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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8화 (8/173)

#8화 레이디들의 사정

2017.03.27.

스무 살이 넘는 귀족 여자에게 예법을 다시 가르쳐 주는 것은 사교계 내에서 커다란 흠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 귀족 영애에게 어떤 사정이 있었든 말이다.

그리하여 백작이 구해다 준 선생은 유명한 예법 스승이 아닌 평민들에게 예법을 가르쳐 주기로 유명한 에레네 부인이었다.

에레네 부인은 나름 명망 있는 자작 가문이었으나 아들의 죽음으로 작위를 이을 자가 없어 실질적으로 평민이 되었다.

거의 한평생 그녀가 안주인으로서 자리 잡았던 가문은 집안에 남자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멸문했다.

자작부인으로서 화려한 삶을 살기엔 그녀가 가진 재산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자작가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예법에 충실했고, 이것은 귀족들의 삶을 동경하지만 접할 길이 없던 부유한 평민에게는 가장 탐날 만한 요소였다.

그래서 에레네 부인은 친분이 있던 친구들의 도움을 거절하고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으로 삯을 받아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해 나가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아이딘 백작가의 부름을 받았다.

아이딘 백작가는 유력 가문은 아니었지만 황태자의 모후인 1황후와 핏줄이 이어진 이른바 황태자파 가문이었다.

그런 가문에서 대체 누굴 교육시켜야 하는지 궁금했던 에레네 부인은 그 대상이 백작 영애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우선 백작 영애라면 어렸을 적부터 자신이 아니더라도 훌륭한 선생들에 의해 이미 교육 받았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편으로 걱정도 되었다.

비록 에레네 부인이 사교계에 나가지 않은 지 오래되었지만, 귀족과 연줄이 있었기에 백작 영애의 아름다운 얼굴에 비해 성격이 그닥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또 그녀가 지난 황궁 연회에서 어떤 일을 벌였는지도.

아무래도 보수를 두둑이 받은 것은 그러한 탓이 큰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평민들을 가르치더라도 그녀는 나름의 프라이드가 있었다.

만약 아이딘 백작 영애가 그녀에게 무례하다면 당장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이딘 백작 영애는 무례하다면 무례하고, 공손하다면 공손한,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제가 사고로 기억을 잃어버려 부득이하게 부인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정을 들어보니 ‘그 사고’의 후유증으로 기억을 잃었다고 했다. 기억을 잃었으니 당연히 예법도 잊어버렸겠지.

그러나 자신을 작위를 잃어버린 반 귀족이라고 멸시하지 않고 정중하게 가르침을 청한 것에서 에레네 부인은 그녀가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였다. 아이딘 백작 영애는 그녀를 잘 따랐으나, 잘 따르기만 했다. 배움의 속도가 생각보다 더뎠던 것이다.

“몇 번을 말해야 합니까. 발걸음을 그냥 가볍게 하라는 게 아니라, 적당히 묵직해 보여야 합니다. 사뿐사뿐 춤추는 걸음걸이는 사람을 경망스러워 보이게 한단 말입니다.”

“네에.”

거추장스러운 치마를 걷으며 걷는 발걸음은 이번에는 납을 단 듯 추욱 처졌다. 이상하게 요령은 있어 보이는데, ‘우아함’이라는 개념을 정확히 학습하지 못한 것 같았다.

에레네 부인이 보기에는 그녀는 자신이 왜 이것을 배워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가끔씩 치맛자락을 쥐며 답답한 한 듯 이리저리 흔들었다.

배움에 대해 납득하지 못하면 배우는 속도는 자연히 느려질 수밖에 없다.

몸에 익힌 예법이 어느 정도 기억에 남아 있는 모양인지 어느 정도는 해냈지만, 이번에 열린다는 황궁 연회에 참석하기엔 한참 모자랐다.

“아가씨,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까.”

“우아하게, 너무 가벼워 보이면 경망스러워 보이니 그래도 또 묵직하게, 기품 있게. 그렇게요.”

경청은 하고 있다. 그럼에도 답답해하는 그 기색에 가르치는 입장도 조금 지쳤다. 그 배움의 열의는 차라리 평민 여자아이들이 더 나았다고 생각했다.

“앉아보세요, 아가씨.”

휴식을 하자는 듯 소파를 가리키자 그녀가 툭툭 걸어와 소파에 기댔다. 그에 에레네 부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아가씨는 분명히 똑똑하십니다. 하지만 하실 의욕이 없어 보이는군요.”

그에 루시펠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루시펠라는 지쳐 있었다.

“납득이 가지 않아서 그럽니다.”

“무엇이요?”

“우아함의 기준이라는 게 뭔가요. 대체 치맛자락을 어떻게 쥐는 게 왜 중요한 거죠? 아니, 드레스도 이해가 안 가네요. 왜 무거운 치마를 입어야 하는 건가요. 편한 옷이 많은데. 말은 왜 돌려서 하는 건가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바로 말하면 되는 게 아닌가요?”

그것은 평민들도 물어보지 않던 질문이었다. 평민들은 귀족들이 그러니 ‘그러려니’ 하고 따랐던 것이다.

“그건 귀족들이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겁니다.”

“천만에요. 남자들이 말을 돌려서 하진 않잖아요. 남자 귀족들은 걸음걸이가 조금 어색해도 그냥 웃고 넘어가요. 그들의 행동이 우아하지 않아도 그렇게 큰 흠은 안 되죠. 유독 여자들만 그런 것을 따지는 것 같군요.”

“마치 그들과 함께 어울려 본 것처럼 이야기하시는군요, 아가씨.”

그 말에 루시펠라가 입을 다물었다. 나이를 먹은 에레네 부인은 루시펠라가 숨기는 구석이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기실 루시펠라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남자가 예법이 서투르면 그것은 그저 가벼운 비웃음거리만 되고 말았다. 심지어는 그것을 격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분방함이라고 칭송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자가 예의범절이 서투르다면 여자들은 그 여자를 비난하며 무리에 끼워주지 않았다. 그렇게 예절은 여성들에게 더 중요하게 작용했다. 에레네 부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남자와 여자는 같지 않습니다.”

그 말에 루시펠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실 루시펠라로서도,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도 버거운데 남의 일처럼 생각하던, 소위 말하는 ‘레이디들의 교양’을 배우는 데 상상 이상의 심력이 소모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하던 것, 심지어 발걸음마저 지적받자 아무리 단순하게 생각하려던 그녀도 신경 쓰려니 짜증이 났다. 차라리 검술 수련을 하라며 검을 던져 줬더라면 이런 생각이 들지도 않았을 터였다.

남자와 여자가 같지 않다는 것은 에스텔로서의 그녀가 지긋지긋하게 들어온 말이었다.

여성의 인권이 낮지 않은 일부일처인 얼샤에도 그 말은 당연했는데, 하물며 다처가 허용되는 얀스가르는 더할 터였다. 알면서도 막상 확인하니 씁쓸했다.

에레네 부인이 말을 이었다.

“이 예의범절은 분명 행동 자체로 보자면 효율이 없습니다. 비효율적인 행동은 일부러 의도한 겁니다. 귀족들에게는 그러한 여유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니까요.”

그러한 여유라니? 루시펠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에레네 부인이 말을 이었다.

“평민들이 발걸음을 느긋하게 할 시간이 있을까요? 언제나 일을 해야 하는 그들의 치맛자락이 귀족 여인이 입는 것처럼 불편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한 것이다. 언제나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평민들이 어떻게 거추장스러운 귀족들의 치마를 입을 수 있단 말인가. 루시펠라는 에레네 부인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언제나 생업에 바쁜 평민과 그 위에 있는 귀족의 차별점은 여유입니다.”

그에 루시펠라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 받았다.

어떻게 보면 예법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각으로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또한 여자의 예법이 더욱 엄격하게 적용되는 것은 단순한 여자들의 허영이 아닙니다.”

“…….”

“귀족가 여성들의 교육은 가문의 위세를 상징합니다. 가주의 위세를 말이죠.”

그 말을 들은 루시펠라는 의문을 가졌다.

여자는 그렇다면 가문의 액세서리와 같은 것인가.

평민이었지만 반 귀족, 거기다 거의 남자로서 자란 ‘에스텔’에게 여자의 예의라는 부분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

“아니죠. 남자는 교육 말고 자신의 위세를 드러낼 것이 많습니다. 예법뿐만이 아니라 학식, 검술 같은 거 말이죠. 하지만 남자들과 달리 여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보여주는 것밖에 없습니다. 치맛자락의 주름, 말의 세심함밖에 없으니까요.”

에레네 부인은 단순하고도 명쾌한 대답을 했다. 루시펠라는 그 말에 할 말을 잃었다.

귀족의 여자들이 드러낼 것은 정말 ‘보여주는 것’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가문의 부속물이 되기 때문이었다.

귀족들의 예의에 이어 여자들 특유의 사치스러움과 허영에 대해서 그녀는 제대로 생각해 보지 않았다.

루시펠라는 에스텔이었을 적, 내심 그 ‘레이디’들에 대해 업신여기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반성했다. 어떻게 보면, 무엇을 내보일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여자들이었다.

스스로를 보호하기도 전에 보호를 강요하며, 이에 벗어나는 에스텔 같은 부류는 여성이 아닌 남성으로 대우받았다.

여자가 검을 잡았기에 불이익을 당했던 게 자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잊고 있었다.

그녀는 후우, 하고 한숨을 쉬며 천장을 보았다. 이쪽도 이쪽 나름 사정이 있구나. 마냥 옷에만 신경 쓰는 멍청이들이 아니었다.

가문의 위세를 드러내는 것이 화려한 드레스와 강철과 같은 혀로 무장한 거라면, 이들의 삶의 방식도 존중해 줘야 마땅했다.

생각해 보니 우습네.

애초에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어놓고 여자들이 사치를 부리는 것, 예의에 목매는 것을 비웃는 남자들의 태도가 우스웠다.

검을 잡는다고 비아냥거리던 이들은 더 우스웠고. 뭐, 자신도 그중 하나였으니 할 말은 없지만.

에레네 부인은 내심 이 말이 루시펠라의 심기를 상하게 한 건 아닌가 생각했다.

집안에 남자가 없다는 이유로 작위를 잃으며, 계급이 실질적으로 강등되었을 때 에레네 부인은 비로소 이 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남자의 역할과 평민과 귀족의 차이가 무엇인지.

비슷한 것을 궁금해하는 그녀의 태도에 자신도 모르게 대답해 버리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렇군요. 납득했어요.”

한참 후에 루시펠라가 웃으며 말했다.

“이게 이들의 방법이라면 이들의 방법을 따라야죠.”

그녀는 허리를 펴며 우아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딘지 모를 딱딱한 동작과 자유분방함은 사라져 있었다.

“그러면 연회까지 노력해 볼까요?”

에레네 부인은 루시펠라가 아름답다는 말에 대해 동의했다. 그러나 그것은 외모에 대한 평가일 뿐이었다.

얀스가르의 샛별이라고 불리던 그녀의 별명답게 그 은색의 눈이 별처럼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그 두 눈, 두 눈 때문에 에레네 부인은 그녀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꼈다.

***

“무슨 근심거리라도 있으십니까?”

이오지프의 말에 황후가 고개를 들었다.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황후는 금색 새장 앞에 서서 카나리아가 노래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녀가 근심 가득할 때 하는 행동 중 하나였다.

“사흘 후가 연회로구나.”

“그렇군요.”

이오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딘 백작 영애 말이다, 그 영애가 걱정이구나.”

황후의 말에 이오지프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황후를 바라보았다.

“아이딘 영애가 곤란에 처하는 건 사실 스스로가 자초한 것도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그렇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내용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황후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태자는 아이딘 백작과 내 사이를 벌어지게 하려는 속셈인 것 같더구나.”

“그럴까요?”

황후의 이름으로 직접 초대장을 보냈으니 아이딘 백작의 입장으로서는 황후를 아무래도 원망하게 될 게 뻔했다.

황태자는 아우인 이오지프는 경계하지 않았으나, 궁의 안주인인 황후는 경계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가 황제가 되고, 황후가 태후가 될 때를 경계함이 틀림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나이보다 어리게 보이게 해주었던 그 앞머리가 들어 올려지며 이마가 드러났다. 그러곤 그 이마에는 화장으로 가려지지 않는 흉터가 보였다.

“저는 그냥 형님의 못된 기질이 발동되어서 그러는 것 같은데요.”

“그렇게 생각하니?”

“형님의 성격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말에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테미르의 가학적이며 포악한 성격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이오지프는 황후 옆으로 다가가 새장을 바라보았다.

“생각해서 일을 벌였다면 이런 방식은 아니었을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니?”

“제드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제더카이어 하인트가 아이딘 백작의 영애와 약혼 관계였다. 여러모로 흠이 있는 약혼녀를 끄집어내서 조롱하는 것은 공작가의 명예와도 직결되었다. 유쾌한 일은 아닐 터였다.

“아이딘 백작과는 다르게 제드 녀석은 백작 영애를 초대한 게 어머니가 아니라 형님이라는 걸 바로 눈치챘을 겁니다. 그 녀석은 형님의 성격을 혐오하니까요.”

이오지프는 흘러내린 안경을 벗으며 자신의 옷자락에 슥슥 문질렀다.

“하지만 기분만 조금 상하고 말 일이지, 하인트 공작이 약혼녀 때문에 황태자와 척을 지겠니?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면 심지어 모욕도 되지 않을 거란다.”

“저는 제드의 성격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여도 매정한 녀석은 아니니까요. 뭐, 나에 대한 일은 빼고요.”

이오지프는 안경을 곱게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자 안경에 가려져 있던 날카로운 눈매가 드러났다.

“흠 많고 억지로 맺어졌다고 해도 약혼녀입니다. 약혼녀를 그곳에 초대해 모욕을 주는 건 재드에 대한 명백한 모욕입니다. 제드는 이 일을 잊지 않을 겁니다.”

“…….”

“저라면 제드를 적으로 돌릴 빌미를 주진 않았을 겁니다.”

안경을 벗은 이오지프의 녹안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아까까지 맺혀 있던 상냥한 웃음과는 다른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

루시펠라는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예법을 습득했다. 그리하여 연회 전날에는 어느 정도 귀족 영애처럼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귀족들의 가계도나 나라에 대한 기본 교양, 화법을 완벽하게 배우지는 못했지만, 어찌 되었건 외양적으로 그럴듯하게 보이는 데는 성공했다.

“외람되지만 아가씨가 벌인 일로 인해 아가씨와 대화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황태자에게 사랑을 구걸해서 호수에 뛰어든 멍청한 일 때문에요?”

“바로 그겁니다. 그래도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정도는 잘 아시는군요.”

칭찬을 받긴 했는데 어쩐지 기분이 나빴다. 루시펠라의 표정에 에레네 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연회장에서 분명히 조롱을 받을 겁니다.”

“정말 안 가는 가장 쉬운 방법이 있는데 이걸 못 해서…….”

내가 어쩌다 이런 몸에 들어와서 고생을 하나, 라는 생각을 했지만 애초에 그런 신세타령을 하면 내가 왜 얼샤에서 그 개고생을 했나, 라는 고민부터 하는 게 맞았다.

어차피 훗날에라도 연회에 참석해야 한다면 그냥 하루라도 빨리 치르는 게 나았다. 에스텔은 피하고 도망치는 성격이 아니었다.

‘연회라.’

루시펠라로 행동하고 있지만 아직 그녀는 현실감이 자리하지 않았다. 그나마 하인트 공작을 볼 때 에스텔이었던 자신이 강하게 자각될 뿐. 현재 자신의 생활은 어딘지 모르게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꼭 꿈을 꾸는 것 같네요.”

“네?”

“아니요, 그냥. 그냥요.”

루시펠라는 씁쓸하게 웃었다.

꿈을 꾸는 것이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녀는 아직도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납득하지 못할 테니.

얼샤의 기사가 레이디가 되어 얀스가르의 연회에 참석한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꿈과 같은 현실감이 없는 일에 겁이 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

연회 날, 아침부터 부산을 떠는 것은 그녀가 아니라 하녀들이었다. 그녀는 아침부터 향기가 나는 입욕제가 가득 든 목욕물에 몸을 담가야만 했다.

하녀들이 벌써부터 기합이 단단히 들어 자신을 꾸며주는 것을 보고 그녀는 멍하게 생각했다.

자신이 이 드레스를 입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리엄 녀석이 보면 배꼽 빠지게 웃다 못해 졸도하겠구나.

그녀는 멍하게 옷시중을 받으며 생각했다.

“준비되셨죠, 아가씨?”

옆에 서 있는 하녀 루이자가 말했다.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하마터면 졸도할 뻔했다. 코르셋이라는 게 이런 어마어마한 것인가.

“그만― 흡!”

벽에 발까지 대고 조이는 게, 코르셋을 한두 번 매본 솜씨가 아니었다. 이 정도 저질 근력인 사람의 허리를 막무가내로 조이면 아무래도 안 좋지 않나.

여자들의 예의가 나름 이유가 있다면 이 코르셋은 뭐지? 여자 죽이기인가. 아니면 의도적으로 여자라는 존재를 약하게 하기 위한 것인가.

“루이자, 너 나한테 그동안 쌓인 게 많았던 거지?”

“에이∼ 아니에요. 설마 아가씨에게 어떻게 화를 내겠어요∼ 힘 더 주세요.”

이젠 다른 의미로 여자들이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예쁘게 보이는 게 일종의 업무라면, 정말 이들은 언제나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루이자, 내가 잘못했어!”

“로이자예요.”

이름을 또 잘못 부르자 로이자는 벽에 발까지 디디고 코르셋을 더욱 꽈악 조였다.

치장이 끝난 후 루시펠라는 자신의 거울에 비친 모습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예쁘긴 했다.

“예쁘네.”

루시펠라의 지나치게 감흥 없는 감상에 하녀들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물론 여기 서 있는 자신의 얼굴이긴 하지만 어찌 되었건 루시펠라의 얼굴이기도 하기에 꾸며도 감흥이 없었다.

긴 머리는 틀어 올려 핀으로 고정시켰고, 창백한 얼굴은 하녀들이 가져온 향기가 나는 가루로 뭔가를 하는 것 같더니(그때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생기 있게 변했다.

원래부터 어여쁜 얼굴이라 생각했던 얼굴은 치장을 하자 더욱 아름답게 변모해 있었다.

그 뭐래더라? 얀스가르의 샛별이라던가.

얼샤의 샛별이라 불리던 자신과 참 비교된다. 애초에 루시펠라는 인물에게 자신을 대입시키기엔 루시펠라와 에스텔은 너무나 달랐다.

루시펠라는 자신이 입고 있는 드레스를 보았다. 군청색 드레스였다. 어찌 보면 그녀가 ‘처음으로’ 입는 드레스였다. 그녀가 기사가 될 때 받았던 제복도 바로 이런 색이었다.

얼마 전에 꾸었던 꿈이 생각났다.

기사가 되어 몸에 맞지 않은 제복을 입었던 꿈. 드레스에 감흥 없는 얼굴을 하는 지금과는 다르게 그때 그녀는 조금 더 들떠 있었다.

검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 무언가 대단한 직위에 오를 수 있다. 사람들을,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점에서 그녀는 뛸 듯이 기뻐했다.

평민인 자신에게 검으로 싸울 기회를 준 나라에게 충성을 바치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때 그녀의 곁에 서 있던 남자의 존재가 떠오르자 기분이 가라앉으려 했지만 루시펠라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루시펠라다. 루시펠라로 살아가기로 했다.

그녀는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1층 로비로 내려가자 연회복을 입은 백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백작은 그녀를 보며 잠시 넋을 잃은 듯하더니 아내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구김이 가지 않도록 치맛자락을 조심스럽게 틀어쥐었다.

“정말 아름답구나, 루시.”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무심결에 나온 말에 백작이 웃음을 터뜨렸다.

“기억을 되찾아가는 것 같구나. 아주 좋은 징조야.”

루시펠라는 참 자신의 외모에 자신감이 있었던 사람이었나 보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닌지라 그녀는 납득했다.

백작은 아주 세련되게 차려입고 있었다. 아이딘 백작가가 돈이 많은 가문이라는 게 말로만이 아닌지, 그녀가 보기에도 옷은 재질 자체가 달랐다.

루시펠라는 무심결에 손을 뻗어 그 옷을 만지작거렸다. 백작이 웃음을 지었다.

“미안하구나.”

“네?”

“아니, 억지로 연회에 가게 해서 말이다.”

“괜찮아요.”

뭘, 새삼스럽게. 황후의 초대를 거절할 간 큰 귀족이 얼마나 되겠는가.

루시펠라의 산뜻한 대답에 백작은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그녀의 머리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리곤 쓰다듬었다.

루시펠라는 백작의 애정을 느꼈다. 그것은 기묘하게도 가슴을 간질이는 따스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가슴 한 켠에 아릿한 괴로움이 번졌다.

“오늘은 먼젓번과 같은 실수는 안 했으면 좋겠구나. 황태자 전하가 곤란할 일 말이야.”

“그럴게요.”

루시펠라가 고분고분하게 답하며 그의 팔을 잡자 백작이 마차로 향했다.

하지만 글쎄, 호의호식하는 얀스가르 인을 보면 자신도 어떤 반응을 보일지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루시펠라로서 살아보겠다고 했고, 사고 칠 생각이 없으니 이렇게 대답해도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백작의 손에 이끌려 마차에 올라타자, 마차가 황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느긋하게 마음을 먹었는데 황궁에 가까워질수록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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