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제라드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예전에 그의 마력이 내 안으로 침투해서 속을 헤집었을 때의 감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나는 흠칫해서 바로 제라드의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평소 같으면 이 정도에서 물러났을 그는 오늘따라 쉬이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손가락을 옥죄는 힘은 더 강해지기만 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나는 애써 침착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지금 이 상황이 썩 달갑지 않았다.
마법이든 뭐든, 지금 마주한 사람을 강제로 떼어낼 방법 정도야 셀 수 없이 많았지만, 그에게 그런 방식을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움직임을 멈추고 제라드를 똑바로 응시하며 싸늘히 경고했다.
“무엄하구나. 당장 이 손 놔.”
“명령이십니까?”
“그래.”
“제가 평소에도 1황녀님의 명령을 순순히 따르는 편은 아니었지요.”
이 녀석이…….
제라드의 불충한 소리에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그동안 품고 있던 의혹이 한결 더 강해졌다.
가능하면 그냥 이대로 모른 척하려고 했지만, 더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제라드, 너…….”
그래서 나도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일전에 유디트와 무슨 얘기를 나누었지?”
제라드가 그렇듯이, 나도 그의 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이 마주한 눈을 직시했다.
작은 돌멩이가 뚝 떨어진 호수처럼 가슴에 얕은 물살이 일어났다.
이 또한 제라드의 동요가 전해진 것이었다.
방금처럼 격렬하게 요동치는 감정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손을 잡고 있으니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제라드는 미동 없이 서서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얽힌 손가락을 느릿하게 풀어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그의 손을 놔주지 않았다.
“말해. 네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알아야겠으니까.”
지금까지는 어림짐작으로, 제라드가 유디트에게 무슨 말을 들었을지 어렴풋이 유추만 했을 뿐이었다.
가장 가능성이 큰 건, 그때 내게 배신감을 느꼈던 유디트가 홧김에 제라드에게 내가 그를 순수한 목적으로 옆에 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준 것이었다.
어쩌면 그를 금단술의 제물로 사용하려 했다는 사실까지 말해 주었을지도 몰랐다.
어찌 되었든 간에, 그 후 동요했던 제라드의 상태나, 오늘의 이 반응을 보면 아무래도 그는 유디트의 말을 믿는 듯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 제라드가 나한테 알고 있는 걸 솔직히 털어놓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나도 거짓말이든, 변명이든 할 수 있을 테니까.
제라드의 태도를 보니, 아무래도 그 역시 이와 관련해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고 말이다.
“벨라 누나!”
하지만 제라드와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는 지금 찾아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보는 밀리엄이 큰 목소리로 나를 부르며 달려왔기 때문이다.
“황자님, 천천히 뛰세요! 그러다 다치세요!”
나는 고개를 돌려 수행인을 뒤에 매단 채 거의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황도를 걸어오는 소년을 눈에 담았다.
아까 킬리안과 함께 있을 때는 유디트가 훼방을 놓더니, 이번에는 밀리엄의 차례인가 싶었다.
상황이 탐탁지 않았지만, 하필 지금 공교로운 시점에 나타난 건 밀리엄의 탓이 아니었다.
어린 동생의 앞에서 외간 남자와 손을 붙잡고 이렇게 바싹 붙어 있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제라드를 놔주었다.
제라드도 방금의 기묘한 대치 상태를 더 이어 갈 생각은 없는지, 내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의 얼굴은 다시 아까처럼 고요해져 있었다.
여전히 파문을 그리며 일렁이는 가슴이 아니었다면, 정말 그가 겉모습처럼 완전히 침착한 상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누나, 몸은 좀 괜찮아? 어쩐지 매일 너무 바쁘더니, 한 번은 탈이 날 줄 알았어!”
내 앞까지 달려온 밀리엄이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내게 다다다 속사포처럼 속에 쌓인 말을 쏟아냈다.
“그런데 이왕 쉬는 김에 좀 더 쉬지, 왜 또 이렇게 외출이 잦은 거야? 어제도 밖에 나가고, 오늘도 밖에 나가고, 매일 할 일이 왜 이렇게 많아? 또 아바마마가 시킨 일들 때문인 거지?”
아까 본 킬리안처럼 마법사의 축일 이후로 처음 만나는 것이라 그런지, 밀리엄은 내 상태가 괜찮은지 확인하려는 듯이 위아래로 바쁘게 시선을 움직였다.
같은 황성 내에 사는 밀리엄을 이렇게 오랜만에 보게 된 이유는, 당연히 샤렐 황후 때문이었다.
그녀는 마법사의 축일 때 일어난 일로 놀라 밀리엄을 부쩍 과보호하고 있었다.
그래서 밀리엄은 어마마마의 명으로 그녀의 치마폭에 곱게 싸인 채, 궁 밖으로 한 발짝도 마음대로 나가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런데 오늘은 밀리엄이 이렇게 오랜만에 모습을 보인 걸 보니, 시간이 지나 샤렐 황후의 마음도 조금은 안정이 된 모양이었다.
“아바마마는, 왜 그렇게 모든 일을 전부 다 벨라 누나한테 맡기는 거야? 우리 카뮬리타 황실에 인재가 그렇게 없대? 누나가 뭐 초인인 줄 아나? 아니, 뭐……. 물론 벨라 누나가 세상에서 제일 대단한 건 사실이지만 말이야. 그래도 어릴 때부터 나랑 놀지도 못하고 매일 바쁘게 지내니까 결국 이렇게 과로해서 몸이 안 좋아지잖아.”
밀리엄이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투덜댔다. 오랜만에 본 그는 이런저런 불만이 많은 것 같았다.
예전이라면 이렇게 내게 푸념하는 밀리엄을 못마땅하게 여겼겠지만, 이제는 이런 그를 봐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게. 어릴 때부터 밀리엄 너랑 놀아 주기도 하고, 적당히 쉬엄쉬엄 일하는 건데. 내가 너무 바쁘게만 살았네.”
“어…….”
설마 내가 자신의 말에 호응해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밀리엄이 당황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나와 눈을 마주한 밀리엄이 이내 귓불을 빨갛게 붉히며 괜히 헛기침을 내뱉었다.
“아무튼……. 벨라 누나 소식 듣고 그동안 궁금해서 죽는 줄 알았어. 오늘도 어마마마를 겨우 설득해서 잠깐만 누나 보러 나온 거야.”
그러고 나서 그가 살짝 내 눈치를 보면서 덧붙였다.
“저기, 그리고 어마마마도 누나를 많이 신경 쓰시던데. 매일 몰래 1황녀궁의 소식을 알아보고 그러시더라고.”
혹시 이 조그만 게 벌써 다 컸다고 내 마음을 생각해서 이러나 싶었는데, 얼굴을 보니 없는 얘기를 지어낸 건 아닌 것 같았다.
내게 완전히 무관심한 것도 아니면서 나한테 직접 안부를 물으러 오지는 않는다는 점이 샤렐 황후다웠다.
그러고 보니 유디트는 샤렐 황후나 밀리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기억을 찾은 후로 오늘까지 단 한 번도 그녀의 입에서 이 두 사람의 이름이 나온 적은 없었다.
내가 그들에게 느끼는 것과 같은 감정을 그녀 역시 예전에 느꼈다면 지금도 마냥 무심한 마음일 수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아르벨라보다 유디트에 가깝다고 했다. 그러니 어쩌면 과거는 과거로 묻어 두기로 한 것일지도 몰랐다.
“어마마마께 난 괜찮다고 전해 드려.”
나는 잠깐 밀리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밀리엄, 너도 어마마마께 걱정 끼쳐 드리지 않게 건강히 지내고.”
내가 이런 식으로 두 사람의 안부를 챙긴 건 처음이라 그런지, 밀리엄은 조금 얼떨떨한 기색이었다.
“어어. 알았어. 누나도 몸 잘 챙겨……?”
그도 어색한 말투로 내게 화답했다.
제라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가라앉은 눈으로 그런 밀리엄과 내 모습을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1황녀님!”
제라드와 나는 둘 다 아까의 일을 잊은 듯이 밀리엄이 끼어들어 마무리하지 못한 대화를 더 잇지 않고 아무 말 없이 1황녀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궁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섰을 때, 마리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황급히 달려와 나를 맞이했다.
“마침 잘 오셨어요. 빨리 방으로 올라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마리나는 드물게도 크게 당황한 상태였다.
“무슨 일인데 그래?”
“그러니까, 그 이상한…… 1황녀님의 애완동물이…….”
그녀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횡설수설했다. 나는 마리나의 말을 듣고 바로 계단을 올라갔다.
침실에 들어서자, 여전히 방구석 결계 속에 틀어박힌 괴물 녀석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평소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보라색 생물체를 보고 마리나가 왜 이런 반응을 보였는지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저도 방금 시트를 갈려고 들어왔다가 발견했는데, 상태가 좀 이상해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마리나는 나가 봐.”
마리나는 저 괴물과 나를 단둘이 방에 둬도 될지 모르겠다는 듯이 주저하다가, 내 독촉에 떠밀려 문을 나섰다.
그 후 나는 확연히 변한 모습을 하고 있는 괴물에게 다가갔다.
“조만간 이렇게 될 줄 알고 있긴 했지만, 설마 잠깐 외출한 사이에 변할 줄은 몰랐네.”
내 목소리를 들은 괴물 녀석이 꿈틀거리며 반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