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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황녀님-162화 (178/203)

162화

그 순간 방 안의 모든 소음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방의 한쪽에서 울리던 시계 초침 소리도, 두 사람이 숨을 작게 들이마시고 내뱉는 소리도, 옷자락이 스치면서 만들어 내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일시에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무거운 적막감만이 들어찼다.

“아르벨라……라고.”

잠시 후 유디트가 입술 사이로 자그마한 속삭임을 흘려보냈다.

꼭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을 천천히 음미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입으로 읊조려 다시 한번 되새기는 것 같기도 한 느낌이었다.

“만약 당신이 이대로 계속 모른 척하면 나도 그냥 지금처럼 지내도 괜찮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찻잔을 든 채 미동 없이 앉아 있던 유디트가 잠시 아래로 내리깔았던 눈을 다시 들어 올렸다.

“그런데 결국은 나를 그 이름으로 불렀네요.”

지금 아르벨라가 한 말에 대한 의문이나 의심은 그녀의 눈에 담겨 있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르벨라의 예상이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유디트는 자신을 ‘아르벨라’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여전히 고요한 모습으로 맞은편에 앉은 사람을 응시했다.

“처음에는 망상인 줄 알았어요.”

조용한 음성이 짙은 침묵으로 가득 찬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다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고. 하지만 역시 그건 아니었던 거네.”

그리고 마침내 찻잔에서 완전히 손을 뗀 유디트가 덧붙인 말에, 아르벨라는 소리 없이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

“그래, 그럼 나는 당신을 유디트라고 부르면 돼?”

그 순간 두 사람이 있는 공간이 예전의 카뮬리타 황실로 바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서로의 이름과 모습을 바꾸어 사용하고 있을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물론 그 시절에 지금처럼 아르벨라가 유디트의 궁에서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러 찾아오는 일 같은 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편한 대로.”

“그래. 그 이름으로 불린 이상, 내가 당신을 평소처럼 아르벨라 언니라고 부르는 것도 좀 이상하긴 하지.”

유디트는 그렇게 말하며, 꼭 재미없는 농담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실소하듯이 얕은 웃음을 입술 사이로 내뱉었다.

“결국 이렇게 되었으니 먼저 하나만 물어볼게.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그러나 그 웃음은 금방 사그라졌다.

“처음부터 우리가 바뀐 걸 알면서 나를 옆에 두고 모욕할 속셈이었던 거야?”

겉모습은 여전히 어린 소녀의 것이나 그 안에 다른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인가?

왠지 지금 아르벨라의 눈앞에 있는 유디트에게서 예전의 위엄 있던 황녀의 모습이 투영되어 보이는 듯했다.

“어떤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상황을 만든 건 당신이지. 솔렘 왕국에는 기이한 마법이 여럿 있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야.”

그리고 얼음 호수처럼 사늘한 황금빛 눈을 정면에서 마주한 순간, 아르벨라도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럼 나한테 복수할 생각으로 이런 짓을 했어? 내가 그때 네 기사를 죽이고 네가 가지게 될 카뮬리타를 망쳐서?”

“아니야.”

그러나 이미 시간이 많이 흘러, 지금의 아르벨라 역시 예전의 미숙하던 어린 황녀는 아니었다.

“마법이 불완전했어. 그래서 나도 지금까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던 거고.”

유디트의 말은 역린을 찌르다시피 했으나, 그녀 역시 일부러 아르벨라를 자극하거나 공격할 심산으로 이처럼 노골적인 표현을 사용해 과거의 일을 들춘 건 아닌 것 같았다.

“믿지 않을 수도 있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원래 내가 누구였는지에 대한 기억 같은 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어.”

설명을 잇는 목소리는 담담하게 느껴질 정도로 침착하고 차분했다.

“일부러…… 복수할 속셈으로 그런 짓을 한 것도 아니고, 치욕스럽게 만들 생각으로 옆에 둔 것도 아니야.”

그 말이 진실인지 가늠하려는 듯이 유디트는 입을 다물고 아르벨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네 말은 좀 이상하게 들리네.”

그러다 잠시 후, 유디트가 닫혀 있던 입술을 다시 열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복수할 생각도 아니고 치욕을 줄 마음도 아니었다니. 그럼 왜 이런 이상한 상황을 만들었는지, 그 이유는 둘째치고서라도……. 내가 너한테 한 짓이 있는데 원망스럽거나 밉지도 않았단 말이야?”

“당연히 원망스럽고 미웠어.”

대답은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불시에 튀어나왔다.

무의식중에 내뱉어진 말이니만큼, 정작 입을 열어 그 말을 한 사람도 멈칫했다.

지금 겨우 얼굴을 마주한 사람과 이런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게 아니었기 때문에 조금은 후회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이미 내뱉은 말을 번복하는 것도 기만인 것 같았고, 방금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을 구태여 변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당신 말이 맞아. 나를 무시하기만 하는 당신이 미웠고, 특히 당신이 그를 죽인 후에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처음으로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런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적어도 당신이 죽기 직전의 일들은…… 당신의 의지로 저질렀던 게 아니란 걸 아니까.”

“그걸 안다면서 내게 솔렘 왕국 사람들에 대한 건 왜 묻지 않니?”

그 뒤로 이어진 것은 냉소 섞인 유디트의 물음이었다.

“이미 예상했겠지만, 네가 데리고 있던 솔렘 왕국 사람들은 지난 마법사의 축일 때 내가 빼돌렸어. 네 소중한 심복들에게 내가 무슨 짓을 했을지 걱정되지 않아? 네 말대로라면 내가 그들에게 복수할 게 너무 당연하지 않나? 지금쯤 살점 하나 안 남기고 고통스럽게 죽여 버렸을지도 모르는데.”

“그러지 않았잖아.”

그러나 아르벨라는 단호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유디트의 말을 부정했다.

“죽이지 않았잖아.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 걸 알고 있어.”

비록 솔렘 왕국 마법사들을 가두고 있던 결계가 유디트로 인해 깨지고, 또 그들에게 걸어두었던 추적 마법도 파쇄되기는 했지만, 그들의 생사를 알 수 있도록 심어 둔 마법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래서 유디트가 지금 말한 것처럼 그들을 해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왠지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라면 방금 말한 것처럼 잔인하고 과격한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의 아르벨라라면 몰라도, 지금의 그녀라면.

확신 어린 아르벨라의 말에, 유디트는 잠깐 침묵한 채 마주한 얼굴을 응시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가 황금빛 눈을 살짝 내리깔아 시선을 비끼며 말했다.

“일단 계속 말해 봐. 복수하려는 게 아니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아르벨라의 손끝이 매끄러운 옷감을 긁듯이 잠깐 지그시 누르다가 다시 펴졌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최후의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았거든.”

그녀도 처음부터 그런 방법을 사용할 생각이었던 건 아니었다.

언젠가 솔렘 왕국의 마법사이자 자신의 충신이었던 미유가 말해 주었던 ‘운명을 바꾸는 마법’은 그녀가 세계의 이면에 끌려 들어가 완전히 갇히기 직전에 가까스로 떠올려 낸 것이었다.

하필이면 왜 그게 떠올랐는지는 지금 생각해 봐도 모르겠다.

어쩌면 예전의 아르벨라가 유디트이던 그녀에게 누누이 하던 말처럼 정말 자신의 안에 음습하게 숨겨져 있던 삐뚤어진 욕망이 그 순간 발현되었던 것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그때 머물러 있던 세계의 이면이 그녀에게 이런 비약적인 행동을 하도록 어떤 농간을 부린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간에, 그것이 당시의 그녀가 할 수 있는 방법 중에 그나마 상황을 조금이라도 타파할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마법이었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도 사실은 그녀 역시 반신반의하면서 사용한 방법이라 성공할 확률은 반의반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마법은 성공했다.

그러나 역시 완벽하지는 못했던 것인지, 그녀는 치명적인 오류에 빠지고 말았다.

유디트로 살았던 기억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진짜 아르벨라로서의 자의식을 가진 채 살게 되었고, 원래의 자신이 품었던 결심이나 목적 같은 건 조금도 깨닫지 못한 채 오늘을 맞이하게 되었다.

“당신이 죽은 후에 카뮬리타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어.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기이한 공간에서 봤으니까.”

과거에 아르벨라가 죽고 난 뒤 다시 한번 찾아왔던 대규모의 균열. 그 안에서 쏟아지던, 이전까지와 조금 다른 형태의 괴수들. 그리고 도래한 세상의 끝.

두 사람 모두가 그 일을 알고 있다면 이야기는 좀 더 쉬워졌다.

“내가 방법을 알아.”

다행히 아직은 늦지 않았다. 좀 더 빨리 기억을 되찾았다면 좋았겠지만, 지금이라도 가장 중요한 것을 떠올려서 다행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게 막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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