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이전에 짐작했듯이 솔렘 왕국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마력과 금단술, 그리고 균열의 발생에는 깊은 연관성이 있었다.
이번에 닫히지 않은 균열이 생긴 것도, 비록 실패하기는 했으나 그레이엄 후작이 금단술을 사용한 영향이 컸다.
비록 그레이엄 후작이 이번에 돌발적인 일을 벌인 것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늦든 빠르든 이번처럼 균열이 닫히지 않는 시점이 올 것이란 사실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허둥지둥거릴 이유는 없었다.
“네가 저 균열을 완전히 닫을 수 있다고?”
“그래.”
“예전에는 그러지 못했잖아. 그런데 이번에는 어떻게?”
“그때는 내가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그 보랏빛 공간. 다른 말로 세계의 이면. 진리의 공간.
“방법을 알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뒤였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혹은 균열…….
그것을 어떤 단어로 정확히 표현할 수 있을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만약 정말 어떤 철학자들의 주장처럼 이 땅의 모든 생물체가 죽은 뒤에 가게 되는 사후 세계가 있다면 그곳이 아닐까 생각했다.
혹은 신에 의해 창조된 모든 생물체가 처음 이름을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그 영혼이 잠시 머문다는 장소가 바로 그곳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지금의 아르벨라가 유디트일 때 그 보랏빛 공간 안에서 마지막으로 느꼈던 것은, 그곳이 죽음과 생, 혹은 그것을 초월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미지의 공간이라는 사실이었다.
만약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보다 큰 단위의 공간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그 보랏빛 공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금단술과 솔렘 왕국의 마법은, 바로 그곳의 마력을 빌려서 사용하는 독자적인 마법식이었다.
원래 마법을 사용할 때는 마법사가 태생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마력으로 수식을 그리는 것이 보편적이었으나, 금단술과 솔렘 왕국의 마법식은 특이하게도 외부의 마력을 빌려 사용했다.
이 세계에 깃든 마력.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생물체라면 응당 풀 한 포기라도 가지고 있는 자연물의 마력과, 더 나아가 허공에 흩어져 있는 구심점 없는 마력들을 끌어모아 사용했기에 그 방법은 획기적이라 할 만했다.
아무리 그물을 촘촘하게 짠다 해도 숨구멍은 생기기 마련이었으니, 본래부터 이 세상과 세계의 이면 사이에는 미세한 틈이 존재하던 것이리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흘러나온 마력을 빌려 쓰면 쓸수록, 지금 이 세계와 세계의 이면 사이의 통로는 점점 넓어지고, 결국은 작은 틈에 불과하던 균열이 어느새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하늘 전체가 열릴 정도가 된 것이리라.
예전에 강력한 마도 왕국으로 부흥했던 솔렘 왕조가 하루아침에 멸망하고 만 것도 그 균열로 인한 재앙 때문이었다.
아마도 생존자 중에서 그 솔렘 왕조의 피를 가장 짙게 이어받았던 예전의 유디트, 즉 현재의 아르벨라는 그곳에 가장 많이 가 본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새장에 갇혀 그 보랏빛 공간에 완전히 삼켜지기 직전, 균열과 이 세계의 연결을 끊을 방법이 뭔지 저절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 계획을 위해서도 솔렘 왕국의 사람들은 필요해. 그러니 그들을 나와 만나게 해 줬으면 좋겠어.”
사실 유디트가 이런 제안을 곧바로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과 무언가를 작당하려 한다고 오해할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아르벨라로서도 이런 말을 꺼내는 건 조심스러웠다.
“내가 수락할 거라고 생각해?”
아니나 다를까, 유디트는 아르벨라의 협조 요청에 순순히 응할 마음이 없는 듯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당신을 속이지 않을게. 원한다면 마법으로 맹세해도 좋아. 그걸로도 믿기 어렵다면 그들과 만나는 자리에 동행해도 무방해.”
아르벨라는 포기하지 않고 그녀를 설득했다.
“내가 아는 재앙을 막을 방법은 이것뿐이고, 거기에 실패하면 예전처럼 멸망을 반복할 뿐이야. 협박하려는 의도로 하는 말은 아니니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애석하게도 앞으로 닥쳐올 큰 재앙을 막아 내는 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르벨라. 당신도 이대로 세상이 끝나기를 바라지는 않잖아. 사실은 당신이 누구보다 이 카뮬리타를 아끼고 사랑했던 걸 알아.”
그리고 그런 그녀의 손으로 직접 이 땅을 망치도록 조종했던 것이 바로 솔렘 왕국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입장에서는 그들을 당장 찢어 죽이고 싶을 만도 했다.
하지만 진짜 아르벨라라면 결국 이 제안을 무시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정말로…… 카뮬리타의 누구보다도 이 땅을 지키는 데 헌신적이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까부터 미묘하게 요점에서 비껴 나간 얘기를 하네. 지금 내가 제일 관심이 있는 건 카뮬리타의 안위니, 세상의 존망이니, 그런 게 아닌데.”
그래서 그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을 때, 그 의외성에 아르벨라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유디트는 그렇게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쉽게 가늠하기 어려운 말을 내뱉은 뒤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응시해 오는 시선에 왠지 주변에 고인 공기의 농도가 한층 짙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작은 시계 초침 소리만 노크하듯이 방에 내려앉은 침묵을 두드렸다.
유디트는 아르벨라가 무언가를 말하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아르벨라도 그녀가 원하는 바가 뭔지 눈치챘다.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향한 시선만 잠자코 마주할 뿐, 먼저 입술을 열지는 않았다.
“나, 처음에 모든 걸 기억해 냈을 때까지만 해도 당신을 예전의 나처럼 만들어 주려고 했어.”
결국 침묵을 깨트린 건 유디트였다.
“예전에 내가 그랬듯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당신의 약점을 드러내고 수치스럽게 만들어 주려고 했어.”
이어진 말에 아르벨라의 눈매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마법사의 축일 때도 원래 그럴 생각이었어.”
그저 담담하게 고백하듯이 읊조려진 목소리에는 그 내용과 달리 부정적인 감정은 깃들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았어.”
유디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듯, 아르벨라의 푸른 눈이 일순간 희미하게 미동했다.
그러니까 지금 유디트는……. 복수를 위해 아르벨라가 이렇게 몸을 바꾸고 일부러 접근한 것으로 오해했을 때조차 끝내 그녀에게 반격할 마음을 품을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르벨라의 귀에 그것은 마치, 그녀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아무래도 먼저 말해 줄 생각은 없는 것 같으니, 내가 직접 물을게. 균열을 닫아 세상을 재앙으로부터 구하고 나면 뭘 할 거지?”
그러나 뒤따른 물음은 제법 날카로워서, 아르벨라를 미묘한 감상에 오래 젖어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마법사의 열병을 고칠 방법은 없어. 그걸 알면서 왜 몸을 바꾼 거야?”
“그건…….”
“내가 아는 바보같이 착하고 물러 터진 너라면, 네 마법사들이 한 짓에 대신 책임을 지고 내게 보상하고 싶다……. 뭐 그런 생각이라도 했을 것 같은데.”
아르벨라가 무어라 설명하려 했으나, 유디트의 말이 덧붙여진 게 더 빨랐다.
그리고 그것은 아르벨라가 예전에 했던 생각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짚어 냈다.
가장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올 듯이 마주해 오는 황금빛 눈에서 아르벨라는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으나, 이상하게도 저 눈앞에서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네 건강한 육신으로 다시 한번 살 기회라도 주고 싶었던 거야?”
유디트는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냉소를 짓는 건지, 아니면 잇새에 힘을 준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하게 그녀의 입매가 비틀렸다.
“처음에 제라드 라스너를 옆에 둔 것, 마법사의 열병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던 게 맞지?”
그 말 역시…… 아르벨라는 바로 부정할 수 없었다.
“당신은 내게 치욕을 주려고 옆에 둔 게 아니라고 했지만, 분명 처음에 나를 눈에 담은 것도 좋은 의도는 아니었겠지.”
유디트는 아르벨라가 구태여 이 자리에서 꺼내고 싶지 않았던 역린들을 사정없이 찌르고 들어왔다.
“아르벨라 언니.”
그리고 지나간 시절을 반추하던 시간은 끝났다.
눈앞에 있는 사람을 현실의 이름으로 부르며 다시 유디트로 돌아온 소녀가 과거의 흔적을 얼굴에서 지운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를 사람들의 앞에 나서게 했어요?”
아르벨라는 두 사람 사이를 막듯이 놓여 있던 테이블 옆을 지나 자신에게 다가오는 유디트를 바라보았다.
“왜 그에게 남들에게 인정받을 법한 공로를 주고, 왜 언제든 스스로 족쇄를 끊고 나갈 수 있을 정도의 힘을 키우게 해 줬어요?”
유디트는 왜 제라드를 제물로 삼기 쉽게, 남들의 눈을 피해 숨겨 놓지 않았느냐고 지적했다.
“왜 나를 냉궁에 가둬 혼자 말라 죽게 하지 않고 매일 찾아와 줬지요?”
그리고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왜 그녀에게도 필요 이상의 관심을 쏟았느냐고 물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또 당신이 내게 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던 것……. 왜 전부 다 무시하지 않고 들어줬어요? 왜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대신 벌해 주었죠?”
유디트가 왜 지금 이런 말을 꺼내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고 그럴 수 없을 것 같기도 했다.
“내가 가진 어머니의 유품을 백야의 전당 마법사에게 보여 주라고 한 것도 당신이죠. 나를 당신 뜻대로 언제든 편하게 좌지우지하려면 그냥 천한 노예의 자식으로 멸시받으며 살게 하는 게 나았을 텐데.”
어느새 아르벨라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유디트가 조용히 멈춰 섰다.
작게 기울어지는 고개를 따라 검은 머리칼이 흔들렸다.
“차라리 나한테 아무것도 주지 않고 빼앗기만 하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나도 그냥 지금 망설임 없이 당신을 버렸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