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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황녀님-177화 (193/203)

177화

처음에는 유디트가 돌아왔나 싶었다. 하지만 귀에 들리는 소리는 그녀보다 확연히 보폭이 크고 무거웠다.

고개를 들자, 차갑게 굳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제라드의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천장에 새겨진 마법진은 그러고 보니 내가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과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어딘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며 내게 사과하던 유디트와 그 후에 나타난 제라드.

이 모든 것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이 순식간에 명료해졌다.

“나가…….”

억지로 삼킨 모난 돌멩이가 목구멍을 할퀴며 숨통까지 틀어막는 듯했다.

“너…… 당장 나가.”

꽉 막힌 목에서 내가 듣기에도 볼품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내뱉어졌다.

그러나 제라드는 내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문앞에 멈췄던 발을 떼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내 말 안 들려? 당장 여기서 나가라고 했잖아……!”

내 격양된 감정을 따라 제어되지 않는 마력이 더 강하게 들썩였다.

차라리 지금 당장 내가 이 자리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었으나, 마력 회로가 완전히 꼬여 간단한 이동 마법조차 사용할 수가 없었다.

안간힘을 써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바로 볼썽사납게 무릎이 꺾였다.

다른 때라면 이렇게 만신창이가 된 모습을 제라드에게 보이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것 따위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는데.”

바닥을 짚은 내 손의 바로 옆에서 제라드의 신발이 멈췄다.

아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고막을 긁으며 파고들었다.

“4황녀의 말이 제법 그럴싸하긴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면서 떠드는 헛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시야에 비친 손이 떨리고 있는 게 내 눈에도 보여서 있는 힘껏 주먹을 그러쥐었다.

꼭 봐서는 안 될 것을 목격한 것처럼 얼어붙어 있던 조금 전의 얼굴과 달리, 내 귀에 스민 목소리는 냉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건조하고 차분했다.

“당신, 정말 곧 죽나 보네.”

바닥에 닿는 순간 녹아 사라지는 흰 눈처럼 머리 위에서 연이어 떨어진 그의 말에는 형체가 없었다.

하지만 거기에 닿은 나는 못 견딜 정도로 속이 시렸다.

“그럼 당신이 살려면 내가 필요하다는 것도 사실인가?”

“헛소리야.”

나는 이를 악문 채 곧바로 그의 말을 부정했다.

“네가 어디서 뭘 들었든…… 전부 다 헛소리라고.”

하지만 제라드는 내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 꼴을 하고 있으면서 헛소리라고?”

고요한 목소리가 선득하게 귓바퀴를 울리며 굴러떨어졌다.

“당신 말이 맞아요. 이미 한 번 경험해 본 일이니, 이번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예전에는 실패했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을 테니까.”

유디트의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바보같이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디트는 그녀가 예전에 사용했던 금단술을 쓸 생각이었다.

천장에 새겨진 마법진의 모양이 내 기억과 조금 다른 것을 보면 완전히 똑같은 마법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계열의 금단술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유디트가 이런 계획을 세운 이유가 뭔지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어쩐지 그동안 내게 아무것도 캐묻지 않더니, 이런 일을 계획 중이었던가.

내가 언젠가부터 찾는 것을 그만둔 마법식.

예전의 아르벨라도 실패했던 바로 그 마법.

어쩌면 지금의 유디트는 그것을 완성시킬 방법을 찾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래서 내게 용서해 달라고 한 것이다.

유디트가 나를 위해 제라드를 죽게 하면, 내가 그녀를 끝내 용서하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그때, 가진 것 하나 없이 보잘것없던 나 같은 걸 왜 당신 같은 사람이 눈여겨봤을까.”

또 한 번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 들어 내가 입술을 세게 짓씹는 동안, 그런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제라드가 말을 이었다.

식은땀이 나면서 시야가 흐려졌다.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팔에 손톱을 세워 긁었다. 피부가 찢기며 금방 핏방울이 맺혀 올라왔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머릿속이 쉽게 명료해지지 않아서, 이번에는 좀 더 세게 손톱을 박았다.

“얼마 전 4황녀를 통해 겨우 이유를 알게 되고, 그때 들은 내용이 모든 사실이란 걸 가까스로 받아들인 뒤에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불현듯 그런 내 손 위로 온기가 덮였다.

차디차게 식어 있던 피부에 번지는 타인의 체온이 유달리 뜨겁게 느껴졌다.

제라드가 내 손을 붙잡으며 몸을 낮춘 탓에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가 한결 가까워졌다.

나를 응시하는 시선 역시 이제는 바로 앞까지 가까워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내리깔고 그와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

이어질 제라드의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지금 이 순간, 두려움마저 느끼고 있었다.

“참 잘됐구나.”

그리고 마침내 제라드의 입에서 속삭여진 말에 심장이 덜컹 떨어졌다.

혹시 나를 조롱하거나 비웃는 것인가 싶었으나, 이어서 내 뺨에 닿은 손길은 솜털이 곤두설 정도로 부드럽기만 했다.

“당신에게 내가 그 정도로 간절하다니, 참 기쁘구나.”

다음 순간 고개를 들어 올린 것이 내 의지인지, 아니면 내 얼굴을 감싼 손에 의한 강요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나는 비로소 내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은 사람과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가까이에서 시선이 얽힌 순간, 나를 온전히 담아 내고 있는 두 눈에 박힌 희열을 발견했다.

나는 믿고 싶지 않던 진실을 깨달았다.

조금 전 이곳에 들어선 제라드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의심하고 있던 것.

그러나 차마 확인하기가 두려워, 만약 외면할 수만 있다면 끝까지 그러기를 남몰래 바랐던 것.

“황녀님. 왠지 당신을 처음 봤을 때부터 이렇게 될 거라고 마음 한편으로 예상하고 있던 것 같습니다.”

제라드는 지금, 아무것도 모르고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어쩐지, 이런 순간을 언젠가 이미 한 번 겪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어서…….”

나지막하게 속삭여진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스몄다.

“이렇게 쉽게 당신에게 내 모든 걸 다 내어 주고 싶어지는 것도, 언젠가부터 더는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았어.”

예전에 이런 말을 들었다면 가슴이 벅찼을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 이런 말을 들었다면 입 안에 설탕 과자를 문 것처럼 달콤에 기분에 젖어 나도 너와 같은 마음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을지도 몰랐다.

“싫, 어……. 난 너 같은 거 필요 없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애써 냉정함을 표면에 한 꺼풀 두르고, 내게 닿은 사람을 떼어 내려는 듯이 앞에 있는 팔을 움켜쥐었다.

“너, 어차피 이제 황궁에 더 머물 이유도 없잖아……. 그러니까 가. 어디든 가 버려.”

이미 흘러간 것은 그냥 이대로 흘러가게 두는 것이 낫다.

얼마 전 내 어머니와의 대화에서 말했던 것처럼 나는 제라드와의 관계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내 미련 때문에 좀 더 일찍 그를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 이제 와서 사무치게 후회가 되었다.

차라리 눈에도 손에도 닿지 않는 곳까지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면, 오늘 같은 상황에서 이렇게 그를 마주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가지 않아. 이제는 내가 있을 곳이 어디인지 아니까.”

그리고 제라드는 잔인할 정도로 어떤 망설임이나 흔들림조차 없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사실은 얼마 전, 다시 황성으로 돌아왔을 때도 당신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

제라드가 그의 팔을 붙든 내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꼭 기사의 맹세를 하듯이 고개를 숙여 손등에 경건하게 입을 맞추었다.

“저는 1황녀님 옆에 있고 싶습니다.”

“…….”

“어떤 방식이든 상관없습니다. 늘 함께할 수만 있다면.”

내 손을 꽉 붙잡은 제라드가 다시 시선을 들어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게 내가 유일하게 원하는 일이고, 그러니 당신도 막을 수 없어.”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싶었지만,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얼어붙어 그럴 수 없었다.

“그러니 황녀님.”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당신이 아무리 싫다 해도, 나는 오늘 완전한 당신의 것이 될 겁니다.”

달콤한 속삭임이 하얀 숨결처럼 부스러졌다.

나 또한 밭은 숨을 토해 냈다.

싫어…….

싫어.

하지 않을 거야, 나는.

그런 거 절대 안 해.

제라드, 나는 너를…….

그러나 하고 싶은 말들 중 어떤 것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결국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천장에 그려진 마법진이 발동했다.

이제는 지긋지긋하기까지 한 보랏빛 광채가 나를 뒤덮었다.

한순간에 터져 나온 강렬한 빛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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