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빨리 일어나요. 당신, 이렇게 누워 있을 사람이 아니잖아.”
붙잡고 있던 손 위로 고개를 숙이자, 검은 머리카락이 침대 위로 흘러내렸다.
“이대로 눈을 뜨지 않으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걱정되지도 않아요?”
작게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으나, 여전히 미동 없이 누운 사람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런 말에 눈을 뜨실 거라면 진작 그랬을 겁니다.”
불현듯 유디트의 등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눈길을 돌리자, 방 안으로 걸어들어오고 있는 낯익은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애처로운 빛을 띠고 있던 유디트의 얼굴이 대번에 식었다.
“제라드 경. 볼 때마다 1황녀님의 침실 앞을 떠날 줄 모르네요. 할 일이 어지간히 없나 보지요?”
“제 역할이야 원래 1황녀님 곁을 지키는 것이니 당연한 게 아니겠습니까. 4황녀님이야말로 오전에도 방문하셨으면서 정오가 지나자마자 또 오시다니, 오늘도 한가하신가 봅니다.”
유디트가 여느 때처럼 쌀쌀맞게 말했으나, 제라드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꾸했다.
유디트는 오히려 그게 더 얄미웠다.
딱히 비밀도 아니었지만, 사실 그녀는 제라드가 싫었다.
그래도 옛 기억을 되찾기 전에는 아르벨라의 옆에 있는 그와 나름대로 사이좋게 지내보려고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그게 무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굳이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아무리 스스로가 원한 바가 아니었다고 한들, 제라드는 자신의 손으로 끔찍한 짓을 저질렀던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게다가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전부터 아르벨라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제라드가 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쨌든, 괜히 꿈자리만 사나워질 수 있으니 잠든 분 앞에서 방금처럼 말하는 건 이제 그만두시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만.”
“꼭 내가 1황녀님을 괴롭히려고 이런다는 소리로 들리네요.”
“그게 아니란 걸 아니까 이렇게 공손하게 간언을 드리는 것이겠지요.”
괜히 고까운 기분이 들어 유디트가 까칠하게 말했으나, 제라드는 여전히 무감하게 느껴질 정도로 담담하게 반응했다.
그러나 방금 유디트가 들은 내용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마냥 무심하지 않았다.
제라드의 말은, 마치 정말로 아르벨라에게 나쁜 마음을 먹고 입을 놀리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좋게 말로 끝내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로 들렸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은 단순한 오해나 착각이 아니라, 지금 유디트가 느낀 것이 맞을 것이다.
“웃겨. 당신은 공손의 뜻을 모르나요?”
“제 말이 거슬리셨다면 죄송합니다. 제게는 다른 것보다 1황녀님의 무사 평안함이 최우선인지라.”
건방지다고 한소리 하고 싶었지만, 막상 그러자니 제라드의 태도와 언행은 성을 내기 미묘한 경계선상에 위치해 있었다.
표정과 말투도 시종일관 지나치게 차분해서 어째 그에게 날카롭게 반응하는 사람만 이상해질 것 같았다.
그렇게 유디트가 뾰족한 시선만 보내는 사이, 제라드는 아르벨라와 유디트가 있는 침대를 지나쳐 열려 있던 창문을 닫았다.
“당신은 이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은 거예요? 왜 그렇게 멀쩡해?”
유디트는 거슬리는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 결국 따지듯이 묻고 말았다.
“……멀쩡하다고?”
하지만 은회색 눈이 소리 없이 움직여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유디트는 입을 다물었다.
“4황녀님은 지금 제가 멀쩡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애꿎은 사람에게 화풀이했다는 자각 정도는 있었다.
더군다나 차분하게 가라앉아 의연함을 가장하고 있기는 하나, 그 안에 박혀 있는 저 위험한 광채를 본다면 누구도 지금의 그를 정상적인 상태라고 생각하지 못할 터였다.
하기야, 정상인이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자신을 제물로 삼는 마법을 쓰는 데 동의할 리도 없었으니…….
유디트는 제라드가 싫었지만, 그 점 하나만큼은 예전부터 높이 샀다.
그는 정말 한 사람을 위해서 늘 망설임 한 번 없이 제 목숨마저 기꺼이 내놓곤 했다.
제라드도 유디트가 진심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다른 말 없이 그녀에게서 시선을 뗐다.
뒤이어 걸음을 옮긴 제라드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유디트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건 뭐예요?”
“라스너 백작가에 갔을 때 찾은 겁니다.”
제라드가 손을 움직여 마력석을 작동시키자, 눈에 익은 영상이 송출되었다.
-아르벨라, 꽃구경을 한다더니 거기서 혼자 뭐 하고 있니?
-토끼풀을 찾아요.
-토끼풀은 왜?
천사 같은 어린 소녀가 햇빛을 머금은 초록빛 배경 속에서 사랑스럽게 활짝 웃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아르벨라의 어릴 적 모습을 담은 마력석이었다.
유디트와 제라드는 묘한 감회에 젖어 입을 다문 채 눈앞에 이어지는 영상을 감상했다.
그러다가 이내 마력석의 작동이 멈추었을 때, 유디트가 불만스럽게 힐난했다.
“이거 제라드 경 소지품이예요? 아, 관리를 어떻게 했기에 화질이 이래요?”
“이것도 많이 복원한 건데요. 가지고 있을 때 하도 많이 작동시킨 데다, 몇 년 동안은 아예 관리되지 않은 빈 저택에 방치되어서 나중에 완전히 멈추기까지 한 걸 다시 고친 거니까.”
그 말처럼, 테이블 위의 마력석은 아주 낡은 상태였다.
정말 수없이 많이 재생했던 듯이 마력석을 작동시키기 위해 손을 대야 하는 부분은 닳아 있기까지 했다.
하기야, 비슷한 나이의 소년 소녀들 중에 마음에 고이 품은 1황녀의 영상 마력석 하나 없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리고 한순간 유디트는 뭐라고 형언하기 어려운 기묘한 의문을 느꼈다.
‘……설마 지난 생에도 내 영상 마력석을 갖고 있던 건 아니겠지?’
그러니까, 그녀가 아르벨라로 살았을 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기만 해도 소름이 돋아서 유디트는 껄끄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미간을 구겼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자, 왠지 그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아르벨라로 살아가는 동안 관심은커녕 눈길 한 번 준 적 없던 남자였으니까.
그때도 제라드는 제 주인 옆에 딱 붙어서 그녀에게 눈곱만큼의 호의도 느껴지지 않는 써늘한 시선만 보냈었다.
그러니 어릴 때라고 해서 별반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은 왜 다른 거지?
설마 저 영상 속의 소녀에게 옛 주인의 영혼이 깃든 걸 어릴 때부터 무의식중에 느끼기라도 했나?
그렇게 유디트가 미심쩍음과 떨떠름함이 담긴 눈으로 앞에 있는 남자를 훑고 있을 때, 제라드가 유디트의 시선을 오해한 듯이 입을 열어 마력석을 가져온 이유를 설명했다.
“1황녀님의 취미가 영상 마력석 감상이었던 게 생각나서 한번 가져와 본 겁니다. 최근에는 바빠서 그런지 영 시간을 내지 못하시는 듯했지만…….”
“영상 마력석 감상이 1황녀님의 취미라고요?”
“사실 취미라기보다는……. 카뮬리타의 황족으로서 결점 없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항상 스스로에게 부족한 점이 없는지 돌아보고, 다른 이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려 끊임없이 노력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제라드의 말에, 곤히 잠들어 있는 사람의 얼굴로 잠깐 두 쌍의 숙연한 시선이 떨어졌다.
사실 아르벨라는 마력석에 저장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기분 전환을 했을 뿐이지만, 제라드로 인해 그것은 자기 발전을 위해서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던 노력으로 오해받게 되었다.
“그럼 이렇게 영상 마력석을 작동시키면 괜히 스트레스만 받는 거 아니에요? 아까 나한테는 잠들어 있는 사람이 싫어할 짓은 하지 말라고 하더니, 말과 행동이 다르네요?”
시비를 거는 듯한 유디트의 말에 제라드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이건 어릴 때 영상이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게다가 원래 귀여운 걸 보면 심신 안정에 좋다고 하던데.”
처음에 유디트는 제라드의 말에 트집을 잡을 생각이었지만, 생각해 보니 이건 맞는 말 같았다.
그녀는 4황녀궁에 보관한 아르벨라와 자신의 영상 마력석을 몇 개 가져오게 했다.
“4황녀님의 영상 마력석은 왜 가져오신 겁니까?”
“귀여운 걸 보면 심신 안정에 좋다면서요.”
“…….”
제라드는 동의하지 않는 눈으로 말없이 테이블 위에 있는 마력석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낀 유디트가 경계하듯이 테이블 앞을 가로막고 섰다.
“다른 건 상관없는데 이 상자 안에 있는 건 마음대로 건들지 말아요. 어렵게 구한 거니까. 전부 해당 연도에 출시한 한정판 에디션으로만 맞췄다고요.”
정작 제라드는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유디트는 그가 자신의 보물을 탐내기라도 한 것처럼 경고했다.
“초판 중에서도 01번에서 100번 사이의 특별 한정판으로 싹 다 찾아서 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제라드 경에게 특별히 보여 주려고 소장용 한정판을 가져오게 했으니까 이건 멀리서 눈으로만 보도록 해요.”
팔짱을 낀 채 턱을 살짝 들어올린 유디트가 어딘가 으스대는 듯한 얼굴로 덧붙였다.
제라드를 향한 그녀의 눈이 꼭 ‘부럽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사실 자랑을 하려고 들고 온 게 맞았기 때문에 제라드의 감상이 착각인 건 아니었다.
고작 낡은 마력석 하나를 귀한 보석이라도 된 것처럼 들고 온 제라드에게 자신의 컬렉션을 보여 주고 배 아파하는 모습을 감상하고 싶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제라드는 유디트의 소장품에 감탄하며 그것을 탐내는 게 아니라,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로 그녀가 가져온 감상용 일반판 마력석 하나를 골라 작동시켰다.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저도 이미 똑같은 게 있어서 괜찮습니다.”
“뭐? 똑같은 게 있다니?”
유디트가 인상을 찡그리자, 제라드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1황녀님의 영상 마력석 한정판 에디션이요. 4황녀님의 말씀처럼 정말 해당 연도에 출시된 물건을 구하는 게 쉽지 않더군요. 그래도 운이 좋아서 얼마 전에 저도 마지막 컬렉션까지 모을 수 있었습니다.”
“어, 어떻게? 매물이 나온 것도 없었을 텐데?”
“정말 그렇더군요. 방금도 말했지만 운이 좋았습니다.”
제라드는 경악한 유디트에게 짐짓 겸손한 척 대꾸해서 더욱 그녀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도 어렵게 구한 걸……!”
“……너희, 도대체 뭘 가지고 싸우는 거니?”
그때 옆에서 들려온 가느다란 목소리에 유디트와 제라드가 움직임을 멈췄다.
“정말, 눈 뜨자마자 보는 게 뭐 이래.”
머리카락이 흩날릴 정도로 서둘러 고개를 돌리자, 침대에 누워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두 사람을 보고 있는 아르벨라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