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황녀님-164화 (180/203)

164화

자그마한 속삭임이 귓가에 울리는 순간, 아르벨라는 문득 몇 년 전에 영상 마력석을 보면서 혼자 울었던 밤을 떠올렸다.

-아르벨라, 꽃구경을 한다더니 거기서 혼자 뭐 하고 있니?

-토끼풀을 찾아요.

사무치도록 외로워 혼자 울었던 날.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 이후로는 그만큼이나 큰 고독을 느꼈던 적이 없었다.

“몇 년 전 그날, 사냥터에서…….”

마침내 굳게 잠겨 있던 아르벨라의 입술이 열리고 그 사이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처음으로 너와 내가 닮았다고 느꼈어.”

저무는 햇빛 아래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혼자 쓸쓸하게 앉아 있던 유디트를 보았을 때였다.

“유디트일 때 나는 당신이 모든 걸 다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르벨라인 나는 네가 너무 부러웠어. 그래서 솔직히 너를 미워하기도 했어.”

예전에는 자신을 최대한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꾸며내는 데 급급했으나, 지금은 처음으로 어느 때보다 솔직하게 스스로를 내보일 수 있었다.

“혹시 예전의 아르벨라도 그랬을까? 당신도 나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었어?”

“예전의 나는 그랬을지도 모르지요.”

지금 눈을 맞대고 있는 사람이 그런 그녀를 비난하지도 않고, 동정하지도 않고, 그저 조용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지켜봐 주었기 때문에.

“아르벨라, 예전에 당신을 내 기준대로 재단해 멋대로 판단한 걸 사과할게. 당신의 말을 끝내 믿지 않고, 당신의 삶이 나로 인해 그런 식으로 끝나게 방조한 것도.”

그래서 이처럼 해묵은 말을 건넬 수 있었다.

“그리고 유디트. 그동안 내 이기심으로 너를 마음대로 손에 쥐어 움직이고 이용하려 했던 걸 미안하게 생각해.”

흐르는 시간 속에 아무리 완전히 지워 버린 듯이 깊게 파묻어 놨어도, 그래도 언젠가 한번은 해야만 했던 말이었다.

“그래도 내가 했던 말과 행동들이 전부 거짓이었던 건 아니었어. 언젠가부터는 그냥 네가 내 옆에 있는 게 좋았어. 그런 시간이 언제까지고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게 내 진심이었어. 그러니까…….”

그것보다는 차라리 이다음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게 더 어려웠다.

“너도 나를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앞선 말은 기껏 침착하게 잘 해 놓고, 그 말을 할 때는 목소리를 약간 떨고 말았다.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놀랄 만큼의 무거운 진심이 거기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유디트는 그런 아르벨라를 굽어보듯이 조용히 내려다보다가, 이내 그녀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당신을 미워하면 슬퍼요?”

“그래……. 분명 아주 슬플 거야.”

“견딜 수 없을 만큼이요?”

“응. 견딜 수 없을 만큼.”

혹시나 그 말을 들은 유디트가 예전처럼 그녀를 비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그래요……. 그렇구나.”

뜻밖에도 차가운 냉소 대신 따뜻한 온기가 아르벨라를 찾아들었다.

“사실은 계속 그 말을 듣고 싶었어요.”

믿을 수 없게도 유디트의 입술에 희미하게나마 떠오른 것은 어렴풋한 미소였다.

“당신은 정말 한결같네요. 그러지 않아도 될 것까지 전부 미안해하면서 사과하는 걸 보니.”

유디트는 황궁 연회 날 밤에 그랬던 것처럼, 아르벨라의 발치에 천천히 몸을 낮추었다.

살며시 포개진 손이 쌀쌀한 새벽녘에 어깨 위로 덮이는 담요처럼 부드러운 따스함을 퍼트렸다.

꼭 한겨울 난롯가에 앉은 어린아이가 제 부모에게 어리광을 부리듯이, 혹은 집 안에서 길러지는 고양이가 주인에게 응석을 부리듯이, 유디트가 아르벨라의 다리에 몸을 기댄 채 맞잡은 손 위로 가볍게 얼굴을 기댔다.

“처음에 말했잖아요. 나는 당신이 계속 모른 척하면, 그냥 이대로 살아도 괜찮았다고.”

유디트가 작게 속삭이는 말에 실려 날아든 간지러운 숨결이 손등을 간질였다.

“조금은 애석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르벨라보다 유디트에 가까워요. 내가 다른 이름으로 살던 시절은 이미 예전에 지나간걸요. 사실은 당신도 그렇지 않아요?”

아르벨라는 무심코 유디트의 손을 더 세게 움켜잡았다.

꼭 위로하듯이 번지는 온기에 문득 목이 메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르벨라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쥐어짜 실낱같은 목소리를 입술 사이로 내뱉었다.

“그래…….”

“나는 그냥, 당신이 처음부터 나를 버릴 생각으로 옆에 두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조금 화가 났던 것뿐이에요.”

나도 그 정도 심술은 부릴 수도 있는 거잖아요, 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밉지 않을 정도의 가벼운 심통이 담겨 있었다.

“당신은 나를 미워해서 그랬다고 했지만, 사실은 단지 그것뿐이었다면 다른 방식으로 할 수도 있었겠지요.”

조곤조곤하게 읊조려지는 음성이 꼭 마음을 어루만지듯이 부드럽게 이어졌다.

“그냥 짓밟고 망가뜨릴 수도 있었잖아요. 분명 그게 더 쉬운 일이었을 텐데.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어요.”

천천히 고개를 든 유디트가 아르벨라의 눈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듯이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를 두 번 다시 두 발로 설 수 없게 땅바닥에 처박는 대신, 내 손을 잡고 당신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 줬잖아요.”

그 말이 꼭 아르벨라를 구원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사실 다른 건 다 상관없었어요. 어쩌면 당신이 나를 발견해 내 이름을 처음 불러 주었을 때부터…… 나는 진짜 유디트가 된 거예요.”

유디트가 그렇게 말해 준 지금 이 순간에야말로, 비로소 아르벨라도 진짜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사실 예전에도 나는, 당신을 진짜 미워할 수는 없었는걸요…….”

유디트도 그 말로, 자신이 아르벨라이던 시절에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끝없이 상처 주었던 과거를 사과했다.

아르벨라는 울고 싶지 않아서 입술에 힘을 줬다.

이제야 두 사람은 마침내 서로를 진실로 이해한 것 같았다.

그들이 얼굴을 마주한 지 수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그러니까 당신도 나를 미워하면 안 돼요. 내가 앞으로 당신에게 어떤 잘못을 하든 용서해 줘야 해요.”

유디트가 흐리게 미소를 지으며 아르벨라에게 속삭였다.

아르벨라도 그녀를 따라 가까스로 미소를 그리며 ‘그래’하고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때는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에 마음이 먹먹해져서 유디트의 그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오랜만에 허물없이 품에 안겨 오는 유디트를 그저 마주 끌어안아 주었다.

그날은 정말 아주 오랜만에, 밤을 지새우지 않고 깊은 단잠을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 *

마력 제어기를 찬 채 구금된 그레이엄 후작은 다음 날 의식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레이엄 후작을 추적하다가 그에게 붙잡혀 금단술의 제물이 될 뻔한 라미엘은 다행히 생명에 지장이 없었다.

그래도 라미엘은 아직 깨어나지 못 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일시적으로나마 금단술에 휘말린 여파로 코어의 마력이 엉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듣기로는 강제로 치료하기 위해 마력 회로를 건드리면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어서, 자연적으로 회복될 때까지 이대로 몸을 정양하는 것이 좋다고 황궁의가 전했다.

2황비 카타리나는 어제 자신의 동생인 그레이엄 후작이 수많은 목격자 앞에서 직접 금단술을 사용한 데다, 제 아들인 라미엘을 죽이려 하기까지 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기절했다.

늦은 저녁에는 그녀도 정신을 차렸지만, 불같이 분노한 뒤 단 한 번도 그레이엄 후작을 보러 가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레이엄 후작이 무슨 짓을 해도 혈육인 그를 외면하지 못하던 카타리나였으나, 이번 일에는 그녀도 오만 정이 다 떨어진 모양이었다.

게다가 2황비 카타리나와 그레이엄 후작가는 처음 생각보다 큰 불똥이 발등에 떨어지자 뒤처리에 바빠진 것 같았다.

그레이엄 후작이 이번에 세드릭 황제의 진노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직접 사람들의 앞에서 제 혈육을 제물로 삼는 가장 흉악한 금단술 중 하나를 직접 사용하기까지 했으니, 원래의 엄격한 규율대로라면 그 친인척들까지 모조리 패망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세드릭 황제는 매일 같이 쏟아지는 상소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눈치였다.

그레이엄 후작가는 황실의 외가였으니 지금까지 하던 대로 형벌을 적용하면 같은 피를 이은 일부 황족들도 이단자로 취급되어 같이 신분을 박탈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는 카뮬리타 황실의 역사상 전례 없는 일이었기에 세드릭 황제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엄 후작의 처우 문제에 더해, 같은 날 하늘에 열린 균열도 큰 골칫거리였다.

여전히 붉게 찢어진 하늘은 고요했으나, 어딘가 음산한 기운을 흘리며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반면 나는 얼마 전과 다르게 아주 차분한 상태였다.

걷잡을 수 없이 동요하던 마음도 모두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지금은 아주 침착해졌다.

어쩌면 이것은 변화한 제라드의 상태가 일정 부분 영향을 끼친 것일지도 몰랐다.

그토록 크게 요동치던 제라드의 마음은 지금 폭풍우가 지나간 깊은 심해처럼 무섭도록 잠잠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었지만, 나는 아직도 그가 유디트에게 들은 말이 무엇인지 조금 신경이 쓰였다.

“킬리안 베른하르트가 1황녀님을 뵙습니다.”

그리고 마법사의 축일 이후 처음으로 킬리안이 입궁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