나치게 자신이 흥분해 있음을 깨달은 루시펠라는 사람들 시선을 피해 조심스럽게 연회장 2층으로 향했다.
황제의 등장으로 2층에는 사람이 없었다. 루시펠라는 발걸음이 이끄는 대로 걸어갔다.
얼샤 왕국처럼 이곳 역시 휴게실이 마련되어 있었고, 루시펠라는 망설임 없이 방들이 있는 복도 맨 끝, 가장 화려한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루시펠라는 휴게실에 마련된 폭신한 소파를 보고 한숨을 쉬며 앉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얀스가르의 휴게실은 낯선 곳이었지만, 그녀는 마치 익숙한 곳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한 행동에 루시펠라는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굽이 높은 구두를 벗었다. 미적 감각이 없었기에 그녀에게 이 신발은 불편한 족쇄에 지나지 않았다.
발이 편해지자 그녀는 한숨을 쉬며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머리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게 주의하며 대체 자신은 무얼 하고 있나 생각했다.
결국, 그녀가 하는 건 고작 루시펠라로서 적응하기 위해 얀스가르 귀족의 옷을 입고 귀족 행세를 하는 것뿐이었다.
정말로 황제를 암살하기라도 해야 하나? 그렇다고 얼샤가 돌아오지는 않는다.
리엄의 행방을 알고 싶었지만, 자신이 리엄의 행방을 알 수 있을 정도면 진즉 황제가 찾아 그의 목을 땄을 것이다. 결국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우울한 생각에 잠긴 그녀는 문을 열고 닫는 이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 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고, 그제야 그녀가 고개를 홱 돌릴 때였다.
“이야, 루시. 역시 날 기다리고 있었네?”
갈색 머리카락을 멋들어지게 넘긴 남자가 미소 짓고 있었다. 문 앞에 서 있는 이는 황태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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