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가끔 진짜 사람을 환장하게 만들어.”
치미는 분을 못 이겨 낮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고막을 긁었다.
지금 우리가 뜻하지 않게 취하고 있는 남사스러운 자세를 지적하기에는, 마주하고 있는 제라드의 눈이 가열된 감정으로 지나치게 달아올라 있었다.
매섭게 나를 관통한 눈빛에 목 끝까지 올라왔던 말이 저절로 삼켜지고 입이 다물렸다.
“늘 제멋대로 사람을 손에 쥐고 주무르면서, 지금도 나한테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놓고 이렇게 혼자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내가 야속하다는 듯이 원망으로 얼룩진 목소리와 눈빛이 가까이에서 쏟아졌다.
“이런 식으로 사람 속을 마음대로 들쑤시면 직성이 풀립니까?”
“…….”
“내가 거기에 어쩔 수 없이 휘둘릴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 당신은…….”
나는 제라드의 일그러진 얼굴을 조용히 응시했다.
그는 아까처럼 어떻게든 감정을 삭여 내려고 애쓰는 것 같았지만, 이번에도 그게 쉬워 보이지는 않았다.
제라드에게 붙잡힌 팔이 세게 눌리면서 조금 아파 왔다.
이내 제라드가 무의식중에 힘이 들어갔던 손아귀에 힘을 빼며 꽉 깨문 입술 사이로 낮게 짓눌린 음성을 내뱉었다.
“방금 나한테 한 말과 행동이 무슨 의미였는지 끝내 제대로 설명해 주지도 않을 거면서.”
“설명 안 해도 알잖아.”
마침내 내가 천천히 입을 열자, 뜨거운 쇳물이 고인 듯한 눈이 미끄러지듯이 움직여 나를 정면으로 담아 냈다.
나도 그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리고 아까보다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커진 충동과 체념 어린 마음으로 다시 한번 말했다.
“굳이 다른 설명 같은 거 덧붙이지 않아도, 너 이미 눈치챘잖아.”
“그렇게 말하면 지금 내가 상상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멋대로 생각해도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텐데.”
이번에는 제라드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침묵했다.
바로 앞에서 눈길 한 번 돌리지 않고 나를 주시하는 시선에 속이 불편해졌다.
벌새 한 마리가 몸에 들어와서 눈치 없이 퍼덕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은 이런 얘기 나눌 때가 아니잖아. 빨리 나가서…….”
그래서 맞닿은 몸을 밀어내며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제라드가 내 팔을 불쑥 잡아당기면서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거의 충돌했다고 할 만큼, 입술이 아플 정도로 세게 부딪쳤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제라드가 아까의 나처럼 인정사정없이 이를 세워 내 입술을 물어뜯은 것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픈 것도 아니었다.
“아……!”
“당하기만 하는 건 성미에 안 맞아서.”
날카로운 통증에 무심코 신음하고 만 내 귀에 뻔뻔한 목소리가 날아와 꽂혔다.
야, 나는…… 이 정도는 아니었잖아!
아랫입술이 꼭 완전히 뜯겨 나간 것처럼 얼얼했다. 지금 내가 짐승한테 물린 건지 사람한테 물린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이게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인지 황당해해야 하는 상황인지도 모호했다.
“너,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야? 이제 완전히 막 나가는 거…….”
하지만 내가 어안이 벙벙해져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울컥해서 쏘아붙였을 때, 제라드가 다시 한번 나한테 고개를 숙여 자신이 깨문 곳을 가볍게 핥았다.
나는 완전히 할 말을 잃은 채 굳어졌다. 금방 내게서 떨어진 제라드가 곧바로 몸을 일으켜 나를 안아 들었다.
다른 때 같으면 누구를 환자 취급하냐며 당장 나를 내려놓으라고 호통을 쳤겠지만, 지금은 아직 정신이 반쯤 돌아오지 않은 상태라 반응이 느렸다.
그래서 제라드의 손이 내 등과 무릎 뒤쪽을 받쳐 들어 올릴 때 바로 그를 저지하지 못했다.
“황녀님 뜻대로 되게 하려고 데려가는 게 아닙니다. 지금은 일시적으로 마법을 멈춘 것뿐이지, 이대로 그만두겠다고 포기한 게 아니니까.”
여러 마력이 잔재한 방 밖으로 걸어 나간 제라드가 복도에서 이동 마법을 사용하려는 듯이 마력을 움직였다.
“그러니 4황녀님과 만난다고 해서 허튼 기대하지 마세요.”
그는 그렇게 쌀쌀맞게 덧붙인 뒤 나를 데리고 유디트의 궁을 벗어났다.
휘이잉.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시야에 비친 것은 붉은빛으로 물든 밤하늘이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마구 나부껴서 자꾸만 시야가 가려졌다.
이곳은 황궁에서도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황제궁의 첨탑이었다.
거대한 마력의 흐름 속에서 검은 머리칼을 흩날리고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아까 내가 그렸던 것과 동일한 마법진 사이에 서 있는 유디트를 발견한 순간 뒷덜미가 저릿해졌다.
“유디트!”
균열과 가까운 만큼 마력의 파장 역시 강해서 혹시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디트는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곧바로 몸을 흠칫 떨며 마법진을 그리던 손을 멈추었다.
“아르벨라 언니……?”
두 눈을 부릅뜬 채 고개를 돌린 유디트가 이내 나를 시야에 담아낸 뒤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내가 이렇게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상황에 크게 놀란 것 같았다.
아까 내가 그런 것처럼, 유디트 역시 황궁 안에 여러 가지 마력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어 자신의 마법이 도중에 멈춘 것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말도 안 돼. 설마 마법이 실패한 거야? 아니야, 그런 거면 이렇게 둘 다 멀쩡한 모습으로 있을 리가 없는데…….”
유디트는 나와 제라드를 번갈아 쳐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술을 달싹였다.
“게다가 분명, 마법사의 열병 증상 때문에 몸도 못 가누는 상태였는데 도대체 어떻게…….”
“내가 다른 놈들의 마력은 공으로 먹은 줄 알았니?”
나는 제라드에게서 떨어져 자력으로 바닥을 딛고 선 뒤 휘몰아치는 마력 속에서 유디트에게 다가갔다.
“내가 성한 몸이 아니라고 날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이런 짓을 하지?”
내가 이제껏 유디트에게 보인 적 없는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자, 마주한 황금빛 눈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보란 듯이 바로 눈앞에서 내 발등을 찍어? 그걸로도 모자라 제라드까지 데려와서 내가 제일 끔찍하게 생각하는 그따위 마법까지 쓰게 하고. 네가 나를 우습게 본 게 아니면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
“우습게 보다니, 아니에요. 난 그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그럴 줄은 정말 몰랐는데. 하긴, 널 지나치게 믿어서 방심하고 있던 내가 잘못이지.”
바로 그 순간, 당황한 듯이 내게 황급히 변명하던 유디트의 눈빛이 변했다.
지금 내가 한 말이 그녀의 안에 있던 중요한 무언가를 정곡으로 찌른 것 같았다.
꽉 앙다문 입술과 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세게 주먹쥐어진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거짓말했잖아.”
이내 유디트의 핏기 없는 입술에서 어금니에 짓눌린 음성이 한 글자, 한 글자 씹어뱉듯이 토해져 나왔다.
“날 속이고 혼자서 죽을 생각이었잖아……!”
그러다 마침내 감정이 폭발했는지, 유디트가 나를 매섭게 쏘아보면서 소리쳤다.
나는 처음으로 내게 목소리를 높인 유디트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냥 모른 척했다고, 내가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머저리인 줄 알아?”
한 번 입을 열자 더 참을 수가 없었는지, 유디트는 언제부터 속에 쌓아 놨는지 모를 말을 한꺼번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래도 설마 말해 주겠지, 설마 마지막까지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자서 위험한 일을 저질러 버리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계속 기다렸단 말이야. 그런데 당신, 끝까지 나한테 숨길 작정이었잖아. 끝까지 아무것도 알리지 않고 스스로를 희생양으로 삼아서 죽을 생각이었잖아!”
“…….”
“내가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과 교류가 없었다고 해서 이게 무슨 마법진을 기본으로 한 건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 당신이 나를 잘 아는 것처럼 나도 당신을 잘 알아. 당신이 나를 지켜봐 온 시간만큼 나도 당신을 늘 주시하면서 살았으니까. 카뮬리타 사람 중에 그 망할 솔렘 왕국의 마법에 대해 나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을걸?”
유디트의 얼굴을 보니, 이제는 내가 어떤 그럴듯한 거짓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무슨 말로 날 설득하려고 해도 안 속아. 이 빌어먹을 마법이 뭔지도 이미 잘 알고 있으니까.”
“그걸 안다면 왜 내가 나설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도 알 텐데.”
내 담담한 말에 유디트의 얼굴이 한결 더 일그러졌다.
내가 유디트를 속이고 사용하려 했던 최후의 마법은 단순히 아무나 제물로 삼는다고 해서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계의 경계를 완전히 닫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가 균열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세계의 이면에 가득 고여 있는 마력을 잘 다룰 수 있는 자여야 했고, 그런 사람이 균열에 직접 들어가서 연결된 통로를 닫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어떤 의미로는 등가 교환의 법칙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었다.
먼저 세계를 연결하는 문을 연 것은 이쪽. 그러니 그 열린 문을 다시 닫는 것은 오직 반대쪽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예전에, 최후의 균열이 열리고 그 안에 흡수되어 세계의 이면에 잠깐 머물렀을 때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때는 힘이 모자라서 문을 닫을 수 없었다.
“넌 나만큼 저쪽에 대해 잘 알지는 않지. 아무리 솔렘 왕국의 마법에 대해 조사했다고 해도, 그걸 밥 먹듯이 사용했던 나보다 저쪽의 마력을 사용하는 데 능숙하지도 않을 테고. 그러니 지금 네가 나 대신 그 마법을 사용해도 실패할 확률이 커.”
“그래도 내가 할 거야.”
유디트는 내 말에 고집스럽게 대답했다.
“오히려 날 우습게 보고 무시하는 건 당신 같은데? 내가 실패할 거라고 누가 그래? 내가 당신보다 능숙하지 않다고? 예전에 내가 카뮬리타 최고의 마법사로 불렸던 걸 잊은 건가?”
나는 유디트의 앞에 그려진 마법진을 보았다.
과연 유디트는 내가 그린 마법식을 단 한 번만 보고도 똑같이 재현해 냈다.
게다가 그 안에 새겨진 복잡한 수식들을 한눈에 분석해, 어떤 마법식인지도 금방 알아냈다.
이건 분명 유디트를 얕봤던 내 실수였다.
“그럼 나도 널 막을 수밖에 없겠네.”
“마음대로 해.”
내가 짤막하게 말하자 유디트가 독기에 찬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나도 마찬가지야. 당신이 또 똑같은 짓을 하려고 해도 방해하고, 또 방해할 거야. 내가 얼마나 끈질긴데? 그런데 당신이 날 떼어 놓고 혼자 이딴 마법을 성공시킬 수 있을 것 같아? 잘됐네. 서로 사이좋게 막고 또 막다가 결국 나란히 실패해서 이 세상 같은 건 죄다 망해 버리면 되니까!”
“…….”
“아니, 차라리 당신이 허튼 생각 같은 건 하지 못하게 이따위 세상, 지금 내가 전부 부숴 버릴 거야! 당신 혼자 희생시켜서 다른 사람들만 살아남게 할 바에는, 차라리 이 세상 사람들 전부 다 오늘 죽여 버릴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라고……!”
예상치 못한 엄청난 반발에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사실은 등에 은근히 식은땀이 배어났다.
‘쟤, 눈이 완전히 맛이 갔잖아.’
물론 유디트가 진실을 알게 되면 화를 낼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악을 쓰면서 무시무시한 소리를 마구 쏟아 낼 줄은 몰랐다.
차라리 분노해서 아무 말이나 되는대로 쏘아붙인 거라면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저 눈은 어디로 보나 진심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