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레이디는 위험에 처했다
2017.03.13.
“오랜만에 바깥에 나가니 좋네요.”
“그래? 그럼 앞으로 자주 나올게.”
하녀는 그 말에 기쁜 듯 웃었다.
딱히 그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한 말이었으나 좋은 게 좋은 거니 뭐. 루시펠라는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호위기사 둘을 대동한 루시펠라는 마차를 탄 채 얀스가르의 수도, 그린힐을 구경하고 있었다.
에스텔이었을 적, 기사가 되어 국왕에게 저택을 하사받았을 때도 그녀는 그곳에 거의 묵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걸어 다녔고, 말을 타곤 했다. 그녀는 언제나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그런 에스텔이 루시펠라로서 백작가에 있는 것은 고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이 입을 드레스를 직접 사겠다고 고집을 부렸고―사실 옷에 대해 하나도 모르니 하녀에게 떠맡길 생각이었다―치안이 안 좋으니 호위기사를 대동하는 조건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루시펠라는 낯선 도시의 정경을 보았다.
얼샤의 형제의 나라라는 말답게 얀스가르는 비슷한 건물 양식이었으나, 얼샤의 채도가 낮은 색과는 다르게 건물의 색이 다채로웠다.
장밋빛 벽돌 길을 지나가며 발전된 수도의 모습에 그녀는 쓴 미소를 지었다.
이 나라의 발전은 멸망한 나라들의 눈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호사를 누리는 귀족 중의 하나가 자신이 되었다는 것이 씁쓸했다.
“길거리가 왜 이렇게 소란스러운 거지?”
그녀의 말에 하녀가 마부와 통하는 창문을 열어 마부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 지금 연쇄살인에 대해서 조사하고 있어서 그렇대요.”
“연쇄살인?”
“왜, 저번에 말해 드린 거 있잖아요.”
“아, 여자만 골라서 죽이는 그거? 칼잡이?”
하녀들은 답답해하는 루시펠라에게 바깥의 소식을 가져와 주었다.
그중 가장 화제가 되었던 것이 칼잡이의 살인에 대한 것이었다.
여자만 죽이다니, 역시 얀스가르도 미친놈들이 있다고 냉소했던 기억이 났다.
“범인을 알아냈대요.”
“정말?”
아, 그래서 범인을 잡으려 이렇게 소란스러운 모양이구나.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범인이 누군데?”
“리어…… 리엄 히르카래요.”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다. ‘히르카’라는 성까지 들었으니.
“리엄이라고?! 그러니까 그 얼샤의?”
“네, 얼샤의 잔당들이요.”
하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장, 그 예쁜 얼굴에 인상 좀 쓰지 마라. 그러다 주름살 생긴다.”
턱밑에 흉터가 있는 덩치 큰 남자. 서른이 넘었으나 어린 나이에 단장이 된 에스텔을 능글거리면서도 아주 잘 따랐던 부관 중 하나였다.
“네, 바보같이 얼샤 왕국이 아직도 독립될 거라 생각하나 봐요. 그래도 여자를 죽이다니, 나쁜 놈이에요. 황제 폐하가 벌을 내리실 거예요.”
“독립을 주장해?”
“네, 사람들을 이끌고 시위를 한대요. 저번에는 어디였더라? 그 바반드 백작에서 종탑을 파괴했다나 봐요. 이번에 연쇄살인을 조사했더니 그 인간이 이곳 수도에서 목격되었다나 봐요. 폐하께서 눈에 불을 켜고 잡아들일 생각이라고. 아, 무서워라.”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가 알기로 얼샤는 부속령이 된 지 오래다. 그리고 투항한 영주들에게 그대로 영지를 주고 통치하라고 했다.
황제의 대우는 퍽 온건했다.
그럼에도 독립을 주장하다니. 그는 신의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갑자기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가씨? 우세요?”
“아니, 아니야.”
“걱정 마세요, 지금 기사들이 모두 리엄을 잡으러 모여들고 있대요.”
리엄의 얼굴이 떠올랐다. 모든 부하가 그녀를 배신했다고 생각했지만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 리엄은 애초에 그럴 녀석이 아니었다. 왜 자신의 부하들을 믿지 못했나.
칼리드의 배신에 죽음이란 큰 사건을 겪고, 겨우 얀스가르인들의 기록하나에 믿고 절망하고, 그런 자신이 한심하게 느꼈다.
“역시 돌아갈까요? 백작님도 돌아오시라 하실 거예요.”
“아니, 괜찮아. 호위기사들도 있잖아. 그리고 저렇게 수도에 기사들이 많이 깔려 있는데 곧 잡히겠지.”
루시펠라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리엄, 리엄을 만나야 한다.
수도 안에 있다면, 리엄에게 자신을 증명한다면 분명 알아봐 줄 것이다. 어쩌면 낯익은 부하들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녀에겐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리엄이 황제에게 붙잡힐 수도 있었다. 이것은 기회인 것이다.
너무 무모한 계획이었지만 그녀는 그를 만나러 가야 했다.
얀스가르의 레이디가 얼샤 독립 세력인 리엄을 만날 수 있는 기회 따윈 없으므로.
***
“너도 한번 입어보는 게 어때?”
그녀는 하녀에게 말했다. 그 말에 하녀도 치수를 재며 드레스를 내오던 재단사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생하는 하녀에게 옷 한 벌 사주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아, 아가씨!”
샵에 다다른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하녀에게 말했다.
루시펠라의 얼굴은 그녀의 그 포악했다던 성격과는 다르게 너무나 청순하여 해맑은 느낌을 주었다. 신의 명령으로 거짓을 절대 말할 수 없다는 신의 종인 천사처럼.
샵의 주인은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녀에게 드레스를 지어 입히라는 아가씨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귀족 영애들의 최고급 드레스만 입힌다는 프라이드도 루시펠라의 엉뚱한 말에 잠시 동안 제 갈 길을 잃었다.
“아가씨, 이건 정말 제게 너무 과해요.”
하녀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며 말했다.
“괜찮아. 나도 지금 심심해서 그러는 거니까. 사실 아버지가 내 행동 가지고 혼내지는 않을 거잖아? 수십 벌 드레스에서 하나만 더 추가되는 거야. 나한텐 부담도 없고, 나는 네 드레스 입은 모습도 보고 싶고, 뭐가 나빠?”
“저는 그럴 자격이 못 돼요, 아가씨.”
“왜? 사실 내가 옷을 예쁜 것만 입어서 너도 입으면 예쁠 텐데. 분명 아가씨처럼 보일 거야.”
“아니에요, 절대!”
그렇게 부정한 것치고 하녀의 두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싱긋 웃었다. 노력했던 아가씨 말투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아, 그러면 이렇게 하자. 옷을 한번 바꿔 입어보는 거야. 그래서 네 말이 사실인지 내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는 거지.”
루시펠라가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저 하녀는 아까부터 그녀를 부럽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어떻게 빠져나갈지 묘안을 짜다가 즉흥적으로 나왔지만 묘수라고 생각했다.
“아가씨, 그렇지만 저는 아가씨의 옷을 제작하는 사람입니다. 저, 그러니까…….”
뒤늦게 정신을 차린 재단사가 루시펠라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제 장난에 동참해 줄 가게에 가는 수밖에 없겠군요.”
에스텔이 아니더라도 본 이 육신의 주인인 루시펠라는 원래부터 고집이 셌으며, 그게 충족되지 않으면 한없이 잔혹해지는 사람이었다.
요새 앓다가 일어나서 그녀의 기세는 꺾였지만, 또 들어주지 않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눈빛은 그때의 그 독살스러운 눈빛이 아닌 명령을 내리는 사람 특유의 위압적인 눈빛이었지만, 이들이 그런 것을 구분할 수는 없었다.
“얼른 하녀복 벗어줘.”
제멋대로 아가씨라는 것은 편했다.
결국 하녀는 포기하고 옷을 벗었다. 사실 그 하녀는 ‘아가씨가 원했으니까’라는 핑계를 대며 루시펠라의 지시에 따랐다.
루시펠라는 들어오면서부터 이미 이 가게에 있는 후문 위치를 파악해 뒀다.
옷을 벗기 전 하녀의 치수를 잰 재단사는 이 일을 빨리 끝내고 싶었는지 하녀에게 맞는 옷이 있노라며 드레스를 한 벌 가져왔다.
화려한 디자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천은 고급이었기에 하녀는 그 옷을 기쁘게 받아 들었다.
하녀가 먼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러자 루시펠라는 드레스를 가지고 탈의실로 향했다. 하녀가 따라오려 했지만 그녀는 거절했다.
그녀는 재단사에게 하녀의 머리를 묶을 리본과 맞는 구두를 가져오라 명령했다.
재단사는 행여 이 제멋대로 귀족 아가씨가 기분이 상해할까 가게를 떠나 옆에 있는 리본 가게와 신발 가게에 갔다.
“정말 옷 괜찮으시겠어요?”
“응.”
루시펠라는 최근 옷 시중을 상당히 귀찮아했기에 하녀는 별 의심 없이 그녀를 혼자 탈의실로 보냈다.
일단 하녀로서도 평생 입어보지 못할 고급 드레스를 입었다는 데 들떠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계속 비춰보고 싶었을 것이다.
루시펠라는 탈의실의 문을 닫은 후 옷을 벗어 내렸다.
아직 몸이 좋지 않기에 몸에 무리를 주는 코르셋은 착용하지 않아 옷을 벗는 데 딱히 어려운 점은 없었다.
그녀는 하녀의 옷을 입었다.
사용인이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아이딘 백작가에서 제공한 옷인지라 옷은 그렇게 허름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원래 그녀는 옷의 재질을 따지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하녀의 남색 원피스를 입고 하녀의 가죽신을 신었다.
그러곤 리본으로 묶었던 머리를 풀어 내렸다. 긴 머리를 늘어뜨리며 고개를 숙이고, 탈의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 하녀를 확인했다.
그녀는 신이 나서 드레스를 입은 자신을 거울에 이리저리 보고 있었다.
루시펠라는 그에 문을 조용히 열었다.
기척을 죽이는 것은 그녀에게 특화된 기술이었다.
물론 지금은 루시펠라가 되어버렸기에 능력은 형편없었지만, 방심하고 있는 하녀를 속일 정도는 되었다.
그녀는 눈여겨보았던 후문의 문을 보았다. 편의상 이용하는 문답게 후문은 당장 나갈 수 있도록 걸쇠가 걸려 있지 않았고, 빗장이 걸려 있었다.
그녀는 아주 살살 빗장을 벗겨냈다. 그러곤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루이자인지 로이자인지 모를 하녀에게 미안하다는, 사실 할 필요도 없는 사과를 하면서.
도망에 성공한 루시펠라는 최대한 사람들 사이에 녹아들려 노력했다.
루시펠라의 아름다운 외모가 눈에 띈다는 자각은 있었기에 그녀는 최대한 고개를 숙였다.
얀스가르의 수도의 지리는 잘 알지 못하고, 리엄을 어디서 만날 수 있을지는 몰랐지만 일단 어떻게든 해봐야지.
그녀로선 별로 손해 볼 것은 없었다. 발견하지 못하면 다시 백작가에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그녀는 리엄과 연쇄살인에 대해 생각했다.
그 연쇄살인은 기괴했다. 사람들보고 발견하라는 듯 대로변 주변에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했다. 살인 장소가 한정된 곳이 아니기에 공범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리엄이 범인으로 지목되면서 그것이 얼샤 잔당들이 짜고 벌인 수작이 되는 것 같지만, 리엄이 여자를?
절대 아니다. 그놈은 여자를 못 죽인다. 약한 이들에게 더 약한 게 그놈이었다.
특히나 그 덩치로 여자나 어린아이에게 쩔쩔매는 모습이 가장 볼만한 놈이었다.
차라리 하녀의 말 그대로 종탑을 부수거나 유력자를 죽이는 화려한 방식이라면 몰라도 여자를 순차적으로 공격할 놈은 절대 아니었다.
그렇다면 연쇄살인과 리엄을 분리해서 봐야만 했다.
우선 연쇄살인의 범인은 누구인지 모르지만, 리엄이 수도에서 목격되었고, 얀스가르의 기사가 그를 찾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리엄이 여자를 죽였던 살인마냐의 여부가 아니라 그녀가 만날 수 있느냐였다.
그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패물을 현금화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마침 보석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적당한 장소로 들어갔다. 신변에 위협이 생길지도 모르니 완전한 뒷골목은 안 되며, 또 커다란 상단이 운영하는 판매소는 신원 보증이 확실해야 하니 안 되었다.
적당한 곳, 적당히 허름한 가게. 그녀가 걷고 있는 것이 옷과 보석을 판매하는 구역이었기에 그러한 가게는 금방 발견되었다.
아름다운 얼굴을 한 여자가 팔려고 내민 귀걸이에 상인이 힐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당당하며 여유로운 표정과 더불어 격의 없는 말투는 상인으로 하여금 루시펠라가 어디 귀족가에 들어간 애첩인가 보다 생각하게 했다.
그는 어음을 내주겠다 했으나 그녀는 그저 휴대하기 편리한 현금을 달라고 말했다.
얀스가르의 화폐의 단위는 얼샤와 비슷할 거라 생각하며 그녀는 돈을 대충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가 두둑해지자 말을 살까 생각했으나, 말을 타는 여자들이 없는 것으로 보아 말을 타다간 금방 들켜 잡혀갈 게 뻔했다.
그때였다. 대로에 기사들이 말을 몰고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말들이 위협적으로 도약하고 있었다. 기사들의 긴장 어린 모습에 사람들의 얼굴에 불안감이 서렸다.
여덟의 기사가 쏜살같이 대로를 달리고, 사람들이 그 기사들의 뒷모습을 보며 수군거렸다.
“무슨 일인가요?”
답을 알 것 같으면서도 그녀는 가장 근처에 있는 중년 남자에게 물어보았다.
중년 남자는 루시펠라의 모습을 보며 놀라다 그녀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어여쁜 얼굴을 드러내자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리엄 히르카, 그 녀석을 잡으려 이 난리들인 거야. 수도 서북쪽에 나타났다는군.”
“서북쪽이요?”
그녀가 눈을 크게 뜨자 중년 남자는 그것에 기분이 좋은 듯했다.
“그래, 2기사단과 루이르크 공작 각하가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켠다더군. 조만간 잡힐 거다.”
“……여긴 수도 어느 쪽이죠?”
그는 루시펠라가 겁에 질렸다고 생각하는지 웃으며 말했다.
“여긴 남동쪽이라 아무 관계도 없는 가장 안전한 지대란다. 그리고 너…….”
남자가 말을 더 이으려 할 때, 루시펠라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역시 말을 타는 수밖에 없나.
이 근처에 말을 파는 곳은 없을까 돌아다니던 차에 그녀는 대로변에 있는 붉은색 마차를 보았다. 마차를 보니 상단의 것으로 보이는 인장이 새겨져 있었다.
아. 사설 마차, 왜 이걸 생각하지 못했지?
얼샤에서도 본 적이 있었다.
언제나 마차와 마부를 준비할 수 있는 귀족 가문과는 달리, 일반인들은 마차를 사서 유지할 돈이 없었다. 그래서 만들어낸 개념이 ‘사설 마차’였다.
이동 거리가 많은 평민은 삯을 내고 마차를 탔다.
귀족들에게는 자신을 따라 한 평민들이 있다는 것이 불쾌한 일이었지만 이동 거리가 넓어짐으로써, 경제적으로 창출되는 효과가 생각보다 컸기에 이 사설 마차는 모든 이에게 각광받았다.
루시펠라는 몇몇 사람이 손을 흔들며 마차를 부르는 것을 보았다.
그녀도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마차가 한 대 멈춰 섰다.
“어디까지 가려고?”
“서북쪽이요.”
“서북쪽?”
“서북쪽 아무 데나 내려주시면 돼요.”
마부는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거긴 너무 위험하니 못 가. 아가씨도 집에 돌아가지그래?”
루시펠라가 무어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 마차는 지나가 버렸다.
루시펠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후 몇 대의 마차를 더 불러 세웠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웃돈을 더 얹어준다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일단 리엄이 탑을 무너뜨렸다는 것에 사람들은 겁에 질린 듯했다. 그렇게 그녀가 역시 말을 빌리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하던 때였다.
“어디까지 가죠, 아가씨?”
자신 앞에 또 다른 마차가 멈춰 섰다.
루시펠라는 이번에도 거절당하면 말을 타겠다고 생각하며 서북쪽이라고 말했다. 마부는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루시펠라는 이 마부가 별로 추운 날씨도 아닌데 옷을 두껍게 입었다고 생각했다. 그때 마부가 말했다.
“타요.”
***
“갑자기 상단들은 왜 들르시는 겁니까! 단장님, 지금이라도 리엄을 잡아야 합니다.”
부단장의 물음을 무시하던 제드는 부단장의 재촉에 결국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경비대, 순찰대, 황성수호대 놈들은 전부 다 전쟁터 한 번 제대로 나가 보지 않은 샌님들이니 잘 보지 못했겠지. 그러니까 굳어버린 머리로 여직 그 쥐새끼 놈을 못 잡았던 거야. 그 새끼들한테 머리는 그냥 장식이거든. 의관 놈들도 족쳐야겠군. 시체만 제대로 봤어도 빨리 끝났을 일을 이렇게 지체하다니.”
제드의 분노 어린 말에 부단장은 의아했다.
제드는 부단장에게 목록을 던져 주었다. 부단장은 그 목록을 받아 들었다. 상단에 등록되어 있는 사설 마차 명단이었다.
“가이드에까지 생각이 나간 건 칭찬해 주지. 다만 살인사건이 여러 군데에서 일어났으면 제일 먼저 이동 수단부터 점검했어야지.”
“하지만 그때 마차를 탔던 수상한 사람은 없었다고 보고되지 않았습니까?”
“그 마차의 탑승자가 아니라 그 마부. 그 마부가 문제일 거라는 생각은 머릿속에 없었나 보지?”
그 말에 부단장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말도 안 됩니다. 여자를 살해했다면 마차에서 내려서 공격 대상을 물색했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너무 마차는 걸리적거리지 않습니까…….”
“칼로 난자당한 것치고는 피가 너무 적다고 생각은 안 해본 거지?”
“피가 말입니까?”
전쟁터에 있으면서 깨달은 것은 인간이 정말 피와 지방으로 이루어진 고깃덩어리라는 것이었다.
피는 인간의 육신을 구성하는 요소다.
그러나 여자들이 흘린 피는 지나치게 적었다.
그렇게 칼로 여러 번 찔렸다면 주변은 이미 피바다가 되어야 했지만, 육체에서 흘러내려 고인 정도로 끝났다. 부단장 역시 그것을 깨달은 듯했다.
사실 살인을 당한 여자와 전쟁터의 낭자한 시체를 연결 짓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그저 이들은 여자의 시체와 남자의 시체가 좀 다르려니 넘어가기도 했던 것이다.
살해당한 이들은 모두 평민이었다. 의관들은 여성, 특히나 신분이 그리 높지 않은 이의 시체를 보는 것이 불길하다고 검시를 거부했고, 그랬기에 모든 것들이 꼬여 버렸다.
모두가 지나치게 안이했기에 속수무책으로 그 쥐새끼에게 당한 것이다.
“그 쥐새끼 놈은 다른 곳에서 여잘 죽이고 다시 시체를 데려다 놓은 거야.”
마차라는 것은 시체를 운반하는 수레에 불과했다.
전쟁터에서도 사람을 죽이는 것을 즐기는 미친놈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미친놈들이 이런 도시에 숨어 있다면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이었다.
그 악취미 같은 피로 새긴 글씨 역시도 자신을 드러내는 과시욕의 발현이자 연막이었다.
피로 글자를 새겼기에 피의 양이 많아 보임과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이곳에서 살인이 벌어졌다고 생각하게 됐다. 모두 그 ‘괴기함’에 주목했기에 다른 것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 시체를 운반한 건.”
“마차였어. 아주 재미있는 장난을 치고 있었지.”
그는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단장 역시도 그제야 제드가 상단을 들렀던 이유를 깨달았다.
제드가 방문했던 곳은 사설 마차를 운영하는 상단이었다. 이들은 모두 사설 마차를 이용할 만한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사설 마차를 운영하는 상단이 세 개. 여기가 마지막이지? 전부 다 조사해. 오늘 만약 해결하지 못하면 몇 시간 후 또 시체가 발견될 거다.”
부단장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체를 잡았는데 범인을 잡지 못한다면, 기사단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될 것이다.
“마부 중에서 마차를 여러 대 소유한 사람 위주로 해. 시체를 옮긴 마차를 바로 쓰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피 냄새는 꽤 오래 남거든.”
사설 마차의 바닥은 철로 만들어졌지만 그 의자는 나무로 만들어졌다. 귀족들의 마차와는 다르게 천이 없기에 씻기에는 용이했다.
그때 건물 안에서 고함 소리와 더불어 울음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부단장과 눈짓을 교환한 그는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상단 건물의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았다. 그곳에는 익숙한 사람이 있었다.
“아이딘 백,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분명 그 고함 소리는 아이딘 백작의 소리였음이 틀림없었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던 남자의 머리는 흐트러졌으며, 그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제드를 보더니 소리쳤다.
“내, 내 딸! 내 딸 루시가 사라졌소!”
이제 보니 백작의 두 눈에는 눈물까지 고여 있었다.
뭐, 사라질 수도 있지. 그걸 가지고 유난이란 말인가. 지금 바빠 죽겠는데. 안 그래도 쥐새끼 때문에 분노하고 있던 제드가 더욱더 얼굴을 찡그렸다.
“저택에서 말입니까?”
“아니, 이곳에서. 이곳에서 사라졌단 말이오! 하녀 옷을 입고 도망가 버렸소!”
하녀 옷? 여기서?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무슨 일인지 제대로 설명해 주십시오.”
하아. 백작에게서 자초지종을 전부 다 들은 제드는 한숨을 쉬었다.
방금 망할, 이라는 욕을 내뱉어 버릴 뻔했다. 지금 정신을 집중해서 쥐새끼를 색출해 내도 모자랄 판에, 사람 하나 찾으러 시간을 허비하게 생겼다.
연쇄살인이 일어난다면 적어도 집에 얌전히 처박혀 있을 머리는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하녀 옷을 입고 가출을 해? 미친 게 틀림없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설마 하는 가정이 떠올랐다.
그 가정은 걱정에 가까웠다.
그러나 우연의 일치라는 게 그렇게 딱딱 맞아떨어질 리도 없고. 그녀가 사설 마차를 탈 확률은 얼마 없…… 지는 않았다. 꽤나 높은 확률로 그녀는 마차를 탈 것이다.
그 여자, 힘도 엄청 약할 텐데. 아니지. 마차 중에서 그 쥐새끼가 있는 마차를 탈 확률은 얼마나 높겠는가.
걱정 비스무리한 걸 잠깐 하고서 제드는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기사 다섯은 경비대와 공조하여 아이딘 백작 영애를 찾는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