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언니!”
“1황녀님, 정신이 드십니까?”
두 사람은 잠깐 놀라서 굳어 있다가 아르벨라에게 급히 다가갔다.
아르벨라는 어딘가 떨떠름한 눈으로 송출 중인 마력석의 영상을 보았다.
예전에는 자신의 모습을 담은 마력석을 보는 것이 마냥 즐거웠으나.
이전 생의 기억을 되찾은 뒤에는 그동안 자기애가 넘쳤던 사실이 다소 민망하게 여겨졌다.
“그래, 나도 반갑긴 한데 일단 저 마력석부터 치우…….”
“당장 황궁의를 불러오겠습니다!”
“마리나아아아아!”
그러나 아르벨라가 말을 끝마치는 것보다 제라드와 유디트가 급히 움직이는 게 더 빨랐다.
계속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과 황궁의, 그리고 마법사들도 소식을 듣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방 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1황녀님! 눈을 뜨셨군요! 잠시 상태를 살피겠습니다!”
“아니, 내 말부터 좀 들어. 먼저 마력석…….”
“혹시 괜찮으시다면 무리하지 않으시는 선에서 마력을 움직여 보시겠습니까?!”
“응, 그래. 안 들리는구나……. 그냥 마음대로 해라.”
다들 아르벨라가 깨어났다는 사실에 소란을 떠는 통에, 결국 그녀는 방 안 가득 송출되는 영상을 그대로 놔둔 채로 진찰을 받아야만 했다.
* * *
“뭐야, 왠지 정신 차리기 전보다 더 피곤하잖아…….”
가까스로 사람들을 내보낸 뒤, 아직까지도 큰 소리로 영상이 재생되고 있던 마력석을 드디어 치웠다.
분명 푹 자고 일어난 상태인데 한바탕 소란을 겪고 난 뒤라 그런지 이상하게 기운이 쭉 빠졌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황궁의와 마법사들은 내가 마법사의 열병 때문에 종종 이런 식으로 침대 신세를 졌던 걸 알 텐데, 이번따라 왜들 이렇게 유난이지?
‘혹시 세계 멸망의 위기를 겪고 난 뒤라 그런가?’
어째 다른 때보다 사람들의 감수성이 높아진 것 같았다.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언니가 쓰러진 이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아세요?”
“쓰러졌다니……. 그냥, 그동안 쌓인 잠 좀 자고 일어난 거야.”
내가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말하자 유디트가 나를 원망 어린 시선으로 살짝 흘겨봤다.
내가 닷새 만에 눈을 떴다는 건 조금 전에 들어서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물러간 뒤에도 유디트와 제라드는 방에서 나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마리나, 나 물 좀 줘.”
“네! 여기, 따뜻한 물이에요.”
나는 먼저 목을 좀 축였다.
의식이 없던 동안에도 청결 마법을 사용해서 몸은 뽀송뽀송했지만, 오랜만에 말을 해서 그런지 목이 영 꺼칠했다.
“속이 허하시진 않으세요? 단호박 수프를 가져왔어요. 식욕이 없으셔도 조금만 드셔 보세요.”
그런데…… 아까부터 앞에서 날아드는 눈빛이 영 부담스러웠다.
물잔을 들었다 내리고 식기를 잡는 내 작은 움직임에도 집요하게 시선이 따라붙어서, 유디트와 제라드가 내 일거수일투족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무시하고 마리나가 준 단호박 수프를 깨작거리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계속 거기 있을 거면 그동안 있었던 일이나 얘기해 봐.”
그렇게 해서 듣게 된 지난 닷새 동안의 일은 예상했던 바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날 하늘 전체를 덮은 균열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고, 괴수들은 모두 일망타진되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아주 적었다고 하니, 이때를 위해 최대한 대비한 보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레이엄 후작에게는 결국 기다렸던 종신형이 내려졌다.
하지만 극비리에 전달된 명령에 의하면, 사실상의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고 했다.
클로에는 쓰러진 이후로 몸을 정양 중이지만 크게 다치거나 상한 곳은 없다고 해서 다행이었다.
나는 그레이엄 후작에게 마력석을 냅다 집어던지던 클로에의 모습을 문득 떠올렸다.
난 정말 클로에에게 그런 재주가 있는 줄 몰랐다.
그토록 급박한 상황에서도 그 정도의 강도와 명중률이라니…….
단순히 우연인가 싶기도 했지만, 만약 실제로 이런 개인기가 있다면 클로에에게는 차라리 마법보다 육체를 단련하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잠시 후 나는 마리나를 내보낸 뒤, 내 앞에 있는 녀석들을 향해 작게 혀를 찼다.
“그러고 보니까 너희도 참 간이 커. 다른 곳도 아니고 황궁에서 금단술을 사용하다니. 균열 때문에 티가 안 나서 다행이었지, 하마터면 인생 종칠 뻔한 것 아니야?”
까딱 잘못했다가는 그레이엄 후작과 괜히 엮여서 더 강력한 처벌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실은 조금 전부터 두 사람이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감이 와서 일부러 내가 먼저 이 얘기를 꺼냈다.
물론 이런 식으로 던질 가벼운 소재가 아니었지만, 분위기가 우중충해지는 것도 싫어서 일부러 지나가듯이 얘기했다.
“그런데 솔렘 왕국 마법사들은 어떻게 됐어?”
“알 게 뭐예요.”
그때, 유디트가 자그마하게 중얼거리듯이 읊조렸다.
“지금 얘기한 것들 따위, 전부 어떻게 되든 알게 뭐예요. 그런 게 뭐가 대수라고.”
나는 일순간 멈칫한 뒤, 조금 전부터 들고만 있던 스푼을 내려놓고 수프 그릇을 옆으로 치웠다.
“유디트.”
“아니에요. 이런 말하려던 게 아니에요. 그냥…… 그냥, 깨어나신 게 기쁘다는 소리가 하고 싶었어요.”
아까부터 유디트가 하고 싶은 말을 삼키는 것 같더니, 드디어 내게 원성을 토해 내려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유디트는 금방 고개를 저으며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평소의 자연스러운 미소가 아니라, 어디를 봐도 애써 흉내만 낸 미소였다.
나는 그걸 보며 난처함과 미안함을 함께 느끼다가, 결국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나도 그래. 이렇게 다시 보니까 좋네.”
유디트가 정말 하고 싶던 말을 마음속에 눌러 담은 것처럼 나도 걱정을 끼쳐서 미안하다는 말이나, 끝내 두 사람의 뜻을 따라 줄 수 없는 것에 대한 사과는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말하지 않아도 내가 유디트의 마음을 알고 있듯이, 그녀 역시 그럴 터였지만.
“그럼 전 먼저 가 볼게요. 막 일어나셔서 피곤할 텐데 쉬세요.”
유디트는 이후 별말을 하지 않고 1황녀궁을 떠났다.
“물이 식은 것 같은데 다시 따뜻하게 데워 드릴까요?”
그 후 단둘만 남은 자리에서 제라드가 내게 물었다.
“혹시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괜찮아. 그냥 마리나를 다시 불러 줘.”
조금 전까지는 괜찮았는데, 왠지 유디트가 떠나고 나니 방에 있는 제라드가 부쩍 의식되었다.
그래서 그만 나가 보라고 했으나, 제라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에 있는 잔 속의 물을 마력으로 데워 내게 가져다주었다.
눈썹을 슬쩍 추어올렸지만, 그래도 기껏 일부러 가져다준 것이니 일단은 손을 내밀어 물잔을 받으려 했다.
그런데 제라드가 손에서 컵을 놓지 않았다.
“사실 1황녀님이 잠드신 동안 몇 번 더 금단술을 시도했습니다.”
살짝 겹쳐진 내 손가락이 작게 움칫거리는 걸 분명 제라드는 느꼈을 것이다.
“이 정도는 이미 예상하고 계셨을 테고.”
이어서 물잔을 든 손에서 힘을 푼 제라드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덧붙였다.
“그럼 혹시, 균열을 완전히 닫게 되면 4황녀님과 제가 다시 금단술을 사용하지 못하게 될 것도 알고 계셨습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고 제라드의 눈을 마주했다.
“알고 계셨군요.”
제라드는 그것만으로도 원하는 답을 알아낸 듯이 눈동자를 어둡게 가라앉혔다.
그는 내 얼굴을 잠깐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말씀하신 대로 시녀를 불러오겠습니다. 황궁의가 안정을 취하라고 했으니 오늘은 푹 쉬십시오.”
나는 문을 향해 걸어가는 제라드의 뒷모습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유디트도 그렇고, 너도 화를 안 내네.”
의외라는 생각이 들어 말하자, 제라드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다른 방법을 찾아내면 되니까 상관없습니다.”
그는 그 짤막한 한마디를 남긴 뒤 방을 나섰다.
다른 방법을 찾아내면 된다니……. 설마 유디트도 제라드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나?
하지만 이전 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찾아내지 못한 방법을 그렇게 쉽게 발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두 사람이 또 가망 없는 일에 매달리려 한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고, 또 그렇게 해서 미련이 조금이라도 줄어든다면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한번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 * *
다음 날, 세드릭 황제를 알현하고 나오는 길에 나는 마리나에게 명령했다.
“마리나. 오늘부터 내 앞으로 잡혀 있던 일정들 전부 취소시켜.”
“예? 전부요?”
“나 오늘부터 파업할 거야.”
갑작스러운 소리에 마리나가 당황했지만, 내뱉은 말을 번복하지 않고 황도를 걷기 시작했다.
사람이 쭉 한결같은 것도 대단한 일이라는데, 우리 부황은 지겨울 정도라 조금 변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직접 최고 통치자로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할 마음을 먹을 게 아닌가.
지금까지는 그래도 내게 책임감이 있어 세드릭 황제가 일을 시키는 족족 거절하는 법 없이 어떻게든 완벽하게 해내려고 기를 써 왔지만, 이제는 나도 완전히 질려 버렸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른 때처럼 내게 온갖 복구 작업을 다 시키려 하는 세드릭 황제에게 처음으로 전부 다 싫다고 퇴짜를 놨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아바마마. 제 몸이 아직 완쾌되지 않아 명령하신 일을 수행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상냥하고 착한 딸의 도리로, 세드릭 황제에게 건실한 충언을 올렸다.
“그러나 좋은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며칠 전에 황궁에서 그러신 것처럼, 이번에는 만백성들의 앞에서 아바마마의 위엄 있는 모습을 드러낸다면 더욱이 모두가 그 이름을 높이 칭송하며 우러러볼 겁니다.”
즉, ‘난 하기 싫으니까 너나 해!’라는 소리였다.
당연히 세드릭 황제는 뭘 잘못 먹은 사람이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그냥 배 째라는 듯이 굴어 버렸다.
그렇게 세드릭 황제의 말문이 막힌 사이에 알현장을 빠져나오자 오랜만에 속이 좀 시원해지는 듯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나는 오늘부터 다른 일정들도 전부 취소하고 모처럼의 긴 휴가나 가져 볼 생각이었다.
물론 세드릭 황제의 말처럼 재앙이 다녀간 후라 카뮬리타 곳곳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고, 백성들을 생각한다면 아직 힘이 있을 때 그들을 위해 헌신하는 게 1황녀로서의 도리이기는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애초에 나 한 사람이 없다고 해서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나라라면 어차피 조만간 망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내가 밭 가는 소처럼 뼈 빠지게 일해 온 시간이 있으니, 이번 한 번만 좀 쉰다고 해서 내게 뭐라고 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을 터였다.
그래서 나는 생애 처음으로 내 의무를 잠시만 내려놓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