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황녀님-172화 (188/203)

172화

그런 일이 벌어진 이유에 대해서는 경험자인 나도 자세히 설명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아마도 세계 밖에서 떠돌고 갇혀 있던 탐욕스러운 영혼들이 경계선이 약해진 틈에 균열을 건너와, 이곳에 있는 인간들의 생을 빼앗으려 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세르쥬 백작, 얼추 정리가 다 되어 가는 것 같으니 우리는 먼저 돌아가 보도록 하지.”

어쨌든 오늘 해야 할 일은 다 끝마친 듯해서 나는 데려온 사람들을 데리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런데 이곳이 제법 우거진 숲속이라 그런지, 하필이면 바닥을 뚫고 위로 올라온 나무뿌리에 발이 걸리고 말았다.

그래도 아주 살짝이었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알아차릴 정도로 티 나게 균형을 잃고 볼썽사납게 휘청거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발을 헛디디자마자 누군가 꼭 기다리기도 한 것처럼 바로 내 팔을 턱 하니 붙잡았다.

나도 모르게 눈을 치켜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마자 못 박힌 듯이 내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요즘 들어 더욱 내 말을 잘 안 듣게 된 제라드였다.

“뭐야…….”

“죄송합니다. 옆에서 보니 황녀님의 팔에 얼룩이 묻은 것 같아 잠시 실례했습니다.”

그는 서늘한 눈으로 내 얼굴을 이상할 정도로 집요하게 주시하다가 이내 시선을 떼고 아무렇지 않게 내 팔을 잡고 있던 손을 거두었다.

무슨 되지도 않는 얼룩 핑계를 대기는 했으나, 내 성격을 아는 제라드가 이유를 적당히 둘러댄 것이 느껴져서 기분이 더 미묘해졌다.

“그러게요, 언니. 로이드가 아까 현장을 더럽게 만들어 놓는 바람에 흙 같은 게 튄 것 같아요.”

“내가 뭘!”

그때, 제라드와 마찬가지로 언제 내게 이렇게 가까이 다가왔는지 모를 유디트가 제라드의 손이 닿았던 내 팔을 문질렀다.

그녀는 조금 언짢은 것 같기도 하고 또 무언가에 살짝 놀란 것 같기도 한, 어딘가 복잡한 빛을 띤 가라앉은 눈으로 제라드를 힐끗 보다가 다시 평소 같은 얼굴로 돌아와 나를 향해 생긋 웃었다.

하지만 나는 천연덕스럽게 구는 이 두 사람에게서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위화감을 느꼈다.

얘네가 왜 이러지? 그냥 나무뿌리에 발이 걸린 것뿐인데, 주위에 그 사실을 너무 철저히 숨겨 주려고 하는 것 같잖아.

물론 나도 사람들한테 발을 헛디딘 걸 굳이 알리고 싶은 건 아니지만, 방금은 그렇게 티가 나지도 않았는데…….

하지만 언제 나한테 재빨리 손을 뻗었냐는 듯이 서늘하니 무심한 얼굴을 한 제라드나, 나를 보며 해사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유디트에게 그런 소리를 해 봤자, 치기 어린 변명을 하는 것처럼 궁색하게 여겨질 것 같았다.

나는 왠지 찜찜한 기분이 들어서 가늘게 뜬 눈으로 제라드와 유디트의 얼굴을 번갈아 훑었다.

“그래……. 하마터면 더러워진 차림으로 궁에 돌아갈 뻔했구나. 눈썰미가 좋은 두 사람 덕분에 미리 발견해서 다행이네.”

“별말씀을요. 이제 정말 궁으로 돌아가요, 언니.”

나는 더 따져 묻는 대신 유디트와 로이드를 데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동 마법은 숲에서 벗어난 뒤에 사용할 생각이었다. 제라드도 내 뒤를 따랐다.

오늘도 제라드는 필요 없다고 하는데도 굳이 여기까지 나를 따라와서 괴수 소탕에 한 몫 거들었다.

제라드는 얼마 전 그레이엄 후작을 체포한 날을 시점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걸 더는 감추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는 그를 떼어 놓고 나 혼자 몰래 장소를 이동하는 것도 쉽지 않아졌다.

하지만 제라드가 공을 세우는 건 나쁜 일이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그가 이런 자리에 동행하는 것을 그냥 막지 않았다.

“1황녀.”

그리고 황성에 도착해 세드릭 황제에게 보고를 마친 뒤 막 1황녀궁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나는 누군가 나를 부르는 익숙한 음성에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시야에 비친 사람이 샤렐 황후라는 사실을 깨닫고, 의외라는 생각에 눈썹을 슬쩍 치켜들고 말았다.

“이제 귀궁하느냐?”

여느 때처럼 차가운 듯이 고요한 눈빛이 내 얼굴에 머물렀다.

샤렐 황후는 잠시 바람을 쐬러 나왔다가 우연히 나와 마주친 듯했다.

“어제는 줄곧 날이 흐리더니 오늘은 제법 화창하구나. 시간이 된다면 내 궁에서 차를 들지 않겠느냐?”

뒤이어 귓가에 내려앉은 그녀의 말은 나를 직접 불러세운 것보다 더욱 뜻밖이었다. 나도 마주한 얼굴을 말없이 응시했다.

평소라면 샤렐 황후는 내게 이런 제의를 할 리가 없었고, 나 역시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리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녀와 나, 둘 다 평소와 달랐다.

나는 내 앞에 있는 사람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러지요. 마침 다음 일정까지는 시간이 비니.”

* * *

나뭇잎 사이로 떨어진 햇빛이 초록빛 잔디와 흰 꽃송이 위로 레이스 같은 문양을 만들었다.

맑은 차향이 은은한 꽃향기에 섞여 코끝을 간질이고, 예쁜 다기들이 햇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였다.

생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지금 내 시야에 비친 어떤 것은 예전 그대로였고, 또 어떤 것은 변해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취향이란 결국 일관된 부분이 있기 마련이라 그런지, 황후궁의 정원 역시 내 기억과 많은 것이 달라지지는 않은 듯했다.

나는 그런 풍경 속에서 오랜만에 묘한 감상에 젖었다.

이런 자리가 몇 년 만이더라.

물론 그동안 황후궁에 잠깐 들렀던 적은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정원에서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렇게 황후궁의 정원에 앉아 찻잔을 앞에 두고 있는 지금, 이상한 향수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특히 내 앞에서 금빛 머리카락을 반짝이며 붉은 눈을 내리깐 채 찻잔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을 보는 것이 그러했다.

“오늘, 4황녀와 함께 균열의 괴수를 처리하고 왔다고 들었다.”

그러다 문득, 먼저 차를 마시던 샤렐 황후가 입을 열었다.

“네, 폐하의 명으로 함께 다녀왔습니다.”

“그 아이와는 여전히 가까이 지내는 모양이구나.”

또 전처럼 유디트를 가까이하는 것에 못마땅함을 드러내는 것인가 싶었으나, 마주한 얼굴에서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거리를 둘 이유가 없기도 하고, 그 아이와는 마음이 잘 통하니까요.”

“그래……? 마음이 잘 통한다고?”

샤렐 황후는 내 말이 뜻밖이었던 듯했다.

그녀는 꼭 이상한 말을 들은 것처럼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시선을 살며시 옆으로 비꼈다.

“네게도 그런 사람이 있다니, 의외로구나.”

하지만 나야말로 샤렐 황후가 오늘 나를 불러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의외로 여겨졌다.

“네가 선택한 그 기사도, 어쩌면 다시 가문의 이름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던데.”

그녀가 이렇게 제라드의 일에까지 사사로운 관심을 갖는 것도 뜻밖이었고 말이다.

“네. 시간문제일 뿐, 반드시 그렇게 될 겁니다.”

샤렐 황후는 다짐인지 확신인지 경계선이 모호하게 느껴지는 내 단호한 대답에, 입을 다문 채 나를 조용히 응시했다.

“그래……. 네가 마음먹어서 하지 못한 일은 원래도 거의 없었지.”

그녀는 내 답변에 굳이 다른 말을 더 얹지 않았다.

이렇게 사적인 시간을 갖는 게 오랜만이라 그런지, 이상하게 대화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고 뚝뚝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우리 둘 다 잠깐 말을 잇지 않아서 정원에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다른 사람들은 아까 진작 물린 탓에, 지금 이곳에는 샤렐 황후와 나, 단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잠시 후,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샤렐 황후의 손에 들려 있던 찻잔이 테이블 위로 내려앉았다.

그녀는 시답잖은 예의상의 안부를 묻는 것을 그만두기로 한 것 같았다.

“아르벨라.”

그리고 마침내 고요하게까지 느껴지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테이블 위를 가로질렀다.

“나를 원망하느냐?”

맥락이 거의 없을뿐더러 앞뒤 설명조차 부족한 말이었지만, 그녀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나는 쉽게 알아차렸다.

어머니와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서로 고집스럽게 외면하고 미루어 온 부분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그녀가 나를 황후궁에 초대해서 하고 싶었던 진짜 본론에 가까운 말이란 사실도 깨달을 수 있었다.

긴 세월 동안 눈에 보이지 않게 묻어 둔 서로의 역린이었던 만큼,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샤렐 황후가 이해되지 않기도 했다.

나도 그녀를 따라 찻잔을 내려놓은 뒤 짤막하게 답했다.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러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동요 없는 눈동자가 잠깐 아래로 내리깔렸다가 다시 나를 응시했다.

“나는 이제까지 지나 온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두 귀를 파고든 그녀의 말은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네게는…… 조금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진, 처음으로 듣는 샤렐 황후의 사과에 나는 일순간 숨을 멈췄다.

그래도 잠시 후 소리 없이 숨을 깊게 들이마셔 나 또한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 못지않은 의연함을 겉에 입힌 뒤, 동요 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왜 이제 와서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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