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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황녀님-175화 (191/203)

175화

사방에서 몰아치는 바람이 한결 거세졌다.

방해꾼이 접근한 것을 깨달은 듯, 그레이엄 후작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더욱 사납게 날뛰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는 앞에서 가해지는 마력석의 공격을 그냥 몸으로 들이받으며 클로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시도하기까지 했다.

“2황녀님……!”

“1황녀님, 조심하십시오!”

마력 폭풍의 한가운데에 있는 클로에와 내가 위태로워 보였는지, 뒤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쳤다.

쓸데없는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그레이엄 후작이 움직이면서 마력의 흐름도 변해 거기에 대응하느라 대답하지 못했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공기를 가르고 날아든 마력이 또 한 번 나를 베고 지나갔다.

살갗이 얇게 찢기며 붉은 핏방울이 마력의 소용돌이에 섞여들었다.

나는 신중하게 손끝으로 내 마력을 뽑아냈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불꽃을 튀기며 마구잡이로 난동을 부리고 있는 마력을 이대로 두면 위험했다.

그러니 내가 파고든 마력과 마력 사이의 이 미세한 간극을 넓혀 폭주한 마력을 와해시킬 생각이었다.

뒤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들었다면 미쳤다고 말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아니, 애초에 가능과 불가능을 논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 이걸 해내지 못하면 클로에가 위험했다.

카가강……!

다음 순간, 기회가 찾아왔다.

가까운 곳에서 들썩이는 마력 사이로 또 한 번의 작은 틈이 발생했을 때, 나는 그 사이로 몸을 들이는 대신 마력을 흘려보내 강제로 틈을 벌렸다.

다시 맞물리지 못하고 움직임을 가로막혀 부딪힌 마력에서 꼭 이가 빠진 칼날이 서로 마찰하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거친 파장에 휩쓸린 내 마력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했다.

만약 도중에 연결이 끊어져 내 마력까지 저 안에 흡수되어 버리면 마력의 폭주를 잠재우기는커녕 폭발만 앞당길 수도 있었다.

그 상태를 유지하면서 또 다른 틈이 발생할 때마다 같은 일을 반복했다.

강제로 틈을 비집고 들어간 내 마력이 사방에서 충돌하던 마력들의 거리를 조금씩 벌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도와준다면 좀 더 수월해지겠지만, 어디까지나 순수한 감각에만 의존해 진행하고 있는 일이니만큼 다른 사람에게 방법을 설명해 주고 똑같이 해 보라고 시킬 수도 없었다.

유디트라면 괜찮을 것 같았으나, 그녀는 내가 이 일을 해결한 직후에 그레이엄 후작 쪽을 맡아 주어야 했다.

그런 식으로 가늘게 이어진 마력의 실이 이제는 셀 수조차 없이 많아졌을 때쯤, 내 등은 배어난 식은땀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이 중 하나라도 방심해 놓치는 순간 마력들은 다시 길을 잃고 날뛸 터였다. 그러니 한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렸던 순간이 찾아왔다.

수없이 충돌하며 사방에서 번쩍거리는 빛을 내던 마력들이 이제는 강제적인 힘 없이도 저절로 느슨하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파앗!

비로소 한데 섞여 엉겨붙던 마력이 한순간에 구심점을 잃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면서 한 차례 큰 바람이 불어닥쳤다. 마력의 중심축이나 마찬가지이던 그레이엄 후작이 비틀거렸다.

하지만 내가 한 일은 폭발 직전의 마력을 중간에 간섭해 잠깐 흐름만 끊어 놓은 것일 뿐, 아직 완전히 잠재운 것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그레이엄 후작의 주변으로 다시 거대한 마력이 뭉쳐 들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다행히 유디트는 찰나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마력의 폭풍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말한 대로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그레이엄 후작을 향한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나는 그 틈에 클로에에게 달려갔다.

“클로에! 너 괜찮아?”

“아, 아르벨라 언니……?”

넋을 놓고 있던 클로에는 그때서야 조금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마침 마력석의 효과도 거의 다했을 때였다.

마력석이 그레이엄 후작의 공격 자체는 막아 주고 있었지만, 클로에 역시 마력의 소용돌이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던 탓에 지금 그녀의 몰골도 평소와 달리 엉망이었다.

클로에는 산발을 한 채 멍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감정이 북받쳐 오른 듯이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 나, 무…… 무서웠…….”

“그래, 이젠 괜찮아. 일단 자리부터 옮기자. 여긴 위험해.”

아무래도 지금은 그레이엄 후작과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나는 곧바로 주변에 보호막부터 씌운 뒤 클로에를 데리고 이동 마법을 사용하려 했다.

쾅!

“아아아악!”

하지만 그 순간 바로 앞에서 덮쳐든 거대한 마력의 홍수가 나를 방해했다.

보호막을 미리 만들어 둔 덕분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았지만, 바로 앞에서 터져나간 마력에 클로에가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나로서는 마력으로 인한 충격보다 바로 옆에서 클로에의 고음에 고막을 공격당한 타격이 더 컸다.

아무튼, 방금의 공격은 그레이엄 후작의 소행이었다.

어쩐지 유디트와 마법사들이 그레이엄 후작을 상대로 생각보다 더 고전하는 느낌이더니, 그 탓에 저 인간이 이쪽으로 관심을 둘 여유까지 생긴 모양이다.

유디트라면 이런 실수를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된 거지?

그리고 연이은 그레이엄 후작의 공격 속에서, 나는 유디트가 그녀답지 않게 얼어붙은 채 다소 소극적으로 마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유디트에게 일신상의 문제가 생긴 건 아닌 것 같았고, 그녀는 무언가를 망설이고 두려워하는 듯했다.

나는 유디트의 굳은 얼굴 속에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불안함과 초조함이 깃든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핏기없는 창백한 얼굴로 그레이엄 후작을 응시하는 유디트를 보고, 그것이 무엇으로부터 야기된 감정인지도 알아차렸다.

“유디트!”

나는 목소리에 마력을 실어 이미 반쯤 부서진 2황녀궁이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쩌렁쩌렁하게 울린 내 목소리에 유디트가 흠칫 놀라 나를 쳐다봤다.

“괜찮으니까 빨리해……!”

그녀는 지금 눈앞에서 폭주하고 있는 그레이엄 후작과 달랐다.

더 이상 그녀는 수많은 사람을 죽게 했던 예전의 그 괴물 황녀가 아니었다.

“그 마법은 성공할 거야. 그러니까 널 믿고 그냥 해!”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이건 유디트가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떨쳐 내야만 할 일이었다.

그 순간 미약하게 흔들리던 유디트의 눈동자에 명료한 빛이 돌아왔다. 멀리서 유디트가 입술을 꽉 깨무는 게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눈을 질끈 감은 유디트에게서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찬연한 빛을 발하는 강대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거대한 마법진이 복잡한 수식을 그리며 빠른 속도로 모양을 완성해 갔다.

“크아아악……!”

그리고 다음 순간, 꽃봉오리가 터져 나가듯이 폭발한 마법진에 정통으로 휩쓸린 그레이엄 후작이 비틀거렸다.

이번에는 정말 치명상을 입은 듯, 그레이엄 후작이 검은 핏덩어리를 쏟아 냈다.

유디트가 한 번 더 마법을 준비했다.

“그으윽……. 클, 로에…….”

소름이 끼치게도, 그 순간 그레이엄 후작이 클로에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여전히 제정신이 아닌 듯한 몰골로 핏발이 선 눈을 움직여 이쪽을 노려보면서 가래가 끓는 듯한 숨소리 사이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이리…… 와라. 이리, 와…….”

클로에가 내 보호막 안에서 몸을 움찔거렸다. 믿을 수 없게도, 그녀는 정말 그레이엄 후작에게 가려는 듯이 다리를 움직였다.

“클로에, 너 왜 이래?”

하지만 워낙에 진이 빠진 상태라 그런지, 클로에는 자리에서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내 손에 가로막혀 다시 주저앉았다.

“흐으, 으흑…… 이제…… 그만 좀 해…….”

돌연 클로에가 감정이 치밀어 오른 듯이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이 오밤중에 그레이엄 후작이 침입해 목숨을 위협받게 되었으니 울컥해서 눈물이 날 만도 했다.

“이제 나 좀 그냥 내버려 둬, 이 미친놈아……!”

하지만 역시 클로에는 이렇게 혼자 상심한 상태로 눈물만 짜낼 만큼 연약한 심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바로 다음 순간, 사납게 이를 갈면서 고개를 번쩍 치켜든 클로에가 손에 닿는 아무것이나 붙잡아 그레이엄 후작에게 집어던졌다.

퍼어어어억!

투석기를 쏘듯이 전광석화처럼 날아간 마력석이 그레이엄 후작의 몸에 놀랍도록 정확히 적중해 틀어박혔다.

정말 당황스럽게도, 입에 담기 민망한 급소에…….

상황이 상황인 데다 격렬한 감정에 휩쓸리기까지 한 클로에가 젖먹던 힘까지 짜냈는지, 그레이엄 후작의 다리 사이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듯한 굉장히 끔찍한 소리가 울렸다.

비록 제정신이 아닌 상태기는 하나, 급소에 가해진 충격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그레이엄 후작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콰과광!

그리고 그 순간, 유디트의 마법까지 그에게 작렬했다.

그레이엄 후작이 속절없이 날아가 벽에 부딪친 뒤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어…….”

“그러니까, 이게…….”

다들 황망한 눈으로 숨소리조차 죽인 채 앞에서 펼쳐진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나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입을 벌리고 있다가, 그레이엄 후작의 주위에 거칠게 요동치는 마력이 다시 힘을 얻기 전에 그것을 봉인시켰다.

그때, 거칠게 숨을 헐떡이던 클로에가 기절했다.

“크, 클로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카타리나와 라미엘이 그녀를 향해 헐레벌떡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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