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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황녀님-187화 (완결) (203/203)

187화

유디트가 질린 눈으로 눈앞에 펼쳐진 카드를 보다가 그것을 확 움켜쥐었다.

시끄럽게 흘러나오던 노랫소리가 뚝 멎었다.

“일전에 제가 맨 처음 정식으로 소개된 황궁 연회에서 본 이후부터 이래요.”

왠지 유디트가 내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처음에는 그냥 한두 번 안부 편지만 보냈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그때 그냥 아예 예의상으로라도 답장을 주지 말 걸 그랬나 봐요. 그런데 제가 딱히 오해받을 만한 말이나 행동을 한 건 아니거든요? 진짜예요.”

아무래도 원래 몬테라 영식에게 구애받던 내가 불쾌해할까 봐 그러는 모양인데, 나는 그냥 이 상황이 조금 황당하고 웃겼다.

유디트가 정식으로 소개된 황궁 연회 때라면 몬테라 영식이 아직 나한테도 살갑게 굴 때인데…….

물론 그때부터 유디트에게 조금씩 관심을 느끼다가 나중에 마음이 움직였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보통 이렇게 거리낌 없이 자매 사이를 오가나?

더군다나 이렇게 토씨 하나 안 틀린 똑같은 방법으로 구애를 하면서?

“왠지 그 사람, 보이는 것처럼 순진하지는 않은 것 같던데요.”

그렇게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을 때, 뒤에 서 있던 제라드가 지나가듯이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서 고개를 돌리자, 그다지 표정 변화가 없는 얼굴로 나를 보며 그가 덧붙였다.

“몇 번 보다 보니, 의외로 야망이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느껴졌습니다.”

“뭐, 야망?”

제라드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하마터면 헛웃음을 내뱉을 뻔했다.

야망이라니, 그 바비 몬테라가?

“뭘 보고 그런 걸 느낀 건데?”

“말 그대로 그냥 느낌이 그렇단 말이었습니다.”

제라드는 딱히 바비 몬테라에게 큰 관심이 있던 건 아닌 듯이 그냥 그렇게만 말하고 말았다.

그런데 돌연, 유디트가 그를 보고 눈을 가늘게 접어 비죽이 웃었다.

“제라드 경, 지금 질투해요?”

그 순간, 제라드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동안 몬테라 영식을 보거나 우연히 얘기가 나올 때마다 아닌 척하면서도 은근히 차가운 눈빛을 하던 게 생각나서요. 난 그냥, 그래서 제라드 경의 눈에만 몬테라 영식의 야망이 보인 게 아닌가 싶어서~.”

유디트는 콧소리까지 넣어 가며 얄밉게도 말했다.

제라드는 살짝 떨떠름해 보였지만, 차라리 말을 섞지 말자 싶었는지 유디트에게 반응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피식 웃으면서 지켜봤다.

이렇게 다 함께 한가롭게 어울려 지내는 건 지난 생과 이번 생을 합해서 처음인 것 같았다.

그만큼 지금 내가 처한 상황도 잊을 만큼 즐거웠다.

요즘은 거짓말처럼 몸도 가뿐해서 늘 이런 날만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나는 불현듯 머리를 스친 이상함에 한순간 멈칫한 뒤, 천천히 무언가를 따져봤다. 그러고 나서 의혹이 더욱 강해졌다.

뭐지?

재앙의 날에 쓰러진 것을 마지막으로, 마법사의 열병 때문에 앓거나 발작하는 일이 단 한 번도 생기지 않았다.

혹시 내가 착각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갑자기 뒷덜미를 스친 기이함에 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걸까? 몸 상태가 멀쩡해도 너무 멀쩡한데……?

* * *

“어이가 없네…….”

황궁의와 마법사들이 다녀간 후 나는 소리 내서 헛웃음을 흘렸다.

주위 사람들은 내게 내려진 진단을 듣고 모두 기뻐했지만, 나는 아직 현실감이 들지 않아 조금 멍한 상태였다.

내 마법사의 열병은 그동안 조금도 악화되지 않고 오히려 약간 완화되었다.

처음 발병된 이후로 단 한 번도 지금처럼 조금이나마 증상이 약해진 적이 없었기에, 이번 진찰 결과는 몹시도 의미 있는 것이라고 할 만했다.

황궁의와 마법사들은 기적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처음에 나는 혹시 이 병이 쉬어야 낫는 것이었는지 의심스러웠으나, 당연히 그건 아니었다.

어쩌면 마법사의 열병에 대한 정의를 새로 내려야 할지도 몰랐다.

앞으로 꾸준히 상태를 살피고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었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내 증상이 완화된 것은 균열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그동안 마법사의 열병을 끊임없이 연구하고도 그 원인조차 찾지 못했던 마법사들 역시 오늘 나를 보고 실마리를 얻은 눈치였다.

그들은 어쩌면 마법 의료학에 한 획을 긋게 될 위대한 발견인지도 모른다며 잔뜩 흥분했다.

혹시 균열 너머의 세계에서 미세한 틈을 통해 오래전부터 꾸준히 마력이 흘러들어 오고 있던 것처럼, 이쪽 세계의 마력 또한 반대로 빠져나가고 있던 게 아닌가 하는 것이 오늘 마법사들의 입에서 나온 가설이었다.

그리고 나도, 혹시 그 영향으로 사람의 체내에서 마력이 빠져나가던 현상이 ‘마법사의 열병’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런 깨달음 얻고 나자, 나는 조금 허탈해졌다.

균열만 닫으면 해결될 병이었다니, 그럼 지금까지 내가 이것 때문에 겪은 마음고생은 뭔가 싶어서 억울하고 허망한 기분까지 들었다.

하기야, 원래 계획처럼 내가 균열 속으로 들어갔다면 애초에 알지 못했을 일이니 딱히 억울해할 것도 없을지 몰랐지만.

그리고 또 한 가지.

단지 그것만이라면 균열이 닫힌 후 내 증상 또한 진행이 멈춘 것으로 끝나야 했겠지만, 거기에서 더 나아가 조금이나마 병증이 완화되기까지 한 것은 아무래도 제라드의 영향인 듯했다.

마력의 파장이 아주 잘 맞는 사람이 직접 마력의 순환을 도와주면 긍정적인 효과가 있는 것 같다고 마법사들은 또 흥분해서 떠들었는데, 이 또한 앞으로 연구가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은 이렇게 마력의 파장이 맞는 사람을 찾을 가능성 또한 낮았고, 설령 그런 사람을 만난다 하더라도 반드시 상대의 협조가 필요한 일이니만큼, 지금 내 옆에 제라드가 있는 것은 그들의 말처럼 실로 기적적인 일이라 할 만했다.

유디트도 그런 얘기를 듣고는 혀를 차면서, 그럼 지난 생에서 자신이 그 방법을 알았어도 어차피 제라드가 협조하지 않아 병을 치료하기는 글렀겠다고 말했다.

“참……. 인생이 뭔지, 사는 게 뭔지 모르겠네.”

그렇게 생각보다 짧았던 휴식을 끝내고 다시 황녀로서의 일상으로 복귀하는 길에 나는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오늘은 대재앙 이후 처음으로 열린 황실 연회 날.

살날이 길지 않은 줄 알고 이제부터 막 놀아 보자고 마음먹었던 1황녀는 어정쩡한 일탈을 마무리 짓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운명이란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참으로 얄궂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이제부터 내 꽃길 인생이 시작이구나 싶을 때 절벽 밑으로 사람을 사정없이 밀어 떨어뜨리더니, 이제는 정말 끝이구나 생각해서 모든 걸 내려놓고 나자 꼭 놀리기라도 하듯이 새로운 길을 떡하니 눈앞에 가져다 놓았다.

“황녀님처럼 1분 1초도 허투루 살지 않으시는 분도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내 혼잣말을 들었는지, 옆에 있던 남자가 피식 웃었다.

제라드는 오늘 황실 연회의 참석자로서 예복을 입고 단장한 상태였다. 그래서 다른 때보다 훤칠하고 잘생겨 보였다.

오늘의 그는 단순한 이단자 출신의 기사가 아니라, 얼마 전 세드릭 황제로부터 정식으로 가문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승인받은 라스너 백작이었다.

“왠지 그렇게 산 게 의미가 있었나 싶어서 요즘 고민 중이니까 너까지 그런 소리하지 마.”

그리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동안 애먼 곳을 향해 혼자 열심히 헛발질만 하다가 어느 날 뜬금없이 남의 손에 의해 정곡을 쿡 찌른 듯한 느낌에 허망해져서 인생에 살짝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요즘 의학계에서 나 같은 상태를 지칭하는 단어가 있다던데, 그게 뭐더라.

아, 그래. 이런 걸 번아웃이라고 하던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당연히 의미가 있는걸.”

마침내 연회장에 입장할 때가 되어, 제라드가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면서 그는 내가 읊조린 말에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동안 지내 온 시간이 없었다면 오늘도 오지 않았을 게 아닙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손을 내미는 제라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니 저는 황녀님이 그런 인생을 살아 온 분이어서, 이렇게 오늘 당신을 만날 수 있어 기쁩니다.”

나는 엷은 미소를 띠고 있는 제라드를 마주 보았다.

지금 제라드가 한 말에 강아지풀로 가슴을 훑은 것처럼 속이 조금 간지러워졌다.

요즘 들어 부쩍 더 내 앞에서 겁 없이 건방지게 굴어 나를 당황시키더니, 이런 소리도 할 줄 알았나 싶었다.

“그래, 듣고 보니 그건 그러네.”

이내 나도 어렴풋이 웃으면서 제라드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들어가자.”

그의 말처럼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시간이 있었기에 오늘 같은 날도 맞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가끔 멍청한 실수도 하고 급히 뛰다가 넘어지기도 하면서 여기까지 온 시간 자체가 모두 나라는 사람 그 자체일 테니.

사실 나는 살아오는 동안 가끔 내가 싫기도 했고, 나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해 스스로를 괴롭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니 앞으로의 내 미래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보다 더 많이 웃고 즐기고 행복해하면서 또 최선을 다해 살아야지.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새로운 날들의 첫 시작이었다.

그 새로운 시간을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운아라고 할 만했다.

나는 제라드의 손을 더 세게 맞잡고 눈앞에 열린 문으로 망설임 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지금까지도 항상 내 노력으로 직접 손에 거머쥐어 왔던 눈부신 빛이 오늘따라 유독 따뜻하게 나를 감싸 주는 듯했다.

< 괴물 황녀님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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