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2화 (2/173)

#2화 레이디에겐 약혼자가 있었다

2017.03.06.

루시펠라. 루시펠라 아이딘.

자신, 그러니까 이 육신에 주어진 이름이었다.

제국 얀스가르 귀족 중 백작위를 가진 루이보스 아이딘의 유일한 딸. 아홉 살 때 어머니를 잃었으며, 아버지와 단둘이 살아온 스무 살의 여자.

그녀는 거울 너머 낯선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자치고는 장신이었던 키는 줄어 있었으며, 삐뚤삐뚤 짧게 단발로 쳤던 회색 머리카락은 길고 탐스러운 검은 머리카락이 되었다.

두 눈은 눈이 내릴 겨울 하늘 같은 은청색으로 변해 있었다.

에스텔이 이 여자에 대해 알았다면 흔하디흔한, 얼굴 예쁜 귀족 여자 중 한 명이라 생각할 법한 여자였다.

아, 얼굴이 좀 소름 끼칠 정도로 예쁘니 기억에 꽤 오랫동안 남을지도 모르겠다.

몸은 말랐고, 작았던 여성의 상징인 가슴 역시 풍만한 편이었으며 허리 역시 가늘었다.

즉, 다시 말해 전혀 단련되지 않은 몸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얼샤 왕국에서 하사받은 보검도 없이 검 한 번도 제대로 들지 않은 몸이 되어버렸다.

의원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아이딘 백작 영애를 보고, 심신에 너무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일시적으로 기억에 혼란이 온 것 같다는 진단을 내렸다.

당연했다. 신관이 와도 그녀의 일을 설명해 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억을 잃었다는 것은 사람이 바뀌었음에도 좋은 변명거리가 되어주었다.

이 몸의 본 주인은 굉장한 성격을 가지고 있던 듯 하녀들은 에스텔에게 지나친 저자세를 취했다.

일례로, 그녀가 ‘역사서’를 가져오라고 하니 단시간 만에 책이 배달되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어떤 백작 영애의 몸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했고, 그것을 이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본디 에스텔은 그런 사람이었다.

얀스가르 제국사를 집어 든 그녀는 책을 펼쳤다. 3년 전 얼샤 왕국의 멸망 부분을 찾은 그녀는 그 페이지를 읽어 내렸다.

―황제 바이두가 이끄는 얀스가르의 대군은 마치 노도처럼 얼샤를 휩쓸었다. 얼샤의 모든 귀족들은 얀스가르의 군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자신한테 대패해서 개가 꼬랑지를 말고 도망가듯 도망간 새끼들이 누군데.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얼샤의 기사들은 저항했다. 특히나 제3부대를 지휘하는 시토라 기사단의 저항이 가장 거셌다.

기사단장인 에스텔 슈페르트는 여성임에도 검을 잡고 단장 직에 올라 매우 사나웠다.

얼샤 왕국의 사람들은 그녀를 이슈타르, 샛별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여성 특유의 비이성적인 판단력으로 패배가 확실한 전투에서 무리한 항전을 주장하다 이를 견디지 못한 부관에게 살해당했다.

그들의 부하들은 그녀의 목을 내밀며 얀스가르에 항복하여 성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날이 얼샤 왕국의 최후의 날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책을 던졌다.

옆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지켜보던 하녀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에스텔의 얼굴은 분노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가씨, 그렇게 숨 쉬면 또 쓰러지세요!”

그 말대로, 호흡은 점점 가빨라지고 시야는 뿌옇게 물들었다.

이마에 열이 올랐다. 당장에라도 검이 있다면 검을 들고 저 책 저자의 목을 따러 갔을 것이다.

여성 특유의 비이성적인 결단?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모두 다 나라를 지키기로 맹세했다.

설령 자신들은 죽어 하늘의 별이 되어 여신 아스트라에게 안기더라도, 최후의 날까지 얼샤의 자긍심을 보여주고자 했다.

처음부터 패배할 거라는 것은 예상했다.

하지만 나라를 지키는 기사가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그것이 무리한 비이성적인 판단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녀는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에스텔은 실존했고, 이미 죽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얀스가르의 군대가 그녀의 목을 확인했다니 확실할 것이다.

그녀는 칼리드에게 배신당한 것이 맞았다.

최후의 전쟁을 결의할 때도 그녀는 부하들이 자신을 따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목을 내민 것은 그녀의 부하들이었다.

“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맺혔다. 그러나 울지 않으려 눈을 부릅떴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잔혹한 진실 앞에 그녀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녀가 또다시 의원을 다급하게 불렀다.

에스텔은 결국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죽는 날까지 여신을 원망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처음으로 아스트라를 원망했다. 차라리 죽어서 그대로 끝났으면 이런 꼴은 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

“우린 밤하늘의 별이 될 거다.”

에스텔은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짧게 쳐진 잿빛 단발머리가 달빛에 반사되어 마치 별빛처럼 빛났다. 전운이 감도는 전쟁터, 전투가 벌어지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다.

“만약 별이 된다 하더라도, 난 단장 옆은 사절이야. 별이 되어서도 겨울에 은하수에 들어가라고 할 사람이라고.”

그에 에스텔은 뒤를 돌아보았다. 삐딱한 자세로 있던 남자 한 명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는 저번 겨울 훈련을 말하며 아직도 그때가 끔찍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은하수에 들어가기 전에 저기 저 강에서 먼저 뒈지고 싶냐, 리엄?”

에스텔이 검끝으로 그를 겨누며 말했다.

그에 남자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남자는 자존심이 상했던지 투덜거렸다.

“켁, 저게 무슨 기사단장이 쓰는 말투냐! 떠돌이 검사들이나 그런 말을 쓰겠다.”

“한마디만 더 하면 단장님을 대신해서 내가 널 죽인다.”

금발의 여자 한명이 단도를 들며 살벌하게 말했다.

그러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에스텔을 바라보며 웃었다. 에스텔 역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녀가 말 머리를 돌려 뒤에 도열해 있는 이들을 보았다. 모두 자신을 따르는 이들이었다.

시토라 기사단의 단원들, 자신의 소중한 부관들이자 동료들. 그리고 얼샤를 위해 싸우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신뢰가 깃든 눈동자. 그리고 하나의 목표로 단결된 무리. 이들과 함께라면 죽음 따윈 무섭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까부터 옆에 있던 칼리드였다.

칼리드는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칼리드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치며 에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멋진 말은 잘 못 해. 네놈들도 몸이 단 모양이니 한마디만 하고 끝내겠다.”

말 머리를 다시 앞으로 돌리며 그녀가 자신의 검을 치켜 올렸다. 왕국에서 받은 황금색의 보검이 번쩍거렸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 언덕 위에 있는 그녀는 백마를 타고 밤하늘 아래에 고고하게 서 있었다. 밤하늘에 하얗게 빛나는 그녀는 이미 별과 다름없었다.

그녀가 목청껏 소리쳤다.

“얼샤를 위하여!”

와아아아아아!

함성 소리가 땅을 울렸다.

그러곤 에스텔이 몬 말이 선봉에 섰다. 얀스가르와의 첫 전투였다.

칼리드가 그녀의 옆에 따랐다.

에스텔과 칼리드는 마주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진지한 표정으로 달려드는 적군들을 응시한다.

칼과 칼이 맞부딪친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 이곳에서 어떠한 방심도 허용되지 않는다.

에스텔의 신기에 가까운 검에 적군들의 목이 우수수 떨어진다. 그 치열한 곳에서 에스텔은 살아 있었다.

***

“신이시여, 제발 우리 딸을 데려가지 마십시오. 차라리 절 데려가십시오.”

에스텔은 백작의 말을 들으며 눈을 떴다. 조금 전까지 그녀는 전쟁터에 있었다.

여긴 어디지?

가벼운 기억 혼란이 일었다가 그녀는 자신이 지금 얀스가르의 어떤 여자 귀족의 몸에 있다는 것을 상기했다.

의식을 차렸음에도, 그녀는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뜰 기력조차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꿈에서 본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 첫 전투에서 죽어버렸다면 얼마나 좋을까.

배신 따윈 생각하지 않았던 그때 그 상태로 죽었다면 이런 감정은 느끼지 않았어도 되었겠지.

모든 이의 반짝거리는 눈빛이 아직도 기억에 선했다.

그리고 칼리드의 신뢰 어린 미소 역시.

꿈속의 그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따스하며, 강인했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아팠다.

얼샤의 소식을 들은 후로 그녀는 사흘째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다.

그녀는 삶의 의지를 잃었으며, 여신이 은혜를 주어 새로운 삶을 주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원망했다.

나라를 잃은 기사, 동료에게 배신당한 기사가 살아 있을 자격은 없었다.

그저 비록 삶이 다시 주어지더라도 죽는 것이 나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제발, 제발, 제 딸아이마저 앗아가지 마십시오. 여신이시여, 제발.”

어렸을 적 아버지는 없었고, 어머니 역시 어느 정도 나이가 되자 그녀를 버리고 떠났다.

그래서 뒷골목에서 살아남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어른의 따스한 정을 단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다.

“루시, 제발 아빠를 버리지 말아다오.”

얀스가르인이다. 적국의 귀족. 그렇게 되뇌면서도 이상하게 백작을 보면 죄책감이 들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지금 그녀가 의식을 잃었던 것은, 그냥 아무것도 먹지 않았기에 의식을 잃고 쓰러진 거다. 에스텔은 스스로의 삶의 의지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왜 남자는 저렇게 울고 있는 것일까. 겨우 피가 이어져 있을 뿐인데. 그는 너무 당연하게 무한한 애정을 주고 있었다.

아버지란 그런 존재인가? 하지만 칼리드의 아버지 역시 칼리드와 살가운 관계는 아니었다.

칼리드의 아버지였던 일카이 공작은 검에 미친 사람이었고, 그들은 그저 같이 사는 동거인에 불과했다.

저 사람이 특이한 것이다, 저 사람이 자신의 딸을, 자신의 육신의 원주인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이다.

“루시펠라, 제발…….”

그녀가 알기로 이 루시펠라는 스스로 물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그녀야 그렇다 치고 이 여자는 대체 왜 뛰어들었던 것일까. 사용인들에게 물어봐도 쉬쉬하니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에스텔은 눈을 감으며 백작의 흐느낌을 계속 듣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물론 그녀는 이런 상황을 바란 적이 없었다. 절망에 빠졌기에 죽으려고 했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되는 게 맞을까.

일단 죽는 것은 에스텔이더라도 루시펠라의 육신인데. 자신의 육체도 아닌데 멋대로 죽는다는 것도 저 남자에겐 못 할 짓이었다.

백작은 지극정성으로 그녀를 돌봤다.

심지어 황궁에 가서 대회의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도 몇 번이나 거절하고 그녀의 옆에서 그녀의 모든 것을 살뜰히 보살폈다.

그녀는 원래 약한 사람에게 한없이 약했다.

그리고 그녀가 보기에는 백작은 약한 사람이었다.

그의 키는 작지는 않았지만 몸집은 왜소했으며, 몸에는 기운이 없었다.

그러나 두 눈, 그 은청색의 두 눈만은 언제나 그녀에 대한 애정으로 생기가 넘쳤다.

그녀에게 있어서 기사로서의 책임감과 동료들과의 우정, 검이 삶의 이유이자 의미였다면 이 남자에게는 딸 루시펠라가 삶의 이유였을 것이다.

이 남자에게 삶의 이유를 앗아가는 게 맞는 것일까.

얀스가르인이 밉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들에게 전쟁의 책임이 없다는 것 정도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또한 얀스가르가 얼샤를 침공한 이유마저도 정당했다.

만약 자신의 나라가 저질렀던 짓을 얀스가르가 저질렀다면 그녀의 군대는 국경을 넘어 그린힐로 진격했을 것이다.

그때 자신의 손 위에 따스한 손이 얹어졌다. 백작의 손이었다.

결국 그녀는 완전히 모질 수는 없었다.

적군에게 완벽하게 잔인하지 못했던 그녀의 성격은 이렇게 또 모질어지지 못했다.

배신감과 분노는 그녀, 에스텔의 것. 이 여자, 루시펠라가 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아니, 생각해 보면 목숨을 끊는다는 선택지는 이런 소극적인 선택지가 아니라 많이 있었다.

검은 못 들더라도 단도를 구할 수도 있었고, 심지어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방법, 찻잔을 깨서 조각으로 손목을 긋는 것, 저 시트로 목을 매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냐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인정하자. 그녀는 우선 자신이 죽고 싶어 했으면서도, 또한 목숨을 이어가고 싶었다는 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복잡한 생각은 사흘 동안의 번민에 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목숨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에스텔이 아니라 루시펠라가 되어야만 했다.

그것은 비단 저 남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가 이 애정에 약해졌을지언정 그는 에스텔과 관련이 없는 완벽한 타인이었으니.

그녀는 3년이 지난 얼샤를 봐야 했고, 나머지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야만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버리려던 목숨이 무척이나 아깝게 느껴졌다.

그녀는 애초에 부정적인 감정에 연연해 가며 자신을 죽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비록 얀스가르의 ‘황제’ 휘하에 있는 귀족이 된 건 이가 갈릴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어찌할 수가 없다. 이미 에스텔이 죽고 난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

모든 이들에게 배신당해 죽어가던 그녀에게 아스트라가 내려준 마지막 축복이다.

그녀는 일단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에스텔, 아니, 루시펠라는 눈을 떴다.

백작이 그녀를 불렀다. 그녀의 눈빛에 생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대체 무엇을 말하는 거지? 아니, 거야?”

루시펠라는 이 육신의 주인이 대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진정으로 궁금해졌다.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용인들은 지나치게 그녀에게 비굴했다.

그녀는 이것을 알고 있었다. 얼샤 왕국의 국왕에게 빌빌대던 신하들의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차 한 방울이 떨어져서…….”

어디에 떨어졌나 봤더니 차를 따르는 컵 받침에 한 방울이 떨어져 있었다.

사실 차를 우아하게 마시는 재주는 없기에 그녀는 훌렁훌렁 들이켜고 있었고, 하녀는 차를 빠른 속도로 따르고 있었기에 일어날 수밖에 없던 일이었다.

차 한 방울 흘린 게 그렇게 벌벌 떨 일인가. 그녀는 귀족들의 법이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붉은 찻물을 확인하고 하녀를 보자 하녀가 덜덜 떨며 무릎을 꿇었다. 루시펠라는 어이가 없었다.

지금 그 한 방울에 무릎을 꿇은 게 맞는 거지?

“왜 무릎을 꿇는 거지?”

“죄, 죄송합니다. 아, 아가씨, 제발…….”

제발, 다음은 뭘까. 그녀가 무심하게 하녀를 보자 하녀가 눈빛을 보며 말했다.

“제발 매질은 하지 말아주세요. 제발!”

“……매질이라니?”

손목에 힘도 없을 것 같은 아가씨가 어떻게 하녀를 매질한단 말인가?

“내가?”

“네, 네!”

“매를 때렸다고, 내가?”

“네!”

“매만 때렸어? 더한 건 없나 보지?”

“소, 손을 바닥에 두시고 손등 위로 구두를 신은 발로 걸어가시기도 했어요.”

일단 하녀는 너무 순진한 나머지 그녀가 저질렀던 악행들을 말하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심보가 못돼서 지금 말한 걸 그대로 한다면 어떻게 하려고 저러는 걸까.

루시펠라는 손에 턱을 괴며 말했다.

“차는 그만 가져오도록.”

“네?”

“아, 아니, 그만 가져오렴.”

그녀가 생각하는 레이디의 말투는 지나치게 미화된 면이 있어 그녀는 가끔 부자연스러운 말투를 쓰고는 했다.

지나치게 상냥한 말투에 하녀는 경악의 표정을 짓다가 용서한다는 표현임을 깨닫고 물러갔다.

루시펠라는 창을 바라보았다.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가는 시기. 그녀가 깨어난 지 아직 며칠도 지나지 않았다.

우선 루시펠라로 살아가려고 하긴 했으나, 다른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우선 그녀는 소위 말하는 귀족의 교양이라던가 기품 따윈 전혀 없었기에, 이렇게 차를 주는 대로 홀짝홀짝 다 받아 마시고 있었다. 화장실에 자주 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억을 상실했다고 내려진 진단은 의외로 만능으로 적용해, 그녀는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런 약골 생활을 해야 하는지 한숨만 일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백작이 들어왔다.

루시펠라는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 의례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백작의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 찼다.

“루시! 몸이 많이 좋아진 모양이구나.”

“네, 그렇습니다.”

“어?”

“아니, 그렇다고요.”

그녀는 가끔 얼샤의 억양이나 군인 말투가 튀어나오고는 했다.

백작은 만족하는 듯 웃으며 선물을 건넸다.

“이게 무엇입니까?”

이번에도 실수했으나, 딸에게 선물을 준다는 기쁨 때문에 백작은 그 말투에서 위화감이 느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고급 종이상자에 예쁘게 매여진 공단리본을 풀었다.

전혀 기대되지 않았으나 억지로 기대 어린 표정을 해야만 하는 건 고역이었다.

상자 안은 아니나 다를까, 푸른색 귀걸이가 들어 있었다. 참 반짝이긴 반짝인다.

“이번에 들어온 것 중에 최고급품으로 샀단다.”

그녀가 듣자 하니 백작은 영지에 자그마한 보석 광산을 소유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보석을 판매하는 것이 그의 수입원이라고. 이것이 파란 보석이라는 것 이외에 그녀는 잘 모른다. 그냥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감사하다고 말했다.

“연회를 언제 다시 나가게 될지는 모르지만, 다시 나가더라도 우리 루시가 제일 돋보여야지. 물론 이런 귀고리가 없어도 너는 가장 아름답겠지만 말이다.”

뭐, 그렇기야 하겠지. 그녀도 이 육신의 얼굴이 아름답다는 자각이 있었다.

연회라. 그런 것도 참여해야 할 일인가. 귀족인 이상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얀스가르의 귀족들의 면상을 본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네가 기뻐하니 나도 기쁘구나.”

“저도 그래요.”

그 말에 백작이 기쁜 듯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잘생긴 중년이 그런 얼굴을 하니 보기는 좋았으나.

“윽!”

이렇게 껴안는 것은 아직도 징그럽고 부담스러웠다. 한참의 무서운 포옹이 끝나고 백작이 말했다.

“아, 좋은 소식이 있단다. 사실 깨어났을 때 말해주려 했지만 미처 말하지 못했단다.”

당연히도 그녀가 그런 상황이었으니 말하지 못할 만도 했다. 좋은 소식이라니? 그녀는 궁금해서 물었다.

“뭡니까?”

“약혼자란다. 약혼자가 생겼구나. 누군지 맞혀보겠니?”

약혼자라니. 생각해 보면 루시펠라는 스무 살이었고 진작 가정을 꾸려야 했다.

하지만 이런 때 결혼이라니, 갈수록 점입가경이구나.

“누군데요?”

심드렁한 말투였지만, 백작은 그것만 해도 충분한 듯 소리쳤다.

“하인트 공작이 혼담을 청했단다!”

하인트? 이름은 들어본 적 있다. 그리고 그 얼굴을 떠올리자 그녀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하인트, 하인트.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제더카이어 하인트!”

“그래! 바로 맞혔단다. 우리 루시가 정말 똑똑하구나. 네 약혼자의 이름이란다. 불행히도 하인트 공작이 세상을 뜨고 바로 작위를 승계받았지.”

아유, 똑똑해. 그러면서 볼을 부비는 게, 스무 살짜리 딸한테 지금 이게 할 짓인가 싶었다.

제더카이어 하인트라면 전장의 흑사자가 아닌가.

얼샤 왕국의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릴 듯 잔인한 맹수. 그가 지나간 곳은 풀 한 포기도 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게다가 그는 심지어 ‘에스텔’과 안면이 있었다.

왜 하필이면 그놈이! 적국의 장수가 지금 자신의 약혼자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이 믿어지지도 않는 상황에 역설적이게도 그녀는 자신이 완전히 얀스가르인이며, 루시펠라 아이딘이라는 여자의 몸에 들어와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이틀 후에 방문하겠다고 전해왔단다.”

“…….”

“많이 놀랐지? 선대 하인트 공작이 정말로 그 말대로 한 모양이더구나.”

“……네?”

루시펠라의 물음에 아이딘 백작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루시? 싫으니? 아직도 황태자 전하를 못 잊은 거니?”

황태자 전하?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루시펠라가 백작을 쳐다보자 그는 입을 딱 다물었다.

뭔가를 숨기는 것 같은 태도였다.

설마 이 몸의 주인은 황태, 아니, 왕자, 얀스가르의 1왕자와도 염문이 있었던 것일까.

정말 가지가지 하는 여자다. 루시펠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요새 한숨을 자주 쉬고 있었다.

하인트 공작의 방문은 이틀 후 정오에 이루어졌다.

병문안이기에 딱히 옷을 차려입을 필요는 없지만 어째서인지 하녀들은 심혈을 기울여 그녀를 단장시켰다.

우선 그녀는 따스한 꽃잎이 뿌려진 물에 목욕해야 했다.

분가루는 콜록콜록 기침할 정도로 날렸으며 입술 역시 아주 살짝 생기가 돌게 꽃물을 찍어 발랐다.

머리 역시 그녀가 보기에는 충분히 윤기가 돌았으나 하녀들은 기름을 펴 바르고 계속 빗질을 했다.

아직 병석에서 일어나기도 전인데 이렇게 할 정도면 대체 그 파티 같은 것에 참여하게 되면 얼마나 머리가 아플까. 그리고 이런 고된 일을 여자들은 어떻게 견디는 것일까.

루시펠라는 아득해졌다. 체력이 절로 닳고 있었다.

체력이 닳는 게 똑같다면 차라리 검을 휘두르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검을 휘두르면 그래도 기분은 상쾌해졌으니. 게다가 오히려 체력도 좋아진다!

검술 단련, 얼마나 좋은 일인가. 물론 그녀는 지금 그것이 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몸은 근육은커녕 지방도 없어서 검을 들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심지어 회복력도 극악해서 물에 빠진 것과 단식한 후유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침대에 앉아 병약한 얼굴에 화장하며 하인트 공작을 기다려야 한다니, 부관 놈 중 하나인 리엄이 이걸 봤다면 포복절도를 했을 것이다.

자신의 휘하 기사들의 이름이 떠올랐다.

리엄, 발데르, 아니카, 오이겐……. 지금쯤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녀의 목을 바친 대가로 목숨을 부지했을까?

루시펠라가 우울한 생각을 하며 침대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파묻었다. 옆에 자신보다 더 긴장한 기색으로 대기하고 있던 하녀가 말했다.

“아가씨, 머리가 흐트러지세요!”

“환자가 머리까지 신경 써야 해?”

그때, 문을 두드리는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옆에서 수발을 들어주느라 대기하던 하녀가 그녀에게 살짝 눈짓했다.

기다리던 하인트 공작이 온 듯했다. 그래도 온다는 시간은 정확히 지키는 모양이었다.

둔중한 발걸음 소리가 방을 쿵쿵 울렸다. 문이 열리고, 남자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여성의 침실까지 들어오는 것은 분명 결례였으나 그는 약혼자이기에, 그리고 그녀가 병중이기에 허용되는 모양이었다.

장신의 남자가 그녀와 눈을 마주하더니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그의 걸음걸이는 군인다운 정갈한 발걸음이었으나 한 걸음, 한 걸음 떼는 그 움직임은 맹수의 걸음처럼 느른했으며, 그 걸음마다 위압적인 느낌이 났다.

제더카이어 하인트는 칼리드보다 더 큰 키였다.

머리색은 청동색이었으며, 눈 색은 붉은 기가 강한 갈색이었다.

굳은 입매와 남성적인 선을 가진 얼굴은 꽤 잘생긴 축에 속했다. 섬세한 이목구비를 가진 칼리드와는 비교되는 외모였다.

뭐, 다시 봐도 꽤나 잘난 남자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루시펠라로서는 그냥 재수 없는 적국의 장수일 뿐이다.

그녀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적장의 얼굴을 지금 이렇게 한가롭게 침대 위에서 마주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당장 목이라도 따줘야 하는 면상이 아닌가.

쉽게 말해 그녀의 심리는 빵집에서 일하는 종업원이 다른 빵집에 빵을 사러 갔다가 진열이 흐트러져 있는 것을 보고 진열하고 싶어 하는 일종의 직업병과 비슷했다.

하녀들이 허리를 숙이며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방에는 루시펠라와 제드, 두 명밖에 남지 않았다.

약혼자들을 대하는 것보다는 적을 대하는 것 같은 호의적이지 않은 눈빛이 서로 오갔다.

“이렇게 늦은 인사를 드리게 되어 송구합니다, 영애.”

약혼자면, 아니, 레이디를 앞에 둔 귀족 남성이라면 손등에 키스하는 걸로 예를 표해야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게다가 마련된 의자에 앉거나, 아니면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야만 했건만 그는 그대로 서 있었기에 그녀는 약혼자라는 하인트 공작을 올려다봐야 했다.

“하인트 공작 각하의 일은 유감입니다.”

루시펠라는 결국 의례적으로 말을 툭 던지기로 했다.

하인트 공작 따위 내가 알게 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최적의 말을 한 것이다.

그러곤 잠시 동안 침묵이 일었다. 말실수라도 했나 싶어 고개를 들어보니 공작은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 공작이 어서 자신이 괜찮은 걸 봤으니 한시라도 빨리 알아서 꺼져 주길 바랐다.

안 그래도 그녀에게 가해진 상황은 아직도 믿기 힘들었는데 적장의 얼굴을 보는 것은 너무도 가혹했다.

그녀는 일단 이 적이었던 자에게 살기를 내보내지 않는 것만으로 힘들었다.

그때 공작이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피차 억지로 하는 약혼이라지만 참 기분 더럽게 구는군.”

나도 마찬가지야, 라고 말하려는 것을 루시펠라는 애써 참았다.

루시펠라는 그제야 숨기지 않고 적의 어린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결국 침대에서 내려와 그 앞에 섰다.

서 있어도 키 차이는 났지만 고개가 떨어질 정도로 올려보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보며 하인트 공작이 이죽거렸다.

“화장까지 하다니. 아프다는 말도 꾀병이었나 보지?”

“이젠 반말인 건가?”

입꼬리를 올리며 내뱉는 그녀의 말에 남자의 적갈색 눈이 살짝 커졌다가 미소를 짓듯 휘어졌다. 그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루시를 보더니 이죽거렸다.

“그대로 뒀으면 결혼하지 못했을 그쪽을 거둔 건 나야. 황태자랑 놀아난 건 과거의 일로 참아주지만, 과거의 일을 잊지 못하고 또 황궁 호수에서 그딴 짓을 저지르거나 내 앞에서 그렇게 못마땅한 태도로 군다면, 앞날이 그닥 유쾌하진 않을 거야. 나도 그대가 별로 달갑지는 않거든.”

루시펠라의 입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팔짱을 끼며,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에 앞머리가 살짝 올라갔다 내려갔다.

사실 그녀는 지금 당장에라도 수치스러움에 뛰어내리고 싶었다.

황태자와 ‘과거의 일’이 있었다고? 게다가 이 여자가 황궁 호수에 뛰어든 것도 황태자 때문인 모양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그녀 나름의 비호의적인 태도도, 하인트 공작에게는 태도가 그럴 거라 생각한 듯했다.

오해를 사도 뭐 이런 더러운 오해를 사는 건가.

더군다나 루시펠라가 물에 스스로 빠졌던 이유가 고작 황태자 때문이라니, 그녀는 이 육신의 한심함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것도 모자라 하인트 공작은 자신이 좋은 태도로 맞이하지 않은 이유가 황태자를 잊지 못해서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고 싶지 않았기에 루시펠라는 하인트를 보며 말했다.

“피차 그렇게 달갑지 않다면 혼인하지 않고 이 상황을 유지한다거나 혼인 후에 바로 이혼하는 방법이 있지 않나?”

그 말에 공작이 피식 웃었다. 그러나 루시펠라의 말에 그는 확실히 기분이 상한 듯했다. 그의 눈빛은 날카로운 예기가 자리해 있었다.

“아쉽게도 나는 가문을 이어서 자손을 낳아야 할 빌어먹을 의무가 있는데 말이야.”

“…….”

“그래도 혼인을 늦추자는 말은 마음에 드는군. 혼인 후 바로 이혼이라, 그렇게 해주지. 나도 영애 같은 이와 벌써 함께하고 싶지는 않거든.”

그는 비틀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루시펠라는 이 사람이 자신을 아주 한심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았다.

아, 그건 좀 이해가 갔다. 물에 빠진 이유가 황태자 때문이라면 그럴 만도 했다.

그는 처음부터 루시펠라라는 인물 자체에게 호의가 없었다.

차라리 잘되었다. 약혼이야 듣자 하니 신관으로부터 도장을 받았기 때문에 무를 수는 없다.

대신 미룰 수는 있으니 미뤄준다면야 좋았다.

아직 적응도 안 되었는데 이 남자랑 결혼하고 살을 섞으라고? 차라리 다시 죽는 게 나았다.

“그것참, 감사한 일이군요.”

그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간드러진다고 생각하는 레이디의 말투로 말하자 그녀는 스스로의 혀를 깨물고 싶었다.

루시펠라의 얼굴을 본 하인트 역시 실소를 지었다.

하인트 공작은 손을 들어 흘러내린 그녀의 기다란 검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쓰다듬어 주더니 바로 아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언뜻 보면 약혼녀에게 하는 다정한 스킨십이었다.

“다음번에도 호수에 뛰어드는 멍청한 짓을 벌였다간,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루시펠라가 그를 쏘아보며 이죽거렸다.

“그럼 다음번에는 황궁 첨탑에서 뛰어내리면 되겠군.”

그렇게 만족스럽게 말하자 하인트 공작의 눈이 정말로 위험한 빛을 띠었다.

그래서 뭐, 때리기라도 하게? 그녀는 두렵지 않았다.

다만 이 남자가 자신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는 게 끔찍해 그것을 쳐내려고 있는 힘껏 다른 팔로 그의 팔을 쳤다.

그러나 그녀의 가벼운 힘은 저 팔조차 제대로 치울 힘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힘이 생각보다 더 최악이라는 것을 깨닫고 경악했다.

그녀는 다시 손을 들어 그의 팔을 밀어내려 했지만 밀어지지가 않았다.

심지어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인트 공작이 일부러 어깨를 꽉 쥐지 않은 것 정도는.

선천적으로 이 몸이 약하고, 또 나름 아팠기에 힘이 없는 것이다.

그녀가 수치심을 느끼며 하인트 공작을 올려다보니 하인트 공작은 비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가소롭다는 표정이었다.

“이 손 떼.”

그녀가 이를 악물고 말했지만, 이미 힘으로 얕보인 뒤였다. 하인트 공작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어깨에서 손을 뗐다.

“뭐, 첨탑까지 오를 힘은 없어 보이는군.”

그 조롱에 그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그녀의 얼굴을 본 하인트 공작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면상이다.

저 얼굴을 한데 후려갈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분명 이 연약한 손이 아작 날 게 뻔했다.

“나가.”

그녀는 대신 씹어뱉듯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인트 공작이 말했다.

“그래, 이쯤 되면 체면치레는 다 했으니,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지.”

끝까지 기분 더럽게 만드는 남자다. 그는 따로 작별인사도 하지 않고 등을 돌려, 방 바깥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 하녀들이 몰려와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는 계속 씩씩대고 있었다.

이렇게 루시펠라는 첫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우선 첫인상, 사실 그와 첫 대면은 아니었지만 안 그래도 좋지 않았던 인상이 최악이 되는 결과로.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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