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황녀님-169화 (185/203)

169화

“내 말 들리면 이쪽으로 와 봐. 계속 그렇게 구석에 붙어서 구겨져 있지 말고.”

-후잉…….

그러자 재촉하는 목소리에 이끌린 듯이 보라색 생물체가 벽에서 몸을 떼고 꼼질꼼질 나한테 기어오기 시작했다.

평소의 통통 튀는 움직임이 아니라, 꼭 물살이 밀려오듯이 흐물거리며 미끄러지는 모양새였다.

-나 이상해졌다고 놀라서 소리 지르지 않을 거야?

“놀랄 거면 방에 들어오자마자 진작 그랬겠지.”

내 말에 안심했는지, 내게 다가오는 놈의 움직임이 조금 더 빨라졌다.

나는 결계 앞까지 가서 몸을 낮추고 그 안으로 손을 내밀었다.

-동족아, 나, 나 어떻게 하냐? 갑자기 못생겨졌어!

괴물은 언제 꾸물거렸냐는 듯이 황급히 내게 기어 와서 내가 내민 손에 찰싹 달라붙었다.

말캉거리는 서늘한 무언가에 손이 완전히 파묻히는 느낌에 일순간 뒷덜미가 쭈뼛 곤두서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반응했다.

“그러게, 모양새가 좀 달라지긴 했네.”

-오늘 아침에 밥을 잘못 먹어서 그런가? 너 혹시 나한테 이상한 거 준 거 아니냐?

“이게 밥 잘 먹어 놓고 내 탓을 하네, 지금.”

괴물 녀석은 혼자서 많이 불안했던지, 자신의 몸을 좀 잘 살펴보라며 횡설수설했다.

녀석의 말대로 동그스름하던 놈의 형상은 어딘가 이상해진 상태였다.

원래부터 말랑하기는 했지만, 젤리처럼 형태가 고정되어 있던 몸체가 지금은 좀 더 흐물흐물해져서 꼭 터진 계란 노른자 같아졌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놈이 갑자기 녹아내린 것처럼 변했으니, 마리나가 이 녀석을 발견하고 기겁했을 만도 했다.

그런데 보라색 생물체는 나와 맞닿은 채로 또 꾸물거리며 모양을 바꾸었다.

흐물거리던 반투명한 몸통이 조금씩 더 커지고, 어딘가 눈에 익은 형체로 빚어져 갔다.

-히익, 더 이상해졌어! 더 못생겨졌어……!

자신의 변화를 눈치챈 괴물이 질겁했다. 당황한 녀석이 몸부림쳤다.

그러자 일순간 사람의 모습처럼 변했던 몸체가 스푼으로 건드린 푸딩처럼 요동치다가, 곧 힘을 다한 듯이 다시 원래의 뭉툭한 모양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나는 녀석이 방금 무엇으로 변하려다가 실패했는지 알았기 때문에, 순간 울컥한 기분을 느끼며 놈의 머리통으로 추정되는 곳에 딱밤을 먹였다.

“뭐? 못생기긴 뭐가 못생겼어? 원래 네가 생긴 것보다 훨씬 나은데.”

원래의 흐물거리는 모습으로 돌아온 괴물이 내 손에 엉겨 붙어 치대며 흐이잉, 흐잉, 괴상하게 칭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조금 전에 일어난 갑작스러운 변화에 그것을 목격한 사람보다 더 놀란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전의 기억을 통해 이미 예측하고 있던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역시 이 괴물 녀석이 방금과 같은 모습으로 변했던 건 일시적인 현상일 뿐, 지금 또다시 조금 전처럼 내 앞에서 급격한 변신을 일으킬 것 같지는 않았다.

-무서워……. 점점 다가오고 있어.

괴물은 요즘 계속 그랬듯이 또 몸을 오들오들 떨면서 두려움을 드러냈다.

나는 이 녀석이 무서워하는 게 뭔지 이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유디트로 살았던 지난 생과 달리 이번에는 최후의 균열이 더 빨리 다가오고 있는 이유가 뭔지도 알 수 있을 듯했다.

내가 유디트로서 세계의 이면에 집어 삼켜졌을 때 운명을 바꾸는 마지막 마법을 사용하면서 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저쪽과 이곳 사이에 보이지 않는 틈이 생긴 상태라, 균열이 커지는 게 가속화된 것이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나는 불쌍하게 떨면서 내게 찰싹 붙은 괴물을 다른 손으로 쓰다듬으며 달래듯이 말해 주었다.

그러자 녀석이 머리로 추정되는 부위를 갸우뚱거리면서 내게 물었다.

-너, 어디 가려는 거야?

“내가 가긴 어딜 가.”

맥락에 맞지 않는 뜬금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의외로 이 녀석에게는 기민한 부분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마리나가 다시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릴 때까지, 녀석의 머리를 문질러 주었다.

그리고 그 이튿날, 마침내 라미엘이 깨어났다는 소식이 황궁 안에 퍼졌다.

* * *

“1황자, 왜 갑자기 무릎을 꿇는 것이냐?”

의식을 되찾은 라미엘이 곧장 세드릭 황제와의 알현을 청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알현장으로 움직였다.

그곳에는 세드릭 황제와 라미엘 말고도 샤렐 황후와 2황비 카타리나가 와 있었다.

라미엘의 안색은 아직도 좋지 않았다. 금단술에 휘말린 후유증으로 마력에 문제가 생겼던 탓에, 아직도 몸이 완쾌되지 않은 듯했다.

물론 내가 아는 라미엘이라면 자신의 이런 병약한 모습까지도 즐기며 영상 마력석에 저장하고도 남았지만, 지금 그는 낯설 정도로 진중한 얼굴을 한 채로 세드릭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내가 알현장 안으로 들어서자, 샤렐 황후가 가장 처음 나를 발견하고 움찔 어깨를 떨었다.

라미엘의 시선도 힐끗 나를 향했다.

하지만 그는 내게 눈길을 오래 두지 않고 다시 상석에 앉은 세드릭 황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직 몸도 편치 않을 텐데 그만 일어나라.”

“폐하의 말씀이 맞다, 라미엘. 찬 바닥에 그러고 있지 말고 이쪽으로 오너라.”

2황비 카타리나는 라미엘의 몸을 걱정해 안달복달 못 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세드릭 황제는 방금 라미엘에게 건넨 말과 달리, 사뭇 무정해 보일 정도로 온기 없고 건조한 눈으로 제 앞에 무릎을 꿇은 아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바마마, 제 부족함으로 외숙부가 그릇된 마음을 품은 것을 막지 못하고, 또 카뮬리타에 큰 해악이 될 죄를 저지른 것을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라미엘이 세드릭 황제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아바마마께서 자비를 베풀어 마지막으로 모든 일을 바로잡을 기회를 주셨음에도 제 실수로 오히려 더 큰 근심을 안겨 드릴 뻔했으니, 이를 어떻게 사죄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어찌 1황자, 네 탓이란 말이냐.”

라미엘이 그레이엄 후작을 추적하다가 오히려 그에게 붙잡혀 금단술의 제물이 될 뻔한 것을 자책하자, 세드릭 황제가 그것을 부정하듯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라미엘을 내려다보고 있는 세드릭 황제의 모습에서는 진정성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지금 이 자리가 퍽 불편한 듯했다.

어찌 보면 아예 라미엘의 얼굴을 보는 것 자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알기로 그레이엄 후작의 일로 세드릭 황제의 앞에 매일 어마어마한 양의 상소문이 쌓이고 있었으니, 죄인과 혈연으로 묶인 라미엘이나 카타리나를 꺼리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직 그레이엄 후작에 대한 처벌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는 않았으나, 사실상 본래의 원칙을 적용한다면 금단술을 사용한 쥬논 그레이엄의 일가 전체를 폐망하게 해야 마땅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는 2황비 카타리나도 지금은 그저 조용히 숨을 죽인 채 세드릭 황제와 라미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 외가인 그레이엄 후작가의 일인데 어찌 제가 무관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아바마마.”

라미엘이 긴장감 어린 알현장의 공기를 깨트리며 폭탄 발언을 내뱉은 건 바로 그때였다.

“제 외숙인 쥬논 그레이엄의 만행에 큰 책임을 통감하며, 저는 이 시간부로 황위 계승권을 반납하고 물러나 카뮬리타와 아바마마의 안녕을 빌며 지내겠습니다.”

“라미엘!”

그 순간 2황비 카타리나에게서 날카로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부릅뜬 눈으로 라미엘을 쳐다보았다.

2황비 카타리나뿐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놀란 얼굴이었다.

라미엘은 말을 마친 뒤 몇 번 거칠게 잔기침을 내뱉었다.

몸이 많이 상하기는 한 듯, 입을 가린 그의 손과 옷소매에는 붉은 핏물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잠시 후 입가에 번진 피를 아무렇지 않게 닦아낸 뒤 세드릭 황제의 앞에 다시 고개를 수그렸다.

카타리나는 주먹을 그러쥔 손을 파르르 떨며 애써 침착하려고 애쓰는 듯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라미엘, 네가…… 확실히 아직 몸이 성치 않은 모양이구나. 이번 일로 충격이 커서 말실수를 한 게야. 이리 충동적으로 굴 게 아니라, 일단 방으로 돌아가서 좀 더 몸을 정양하고…….”

“어마마마의 말씀처럼 제 몸이 성치 않은 건 맞지만, 정신은 온전합니다.”

“정신이 온전한 놈이 이런 가당찮은 소리를 해!”

그러나 담담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끝까지 제 의견을 굽히지 않는 라미엘에게 화가 난 듯이, 그녀는 곧 이성을 잃고 언성을 높였다.

나는 작게 혀를 찼다. 2황비 카타리나도 참 어지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쥬논 그레이엄의 일로 이미 그녀의 외가인 그레이엄 후작가는 힘을 잃었다.

뿐만 아니라, 카타리나는 쥬논 그레이엄의 혈족인 그녀 자신과 라미엘, 클로에 남매의 처우마저 걱정해야 했다.

이런 판국이니 사실상 라미엘이 황위를 이을 일말의 가능성도 이미 완전히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카타리나의 반응을 보니, 그녀는 아직도 후일을 도모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물론 제아무리 금단술이 중죄라고는 하나, 카뮬리타의 황족이자 세드릭 황제의 후손인 라미엘과 클로에까지 직접적인 형을 받을 리는 없었다.

그들이 직접 용서받기 힘든 마법을 사용했다면 또 몰라도, 이번 일은 외척 가문에서 일어난 일에 그들 역시 휘말렸을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카타리나 황비는 달랐다.

이번 일은 쥬논 그레이엄에게 사형, 혹은 종신형을 내리고 그레이엄 후작가의 권한을 전면 몰수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2황비 카타리나도 폐위될 가능성이 있었다.

물론 그녀라면 자식들을 폐황자, 폐황녀로 만드는 것보다 차라리 그것을 반길 터였다.

“충동적으로 꺼낸 말도, 말실수도 아닙니다. 제 결정을 번복할 마음도 없습니다.”

그리고 라미엘이 이렇게 정신을 차리자마자 세드릭 황제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이와 같은 선언을 한 이유는, 그 역시 이런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