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샤렐 황후는 그녀답지 않은 행동을 한 사람답지 않게 담담하고 차분해 보였다.
나를 보는 그녀의 눈빛 역시 그러했다.
“너는, 태중에 품었을 때부터 내 전부와 다름없었지.”
아까 내가 이 황후궁의 정원에 처음 자리를 잡고 그랬던 것처럼, 그녀 역시 좀 더 먼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누구나 선망하고 우러러보는 높은 자리에 앉아 있어도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들은 무엇 하나 나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부귀와 권력, 명예 같은 것은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숨을 쉬듯이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던 것들이라, 오히려 흙더미보다 못하게 느껴지기도 했어.”
샤렐 황후는 국모의 자리에 앉기 전부터 델피니움 공작가의 영애로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전부 누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생을 살았기에, 무엇 하나 값지고 귀하게 여겨지는 것이 없었노라고 그녀는 말했다.
“오직 너만 달랐다. 내 생에 오직 너만 의미가 있고, 너 하나만 특별했지.”
아득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는 어머니의 얼굴에서, 그 순간 지금까지 미처 내가 깨닫지 못했던 세월의 흔적이 엿보였다.
여전히 날카롭게 반짝이는 유리 조각인 줄 알았던 것은, 내가 모르는 시간 동안 파도에 쓸리고 모래에 닳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뭉툭해지고 빛바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 생각보다 너를 훨씬 일찍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지금처럼 너를 곁에 두었다가는 내가 오래 버티지 못해 먼저 애간장이 끊어져 죽을 것을 알았던 것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여인은 여전히 누구보다도 지고한 위치에 있었으나, 어째서인지 이 순간만큼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곤궁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네게 더 모질게 굴었다. 더는 네가 내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살았다. 그랬더니 어떻게든 다시 숨이 쉬어지더구나.”
그녀는 지금까지 불치병에 걸린 딸을 냉담하게 외면했던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기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지금까지 자신의 약점, 혹은 치부나 다름없게 생각해 누구에게도 온전히 내보이지 않았을 속마음을 처음으로 내 앞에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꼭 그로 인해 자신이 공격당하거나 경멸받아도 감내해 받아들이겠다는 듯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다. 왜 한 번씩 네 소식을 들을 때마다 점점 이리도 속이 타는 기분이 드는지.”
“…….”
“왜 이대로 너를 완전히 손에서 놓아 보내는 게 더 큰 후회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이제 와서 드는지…….”
그러고 나서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찻잔을 쥔 샤렐 황후의 마른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아랫입술을 살며시 당겨 문 그녀가 여전히 조금은 서늘하고 건조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기적인 어미라 욕하고 원망해도 이해한다. 이 또한 내 이기심임을 나 역시 모르지 않아.”
그러나 잠깐의 망설임 끝에 내게 건네진 것은 희미한 떨림을 담은 물음이었다.
“그래도…… 또 차를 마시러 오겠느냐?”
냉정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평소와 달리 얼어붙은 듯이 굳은 눈매나 마디가 하얗게 불거질 정도로 찻잔을 세게 움켜쥐고 있는 손이 그녀의 심경을 대신 말해 주는 듯했다.
놀랍게도 샤렐 황후는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입에서 어떤 대답을 나올지 불안해하고 긴장하면서 그녀는 숨을 죽인 채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만 그런 그녀를 향해 실낱 같은 미소를 흘리고 말았다.
“어머니. 가망 없는 것에 더는 기대지 않기로 결정하셨다면, 끝까지 그러시는 게 좋습니다.”
그 순간, 나를 응시하고 있던 붉은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연민이든, 동정이든, 죄책감이든지 간에 쉽게 곁을 내주지 마세요.”
예전처럼 오기에 젖어, 내 박살 난 자존심을 어떻게든 채우려 일부러 그녀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었다.
“한때는 어머니가 저를 어릴 때처럼 감싸 안아 주기를 바란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어머니에게 내 상처받은 마음을 알아 달라고 심통을 부리고 싶어 공연히 더 못되게 구는 것도 아니었다.
“더는 어머니가 제 인생에 필요치 않다는 소리를 하려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다시 얼굴을 마주하기에 이미 늦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에요.”
오히려 지금의 나는, 그녀가 조금 안타까운 것 같기도 했다.
“다만 지금이 되어 보니 이제는 알겠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지금 이대로가 가장 좋아요.”
기껏 모질게 마음을 먹어 놓고, 지금 또 이렇게 약해져서 가능성 없는 것을 다시 붙잡으려 하는 내 어머니가.
“이미 흘러간 것은 그냥 이대로 흘러가게 두는 것이 낫습니다.”
어머니와 나는 이대로 거리를 유지한 채 이미 과거에 스쳐 지나간 인연처럼 서로를 대하는 게 나았다.
설령 그게 어렵다 해도, 그럴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옳았다.
“저 때문에 당신이 상처받기를 바라지 않아요.”
그래서 나 또한 아주 오래전 이후로, 처음으로 고집과 오기를 버리고 진심을 담아 그녀에게 말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어머니. 오늘, 어릴 때처럼 제게 먼저 차를 마시자고 해 주셔서요.”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원망은 햇볕에 녹아 씻겨 내려간 듯이 사라졌고, 더는 내 앞에서 가늘게 손을 떨고 있는 사람을 미워하지도 않았다.
내가 가지고 있던 미련 하나가 지금 막 엉킨 실타래를 풀고 깨끗하게 날아갔다.
그것만으로도 오늘 밤은 홀가분하게 잠들 수 있었다.
* * *
한밤중, 누군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눈이 떠졌다.
푸르스름한 달빛이 창문을 통해 스며들고, 방 안에는 고요한 밤의 적막감이 얇은 베일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지금 막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느꼈다.
구석에 있던 괴물 녀석도 이변을 느낀 듯이 결계 속에서 파르르 몸을 떨고 있었다.
곧바로 이불을 걷고 일어나, 침실을 나섰다.
“황녀님! 이 늦은 시간에 어디를 가세요?”
“따라오지 말고 여기에 대기하고 있어!”
마리나와 시녀들이 황급히 나를 따라왔으나 그들을 막은 뒤 혼자 유디트의 궁으로 향했다.
상황이 급해서 이동 마법을 사용하자, 금방 4황녀궁의 결계를 통과하는 느낌이 들었다.
유디트와 의논해 미리 출입이 자유롭도록 설계해 두었기에 바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을 옮겨 둔 방에 서서 또 곧바로 연이은 마법을 사용할 준비에 들어갔다.
“언니!”
유디트도 잠옷 바람으로 내가 있는 곳에 나타났다.
“설마 오늘이에요?”
“모르겠어. 하지만 느낌이 심상치 않아.”
유디트의 물음에 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창밖을 보았다.
우웅.
예상했던 대로, 아까부터 희미하게 내 육감을 건드리던 기묘한 진동이 이제는 의심할 여지조차 없이 뚜렷하게 대기 중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꼭 공기가 우짖는 듯한 거친 떨림이 솜털을 바짝 곤두서게 만들었다.
곧이어 고요한 한밤중의 평온을 깨트리며 울리기 시작한 시끄러운 경보음이 여기저기서 떠밀려 왔다.
마력으로 만든 내 카나리아도 머리 위에 나타나서 퍼덕거렸다.
-균열에서 괴수가 나타났습니다! 좌표는 a3, x92, k110입니다.
역시 예상대로라고 해야 할지, 방금 내가 잠에서 깨자마자 느낀 것처럼 균열에서 움직임이 있었던 듯했다.
유디트의 새도 부리를 딱딱거리며 또 다른 괴수 출몰 지점의 좌표를 알렸다.
-또 다른 좌표는 a69, x242, k994.
-좌표 a189, x103, k88.
-좌표 a773, x5, k665…….
하지만 신호가 온 좌표는 한두 개가 아니었다.
새들의 부리에서 끝도 없이 이어지는 보고에 저절로 얼굴이 우그러졌다.
중간에 끼어든 또 다른 소식을 하나 더 듣고 나서는 더욱이 이마에 깊은 골이 팼다.
-지하감옥에 갇혀 있던 그레이엄 후작이 폭주한 상태로 탈옥했습니다. 이동한 장소는…… 2황녀궁으로 추측됩니다!
“이 미친놈이……!”
라미엘을 제물로 삼아 힘을 키우는 건 분명 실패했을 텐데?
혹시 그레이엄 후작도 숨기고 있던 뭔가가 더 남아 있었던 건가?
게다가 추정되는 이동 장소가 2황녀궁인 것도 문제였다.
설마 제정신도 아닌 상태에서 본능적으로 먹잇감을 찾아 클로에를 찾아간 건지 의심이 들었다.
라미엘과 마찬가지로 클로에 역시 그레이엄 후작에게는 양질의 제물로 삼을 만하다고 할 수 있는 혈육이었으니까.
“야심한 달밤에 다들 가지가지 하는군.”
시작부터 질린 기분이 들었지만 나도 질 수 없었다.
그래서 서둘러 마법진을 완성해 모기가 피를 빨듯이 잠들어 있는 솔렘 왕국 마법사들의 마력을 쭉쭉 빨아들였다.
갑자기 많은 양의 낯선 마력을 몸에 받아들였더니 속에서 충돌이 일어나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기왕 흡수한 마력을 다시 뱉어 봤자 내 손해라, 자꾸만 난동을 피우며 밖으로 비집고 나오려 하는 마력들을 꾸역꾸역 몸 안으로 내리눌렀다.
그런 뒤 나는 또 바로 이동 마법을 사용했다.
“잠깐만요, 지금 2황녀궁에 가려는 거죠? 저도 같이 가요!”
유디트가 우려와 염려가 섞인 눈으로 나를 보며 잇따라 이동 마법진을 펼쳤다.
유디트의 말처럼 일단 괴수가 출몰한 곳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나는 클로에와 그레이엄 후작의 일부터 해결하러 갈 생각이었다.
유디트가 나를 따라오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어서 그녀를 말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문득 눈에 띈 그녀의 얼굴이 유달리 안 좋아 보여서 한순간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그녀는 금단술에 실패한 뒤 이성을 잃고 폭주해 클로에와 밀리엄을 죽인 적이 있었다.
그럼 혹시 지금 그때의 일이 떠올라서 이렇게 안색이 나쁜 건가 싶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기에, 나는 유디트에게 안심하라는 듯이 말했다.
“괜찮아, 크게 걱정할 만한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왠지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아서, 조금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그리고…… 너와 나는 비슷한 상황을 이미 한 번 경험해 본 적이 있으니까 이번엔 더 잘할 수 있겠지.”
그러자 유디트는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어딘가 애매모호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내 그녀가 복잡한 감정으로 물든 눈을 감으며 입술을 잘근 깨문 뒤 작게 속삭였다.
“네. 한 번 경험해 봤으니 더 잘할 수 있겠지요.”
그러고 나서 우리는 그레이엄 후작의 목적지로 추정되는 클로에의 궁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