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4황녀님, 방금 굉장하셨습니다……! 단번에 그레이엄 후작을 무력화시키시다니!”
“아니요, 저보다는 2황녀님이…….”
상황을 옆에서 지켜본 몇몇 마법사들이 유디트를 향해 감탄하자, 그녀는 얼떨떨한 얼굴로 대꾸하며 기절한 클로에를 쳐다보았다.
유디트도 방금 클로에가 던진 마력석이 그레이엄 후작의 급소에 명중한 것을 본 모양이었다.
우우웅!
그때, 머리 위에서 심상치 않은 진동이 울렸다.
어두운 밤하늘에 일렁이는 거대한 마력의 흐름이 꼭 거칠게 파도치는 자줏빛 물살 같았다.
아무래도 저도 모르게 균열의 마력을 끌어 쓰며 폭주한 그레이엄 후작 때문에 균열의 움직임이 가속화된 듯했다.
나는 고개를 내려 주변을 한 번 살폈다.
클로에는 카타리나와 라미엘이 돌봐 주고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지금도 내 새를 통해 여기저기에서 시끄럽게 보고되는 내용을 들어 보니, 소란이 일어난 다른 장소에서도 내가 미리 내렸던 지침을 따라 각자 맡은 역할을 잘해 주고 있는 듯했다.
이제 그레이엄 후작의 폭주를 잠재워 예상치 못한 급한 불도 껐으니, 다시 원래의 계획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마침 제라드가 자리를 비웠으니, 그가 오기 전에 마무리 지을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라미엘, 2황비님을 모시고 빨리 안전한 장소로 가. 넌 아직 몸도 성치 않으니까 나서지 말고 클로에랑 같이 있어.”
나는 마지막으로 주변에 있는 다른 마법사와 기사들에게 저 세 사람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라미엘에게도 당부한 뒤 자리를 떠나려 했다.
“고, 고맙다, 1황녀.”
“예?”
“클로에를 도와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2황비 카타리나가 내게 놀라운 말을 건넸다.
기어들어 가듯이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녀의 말은 내 귀에 확실히 전해졌다.
라미엘도 의외였는지, 놀란 눈으로 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빨리 클로에를 업지 않고 뭘 하는 게야! 언제까지 황녀를 이런 찬 바닥에 눕혀 두려는 것이냐!”
카타리나는 우리의 시선이 불편한지, 괜히 날카로운 눈초리로 옆에 있던 기사를 노려보며 닦달했다.
나는 묘한 눈으로 그런 그녀를 보다가 이동 마법을 사용했다.
자리를 떠나기 직전에, 유디트와 눈이 마주쳤다.
앞으로의 일은 그녀와 미리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에 고개를 작게 끄덕여 보인 뒤 장소를 옮겼다.
내가 최후의 마법을 완성하기 위해 향한 곳은 아까 들렀던 유디트의 궁이었다.
이번에 사용할 마법은 지금까지 내가 경험해 본 것 중에 가장 크고 복잡한 마법이었다.
하여 언제든 부족한 마력을 빌려 쓸 수 있게, 솔렘 왕국 사람들을 가까이에 둘 필요가 있었다.
파앗!
그런데 바로 내 뒤를 따라 다른 마력의 파동이 잡혔다. 다음 순간 눈앞에 나타난 것은 방금 나와 시선이 마주쳤던 유디트였다.
“뭐야, 왜 따라왔어? 유디트, 넌 밖에서 다른 사람들을 돕기로 했잖아?”
“저도 옆에 있을래요.”
혹시 유디트가 조금 전에 눈이 마주친 것을 다른 의미로 오해해서 나를 따라온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아니면 먼저 내가 했던 말을 잘못 알아들었나?
하지만 그녀의 고집스러운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그건 아닌 듯했다.
“나도 처음 사용해 보는 마법이라 집중해야 해서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게 낫다고 했잖아. 게다가 밖에는 아직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도 많고. 그러니 그냥 원래 말했던 대로…….”
“싫어요.”
하지만 내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유디트는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다시 한번 말했다.
“저도 여기에 있을 거예요.”
그 단호함에 더는 그녀를 막지 못했다.
유디트에게서 어떻게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고야 말겠다는 굳건한 의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나는 유디트를 옆에 둔 채 손가락에 피를 냈다.
일단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하면 나중에 유디트가 이상함을 눈치채도 섣불리 끼어들 수 없을 테니 문제 될 건 없을 것이다.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붉은 핏방울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반대쪽 손에서는 몸에서 빠져나온 마력이 황금빛으로 반짝이며 너울거렸다.
그리고 이내, 마력과 피가 허공에서 뒤섞여 복잡한 문양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을 완성시켜 마법이 성공하면, 세계는 다시 평화로워지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누구 한 사람 희생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사실 유디트에게는 거짓말을 했다. 이 마법이 내게 조금도 위험하지 않다고 했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이어지지만, 내 이야기는 오늘 이곳에서 마침표를 찍게 될 것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사용할 이 최후의 마법에 필요한 제물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유디트에게는 이런 사실을 비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조금씩 약해지고 있는 세계의 경계가 비로소 완전히 사라져 균열이 전부 개방될 때.
그때 모든 것이 시작되고,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쿠웅!
그런데 마법진을 그리던 중에 예상치 못한 이상이 발생했다.
마력과 피로 그려진 마법진에 막 마지막 획 하나를 찍으려 할 때, 갑자기 알 수 없는 힘이 그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 순간, 나는 마법에 집중하기 위해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다행히 마법이 발동했을 때 방해받은 것이 아니라 그 반작용으로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길을 잘못 든 마력이 한 차례 요동치며 배 속을 헤집었다.
나는 일단 마법진을 유지시킨 상태로 움직임을 멈췄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이건 아주 가까이에서 성질이 다른 두 개의 마법이 사용될 때 각각의 마력이 뒤섞이며 발생하는 부작용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그려진 마법진은 내 것밖에 없었다.
“미안해요.”
바로 그때, 내 귀에 조용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고개를 돌리자, 유디트가 나를 향해 다시 한번 사과했다.
“정말 미안해요.”
나는 그때서야 나를 방해한 사람이 유디트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 왜…….”
목에서 감도는 피비린내를 삼키며 입술을 달싹이다가 퍼뜩 닿은 생각에 급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균열에서 흘러나와 공기 중에 뒤섞인 마력이 아까부터 머리 위에서 어지럽게 요동치고 있어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데, 믿을 수 없게도 천장 전체에 이미 완성되어 발동을 준비 중인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정확히 어떤 마법진인지는 한눈에 파악할 수 없었지만, 그것이 나를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게다가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기운 또한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바로 천장의 마법진을 부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믿을 수 없게도 유디트가 나를 공격했다.
“읍……!”
그렇지 않아도 거대한 마법을 준비하던 중에 정면에서 공격당하자, 내가 흡수했던 솔렘 왕국 마법사들의 마력까지 속에서 충동하며 어지럽게 뒤엉키기 시작했다.
심지어 유디트는 내 안에 제 마력까지 쑤셔 넣어 내 코어를 직접 건드리기까지 했다.
한순간, 손으로 심장을 움켜쥐어 사정없이 쥐어짠 것처럼 극심한 통증이 속을 들쑤셨다.
마력의 구심점을 정확히 노린 일격에 왈칵 피를 토했다.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순식간에 온몸에 뜨겁게 들끓는 열이 치솟았다. 가슴을 움켜쥔 채 바닥을 구르며 입에서 또 한 번 피를 쏟아냈다.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지만, 아직도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는 고통이 엄습했다.
마법사의 열병으로 인한 발작이 유디트로 인해 강제로 발생한 탓이었다.
“유……디트……!”
나는 피를 토해 내며 부릅뜬 눈을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고정시켰다.
유디트가 설마 나한테 이런 짓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배신감마저 느껴졌다.
나는 상대가 유디트라 방심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가 절대로 내게 해를 끼칠 리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당신 말이 맞아요.”
충격에 몸서리치는 내 귀로, 이런 상황에서조차 차분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이미 한 번 경험해 본 일이니, 이번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아까 이곳을 떠나기 전에 내가 했던 말이 이번에는 유디트의 입에서 흘러나와 내게 되돌아왔다.
“예전에는 실패했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을 테니까.”
“너……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계속 올라오는 핏물을 가까스로 삼키며 꽉 막힌 성대에서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미워하지 않을 거라고 했죠?”
이해할 수 없게도, 나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인 유디트도 지금의 상황이 전혀 즐겁지 않은 듯이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부디 용서해 주세요.”
그러나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결연함이 깃든 눈으로 나를 보면서, 그녀는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대신, 당신이 지키고 싶었던 이 세계는 내가 구할 테니까.”
유디트가 떠난 뒤, 나는 싸늘한 정적이 깔린 방 안에 혼자 남았다.
어떻게든 움직이려 했지만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으, 하윽…….”
속에서 날뛰는 뜨거운 불덩이가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 것 같았다.
식은땀으로 젖은 이마가 카펫 위에 문질러졌다.
내가 뭘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기어서라도 유디트의 뒤를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에 손톱을 세워 바닥을 긁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방 안으로 들어서는 발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