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불편한 초대
2017.03.23.
루시펠라가 백작가로 돌아왔을 때 백작은 그녀를 찾느라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사용인들은 새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전원 나와 있었다.
이들은 이미 그녀가 죽을 뻔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가 터덜터덜 걸어가자 대기하고 있던 의원이 달려왔다.
집사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는 듯했다. 아무래도 하인트 공작을 찾는 듯했다. 그것을 눈치챈 루시펠라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공작 각하를 찾는 거라면, 갔어.”
집사의 표정에 ‘그래도 약혼녀인데……’라는 말이 스쳤으나 루시펠라는 굳이 하인트 공작을 위해 변명하지 않았다.
사실 그가 돌아갔던 것은 그녀 때문이었다. 저택 안까지 마차가 들어오려고 했지만 루시펠라는 그것을 거절했다.
심지어 부축마저 하인트 공작이 아닌 저택에 상주하던 호위기사에게 부탁했다.
모욕적인 루시펠라의 강한 거부에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공작은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루이자는?”
그녀를 부축하는 의원을 가볍게 뿌리치며 루시펠라가 물었다. 일단 이름부터 루이자가 아니라 ‘로이자’였지만 집사는 그것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로이자는 그녀와 함께했던 수행 시녀였다. 그런데 루시펠라가 도망쳐 버려서 그녀는 호된 체벌이 예고되어 있었다.
“우선 벌을 주기 위해 방에 가둬놨습니다만…….”
어차피 쫓겨날 아이였지만, 루시펠라의 잔혹한 화풀이를 받는 것은 아무래도 불쌍한 일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요즘 성격이 유해졌다고 해도 이번에는 자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드레스에 정신이 팔려 주인을 섬기는 데 소홀히 한 것은 사실이었으니 벌은 받아야 마땅했다. 집사는 이 사태에 한숨을 내쉬었다.
“안내해.”
“네?”
보통은 끌고 오라고 말하지 않나? 집사는 걱정했다.
사용인들을 가두는 방은 저택 안에 위치했음에도, 루시펠라가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던 곳이다. 그런 방을 찾아가겠다면 무언가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가씨, 우선 몸부터…….”
집사의 말에 루시펠라는 조용히 한 손을 들어 올려 그를 막았다.
노기에 찬 찢어지는 듯한 음성보다 그 짧은 손짓이 어쩐지 더 힘이 있었다. 집사는 알 수 없는 위압감을 느끼며 그녀를 조용히 따랐다.
사용인들의 징계실은 저택 뒤쪽의 가장 외딴곳에 자리해 있었다.
감금을 목적으로 했기에 이곳은 어둡고 좁았으며, 화려한 백작가와는 어울리지 않는 음습한 곳이었다.
“호위기사들은 어떻게 됐지?”
“고용된 기사들은 모두 해직되었습니다. 그쪽도 벌을 받고 있겠지요.”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복도 끝에 달린 문을 보며 열라는 듯 턱짓을 했다.
하인들이 문을 열었다.
방 안은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그 방 안에서 쭈그려 앉아 흐느끼고 있는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빛이 새어 들어오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 뒤를 보다가 루시펠라가 서 있는 것을 보며 겁에 질린 표정을 했다.
루시펠라는 방을 한번 훑어보더니 바로 로이자에게 다가갔다.
모두가 루시펠라가 그녀에게 화풀이를 해댈 거라고 생각했다.
사용인에게 고용인의 화풀이는 당연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드레스에 한눈을 판 하녀의 잘못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이 집 아가씨는 연쇄살인마에게 살해당할 뻔했다.
“아, 아가씨,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로이자가 울면서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루시펠라가 손을 뻗자 로이자가 몸을 움츠렸다. 루시펠라가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일어나.”
왜요? 일으켜서 뺨을 때리게요?
로이자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말을 듣지 않으면 더 혼날 걸 알기에 덜덜 떨며 몸을 일으켰다.
루시펠라는 로이자의 얼굴을 보더니 뒤에 서 있는 집사에게 물었다.
“매질은 따로 안 한 거겠지?”
“네, 그렇습니다……. 주인님과 아가씨의 처분을 기다려야 하니까요.”
집사는 드디어 올 게 왔구나, 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녀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다행이네.”
로이자는 그 말을 ‘내가 손대기 전까지 아무도 손대지 않아 다행이야’라고 이해한 듯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큰 벌을 받게 될 건지 감히 짐작도 되지 않았다.
루시펠라가 따라오라는 듯 눈짓을 했다.
뭐지? 방에서 벌을 내릴 작정인가? 그러면 왜 직접 여기까지 와서 데려가는 거지?
사용인들의 얼굴에 의문이 어렸다.
사용인들은 그저 루시펠라가 하녀들을 다스릴 거라 생각했기에 루시펠라가 단순히 하녀에 대한 선의로 행동했다는 것을 감히 짐작도 하지 못했다.
로이자가 두려움에 차 집사를 보자, 집사는 입 다물고 무조건 빌라는 눈짓을 했다.
로이자는 앞으로 일어날 일이 너무 두려워 눈물이 났다.
그때는 드레스에 정신이 나간 게 분명했다. 저 아가씨가 유순해졌다고 방심했다. 하지만 자신도 억울한 게, 아가씨가 도망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무리 안하무인에 거만했어도 길거리의 먼지는 더럽다고 발을 디디기도 싫어했던 아가씨였다.
채찍질을 할까? 이 정도면 손목이 잘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알몸으로 쫓겨날지도 몰랐다.
“아가씨.”
집사가 방 안으로 따라 들어오려 했으나 그녀는 손을 들어 그것을 저지했다. 집사는 자신이 그 손짓 하나에 멈췄다는 것에 놀랐다.
방 안에 들어온 루시펠라는 고개를 푹 숙이고 무릎을 꿇은 로이자를 일으켜 세웠다.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겠구나.”
“……네?”
다정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루시펠라는 걱정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또 상냥한 얼굴로 무언가 하려는 게 아닐까? 그때 도망쳤을 때처럼 말이다.
그런 로이자의 얼굴을 보고 루시펠라가 미안함을 담아 손으로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로이자는 그에 지나치게 놀라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미안하구나, 나 때문이야.”
“아, 아니에요. 제, 제가 그러니까, 더 잘 감시를, 아니, 아니, 모셨어야 했는데…….”
“작정하고 도망쳤는데 네가 어떻게 알았겠어?”
아까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을 하며 억울해하던 로이자였지만, 너무나 맞는 말을 기대하지 않던 사람이 말하니 오히려 더 무서워졌다.
“벌은 내가 알아서 내렸다고 해줘. 많이 겁먹었을 텐데 들어가 쉬도록 해. 집사에게도 적당히 내가 혼냈다고 말하고. 안 혼났다고 하면 더 혼나잖아.”
“……아가씨?”
“뭐 더 할 말 있어? 화를 내고 싶다면 내도 좋아.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
죽었다 살아나고 기억까지 잃어버리면 정말로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 있는 건가?
항상 날이 서 있고, 무조건 화부터 내던 루시펠라는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할 말이 없으면 나가도 좋아. 가서 의원을 불러줘.”
그러고 보니 그녀의 목에는 검은 손자국이 나 있었다.
로이자는 그것을 보고 정말 이 아가씨가 죽었다가 살아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도.
“아가씨.”
로이자는 눈물을 흘렸다.
이 아가씨가 왜 변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행동으로 아가씨가 원래부터 착했던 사람이라고 마음대로 생각했다.
그래도 자기 잘못이 없던 것은 아닌데 관대한 처분을 내리니 더 울컥했다.
“으아아가씨이이!”
루시펠라는 어어엉, 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하녀를 보고 당황했다.
분명 처음에 로이자를 보았을 때는 조용하고 할 일만 하는 전문적인 하녀의 느낌이었으나, 이런 것 하나에 애처럼 울음을 터뜨리다니. 게다가 루시펠라는 우는 사람에게 약했다.
“루이자, 울지 마. 울지 마, 루이자.”
“으아, 아가씨이, 제가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럴, 흑! 게요! 흑!”
“그래, 그래.”
루시펠라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다시 로이자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였다.
훌쩍훌쩍 울고 있던 로이자는 생각했다. 아, 정말 어쩜 이렇게 천사 같은 아가씨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저 로이자예요, 아가씨. 루이자 아니에요, 흑흑!”
“아, 미안. 로이자. 그래서 서운했구나.”
로이자는 단순한 성격이었고, 그녀가 모시는 아가씨가 나름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자 자칫 그녀의 가슴에 남을 뻔했던 앙금이 사르르 녹아 사라져 버렸다.
***
얀스가르 제국 2황자, 이오지프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나름의 준수한 외모였으나, 그의 외모는 두꺼운 검은 안경에 가려져 제대로 표가 나지 않았다.
“형님. 세상에나. 이곳에는 어쩐 일로 발걸음하신 겁니까?”
바로 눈앞, 황태자인 테미르가 이곳 황후궁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테미르는 황후궁의 정원에 마련된 티테이블에 앉아 황후 프리실다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황후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서 와 앉으렴, 이오지프.”
황태자는 활짝 웃는 이오지프의 얼굴과는 달리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든지 말든지 이오지프는 싱글거리며 황후의 옆에 앉았다. 이 상황이 좋아서 어쩔 수 없다는 듯했다.
“오랜만에 둘을 같이 보니 좋구나.”
황후가 미소를 지으며 인자하게 말했다.
“그렇게 좋아 보인다면 어머님, 앞으로 자주 찾아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에 찻잔을 잡은 황후의 손이 흠칫 떨렸다. 이오지프가 웃으며 말했다.
“형님, 황태자 정무로 바쁘실 텐데 방문해 주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어마마마와 형님이 사이가 안 좋다는 소문도 사그라질 겁니다. 아바마마도 기뻐하실 테지요.”
그에 테미르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농담으로라도 황후와 사이가 좋다는 소문이 나길 꺼려하는 게 분명했다.
현 황후는 제2황후로, 황태자는 2황후 소생이 아니었다.
전 황후 루크레치아는 황태자가 다섯 살 때 병으로 사망했으며, 그에 당시 이오지프를 낳았던 황비, 프리실라가 황후가 되어 황궁의 안주인이 되었다.
테미르가 못마땅한 얼굴로 무어라고 더 말을 하려 할 때였다.
“그런데 무슨 말씀들을 나누고 계셨습니까? 이 아우가 들어도 되는 이야기입니까?”
그에 테미르의 얼굴에 삐뚜름한 미소가 서렸다.
“이번 가을 연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을 연회요?”
얀스가르는 매년 가을 수확이 끝나면 대대적으로 커다란 축제를 연다.
이것은 황궁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수확제를 맞이하여 커다란 연회를 열었다.
황제의 탄신일 이후로 가장 커다란 연회라 중소 귀족들은 대부분 다 참석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얀스가르의 토지가 추수를 하는 황금색 물결로 물들 때면, 그린힐의 거리는 귀족들의 번쩍거리는 금색 마차로 가득 찼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
테미르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꼭 초대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말이다. 황후 폐하께 친히 요청 드리러 왔지.”
“오, 누군가요? 저도 궁금하네요.”
순진한 이오지프의 물음에 테미르가 다시 낄낄거렸다. 웃음소리가 천박했으나 이오지프도, 황후도 얼굴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아이딘 백작가 말이다.”
“아이딘 백작이라면 당연히 초대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태자?”
“아니요. 아이딘 백작뿐만 아니라…….”
태자는 티테이블 위에 있는 찻잔을 손으로 뱅글 돌리며 입을 다셨다.
“루시펠라 아이딘. 백작 영애를 보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에 황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이딘 백작 영애가 황태자, 테미르의 사랑을 갈구한 나머지 황궁 호수에 뛰어들었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연회를 주관하시는 어마마마께서 힘 좀 써주십시오. 저도 만나보고 싶지만 도통 만날 기회가 없어서 말입니다. 사사로이 저택에 찾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태자, 아직 백작 영애의 몸이 낫지 않았어요. 그리고 아시잖습니까? 저번에 수도를 뒤숭숭하게 했던 사건에 휘말려서 또 몸이 좋지 않다고 해요.”
아이딘 백작이야 그가 친하게 지내는 무리, 황태자파 덕분에 대놓고 비웃는 사람은 없었지만 여자인 루시펠라는 이야기가 달랐다.
사건이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았으며, 여자들에게 더 가혹한 사교계 특성상 루시펠라가 당할 조롱과 멸시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래서 너무 걱정인 겁니다. 그 애가 다시 걸어 다니는 모습을 봐야 제 걱정이 사그라들 것 같거든요. 제 부탁을 들어주시겠지요, 어마마마?”
“태자, 그건 곤란합니다.”
그러자 그가 들고 있던 찻잔을 티테이블 옆의 하얀 조각상을 향해 집어 던졌다.
쨍그랑!
홍차의 붉은 물이 조각상을 적셨다. 그에 옆에 서 있던 시녀들의 얼굴이 굳는 것이 느껴졌다.
황후 역시 놀란 표정이었다. 테미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실례합니다, 황후 폐하. 제 찻잔에 금이 가 있지 뭡니까. 관리하는 시녀에게 벌을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테미르의 눈짓에 자주색 제복을 입고 있는 기사가 바로 옆에서 차 시중을 들고 있던 시녀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았다.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던 시녀의 입에서 겁에 질린 비명 소리가 나왔다.
“태자!”
황후가 만류하듯 황태자를 부르자 그가 미소를 지었다.
“설마 제게 이딴 찻잔을 일부러 내오라고 시켰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설마 황후 폐하께서 제가 미워 그런 것은 아니겠지요.”
그 기묘한 대치에도 이오지프는 태평하게 차를 마셨다.
“아이딘 백작이 곤란해할 겁니다. 딸이 사고를 당했다고 하는데, 이렇게 빨리 모습을 드러내라니요.”
“아이딘 백작은 제 외당숙 되시는 분입니다. 당숙께서 어찌 제게 서운함을 품겠습니까.”
호위기사가 더 억세게 시녀의 손을 뒤로 꺾어 누르자 시녀의 입에서 다시 비명 소리가 새어 나왔다.
교육을 잘 받았기에 대놓고 울음소리를 내거나 살려달라고 자비를 구걸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황태자에게 내는 찻잔에 금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황태자는 억지로 트집을 잡고 요구를 들어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시죠, 어머니.”
그때 이오지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이 보고 싶으시다는데 못 들어주실 이유가 없잖아요. 형님은 이 나라의 황제가 되실 분입니다. 아이딘 백작도 개의치 않을 거예요.”
“…….”
이오지프의 두둔에 테미르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오지프는 테미르에게 꽤나 유순한 동생이었다. 형제가 그렇게 말하는데 황후 역시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렇게 하겠어요.”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어마마마.”
테미르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
심각했다. 아주 심각했다.
그것은 루시펠라가 말하는 것이 아닌, 다른 이들이 공적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사건이 일어난 지 2주일 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일이 있고 루시펠라에 대한 경계는 강화되었으나, 어째서인지 하녀들의 태도는 저번보다 더 풀어져 있었다.
루시펠라가 직접 사과해서 로이자의 벌을 면제해 준 것이 사용인들의 귀에 들어간 탓이었다.
죽음 직전까지 갔음에도 화를 내기보다는 자신의 잘못이라며 사과까지 한 아가씨의 평판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반성이라도 한 모양인지 루시펠라는 몸져누우면서도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아주 얌전하게 사용인들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
이것을 먹으라 하면 먹고, 걸어가라 하면 걷고, 입으라 하면 입고. 몇 번 죽을 뻔하더니 사용인들의 이상적인 주인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아주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다. 기억을 잃어버려 성격의 변화에 쌍수 들고 환영했는데, 정말 말 빼고 다 잊어버렸다는 점이 문제였다.
우선 그녀는 주로 침대에 누워 있었으며, 가끔씩 일어나 걸을 때 그녀의 걸음걸이가 이상해도 하녀들은 그녀가 아파서 그러려니 하고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가끔 말투가 남성스러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죽을 뻔하다 깨어난 후유증 때문에 그러겠지. 심지어 며칠 동안 밥도 안 먹었잖아’라고 생각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심각한 상황을 외면하고자 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분명히 평민과는 달랐으나, 그렇다고 레이디들의 사뿐사뿐한 걸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꼭 아가씨들이 아니라 군인들의 발걸음 같습니다. 그것도 행진하는 당당한 발걸음…….”
집사의 말에 백작은 충격을 받은 듯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것은 루시펠라의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던 저택의 집사가 보고 내린 최종적인 결론이었다.
“아무래도 아가씨께서 기억을 잃으셔서 그 후유증이 좀 심각한 모양입니다.”
“아니, 대체…….”
“황궁 연회까지 앞으로 일주일입니다. 어떻게든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를 어떻게 해야……. 어찌 이런 일이…….”
거참, 사람 앞에 두고 별소리를 다 하네.
루시펠라는 지금 집사와 백작의 대화에 호로록, 차를 마시며 경청하고 있었다. 차를 훌훌 마시는 것을 본 백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에스텔은 평민 출신이었지만 어린 나이에 가브라인 공작가에서 길러지며 검술을 배웠다.
귀족들의 저택에 살았지만 가브라인 공작은 검술을 가르치는 것 이외에 그녀의 교육에 신경 쓰지 않았고, 그 집 사용인들도 평민에게 귀족의 예법을 알려주는 것은 당치 않다고 여겼기에 그녀는 방치되었다.
그러나 사용인들을 대하는 방식은 익숙했으며, 식사 예절만큼은 보다 못한 칼리드가 가르쳐 줬기에 익숙했다.
‘칼리드.’
그 이름을 떠올리자 찻잔을 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휘휘 저어 그 이름을 지워 버리려 했다.
칼리드라는 이름은 여전히 그녀에게 중요했다.
그러나 그에 대해 생각하다가는 소위 말하는 인간 불신과 우울함에 빠질 게 뻔했다.
아직 칼리드를 찾아 나서는 건 조금 더 나중에 해도 괜찮을 것이다.
칼리드를 모르는 루시펠라가 그를 찾는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행여나 주변 사람들에게 의심받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렇게 그에 대한 생각을 미뤘다.
여하튼 에스텔은 귀족의 예법을 전혀 배우지 못했으며, 어느 정도 보고 배운 게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남자’들의 예법이지 ‘레이디’의 예법이 전혀 아니라는 거였다.
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법은 ‘몸이 아픈데 안 가면 안 돼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으나, 그것은 대번에 거절당했다.
황후가 직접 초대장을 보낸 것이다. 그녀가 친필로 쓴 초대장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황태자와 황후가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는 루시펠라는 황후가 자신의 아들의 위엄을 떨어뜨려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구나. 망신이라도 줄 모양이려니, 무심하게 생각했다.
“약혼 발표 후에 처음으로 사교계에 나가시는 거라 분명히 하인트 공작 각하와 춤을 추셔야 될 겁니다.”
오, 방금 그건 좋았다. 힐을 신고 그의 발을 콱콱 내리찍는 걸 생각하고 루시펠라는 웃었다.
그 표정이 어떻게 될지,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그러나 백작의 얼굴이 죽을상이기에 실행은 상상만 하기로 하고 그녀가 말했다.
“배우면 되죠.”
“일주일 안에? 절대 안 된다. 우리 루시가 똑똑하긴 해도 그건 안 돼.”
일단 화술이나 지식, 상식이라면 자신은 없었지만 춤을 추는 거라면 어찌어찌 할 자신은 있었다. 어찌 되었든 몸을 쓰는 게 아닌가. 몸을 쓰는 것은 자신이 있었다.
루시펠라는 여유로운 얼굴로 하품을 했다. 그 한량 같은 모습에 백작이 못마땅하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왔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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