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황녀님-170화 (186/203)

170화

라미엘은 평소에도 게으른 것치고 머리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세드릭 황제가 그레이엄 후작 일가의 판결을 공표하기 전에 이렇게 그 친족인 1황자가 먼저 죄를 깊이 뉘우치는 모습을 보이면, 세드릭 황제도 그들 모자에 관해서는 좀 더 너그러운 처사를 내릴 명분이 생겼다.

즉, 라미엘의 이런 행동은 제 모친인 2황비 카타리나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해도 좋았다.

“이런 결정으로 제 외숙이 저지른 죄를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겠지만, 같은 피를 일부나마 나눈 혈족으로서 앞으로 남은 제 일생은 카뮬리타를 위해 성심껏 봉사하며 겸허하게 살고자 합니다. 그러니 부디 윤허해 주십시오, 아바마마.”

2황비 카타리나는 사색이 된 얼굴로 세드릭 황제를 보았다. 그러나 라미엘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상태로 미동이 없었다.

잠시 후, 마침내 세드릭 황제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윤허한다.”

“폐하!”

카타리나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러나 이 일을 먼저 청한 것은 라미엘이었고, 세드릭 황제는 이미 허락을 내린 뒤였다.

“네 뜻은 잘 알겠으니 그만 물러가 보아라.”

세드릭 황제는 피곤한 듯이 라미엘의 퇴실을 명했다.

나는 라미엘이 알현장을 떠나는 것을 보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 * *

“축하해, 라미엘. 네가 원하는 대로 해결돼서 지금 기분이 좋겠구나.”

내 목소리를 들은 라미엘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알현장 안에서 벗어날 때까지만 해도 진중한 빛을 띠고 있던 라미엘의 얼굴에 평소 같은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여, 아르벨라. 죽다 살아나서 보니까 더 반갑네.”

말 그대로 죽다 살아난 것 같은 몰골을 한 주제에, 라미엘의 말투에서는 활기와 여유가 넘쳤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가는 나를 보며 짐짓 엄살을 떨 듯이 말했다.

“그런데 누이야, 좀 너무한 거 아니야? 평소에는 시간 약속도 칼 같이 지키면서 왜 하필 이번에만 지각을 한 거야? 기다리다가 진짜 눈 빠지는 줄 알았잖아.”

라미엘의 뻔뻔스러움에 무심코 헛웃음이 나왔다.

“누가 들으면 너랑 내가 작당하고 일을 꾸민 줄 알겠네. 상황도 잘 알아보지 않고 무작정 일을 저지른 네 잘못이지.”

마법사의 축일에 라미엘이 무언가를 계획 중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눈치챘으나, 설마 그가 정말 그때 일을 벌일 줄은 몰랐다.

그리고 라미엘도 설마 내가 그날 쓰러져, 이후로 사흘 동안이나 자신이 그레이엄 후작과 단둘이 방치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분명히, 그날은 얌전히 궁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을 텐데?”

“아, 확실히 그랬긴 하지.”

매정하다고 할 수 있는 내 말에도 라미엘은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기라도 한 듯이 웃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잠깐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그런데 아르벨라, 오매불망 너만 기다렸던 나를 그렇게 오랫동안 방치한 걸 보니까 생각보다 몸이 많이 안 좋았나 봐? 들은 것처럼 단순한 과로는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잠시 후, 라미엘이 여전히 호선을 그린 입술을 다시 열어 내게 말했다.

“넌 예전부터 꼭 한 번씩 네 궁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을 때가 있었지. 전부터 의심스러웠지만 네가 경계할까 봐 굳이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었는데 말이야. 아르벨라 너, 혹시 오랫동안 앓고 있는 지병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아까도 말했지만, 라미엘은 게으를 뿐 머리가 나쁜 건 아니었다.

정말 소문처럼 내가 과로 정도로 몸이 안 좋은 것이었다면, 그런 위험한 상황에서 라미엘을 그대로 두었을 리 없었다.

그러니 이것은 확실히 타당한 결론이었다.

“내가 일부러 널 그냥 내버려 둔 거라는 생각은 안 하나 봐.”

“우리 누이가 그럴 리 없지. 너, 사실은 나 많이 좋아하잖아.”

내가 일부러 심술 맞게 말했는데도 라미엘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제는 말해 줘도 되지 않아? 나 이제 네 경쟁자도 뭣도 아닌데. 방금 황위 계승권도 깔끔하게 포기했잖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재차 나를 구슬리듯이 속살거렸다.

이번에는 내가 그런 라미엘을 조용히 쳐다보다가, 툭 내뱉듯이 말했다.

“네가 굳이 그렇게 할 것까지는 없었을 텐데.”

“뭐, 방금 부황이랑 우리 어머니 앞에서 황위 같은 거 필요 없다고 대놓고 발로 차버린 거?”

황족에게 결코 가벼운 사안이 아니었음에도, 라미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무덤덤하게 반응했다.

어쩌면 앞으로 그에게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네가 있는데 나한테 차례가 오겠어? 그리고 아르벨라, 넌 내가 지금까지 그 말을 얼마나 하고 싶었는지 모를걸.”

하지만 그의 얼굴은 이상할 정도로 편안해 보였다.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라미엘을 봐온 것 중에 제일.

“솔직히 우리 외숙부 숨이 넘어간 뒤에야 말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게 전부 다 내 천재적인 수완 덕분이라고 할 수 있지.”

라미엘은 혼자만 아는 농담을 하는 것처럼 피식 웃다가 또 속이 조금 아린 듯이 손으로 명치 부근을 문질렀다.

“그래서, 아르벨라 네 생각에는 우리 숙부 언제 사형당할 것 같아?”

“사형보다는 종신형일 가능성이 높을 텐데.”

“어차피 제정신도 아니니까 종신형 선고를 받아도 우리 부황이나 후작가 사람들이 그냥 뒤에서 조용히 죽여 버릴 게 뻔한데, 그게 사형이나 마찬가지지.”

라미엘은 과연 이 상황이 꽤나 만족스러운 듯했다.

“그럴 거면 그냥 오늘이라도 빨리 처리해 버렸으면 좋겠네. 사실은 죽기 전에 이것저것 갚아주고 싶은 게 많았는데, 지금 그 인간 꼴을 보니까 입맛이 떨어져서 그냥 관두려고.”

나는 줄곧 궁금하던 것을 속에만 담고 있다가, 라미엘의 말을 듣고 조금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라미엘, 너 그날 그레이엄 후작한테 무슨 짓……. 아, 아니다. 이제 와서 이런 걸 확인해 봤자 뭐 하냐.”

그레이엄 후작이 금단술을 사용한 날, 그가 유달리 이상해 보이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던 게 계속 마음에 걸렸었다.

그래서 라미엘에게 진실을 알아보려 했으나, 어차피 모든 일이 처리된 마당에 그런 걸 또 확인해 봤자 뭘 할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물론 이건 내가 그레이엄 후작보다 전적으로 라미엘의 편이기 때문에 품은 마음이기도 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네 몸에 안 좋은 일은 더 하지 말라고.”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야?”

라미엘은 당부와 경고가 섞인 내 말을 듣고 재미있다는 듯이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올렸다.

나는 그런 그를 떨떠름하게 쳐다보았다.

예전에 유디트의 인생을 살 때에는 다른 이복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라미엘도 참 싫었는데, 지금은 내가 라미엘의 편이라니.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한순간 기묘한 감흥이 생겨났다.

“그보다 아르벨라. 본의 아니게 내가 네 애완견…… 아니, 그 이단자 출신 기사 놈한테도 조금 도움이 된 것 같은데. 이걸로 예전 빚은 갚은 걸로 치자.”

라미엘이 덧붙인 말을 듣고는 더욱이 그랬다.

그가 말한 예전의 빚이라면, 일전에 내가 제라드를 거둔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라미엘이 나 몰래 그를 공격했던 일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또한 라미엘의 말대로 의도했든 아니든, 이번에 그가 제라드에게 도움이 된 건 사실이었다.

그레이엄 후작이 중간에 적당히 꼬리를 자르지 못하고 황실에서 탈출을 감행한 데다, 이번에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제 조카를 납치해 금단술을 시도한 것은 전부 라미엘의 계략인 게 분명했다.

라미엘은 그레이엄 후작의 확실한 몰락을 바란 것 같았다.

그러나 라미엘이 굳이 이런 번거롭고 위험한 방법을 취한 것은, 2황비 카타리나가 그레이엄 후작과 완전히 연을 끊어 그를 보호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임과 동시에, 세드릭 황제가 그들에게도 연대적인 처벌을 내리기 난처해할 것을 확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세드릭 황제는 아직 황명을 내리지 않았고, 이번 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난 삶까지 포함해 제왕의 밑에서 긴 시간 동안 그의 성심을 살피며 줄다리기를 해 왔던 나는, 결국 그가 이번 사건에 이례적인 판결을 내릴 것을 알았다.

오늘 라미엘이 취한 행동으로 2황비 카타리나도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고, 당연히 라미엘과 클로에 또한 그레이엄 후작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한 피해자로 처리되어 이단자로 구속되지 않으리라.

금단술을 사용한 죄인의 혈족들에게까지 연대적인 책임을 물지 않는 것은 이제껏 없었던 일이었다.

그러니 이런 시기에 라스너 가문에 대한 재심을 강력히 주장한다면, 세드릭 황제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글렌 라스너가 죄를 저지른 배후에 그레이엄 후작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새로운 증거 역시 나왔으니, 라스너 가문의 살아 있는 유일한 후손인 제라드는 더욱이 사면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의미에서는 라미엘의 약은 수가 이쪽에도 도움이 되었다고 할 만했다.

“라미엘!”

바로 그때, 뒤에서 알현장의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우리가 있는 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라미엘과 내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

“나 먼저 간다.”

나는 그를 보다가 먼저 발길을 돌렸고, 라미엘은 인사 대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너 정말 제정신이 아닌 거지!”

잠시 후 철썩, 하고 2황비 카타리나가 라미엘의 뺨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끼어들 자리도 아니었고, 어차피 모자간에 해결해야 할 일이라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하고 먼저 그곳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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