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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황녀님-174화 (190/203)

174화

* * *

“꺄아악!”

“빨리 지원군을 불러……!”

2황녀궁은 그새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사방으로 소용돌이치는 마력의 파장에 눈을 제대로 뜨고 있기도 어려웠다.

보고받은 대로 그레이엄 후작은 2황녀궁에 있었다.

클로에는 문짝이며 벽이 다 부서져서 안쪽이 훤히 보이는 침실 한구석에 사색이 된 채 얼어붙은 듯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레이엄 후작! 순순히 투항하라……!”

이미 도착한 마법사와 기사들이 그레이엄 후작에게 공격을 퍼부어 클로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여러 명이 상대해도 그레이엄 후작 하나를 제압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마력의 충돌이 곳곳에서 일어나 눈앞이 쉴 새 없이 번쩍거렸다.

나는 거기에 휩쓸리지 않게 내 마력으로 무형의 방어벽을 세운 뒤 그레이엄 후작의 상태를 재빨리 살폈다.

그런 뒤 곧바로 그에게 엄청난 힘이 숨겨져 있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필이면 지금 공교로운 시점에 균열의 기운이 거세져, 그레이엄 후작도 그 영향을 받아 일시적으로 힘이 강해진 것 같았다.

이미 금단술에 발을 담근 상태라 균열에서 흘러나온 마력에 다른 사람보다 크게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싶었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좀 더 일찍 그를 죽여 버리는 편이 나을 뻔했다.

“2황녀님! 빨리 이쪽으로……. 크윽!”

마법사와 기사들이 일단 클로에부터 데려와 보호하려 했으나, 곧 그레이엄 후작에게서 휘몰아쳐 날아온 강력한 힘이 그들을 후려갈겨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았다.

“크으아아악!”

자꾸만 방해받는 것이 짜증스러웠는지, 그레이엄 후작이 짐승이 울부짖듯이 포효했다.

머리는 산발이 된 채 실핏줄이 다 터져서 시뻘겋게 된 눈을 번들거리는 모양새가 지난번보다 더한 광인의 것으로 보였다.

클로에는 공포로 몸이 굳은 건지,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그녀를 불러도 몸을 달달 떨기만 할 뿐 부서진 침대의 뒤에 주저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상황을 가늠했다. 그레이엄 후작의 주변에 또다시 거칠게 일렁이기 시작한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2황녀궁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휩쓸릴 것 같아서 나도 마력을 움직였다.

콰앙……!

다시 한번 폭발하려 하던 그레이엄 후작의 마력과 내 마력이 정면에서 부딪쳤다.

무언가가 터지는 듯한 거대한 소리가 울리며 지진이라도 난 듯이 바닥과 천장이 흔들렸다.

“앗, 1황녀님, 4황녀님……! 오셨습니까!”

뒤늦게 나와 유디트를 발견한 사람들이 꼭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우리를 반겼다.

“한눈팔지 말고 2황녀의 보호를 최우선시해!”

나는 그들에게 소리치며 2황녀궁 전체를 감싸도록 결계를 쳤다.

지원군의 출입은 막지 않으면서, 안에서 유출된 마력이 밖에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막는 결계였다.

그러는 동안 유디트는 그레이엄 후작을 상대하고 있는 다른 마법사들에게 힘을 보탰다.

캉! 카앙! 챙……!

여러 마력이 허공에 뒤섞여 날붙이가 부딪치는 듯한 날카로운 소음과 빛을 만들었다.

차라리 힘으로 다 뭉개 버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상황을 보니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대대적인 마력의 폭발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그렇게 된다 해도 이쪽에 있는 사람들은 충분히 보호할 수 있었지만, 그레이엄 후작과 가까이에 있는 클로에의 안전은 장담하기 어려웠다.

“클로에! 내 말 안 들려? 정신 차려, 클로에……!”

클로에를 구하러 직접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이라 소리 높여 그녀를 불렀으나, 내 목소리조차 클로에의 귀에는 닿지 않는 듯했다.

“1황녀님!”

그때,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역시 여기에 와 계셨습니까?”

제라드가 마력의 파장에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내게 다가와 이쪽으로 날아드는 마력의 파편을 쳐냈다.

아무래도 그 역시 황성 안의 소란을 듣고 내가 이곳에 왔을 거라 추측해 급히 뒤쫓아온 듯했다.

제라드는 내가 혼자 말도 없이 1황녀궁을 박차고 나온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어딘가 성이 난 듯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또 균열에서 괴수의 낙하가 목격되었습니다! 좌표는…… a11, x508, k39입니다!

그때, 또 다른 보고가 들어왔다. 유독 익숙한 좌표다 했더니, 황궁이었다.

2황녀궁은 소란통에 한쪽 벽면과 천장이 일부 뜯겨 나가 고개를 들면 밤하늘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과연 위에서 꼭 벼락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빛이 몇 번이고 연달아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황궁 전체를 둘러싼 결계에 균열에서 떨어진 괴수가 부딪쳐 일어난 현상이었다.

“마법 부대 2조, 3조는 먼저 지시한 대로 이동하도록. 침착하게 움직여!”

나도 마법사들에게 마력으로 신호를 보냈다.

상황이 꽤나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긴 했지만, 아직 최후의 균열은 열리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날을 대비해 미리 마법사들과 기사들에게 각자의 역할을 일임해 두었으니, 지금은 그들을 믿고 각 구역의 방비를 맡기기로 했다.

“클로에!”

그때, 작은 마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라미엘이 나타났다. 그 역시 지금의 상황에 몹시 당황한 기색이었다.

라미엘은 서둘러 클로에와 그레이엄 후작의 모습을 살핀 뒤,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왜……!”

거의 동시에 2황비 카타리나도 2황녀궁에 도착했다.

“쥬논! 네가 정녕 미친 것이냐! 감히 내 딸에게 이 무슨……!”

그녀는 평소와 달리 헝클어진 머리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딸이 위험하다는 소식에 서둘러 오느라 자신의 행색을 살필 여유도 없었던 듯했다.

“2황비님, 이 이상 가까이 가시면 위험합니다!”

카타리나는 아연실색한 얼굴로 눈앞의 상황을 보다가 비틀거렸다.

막상 자신의 동생이 저런 미친 사람 같은 몰골로 딸과 다른 사람들을 위협하는 모습을 보니 충격이 아주 큰 것 같았다.

그때, 라미엘이 그림자 마법을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마력을 조금 움직이자마자 바로 피를 토하며 휘청였다.

아직 그레이엄 후작 때문에 손상된 마력 코어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타격이 온 모양이었다.

“라미엘, 너 그러다가 평생 마법 못 쓰고 싶어? 나대지 말고 뒤로 빠져.”

“그럼 클로에를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두란 말이야?!”

벌게진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라미엘을 보면서 혀를 찼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지금 클로에가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로 그레이엄 후작의 앞에 내던져진 건 아니었다.

클로에는 원래 카뮬리타 황실 사람치고 마법의 사용에 능통하지 못했다.

그래서 전에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내가 준 마력석이 지금 다행히도 클로에의 몸을 지켜 주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출처를 알 수 없는 마력들이 클로에의 주변에서 움직이는 걸 보니, 나뿐만이 아니라 라미엘이나 카타리나 같은 다른 사람들도 그녀에게 마력석을 준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레이엄 후작이 클로에 쪽으로 가까이 접근할 때마다 그녀의 앞에는 불꽃이 일어났다가 빛이 번쩍였다가, 또 날카로운 마력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기도 하면서 어지러운 파장을 퍼트리고 있었다.

내가 다급한 마음을 애써 누르고 눈앞에서 소용돌이치는 마력을 차분히 살펴볼 수 있는 이유였다.

“언니…….”

“조금만 기다려.”

옆에서 유디트가 직접 움직여야 할지 묻는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녀를 막은 뒤 날카로운 시선으로 요동치는 마력들을 주시했다.

제라드가 내게 날아오는 마력의 파편을 모조리 쳐내고 있어 아까보다 편하게 집중할 수 있었다.

-1황녀님! 황실 결계의 일부가 파괴되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도움을 안 준다, 진짜…….

나는 고개를 돌려 제라드를 쳐다봤다.

“제라드.”

“싫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이 내 말을 듣기도 전에 매몰차게 거부했다.

얘는 갈수록 뭐 이렇게 당당하게 명령에 불복종하는 건지…….

“거리상 우리가 제일 가까우니까 네가 먼저 가서 지원해. 금방 다른 지원군도 도착할 텐데, 그전까지만 도와주고 적당히 빠져.”

“자주 잊으시는 것 같은데, 전 1황녀님의 기사입니다. 그러니 1황녀님이 계시는 곳이 제가 있을 곳입니다.”

제라드는 냉담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말은 이런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내 귀에 제법 달게 들렸다.

하지만 나는 제라드에게 설득당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덧붙였다.

“말 좀 들어라. 널 믿으니까 맡기는 거잖아.”

내 말에 제라드가 입을 다물었다. 이를 악문 듯이 그의 턱이 바짝 조여졌다.

“네가 가서 그쪽 일을 해결해 두면 내가 할 일도 줄어드는 거야. 그러니까 가.”

항의하는 듯한 눈빛이 나를 응시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제라드도 바로 내 명령에 불복하지 않았다.

사납게 날뛰는 마력이 충돌하며 제라드의 눈 안에서 반짝이는 광채를 냈다.

그러나 그의 눈 안에서 거칠게 요동치는 건 시야에 비친 마력의 파장만이 아닌 것 같았다.

잠시 후,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가 굳게 다물려 있던 제라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위험한 일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십시오.”

결국 내가 이겼다.

“그래.”

제라드는 내가 선뜻 대답했는데도 미덥지 않은 듯이 굳은 눈으로 나를 보다가 뒤돌았다.

나는 제라드가 떠나자마자 눈앞에서 소용돌이치는 마력을 다시 주시했다.

조금씩, 각각의 마력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떨어지는 순간의 틈이 두 눈에 포착되었다.

제라드와 약속하자마자 그걸 어기다니 대놓고 거짓말을 한 셈이었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유디트, 때가 되면 마법사들과 함께 그레이엄 후작을 총공격하도록 해.”

“네?”

“너라면 언제 움직여야 할지 알 수 있을 거야.”

유디트에게 그렇게 당부한 뒤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1황녀님!”

“아르벨라……!”

내가 마력의 소용돌이 속으로 성큼 들어서자 뒤에서 사람들이 경악해 나를 불렀다.

곧장 날카로운 마력에 옷자락이 찢겼다. 잘린 머리카락 몇 가락이 반짝이며 날아가 마력의 폭풍 속에 삼켜졌다.

사방에서 번쩍거리는 빛에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았다.

나는 침입자의 존재를 느낀 듯이 한결 거칠게 날뛰는 마력의 미세한 틈을 찾아 한 발짝 더 앞으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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