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그린힐의 연쇄살인마
2017.03.09.
황제의 부름을 받고 황궁에 들어간 제드는 노골적으로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복도 너머에 이쪽으로 다가오는 루이르크 공작 때문이었다.
제드에게 있어서 싫어하는 것은 너무나도 많았지만 그가 표정에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까지 싫어하는 사람은 저 한 명뿐이었다.
“이거 반갑습니다, 하인트 공.”
준수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서렸다.
푸른색 머리카락과 자색의 눈동자. 그의 얼굴은 여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듯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제드는 당장에라도 구역질을 할 것 같았다.
“피차 마주하면 기분 좋을 면상도 아닌데 좀 치워줬으면 좋겠군, 루이르크 공.”
“하하, 아쉽게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왠지 우리 방향이 같은 것 같거든요.”
“뭐?”
그가 인상을 쓰자 루이르크 공작의 미소가 짙어졌다. 수려한 미소는 너무도 아름다워서 제드는 그의 얼굴을 한 대 후려갈기고 싶었다.
물과 기름, 얼음과 불처럼 그들은 섞일 수 없는 존재였다.
아마 저 녀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제드는 루이르크 공작이 너무도 싫었다.
싫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제드가 혐오하는 부류가 있다면 바로 루이르크 공작과 같은 부류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폐하를 알현하러 가는 거죠? 저도 같습니다.”
“……제길.”
그는 나지막이 욕을 내뱉었다. 결국 방향이 같으니 같은 복도를 지날 수밖에 없었다.
알현실은 당연하겠지만 이어진 통로가 하나뿐이었다.
“참, 약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약혼자가 얀스가르의 샛별로 불리는 그 유명한 아이딘 백작 영애라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
“아, 영애의 존안을 몇 번 먼발치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만, 너무 아름다우신 분이시더군요, 황태자 전하께서도 잠시나마 매혹될 만큼.”
황태자가 잠시나마 가지고 놀다 버린 여자라는 걸 조롱하고 있는 것이었다.
제드는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저 남자는 검을 씀에도 기사보다는 귀족으로 보였다.
제드는 루이르크 공작의 저런 우아한 조롱법 역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이딘 백작 영애께서는 공작을 보고 기뻐하셨을 겁니다. 분명 그랬겠지요? 몸이 안 좋으시다는데 큰일이군요.”
그 ‘약혼녀’가 황태자에게 매달리다 비참하게 거절당하고는 그 길로 황궁 호수에 뛰어든 일마저 언급했다. 침묵하던 제드는 입을 열었다.
“그러는 공은 아이딘 영애보다 더 황태자 전하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더군.”
“누가 들으면 오해하실 것 같습니다. 저는 황제 폐하의 신하인 것을요.”
“그래, 뭐, 그렇다고 해두지.”
루이르크 공작이 황태자파의 앞잡이로서 하는 행동을 굳이 서술하는 것은 하수나 하는 짓이었다.
제드는 정보력을 가지고 있었고, 루이르크는 제드가 그런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제드는 그저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노력하는 공의 소식은 정말 잘 듣고 있어.”
“…….”
“뭐, 대다수는 헛수고지만 말이야. 그래도 내 공의 치적은 폐하께 말씀드리지.”
“이거 참, 과분한 관심에 감사할 따름이군요.”
루이르크가 마주하며 미소 지었다.
너구리 같은 자식. 제드의 적갈색 눈동자가 루이르크 공작을 싸늘하게 훑었다.
복도를 걷는 동안 두 남자에게는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았다.
약혼녀라. 제드는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의 머릿속에 그 약혼녀라는 여자가 떠올랐다.
귀족의 생리로 따져 보자면 아이딘 영애는 오히려 그를 반겨야 마땅했다.
그런 추태까지 벌여 혼처는 늙은 귀족의 두 번째 부인으로 시집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음에도 그와의 약혼으로 살아날 길을 마련해 두었으니.
뭐, 의외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말하는 모습은 정상적이라 놀라긴 했지만 역시 그녀는 철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더없이 싸늘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너 때문에 황태자와 맺어지지 못했어’라는 것 같았다.
심지어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듯 자리마저 권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그가 루이르크 공작을 혐오하듯 그녀 역시 자신을 ‘혐오’하고 있었다.
제드는 자신이나 자신의 가문이 아이딘 백작이나 백작 영애에게 무언가 하지 못할 짓이라도 한 건가 생각했다.
하지만 혼약을 전달할 때는 매우 정중한 편지를 썼고, 백작 역시 바로 답장을 보낸 것을 보아 내심 기뻐하는 눈치였다.
심지어 그 자살 소동 전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딘 백작 부녀와 지나가다 인사 정도는 했어도 서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왜 그런 눈빛이지? 그런데 또 생각해 보니 이상한 게 있었다.
‘말투가 묘하게 남자 같았지.’
반말로 하면 반말로 응대해 오는 참신함(?)에 어이가 없어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 잘 다듬어진 아름다운 얼굴에서 남자들의 말투가 나왔다.
게다가 그 느낌과 어투는 ‘군인’ 느낌이 났다.
너무 자연스러웠기에 그땐 몰랐던 것이다. 물에 빠졌다니 역시 정신이 이상해진 건가. 미친 아내는 사양인데.
그러나 제드는 본디 비현실적으로 과장해서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설마 진짜 미쳤겠는가, 말하는 게 예의가 없어서 그렇겠지.
그 불쾌한 첫 만남에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혼인하자마자 이혼하겠노라고 말했지만, 그것도 일이었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니 절로 짜증이 났다.
이윽고 알현실에 다다른 두 남자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얀스가르의 태양이여 영원하라. 폐하를 뵙습니다.”
“얀스가르의 태양이여 영원하라. 폐하를 뵙습니다.”
그들은 같이 무릎을 꿇어 얀스가르의 황제에게 예를 올렸다.
이 나라의 황제인 바이두는 왕국에 대한 정복전쟁을 활발히 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형제의 나라인 얼샤를 침공하여 지배하였고, 그 후로부터 그를 스스로 ‘황제’라고 칭했다.
얀스가르 왕국은 제국이 되었고, 왕궁은 황궁이 되었다.
그가 황제가 된 이유는 간단했다.
그저 넓은 땅을 소유하고 싶어서. 그래서 얀스가르는 이웃 나라 베른을 쳤고, 남쪽의 튀링겐을 쳤다.
그리고 서북의 강국인 이자힐과 더불어 그 옆의 부족국가인 카라얀이 그의 손에 떨어졌다.
넓은 평야와 숲, 지원이 풍부한 산. 모든 것은 그저 ‘짐이 원한다’는 지배자의 아주 간단하고 잔혹한 논리 아래 이루어졌다.
이 엄청난 변화를 이룩해 낸 황제는 지금 근심으로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노인은 한쪽 손으로 이마를 짚었는데, 그것은 그 근심의 정도가 중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눈썹 사이에 서린 주름과 그의 눈빛으로 보아 그의 눈에는 새파란 노기가 서려 있었다.
제드는 황제가 분노한 이유를 짐작했다. 아마 루이르크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황제는 그들에게 손짓으로 일어나게 했다.
격식을 중시하지 않는 건 아니었으나 경시하지도 않았던 황제에게서 인내심이 사라져 있었다.
“하인트 공, 루이르크 공.”
“네, 폐하.”
황제는 한숨을 쉬더니 이마에 짚은 손을 떼며 그들을 응시했다. 그에 제드와 루이르크 역시 허리를 세웠다.
“짐의 백성들이 왜 죽어가고 있을까.”
“…….”
“짐의 백성들이 왜 처참하게 죽어가고 있을 것 같나.”
황제는 문안 인사를 생략한 채 본론부터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요새 수도에서 일어나는 일을 떠올렸다. 바로 이 제국의 수도 그린힐에 일어나는 연쇄살인사건에 대한 일이었다.
여자만을 골라 죽이는. 죽여도 처참한 꼴을 만들어 버리는 추리소설마저도 이젠 진부하다 못해 다뤄지지 않는 이야기.
그것이 전쟁이 끝난 평화로운 수도 한복판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순찰대, 경비대, 심지어는 황성수호대까지 파견되어서 살인사건을 조사하려 했지만, 살인사건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었다.
동일범에 의한 연쇄살인사건이라고 알았던 이유는 시신에 대한 잔인한 방식과 두 번째 살인부터 그 피로 옆에 쓴 글자, ‘나는 칼잡이야’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몸은 처참하게 난도질당한 채 목숨을 잃었으며, 그들의 피는 그 벽에 쓰여 있는 ‘칼잡이’라는 글자의 붉은 도료가 되었다.
단순한 강도 사건이라기엔 시신의 훼손도가 지나치게 높았다.
젊은 여성. 신분을 가리지 않는 살인. 단순한 살인사건이라 여겼던 그린힐의 거리는 대번에 흉흉해졌다.
“1기사단, 2기사단의 단장들인 자네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겠지.”
제드는 망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1기사단의 단장이었고, 2기사단의 단장은 루이르크 공작이었다.
사실 1기사단 단장이라는 직위는 그에게 명예직이나 마찬가지였다.
루이르크와 달리 제드의 1기사단의 실질적인 실무는 모두 부단장과 그 보좌관이 수행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제드는 수도 안쪽에서 황실 관련 업무보다는 실제 전장에서 뛰어다녔기 때문이다.
황제는 그에게 기사단장 직을 주었지만, 그는 지휘관으로서 전장을 돌아다녔다.
황제가 그들의 직책을 부른 것이라면 단장으로서 무언가를 시킬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제드의 예상이 맞다면,
“사흘. 사흘 주겠다.”
황제는 그들에게 그 살인범을 잡아오라고 명했다.
***
“아가씨, 제발 좀 그만하세요.”
하녀의 애원에 루시펠라는 걸음을 늦췄다. 숨이 헐떡이며 심장이 방망이질했다. 땀이 주르륵 흘러내려 그녀의 몸에 달라붙었다.
누가 봐도 거친 행동을 했다 여기게 될 모습이었으나 안타깝게도 루시펠라는 지금 겨우 정원을 두 번 돈 것뿐이었다.
그것도 뛰는 것도 아닌 걸음을 약간 빠르게 한 정도로.
루시펠라의 몸은 에스텔에게는 커다란 재앙이었다.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이런 여자가 대체 그 화장은 어떻게 하고 파티를 갈 체력이 있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루시펠라가 가장 먼저 하기로 했던 일은 아주 간단했다.
그녀는 우선 체력을 기르고자 했다.
이 형편없는 몸으로 에스텔처럼 몸을 마음대로 다루지는 못할지언정 걷는 것은 좀 하고 싶었다. 이왕이면 자기 몸도 지키고.
금지옥엽으로 키워진 루시펠라에게 무슨 위험한 일이 닥치겠냐마는, 그녀는 그러고 싶었다.
“아가씨!”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주인님께 말씀드릴 거예요.”
“그래도 소용없어. 내가 그렇게 하고 싶으니까.”
하녀들은 언제나 날이 서 있으며 표독스러웠던 그들의 아가씨가 조금은 고집스러워졌지만 그래도 온순해진 것을 금세 깨달았다.
그리하여 영민한 여자들은 루시펠라가 어느 정도 선, 아니, 선이라는 것이 없이 그녀들을 귀엽게 봐준다는 것을 알았다.
기억을 잃어버린 그들의 아가씨는 어딘지 모르게 조금 서툴면서도 관대하며 그래서 더욱 귀여웠다. 다 큰 성인임에도 아기 새처럼 그들의 보살핌을 얌전히 받아들였다.
“그럼 제가 양산 씌워 드릴게요.”
“무슨 그런 걸 귀찮게 씌워, 팔 아프게. 그리고 내가 더 키가 크잖아. 그러니까 네 이름이…….”
“로이자예요.”
“그래, 로이자.”
아, 또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녀는 하녀들에게 친근하게 굴었으며 이름 역시 기억하려는 노력 정도는 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노력은 효과적이지 못해 언제나 이름을 헷갈려 했지만.
언제나 아가씨의 살벌한 신경질로 인해서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저택은 어딘지 모르게 둥글둥글한 분위기가 되었다.
마치 봄날의 개나리가 피어난 것과 같은 분홍과 노랑이 가득한 분위기.
하녀들은 루시펠라의 포악함을 기억했지만, 그녀에게 딱히 원한을 품지는 않았다.
하녀들에게 원래 윗사람들은 그런 존재였다. 또한 루시펠라에게 감정을 품기에는 그녀는 너무나 높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녀가 지금 하는 행동 하나하나는 그동안 서운했던 마음을 스르르 풀게 해주었다.
원래 못 했던 사람이 한 번 잘하면 그것이 가슴에 남는 법이었다.
그들의 아가씨는 가끔 여자가 힘든 일을 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자신들보다 더 연약한 주제에, ‘아니, 너희들은 어떻게 이런 걸 들어? 나에게 시켜’라고 하다가 몇 번 집사에게 혼이 난 적도 있었다.
사용인들은 루시펠라 아가씨가 천성은 나쁘지 않은 것이며 못된 것만 배웠기에 그런 것이라 납득했다.
백작 역시도 루시펠라의 변화에 기뻐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까다로움을 버리고 웬만한 것에는 그냥저냥 만족했기 때문이다. 모두들 루시펠라 안에 있는 에스텔에게 익숙해져 갔다.
“이건 뭐야?”
“주인님께서 선물로 주신 거예요. 아가씨가 사달라 하셨잖아요.”
결국, 그녀는 하녀의 권유로 방에 들어와야 했다.
그녀가 집에 들어오자 하녀 한 명이 주인님이 보냈다며 선물상자를 가져왔다. 상자를 여니 그녀가 원했던 것이 들어 있었다.
그냥 어디 화려한 장신구였다.
단도의 검집은 두꺼워 화려한 진주와 보석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심지어 검집은 우윳빛 유림석으로 만들어져 묵직해 휴대성이 최악이었다.
그녀는 무거워 벗겨지지 않는 검집에서 검을 꺼내 날을 보았다.
제법 날카롭긴 했으나 내구도가 최악이었다. 이걸 가지고 호신하는 것도 웃기다.
혹시 무슨 일이 있다면, 제일 먼저 빼앗겨 비싼 값에 팔리겠지. 그냥 레이디들은 남자들에게 보호나 받으라는 소리군.
그녀는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랴.
최근 바깥이 흉흉하다는 이유로 그 위험한 단도를 쉽게 구했다.
그러나 백작이 단도를 구한다고 해서 진짜 살상용 무기를 구해줄 거라 생각했던 게 잘못이었다.
단도를 목에 걸며 루시펠라는 한참 동안 그 단도를 바라보았다.
꼭 이 단도가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지나치게 화려하고 무거운 검집에 짓눌린 은색의 날카로운 날. 그것은 루시펠라 속에 있는 에스텔이었다.
***
제드가 수사에 착수하는 당일 저녁. 살인사건은 또 발생했다.
여자는 또 그때처럼 처참하게 죽어 있었다.
수도경비대장과 황성수호대 일원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결국 황실에서 기사단까지 파견되었다. 그러한 사실을 대대적으로 알렸음에도 마치 그를 조롱하는 듯했다.
쥐새끼 같은 놈. 그는 이를 으득 갈았다.
살인 현장은 여전히 끔찍했다.
길은 마차가 지나갈 정도로 상당히 넓었고, 여성은 칼로 난도질이 되었고, 그 벽에는 ‘칼잡이의 두려움’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기사들이 파견되어 무서워 죽겠다고 비웃는 것이다.
살해당한 사람들은 또 그때처럼 젊은 여성이었다.
수도의 커다란 상단에서 서기로 일하는 여자였고, 돌아가는 길에 살해당했다.
“또 칼에 찔린 모양이로군요.”
제드의 옆에 있던 어두운 자색의 제복을 입은 루이르크 공작이 시신을 보고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그건 제드 역시 알고 있었다. 칼잡이라는 말 그대로 시신은 칼에 찔렸다.
군의관은 여자의 시체를 보는 것은 불길하다며 검진을 거부해 왔다.
“아아 연약한 여자가 벌써 일곱이나 죽었다니 끔찍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공?”
“…….”
“뭐 알아낸 건 있으십니까?”
“전혀.”
살인범은 신출귀몰했다.
일정 거주지가 없다는 듯, 이 구역과 저 구역에서 쉽사리 살인을 저질렀다.
사체를 발견했던 사람들은 그들이 본 것 중에 특이한 점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말했다.
때는 저녁, 사람들이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갈 시간. 희생자들은 첫 희생자를 빼고 방어흔이라는 것이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등 뒤에서 습격을 당했기에.
강도를 당한 것도 아니고, 또 강간을 당한 것도 아니다.
우습게도 희생자들의 시체가 놓여 있던 장소는 항상 사람들이 밀집된 지역의 겨우 한 블록 뒤에 불과했다.
게다가 발견된 시각은 대체로 이 시각, 이 시각이 가장 유동인구가 많을 시각이라 그럴지도 몰랐다. 그렇게 사람이 많은데 대체 왜 목격자가 없는 것일까.
“매춘부에 서점 종업원, 식당 종업원, 유부녀에…….”
문제는 피해자들이 비슷한 나이 대 여자라는 것 이외에는 공통점이 없다는 것이다. 사는 구역도 다르다.
“정보 길드는 조사해 봤나?”
“네, 저 역시 피해자의 신원만 알고 파악해 두고 있답니다. 정보 길드는 범인이 가이드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었습니다.”
살인사건의 구역이 다양했던 만큼 칼잡이 살인마에 대한 소문은 계속해서 눈덩이처럼 퍼져 나갔다.
일곱 명의 희생자. 동, 북, 서. 남, 동 등등…… 심지어 그는 여자라는 소문도 돌았다.
살인의 주기는 일정치 않다.
그러나 그 ‘주기’라는 것이 있다면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2주일에서 일주일, 일주일에서 닷새, 닷새에서 사흘, 이틀에서 하루. 하루…….
“가이드. 가이드들이 있겠지?”
“네? 네.”
“가이드 녀석들 불러들여.”
가이드들은 수도에 처음 온 여행자나 상인들에게 일정 금액을 받으며 관광과 더불어 어디에 터를 잡으면 좋은지 설명해 주는 역할을 하는 이들이었다.
당연하겠지만 이들은 도시를 구석구석 알고 있었고, 언제나 말을 타고 다녔기에 평민들과 달리 이동이 자유로웠다. 그리하여 가장 먼저 의심을 샀다.
정보 길드가 범인에 대해 지목했듯, 황성수호대도 멍청한 놈들은 아니기에 가이드들에 대한 조사는 끝났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제드가 여자의 시체를 더 자세히 보고 있을 때였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려던 찰나였다.
“각하!”
기사단들 중 한 명이 뛰어왔다.
“무슨 일이지?”
“리엄 히르카가 목격되었다는 제보가 있습니다.”
“뭐?”
루이르크와 제드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리엄 히르카는 얼샤의 잔당 중 하나였다,
얼샤 왕국이 얀스가르 군에 의해 멸망하던 날, 국왕의 목이 잘렸음에도 끈질긴 놈들은 얼샤 왕국의 독립을 부르짖었다.
얼샤 잔당 중 한 명이라.
얼샤 왕국은 멸망했음에도 이렇게 잔당들이 존재했다.
가만히 닥치고 있으면 좋으련만, 이들은 가끔가다 가끔 과격한 방식으로 얼샤의 독립을 외쳤다.
이미 그 얼샤 왕국이 멸망하던 날, 자신들이 섬기던 왕의 목이 잘려 없어졌는데도 그러했다.
특히나 이들이 저지른 가장 끔찍한 행위는, 당시 얼샤 복속을 강하게 주장했던 바반드 백작령에 세워진 종탑을 무너뜨린 것이었다.
그들은 일명 ‘변절자’를 가장 증오했으며, 그 변절자의 죽음을 강하게 희망했다.
특히나 리엄 히르카는 꽤나 위협적인 반―얀스가르 세력 중 하나였다. 침묵이 그들을 감쌌다.
“아무래도 그가 연쇄살인의 범인이 아닐까요? 아니, 연쇄살인의 범인이 아니라 테러범이겠군요.”
루이르크 입에서 나온 매끄러운 말에 제드는 혐오스럽다는 듯 그 태연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사들이 루이르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런거렸다. 그렇게 되면 모든 기묘한 말이 맞았다.
리엄 히르카가 왔다면 그들의 ‘수하’들도 왔다.
벽에 피로 새겨진 칼잡이라는 글씨는 ‘리엄’의 직업이 얼샤의 기사였다는 것을 나타내는 지표였다.
살인의 주기가 짧아진 것은 이들이 황제를 압박하며 동료들을 모으기 위함이었다.
또한 여러 구역에 살인이 일어났던 이유는 공범, 즉, 얼샤의 독립 지원 세력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이들은 살인이라는 과격한 수단을 통해서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며 경고하는 것이다. 변절자의 처단과 독립을.
“2기사단들은 지금 리엄 히르카의 목을 찾아옵니다. 폐하께 그의 목을 바칩시다.”
루이르크가 빠르게 말했다. 2기사단의 기사들이 세워놓은 말로 빠르게 달려갔다. 그리고 황성수호대 역시 그 기사들을 따랐다.
루이르크는 여자를 힐끗 보더니 발걸음을 말로 향했다. 제드의 눈동자를 본 루이르크가 말했다.
“하인트 공, 빨리 안 가면 공적을 빼앗길지도 모릅니다. 우리 기사단 녀석들은 꽤나 뛰어나거든요.”
“그것참, 기대되는군.”
제드는 진심으로 루이르크가 싫었다. 저놈은 지금 자신이 어떤 짓을 저지른다는 자각을 하고 있긴 한 걸까.
말을 몰아 사라지는 2기사단을 보며 1기사단이 의아한 표정으로 제드를 보았다.
그들 역시 공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 하는 다급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제드는 말했다.
“루이르크 공이야 간과 쓸개를 다 빼줘서라도 그놈을 잡을 테니 노력할 필요는 없지. 우리는 그저 무슨 일이 없는지 수도를 순찰한다.”
“단장님!”
부단장이 불만스러운 듯 제드에게 말했다. 제드의 적갈색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그 서늘히 가라앉은 눈동자에 압도되어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제더카이어 하인트는 기사 중의 기사였으며 전쟁터의 살아 있는 군신이었다.
깨갱거리며 꼬리를 마는 부단장을 본 제드는 여자의 시체를 바라봤다.
피로 물든 채 누워 있는 여자. 여자의 시체를 보는 것은 너무도 불쾌했다. 그때, 얼샤 왕국의 멸망을 보았을 때도 그러했다. 특히나 그 여자의 목도.
제드는 여자의 시체로 다가갔다. 황궁에서 알아서 하겠지만 아무래도 그전에 자신의 선에서 이들 가족에게 보상을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웅크린 채로 쓰러진 여자를 제대로 눕힌 제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언가 놓치고 있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체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 그의 날카로운 눈이 여자를 훑었다.
그리고 제드의 머릿속에 환하게 불이 켜졌다.
피가, 여자가 흘린 피가 지나치게 적었다.
전쟁터를 누벼 시체만 신물 나게 봐왔던 제드였다.
그는 벽에 새겨진 '칼잡이'라는 글자를 보았다.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낸 순간 해답은 너무나 명쾌했다.
그때 가이드들이 오고 있었다. 마침 잘됐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