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뭐야, 그럼 진작 그렇다고 얘기하든가.’
나는 왠지 민망해져서 괜히 두어 번 헛기침을 한 뒤, 조금 뒤로 뺐던 손을 다시 원상 복귀시켰다.
“그래……. 그런 거면 한번 해 봐.”
제라드의 마력이 다시 내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나는 거기에 반응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애써 침착한 척했다.
사실 이런다고 해서 정말 유의미한 치료법을 찾을 수 있으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계속 4황녀궁에 틀어박혀 마법사의 열병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는 유디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들이 원했던 것처럼 제라드를 희생시키는 금단술을 사용하는 데에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었으니, 이 정도는 두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주고 싶었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그런 데 시간을 할애할 바에는 나와 함께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같이 보내 주었으면 했지만 말이다.
그들이 이런 식으로 내 앞에서 끊어내지 못한 미련을 보일 때마다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나를 위해서 이렇게 애쓰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간질간질해지고 기쁘기도 했으니, 역시 나는 마냥 착한 사람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나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뭐지?’
‘왠지 점점…… 마력이 이상하게 움직이는 것 같은데.’
내 안으로 들어온 제라드의 마력은 처음보다 확연히 집요하고 어딘가 질척거리는 느낌으로 나를 훑고 있었다.
이게, 원래 이러는 게 맞는 건가……? 정말 의료 목적으로 이러는 게 맞아?
“그런데 황녀님.”
그렇게 내가 의혹을 느끼고 있을 때, 귓가에 간지러울 정도로 나지막한 속삭임이 흘러들었다.
동시에, 내 안에서 한결 밀접하게 뒤엉키는 마력의 움직임이 느껴져서 무심코 움찔 몸을 떨고 말았다.
어느새 내게 좀 더 가까이 몸을 기울인 제라드가 얽힌 손가락에 저릿할 정도로 세게 힘을 주며 낮게 읊조리듯이 말했다.
“아직 밝은 대낮인 데다가 탁 트인 곳이라 안 된다는 건, 즉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는 얼마든지 이런 짓을 해도 된다는 허락의 의미인 건지요?”
눈부신 햇빛 조각이 박혀 유독 예쁘게 반짝이는 은회색 눈이 장난스럽게 살며시 접히는 순간, 나는 불에 데기라도 한 듯이 잡고 있던 제라드의 손을 거의 내동댕이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가, 누가 그런 뜻으로 한 말이랬어? 웃겨, 진짜……!”
좀 더 현란한 말솜씨로 혼자서 마음대로 착각하지 말라거나, 누구에게 그런 무엄한 소리를 하는 것이냐는 소리를 쏘아붙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지금은 씩씩거리는 숨소리만 나올 뿐 제대로 된 말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제라드를 매섭게 노려봐 준 다음, 다소 거친 걸음으로 먼저 정원을 빠져나갔다.
그런 내 뒤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와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열이 머리 꼭대기까지 올랐다.
제라드도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쫓아 오고 있는지, 뒤에서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는 나와 달리 뒤에서 잔디를 밟으며 이어지는 발소리는 드문드문하게 들려왔다.
그런데도 키 차이 때문인지, 제라드는 금방 나를 따라잡았다.
“황녀님, 화 나셨습니까?”
“따라오지 마.”
“죄송합니다. 반응이 귀여우셔서 조금만 장난을 친다는 게.”
미친 거 아니야?
나는 제라드의 입에서 나온 기함할 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너, 지금 누구한테 그런 무엄한 소리를…….”
하지만 생각보다 제라드는 가까이에 있었고, 그래서 나는 고개를 돌리자마자 그의 가슴팍에 코를 박을 뻔했다.
“조심하십시오.”
주춤하며 뒤로 물러난 내 팔을 제라드가 붙잡았다.
왠지 조금 전부터 제라드의 앞에서 나답지 않은 바보 같은 실수를 자꾸 하게 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조금 전보다는 침착함을 많이 되찾은 상태여서 이번에야말로 제라드에게 한마디 해줄 생각으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눈이 마주치자마자 나도 모르게 입이 다물어졌다.
예전에 제라드에게는 낮보다 밤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아니었다.
밝은 햇빛과 초록빛 신록이 무리 지어 뒤엉켜 있는 정원에서 제라드는 단지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거뜬히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쩌면 지금 그가 하얀 햇볕조차 녹아내리게 할 것 같은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제라드는 그를 보는 내 속이 다 간지러워서 남몰래 긁고 싶은 충동마저 생기게 하는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한순간 나도 모르게 낮게 탄식할 뻔했다. 그러나 동요 어린 마음을 감추고 얕은 숨을 삼키며 시선을 내렸다.
어쩌면 이런 시간이 앞으로 무척 짧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속이 쓰리고 조금 서글픈 것 같기도 한 기분이 들었다.
“황녀님.”
그때, 내 손가락 사이로 다시금 온기가 파고들었다.
“모처럼 날씨도 좋은데, 정원에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가시죠.”
제라드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내 눈을 들여다보면서 속삭였다.
“앞으로 한동안 황녀님도 바쁜 일이 없으실 예정이고 저도 그러니까. 그러니 조금만 더 저와 같이 있어 주세요.”
제라드는 내가 정말 간절히 원하고 있지만 차마 그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거짓말처럼 내게 먼저 해주었다.
“……그래. 날씨도 좋으니까.”
내가 작게 중얼거리듯이 허락하자, 제라드가 먼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제라드와 나는 그렇게 손을 맞잡고 다시 뒤돌아 정원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는 동안 아까부터 살짝 홧홧하던 귓가에 열이 더 오른 것은 나만 아는 비밀이었다.
* * *
“결국 폐하께서 직접 피해 지역을 순회 중이라면서요?”
“너도 들었구나? 그렇다더라. 알고 보니 우리 부황께서 귀가 얇으시더라고.”
유디트와 함께 테라스에 앉아 다과를 들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던 중에 나온 말을 듣고 나는 코웃음을 쳤다.
세드릭 황제가 직접 황궁 밖으로 나가서 오랜만에 성군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은 이미 카뮬리타 전역에 파다하게 소문이 난 일이었다.
“우리가 둘 다 파업하고 라미엘과 클로에는 대외 활동을 하지 못하는 상태니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애들을 내보내 봤자 의미가 없겠지.”
나머지 황녀, 황자들은 그럴 만한 능력도 없고 아직 너무 어렸으니 말이다.
그래서 결국 세드릭 황제가 직접 움직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역시 핏줄은 어디로 가지 않는 건지, 그는 요즘 사람들의 찬양을 자양분 삼아 지역 순회에 생각보다 더 열을 올리고 있는 듯했다.
이번에 균열을 닫은 공로가 자신의 것인 척 한껏 사람들의 찬사를 즐기다가 뒤늦게 소문이 정정되니, 마치 이미 가졌던 걸 나한테 뺏기는 기분이 들어 자존심이 상하기라도 했나?
“4황녀님, 오늘 오전에 도착한 서신들을 모아 왔습니다.”
“아, 이리 줘.”
그때, 시녀가 테라스로 들어와 유디트의 앞으로 편지 다발 하나를 내려놓았다.
요즘 유디트는 나와 마찬가지로 세드릭 황제에게 파업을 선언한 뒤, 거의 내 궁에 눌러앉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와 함께 밥을 먹고 놀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물론 내게 말은 하지 않아도 여전히 하루 중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해 마법사의 열병을 치료할 방법을 찾아보고 있는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여전히 별다른 진척은 없는 눈치였다.
얼마 전, 나는 4황녀궁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유디트를 찾아가 그녀에게도 이제껏 한 번도 한 적 없던 부탁을 했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으니 앞으로 나와 조금이라도 더 같이 시간을 보내 주면 안 되겠느냐는 말에, 유디트는 그런 불길한 소리는 하지도 말라고 화를 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나를 원망하듯이 쳐다보며 치사하다고 말하면서도 내 뜻에 따라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요즘 함께 나태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1황녀님께 도착한 서신들입니다.”
유디트에 이어 나한테도 따끈따끈한 서신이 도착했다. 유디트와 나는 잠깐 각자에게 온 편지를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한테 온 편지에는 라미엘과 클로에가 보낸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르벨라.
얼마 전에 그레이엄 후작가에서 쓸 만한 보양식 재료를 찾았는데, 새로 가문을 잇게 된 이모님이 앞으로 잘 봐달라는 의미로 우리 부황께 진상한다는 걸 몰래 빼돌려서 너한테 보내.
내 생각하면서 한 뿌리, 한 뿌리, 소중히 뜯어 먹어!
“혹시 라미엘 이름으로 오늘 들어온 거 있어?”
“네, 마법 생물이 된 맨드레이크예요.”
마리나의 답변에 나도 모르게 얼굴을 구겼다.
그냥 맨드레이크도 아니고 마법 생물이 된 맨드레이크라니. 그건 마법 생물에게 먹혔다가 배설된 맨드레이크를 의미했다.
이후 마법적 기운이 더해져 그냥 맨드레이크보다 신비한 효능을 지닌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 때문에 거부감이 들었다.
지난번에 라미엘이 내 상태를 묘하게 의심하는 듯한 말을 하더니, 요즘 틈만 나면 이런 이상한 것들을 보내고 있었다.
“마법 식물이 된 맨드레이크라……. 그러고 보니 맨드레이크로는 한 번도 실험해 본 적이 없었네요.”
“한 뿌리 정도는 가공 없이 먹어 보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만.”
게다가 유디트와 제라드는 지금처럼 라미엘이 보낸 물건들에 은근한 관심을 보이며 나한테 먹이려 하기 일쑤였다.
“몸에 좋은 것도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으면 해로운 거 모르니?”
이럴 때는 둘이 의외로 쿵짝이 잘 맞았는데…….
나는 이들의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통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나는 두 사람이 나누는 맨드레이크에 대한 대화가 더 깊어지기 전에 화제를 돌렸다.
“참, 유디트. 다음에 클로에가 밤에 몰래 자기 궁에 모여서 놀자는데 어때?”
“전 좋아요.”
내가 질색하는 걸 알아서인지, 유디트와 제라드는 다행히 내가 말을 돌리는 걸 모르는 척해 주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나머지 편지들을 확인하던 유디트가 얼굴을 찡그렸다.
“뭐야, 이 사람은 왜 자꾸…….”
“응? 왜? 누구한테 온 건데?”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혹시 나 몰래 유디트를 괴롭히는 사람이라도 있나 싶어서 물었다.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편지를 치우려 하는 유디트를 보자 의심스러운 마음이 더욱 커졌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별로 중요한 내용도 아니고…….”
퍼엉!
하지만 유디트가 편지에 손을 대자마자 저절로 봉투가 펼쳐졌다. 그리고 안에 든 카드와 꽃잎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4황녀님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허공에 떠오른 카드에서 어디선가 들어 본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흩날리는 꽃잎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이 목소리는…….
“뭐야, 몬테라 영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