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기사는 레이디가 되었다
2017.03.02.
뺨에 닿은 돌바닥이 차가웠다. 그러나 그 차가움도 점차 희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입에서는 피가 줄줄 새어 나오고 있었고, 복부는 불덩이가 내장을 불살라 태우려는 듯 작열감이 느껴졌다.
그곳에서 흘러나온 피는 바닥을 천천히 적시고 있었다.
떨리는 입술을 들어 말하려 한다. 그러나 이미 성대는 기능하지 않는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에스텔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눈으로 묻는 것밖에 없었다.
왜?
왜?
왜?
도대체 왜?
에스텔은 눈을 떠 자신을 죽인 살인자를 바라보았다. 시야는 흐릿했지만, 바닥을 디디고 선 남자의 두 다리가 보였다. 얼굴을 보려 했지만 고개를 들 힘도 사라져 버렸다.
“독을 바른 칼에도 이렇게 살아 계시다니, 역시 단장님이시군요.”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부드러웠고 다정했다. 감각이 사라져 가는 얼굴에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쓸었다.
“카…… 리…….”
“쉿, 말을 하면 더 고통스럽잖아. 에스텔. 얌전히 죽어야지.”
귓가에 머무르던 손가락은 이내 느른하게 피에 물든 입술을 매만졌다. 그 입술이 내뱉는 최후의 숨결까지 느끼려는 듯.
숨이 끊어지는 날이 다가온다면 의연히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어느 정도 미련은 있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했던 그녀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미련을 가질 만한 여유가 없었다.
자신이 죽으면 조국이 적국 얀스가르에 항복한다는 것도, 기사단 녀석들이 모두 죽임을 당할 거라는 것도, 심지어는 지금 자신이 맞이하는 죽음이 가장 한심한 개죽음이라고 비웃었던 하극상이라는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어떤 것도 지금 그녀가 당한 배신보다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배신자는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을 만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내뱉으려던 숨이 더욱 거칠어졌다. 그녀의 몸이 고통으로 요동쳤다.
칼리드, 네가 왜? 나를 발견해 준 네가 왜? 대체, 왜?
목숨을 걸어도 아깝지 않을 이라 생각했다. 내가 검을 잡게 한 건 너였잖아. 기사로 만든 것은 너였잖아.
친구이자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였다.
피를 나누지 않았어도 유일한 형제이자 그녀의 인생에 선명한 빛으로 새겨져 있던 남자였다.
그럼에도 네가 날 배신하다니. 칼리드, 네가 나를!
어느새 시력마저 상실한 듯 시야가 캄캄하게 물들었다.
“안녕히, 나의 이슈타르.”
나긋한 작별인사와 함께, 에스텔은 눈을 감았다.
***
망할 노친네. 제드는 이를 으득 갈았다. 마물들과 전투에서 실컷 고생하고 돌아오니 뭐가 어쩌고 어째?
제드의 적갈색 눈이 번뜩였다. 그의 기분은 최악을 달렸다.
그러나 탓할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신께서 허락하신 생명의 시간이 다했고, 쉽게 말하면 그냥 병으로 죽었다.
여기서 말하는 망할 노친네, 그는 제드의 아버지였고, 하인트 공작가의 가주, 아니, 전대 가주였던 가스파르 하인트였다.
출정하기 전 낌새가 이상하더라니, 전장에서 날아온 것은 갑작스러운 그의 부고였다.
우선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잃은 감정을 추스르고, 장례식을 거행하며 작위를 받고 가신들의 인사를 받아야 했으며, 황제에게 충성 맹세를 해야 했다.
스물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작위를 물려받은 것 역시 귀찮은 일이었는데, 문제는 공작의 유언장이었다.
선대 공작의 서명과 더불어 가문의 표식이 찍힌 밀랍으로 봉인된 유언장.
윤기가 도는 고급 양피지에는 가문의 도장과 더불어 대신관의 인장이 한 개도 아니고 무려 세 개나 찍혀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이 명예로운, 아니, 망할 신관이 셋이나 달려들어 작성된 유언장은, 그 누구도 유언의 이행을 거부할 수 없다.
만약 거부하게 된다면 신의 뜻을 어긴 것이니, 그는 작위는커녕 제국민으로서의 이름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유언장의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아이딘 백작가의 영애와 결혼하라는 것. 그러나 그 간단한 문장과는 달리, 내용은 전혀 간단하지 않았다.
제드는 졸지에 약혼녀가 생겨 버린 것이다.
여자가 싫다는 것은 아니다. 제드는 오는 여자는 가리…… 아니, 가렸다.
물론 예쁜 여자들만 가렸다. 그렇다고 아이딘 백작 영애가 아름답지 못하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루시펠라라는 이름 그대로 얀스가르의 ‘샛별’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외모로 소문이 자자했다.
밤하늘의 색과 같은 길고 탐스러운 머리, 새하얀 얼굴, 그리고 별과 같다는 그 은청색의 눈까지.
그녀는 현재 스무 살이다.
스무 살. 일곱 살이나 어린 여자였지만, 보통 여자들이 스물이 채 되기 전에 결혼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녀는 혼기보다 나이를 더 먹은 것이다.
왜 결혼하지 못했냐 하면 간단했다. 그녀의 성격 때문이었다.
아이딘 백작은 어렸을 적에 백작부인과 사별했고 슬하에는 외동딸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아이딘 백작은 그녀를 금지옥엽, 말 그대로 호호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톡 부러질까 애지중지 귀한 딸로 떠받들어 키웠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응석받이로 자랐고, 최악으로 신경질적인 성격까지 더해져 아름다운 외모만큼 그녀의 성질머리는 이미 귀족들 사이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게다가 최근에는,
‘황태자 전하와 염문이 있었지.’
‘염문이 있다’라는 말은 간단했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꽤나 엄청났다.
우선 풋풋한 연애가 아니라 남녀의 운우지락까지 들어 있다는 게 그러했다.
이들의 잠자리 사정까지 그의 귀에 들려올 정도라면 어땠는지는 대충 알 것도 같았다.
포악한 황태자와 포악한 백작 영애의 만남의 결과는 뻔했다. 그녀는 결국 황태자에게 비참하게 버림받아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가 아버지의 장례식과 뒤처리에 숨도 못 쉬도록 바쁠 때 듣자 하니 어쨌다더라, 황궁 연회에서, 황태자에게 거절당하자 항의를 하려는지 아니면 상심을 했는지 황궁 호수에 뛰어들어서 자살 시도를 했다지.
그래서 아직도 정신을 잃고 있다고. 그 와중에 들려오던 소문에 어이가 없어 실소했던 기억은 난다. 남의 아버지는 죽었는데 그 인간 목숨이 참 쉽다고.
멍청한 이가 아닌가.
그는 자신의 기사 중 사귀던 여자한테 차이자 매달리는 최후의 수단으로 자살하겠다는 기사를 보았다.
물론 그놈을 거꾸로 매달려 흠씬 두들겨 패줌으로써 살려달라는 말이 나오게 해 삶의 의욕을 고취시켰다.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다. 제드는 그런 것을 혐오했다.
남들은 지극히 낭만적이다 뭐다 하지만 감정 하나에 저렇게 매달리는 것은 그저 추할 뿐이었다.
사교계에서 손가락질받는 황태자가 버린 여자가 자신의 약혼녀라.
아버지도 참 고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아버지를 욕했다.
“며칠 전 깨어났다고 하십니다.”
“누가?”
“아이딘 백작 영애 말입니다.”
부관인 버나드가 말했다. 제드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래도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텐데, 라고 생각하지 않을 양심은 있었다.
“약혼 사실을 아이딘 백작가에서 알고 있나?”
“방금 유언장 공개와 동시에 신관들이 전했을 겁니다. 신전의 이름을 내건 이상 유언은 집행해야 하니까요.”
망할 오지랖.
아이딘 백작가에서도 유언장 공개 전까지 약혼에 대해서는 몰랐을 가능성이 컸다. 감히 하인트 공작가를 약혼자로 두고 황태자와 놀아나지는 않았겠지.
아이딘 백작가라……. 제드는 생각에 잠겼다.
아이딘 백작은 황태자의 모후인 죽은 황후와 사촌 관계였다.
즉, 공개적으로 황태자를 지지하는 가문 중 하나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가 황태자를 지지하길 바라서 이런 것인가. 여전히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하필 ‘저런’ 약혼녀라니.
“이젠 무를 수도 없겠군.”
그가 못마땅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버나드 역시 주인의 고민에 같이 한숨을 쉬었다.
약혼을 파기하는 방법은 분명 존재했으나, 양가의 합의가 이루어져야 가능했다.
하인트 공작가를 물어버린 아이딘 백작가는 절대 약혼을 파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틀 후 찾아가겠다고 전해.”
***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밝은 햇살과 화려한 샹들리에였다.
에스텔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렸다.
칼리드와 그녀는 작전에 대해 이야기하겠노라며, 회의실에 들어가 이야기했다.
모든 이야기를 마치고, 칼리드는 돌연 그녀를 안고 싶다고 했다. 그 안고 싶다는 것은 말 그대로 포옹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두 팔을 벌리며 그를 안았을 때, 칼리드의 독 바른 검이 그녀의 배를 꿰뚫었다.
그러나 그녀는 살아 있다. 자신이 살아 있었다. 그와 동시에 기쁨이 자리했다.
칼리드, 이 녀석. 날 죽인 척한 거구나!
생각해 보니 그랬다. 그 녀석이 자신을 죽일 리가 없었다. 어떤 녀석인데. 에스텔은 누워서 미소를 지었다.
칼리드는 언제나 그랬다.
그녀의 신뢰를 시험하듯 그녀를 실망시키는 행동을 하다가 꼭 나중에 아니라는 것을 밝히며 그녀의 표정이 변하는 걸 즐기는 고약한 성질이 있었다.
한 번은 그것에 너무 화가 나 얼굴에 주먹을 날렸더니 그 녀석은 그런 짓을 멈췄다.
여하튼 이것도 그 녀석이 자신을 살리기 위한 방편임이 틀림없었다.
일부러 자신을 죽인 척하고 자신을 데려다 놓은 것이다.
설마, 자신을 데리고 전투에서 억지로 도망친 건 아니겠지.
그때 그녀는 분명히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으니까. 살아날 가능성은 없다 생각했다.
역시 멋대로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전투에서 그녀를 빼돌린 거겠지.
어떻게 봐도 그렇게밖에 결론이 나지 않았다. 진짜 그런 거라면 네놈은 죽었다, 칼리드.
에스텔이 이불을 꾹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자신의 손이 굳은살이 박인 손이 아닌 희고 고운 손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에스텔은 자신의 몸을 덮은 붉은 이불보를 보았다.
세상에, 여긴 또 어느 귀족의 저택이야!
이불은 진줏빛 광택이 은은하게 서려 있는 실크였다. 에스텔은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그 이불을 쓸었다. 기분 좋게 부드러웠다.
전시에 어떤 돈 많은 귀족이 또 이렇게 사치를 한 거야?
에스텔이 삐딱하게 생각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게다가 자신의 검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뻔했다. 자신이 날뛸 걸 염려한 칼리드가 어딘가에 숨겨놨겠지.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고 하녀가 들어왔다.
하녀의 차림은 어딘지 이국적이었으나 그래도 마침 찾으려던 차에 반가워 웃었다.
그러나 하녀는 에스텔의 미소를 보고 창백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아가씨, 죄송합니다! 깨어나셨는지 몰랐어요!”
겁에 질린 듯한 하녀의 얼굴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보다 에스텔은 무언가가 더 중요했다. 방금 저 하녀가 뭐라고 했는가.
“아가씨?”
당연하겠지만 열세 살, 칼리드 녀석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 이후로 그녀는 ‘아가씨’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아니, 사실 몇 번 들은 적이 있지만 그것은 멸칭으로서였기에 그런 말을 쓴 자는 친히 차근차근 밟아주었다.
“제,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미리 대기하고 있었어야 했는데.”
무릎을 꿇는 하녀를 보고 에스텔은 얼굴을 찡그렸다.
뭐야, 왜 이렇게 비굴해. 그렇다고 자기보다 어린 젊은 여자애가 저러는 걸 보니 달갑지는 않았다.
“일어나.”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하자 하녀의 얼굴이 화색이 돌았다. 목숨을 살려준 것도 아니고 이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가, 감사합니다.”
하녀가 일어나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너무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는 것 같은데.
어차피 그녀도 같은 평민 출신이다.
오히려 그녀를 희귀한 걸 보는 것처럼 구경하는 시선은 있어도 /이런/ 종류는 또 처음이었다.
“내가 얼마나 자고 있었던 거지?”
“사흘 동안 기절해 있으셨어요.”
“그래? 많이도 잤네.”
“주인님께서 걱정 많이 하셨어요.”
“주인님이? 누군데?”
에스텔은 물론 이 저택의 주인을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녀는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가씨의 아버님이요.”
에스텔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 하녀는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
“네, 백작 각하요……. 아가씨?”
에스텔의 얼굴을 본 하녀의 얼굴이 불안감으로 흐려졌다. 그도 그럴 것이 에스텔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버지가 없다. 아니, 아버지를 모른다. 그런데 무슨 아버지란 말인가. 서로 간에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검은 비단이 어깨에서 찰랑이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손을 잡아 그 비단을 손에 쥐었더니 그것이 손에서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그것이 머리카락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짧은 당황이 지나고 나서였다.
그녀의 머리는 짧은 단발의 회색 머리카락이다. 이런 결 좋은 기다란 검은 머리카락 따윈 없었다. 에스텔은 이성을 찾으려 겨우 노력했다.
“……거울 좀 가져와 줄래?”
애써 부드럽게 말했지만 아랫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은 매끈하며 손톱에는 윤기가 돌았다.
마치 검을 한 번도 잡아보지 않은 것처럼.
하녀가 거울을 가져와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을, 아니, 자신이 아닌 여자의 모습을 보았다.
아무렇게나 뻗친 짧은 단발이었던 머리와 달리 여자의 머리는 부드러운 흑발이었다.
얼굴은 햇빛이나 제대로 봤을까 싶을 만큼 새하얀 우윳빛이었다.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것은 눈. 아몬드 모양의 눈이었다.
맑고 반짝거리는 눈동자의 색은 꼭 다이아몬드를 연상시키는 은청색이었다.
에스텔은 맹세코, 이 여자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눈을 깜빡이자 그녀도 눈을 깜빡인다.
거울에 수작을 부렸으리라는 생각도 할 수 없다. 그녀가 실제로 머리카락을 보고 있지 않은가.
“여긴 어디지? 대답해 봐.”
“……?”
“여긴 어디야? 칼리드는 어디 있어?! 어서 대답해!”
초조해진 에스텔은 몸을 일으켜 하녀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말했다.
이럴 리가 없다. 이건 자신이 아니었다. 이건 뭐란 말인가, 무슨 조화인가!
“아, 아가씨, 진정하세요! 아가씨!”
하녀는 겁에 질려 덜덜 떨며 말했다.
헉, 헉, 그녀는 자신의 가느다란 손목을 보았다. 이건 꿈일 거야. 꿈. 에스텔이 머리를 쥐어뜯으려는 듯 감싸 쥐었다
“아가씨, 아가씨가 가장 소중히 여기시던 머리카락이잖아요!”
“나한테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칼리드, 칼리드를 불러와!”
“그분이 누구신데요!”
“칼리드, 칼리드 가브라인!”
“그분이 누구신데요. 아가씨, 그런 사람은 없어요!”
“그럼 말해, 지금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건지!”
“아, 아가씨가 이상해! 제시! 제시! 어서 의원을 모셔와!”
모든 게 어그러지고 있었다.
에스텔은 가까스로 정신을 유지해야 했다.
생각해 보니 숨 쉬는 이곳, 하녀들의 복식, 모든 게 낯설었다. 게다가 하녀는 얀스가르식 어투를 썼다.
“여기가 어디지?”
“……아가씨의 집이죠.”
“나라를 말하는 거야.”
“얀스가르요. 제국 얀스가르잖아요. 여긴 얀스가르의 수도 그린힐이고요.”
말도 안 돼. 얀스가르는 왕국이다. 어떻게 제국이라는 말을 붙이는가. 불경이다.
게다가 이 얀스가르는 그녀가 쓰러지기 전까지 전쟁을 벌이던 적국이었다. 여긴 적진이었나? 그렇다면 얼른 무기를 찾아야 하는데.
하녀는 당황한 나머지 자신이 얼샤 억양을 쓰고 있는 것을 모르는 듯했다.
그녀는 지금 적국 한가운데에 있었다.
어서 칼리드를 찾아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런 목표도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지고야 말았다.
“얼샤 왕국과의 전투는 어떻게 됐지?”
그 말에 하녀는 심각함을 느낀 듯했다.
“아가씨, 의원을 꼭 보셔야겠어요. 얼샤 왕국은 멸망했잖아요!”
“얼샤가 멸망했다고?”
자신의 조국이었다. 자신이 그렇게 지키고자 했던 나라였다. 에스텔은 충격받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지금 몇 년이지?”
“얀스가르력 729년이에요, 아가씨.”
하녀는 다행히도 그녀의 말에 꼬박꼬박 대답해 주고 있었다. 그녀는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계산해 보았다.
3년, 3년이 지났다. 자신이 있던 때로부터 3년이.
“얼샤가 언제 멸망했지?”
“그것도 3년 전에요.”
“말도 안 돼!”
“아가씨?”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에스텔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칼리드, 칼리드는 어디 갔지? 나는 뭐지?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갔다. 거짓말이라고 부정하고 싶었다.
“아가씨, 어디 가세요. 쉬셔야 해요!”
“……이거 놔!”
에스텔이 손을 뻗어 그녀를 밀치려 했지만, 하녀는 힘이 셌다.
아니, 힘이 센 게 아니었다. 지금 자신의 육신은 지나치게 말랐고, 가녀렸다.
그런 체구에 당연히 힘이 있을 리가 없기에 그녀는 겨우 여자 한 명에게 붙들렸다.
몸을 세게 움직이니 숨이 찼다. 그녀는 뿌리치려 안간힘을 썼지만 그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녀는 안간힘을 썼다. 당장 얼샤로, 얼샤로 가야 했다.
“루시!”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와 그녀를 붙잡았다. 여자도 뿌리치지 못하는데 남자까지……. 결국 그녀는 힘이 빠져 주저앉았다.
“아, 루시, 괜찮단다. 아빠야, 아빠가 왔어.”
“…….”
“루시.”
흥분으로 두근거리던 심장의 박동이 느릿해진다.
에스텔은 눈을 깜빡였다.
따스한 품에 안겨 그 사람의 얼굴을 보니, 이 여자와 닮은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는 금발이지만 눈 색은 그녀와 똑같은 색이었다. 애정 어린 눈으로 자신을 따스하게 보는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누구십니까?”
답을 알면서도 그녀는 물어봤다. 왜냐하면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남자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에스텔은 그런 애정 어린 시선을 받아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생애 단 한 번도 아버지를 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빠를 기억 못 하니?”
“…….”
에스텔은 아주 살짝 흔들렸다. 정말로 그녀가 이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지, 꿈을 꾸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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