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황녀님-185화 (201/203)

185화

* * *

“소공작, 어서 와.”

“1황녀님께 인사드립니다.”

그렇게 한결 가벼운 마음을 안고 1황녀궁으로 돌아가 손님을 맞이했다.

킬리안 베른하르트가 오늘따라 신경을 쓴 듯이 유독 멀끔하고 수려한 모습으로 다가와 내게 인사했다.

“오늘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1황녀님.”

“나야말로 지난번에는 고마웠어. 덕분에 황궁 밖의 피해가 생각보다도 적었다고 하더군.”

“아닙니다. 카뮬리타 사람들을 위한 일인데 당연히 손 놓고 있을 수 없지요. 더군다나 1황녀님께서 제게 처음으로 청하신 일이 아닙니까.”

오늘 킬리안이 입궁한 것은 내가 그를 불렀기 때문이다.

“들어가지. 소공작을 위해 특별히 귀한 차를 준비했어.”

킬리안과 나는 손님 접객용 응접실에 가서 얼마간 자잘한 날씨 얘기를 하거나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킬리안은 오늘 내가 그를 왜 불렀는지 은연중에 눈치챈 듯했는데, 그래도 자리를 불편해하거나 어색해하지 않고 평소처럼 나와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러다가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을 때, 나는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고 킬리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혹시 괜찮으면 밖에 나가서 조금 걷지 않겠어?”

킬리안도 내 권유에 잠깐 나를 말없이 쳐다보다가 입술을 들어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괜찮겠군요. 그럼 나갈까요?”

나는 마리나를 포함한 수행원들에게 멀리서 따라오게 했다. 제라드에게는 아예 내 뒤를 따르지 못하게 했다.

제라드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것처럼 입술을 벌렸다가 곧 다시 다물었다. 그런 뒤, 이번만큼은 내 명령대로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나는 킬리안과 함께 밖으로 나와 1황녀궁의 정원을 걷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날씨가 좋네.”

“정말 그렇군요.”

“며칠 전의 일 때문에 황궁 안에도 군데군데 손볼 곳이 많아. 그래도 1황녀궁의 정원은 멀쩡해서 다행이지.”

“예, 하마터면 1황녀님과 이런 시간을 보내지 못할 뻔했으니 다행인 것 같습니다.”

사실 해야 할 말은 정해져 있었는데, 왠지 생각보다 쉽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킬리안도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진작 눈치챈 듯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더 시간 끄는 것도 못할 짓이다 싶어서 마침내 본론을 꺼냈다.

“소공작. 전에 소공작이 내게 개인적으로 했던 말 말인데.”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자, 킬리안도 자리에 멈춰선 채 나를 응시했다.

“미안해.”

나는 그의 얼굴을 마주하며 이번에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말했다.

“나를 특별히 생각해 줘서 고맙지만, 마음은 받아들일 수 없어.”

그러자 킬리안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이내 그가 얕은 숨을 내뱉으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왠지 그렇게 대답하실 것 같았습니다.”

킬리안의 입술에 번져 드는 씁쓸한 미소가 햇빛에 물들어 희게 보였다.

“그래서인지, 생각보다 그렇게 충격적이지는 않네요.”

그는 또 얼마간 나를 가만히 보기만 하다가 물었다.

“이미 마음에 담은 사람이 있으시지요?”

“그래.”

이런 상황에서 거짓말을 하거나 둘러대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냥 솔직히 대답했다.

눈치가 빠른 남자이니 이미 알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확신할 정도로 내가 은연중에 티를 냈었던가 싶어 조금 겸연쩍어졌다.

“혹시 제가 그래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면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킬리안은 첫 번째 물음에서 그치지 않고 좀 더 당돌한 질문을 꺼냈다. 그에 대답을 조금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물론이고 소공작을 위해서도 그러지 않는 게 좋겠어. 기다려도 소용없을 거거든.”

내 흔들림 없는 말에 킬리안의 표정이 살짝 흐려졌다.

하지만 이내 그는 조금 전처럼 씁쓸하기는 하지만 약간의 후련함도 담긴 미소를 지으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군요. 진지하게 대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리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대단한 부탁도 아니고, 또 마지막 청이라고 해서 나도 거절하지 않았다.

내가 앞으로 내민 손을 킬리안이 감싸듯이 붙잡았다. 그의 고개가 앞으로 기울어지고, 이후 가벼운 온기가 손등에 내려앉았다.

그런데 원하는 바를 이루고 나서도 킬리안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소공작.”

혹시 나한테 거절당한 것이 충격적이라서 이러는 건가 싶어 조심스럽게 킬리안을 불렀다.

하지만 잠시 후 고개를 든 킬리안은 상심하기는커녕 오히려 엷게 미소를 띤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역시…… 그리 쉽게 마음을 접을 수는 없을 것 같네요.”

“뭐?”

“그러니 기다려 보겠습니다. 정말 소용없을지는 그때가 되어봐야 아는 것이니까요.”

나는 예상치 못한 킬리안의 반응에 조금 놀랐다.

그러나 역시 내 입장에서는 그를 응원할 수도, 그에게 긍정적인 말을 해줄 수도 없었다.

“나중에 더 후회할지도 모르는데?”

“괜찮습니다. 그것도 제가 선택한 것이니 설령 그렇다 해도 감수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말하는 사람을 부득불 더 말리기도 애매했다.

“그러다가 언제라도 틈이 보이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겁니다. 사실 불충한 말씀이지만, 지금도 마음속으로는 황녀님과 그 사람 사이에 제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크기를 바라고 있기도 하고요.”

“소공작, 불화를 기원하는 말을 너무 당당하게 하는 것 아니야?”

나는 지나치게 솔직한 킬리안의 말에 그만 헛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그러다가 이내 눈앞의 얼굴을 마주하며 한숨과 웃음이 뒤섞인 얕은 숨을 입술 사이로 흘려보냈다.

“그래, 후회도 본인의 몫이라고 했으니. 소공작은 내 생각보다 더 용감한 사람이었구나.”

그의 마음에 답할 수는 없지만, 킬리안이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내 생각보다 킬리안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방금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미 내 눈과 마음에 먼저 들어와 나를 가득 채워 버린 사람이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는 내어줄 것이 더 이상 없어 미안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으로 재차 사과하는 것도 오만인 듯해서, 나는 그저 킬리안에게 다른 좋은 인연이 있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킬리안이 정원을 떠난 뒤, 나는 바로 궁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밤에 산책을 나올 때마다 곧잘 누워서 시간을 보내곤 하던 정원 구석의 벤치에 앉았다.

햇볕은 눈이 부셨고, 하늘은 오늘따라 유독 맑게 푸르렀다.

나는 모처럼 일정에 쫓기는 일 없이 세상의 아름다운 빛과 향기, 그리고 따스함을 만끽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누군가가 조용히 다가와 내 옆에 앉는 게 느껴졌다.

“조만간 라스너 백작가의 이름이 귀족 명부에 정식으로 다시 새겨질 것 같던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나는 굳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고 태연히 말을 이었다.

“잘됐네. 축하해.”

그러고 나서 고개를 살며시 돌려 웃어 보이자, 먼저 나를 쳐다보고 있던 제라드가 가만히 시선을 마주해 왔다.

글렌 라스너가 그레이엄 후작에게 조종당해 타의로 금단술에 손을 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라스너 백작가의 복권은 거의 기정사실화되었다.

그러나 이번에 드디어 세드릭 황제로부터 최종 결정이 내려졌다고 들었다.

사실 내가 쓰러져 있는 동안 처리된 일이었지만, 늦게라도 직접 축하해 주고 싶은 마음에 제라드에게 말했다.

그러자 제라드는 한동안 조용히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불현듯 그가 갑자기 내게 팔을 뻗었다.

뒤이어 내 손등을 덮은 온기에 일순간 몸을 움찔 떨고 말았다.

곧 손가락이 얽히고 약간 서늘하게 식었던 피부 위로 온기가 스며들었다.

사실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바로 손을 뿌리쳐도 되었지만 그냥 가만히 놔뒀다. 어느새 겹쳐진 두 손의 온도가 처음과 달리 제법 비슷해졌다.

괜히 손가락이 움츠러들고 속이 근질거리는 느낌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숨소리를 죽였다.

그런데 다음 순간, 얽힌 손가락을 타고 기묘한 감각이 흘러들었다.

맞닿은 손에서 스민 마력이 무방비 상태에 있던 내 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흠칫 놀랐다.

대번에 몸에서 마법사의 열병과는 다른 종류의 열기가 피어오르고, 입 안이 타들어 가듯이 바짝 말랐다.

“너……. 지금 뭐 해?”

당황해서 당장 잡힌 손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제라드는 일전에 그랬듯이 이번에도 순순히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무슨, 이렇게 밝은 대낮부터 도대체 뭐 하는 짓이야? 더군다나 이렇게 탁 트인 곳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물론 내가 할 말은 아니었다. 나도 지금까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제라드에게 똑같은 짓을 한 적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그때는 이런 기분이 든다는 걸 몰랐을 때였다. 반면 제라드는 이게 얼마나 낯부끄러운 짓인지 다 알면서 이런다는 게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언제부터 이렇게 뻔뻔해진 건지, 제라드는 낯빛 하나 바뀌지 않은 얼굴로 나를 들여다보다가 입술 끄트머리를 살며시 끌어올렸다.

“정말이네요. 이렇게 부끄러워하시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내가 부끄러운 게 아니라……! 지금 네가 하는 게 그런 짓이라고.”

“도대체 제가 뭘 했다고 이러시는 건지.”

천연덕스러운 반응에 기가 막혔다.

얘가 한동안 잠들어 있던 내 승부욕에 불을 붙이네?

발끈해서 나도 제라드에게 똑같이 되돌려줄 생각으로 마력을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내가 행동 개시에 들어가기 전에 덧붙여진 설명을 듣고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해하지 마시지요. 황녀님과 제 마력의 파장이 맞는다고 하니 혹시 마법사의 열병을 치유할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을지 시험해 보려는 것뿐이니까.”

마음이 혼란한 상태라 그런지 제라드의 말이 머릿속에 바로 입력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말을 곱씹어 생각하다가, 이내 방금과는 다른 의미로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제라드가 지금 한 말에 의하면, 그가 마력으로 나를 들쑤신 건 불건전한 이유가 아니라 의료 목적이었던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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