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 * *
그 시각, 유디트도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황궁 밖으로 빠져나갔다.
“유디트 황녀님!”
목적했던 곳에 도착하자마자 초조한 얼굴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유디트를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솔렘 왕국의 사람들은 방 안에 들어온 유디트를 향해 일제히 무릎을 굽혀 몸을 낮추었다.
그들은 유디트를 보고 이루 말할 수 없이 감격한 얼굴이었다.
마치 이렇게 살아서 유디트를 만난 것만으로도 여한이 없다는 듯이, 어떤 마법사들은 그녀의 앞에서 눈을 촉촉하게 적시기까지 했다.
“오시는 길은 불편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렇게 동료들과 유디트 황녀님을 정식으로 다시 뵙게 될 날을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유디트에게 직접 은혜를 입은 라칸의 충성심이 가장 깊어 보였다.
유디트는 망토의 모자를 벗으며 자신의 앞에 고개를 수그린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솔렘 왕국 마법사들이 전부 모였다고 들었는데, 여기에 있는 인원이 전부인가요?”
“예, 지금 남아 있는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은 저희가 전부입니다. 모두 유디트 님을 모시기 위해 모인 충성스러운 심복들이니 믿고 뒤를 맡겨 주십시오!”
라칸은 이어서 유디트에게 더 깊이 고개를 수그리고 충성을 맹세했다.
“유디트 황녀님. 당신은 우리의 하나뿐인 빛. 그리고 우리는 당신의 충실한 종입니다.”
그러나 그가 한마디 한마디를 이어갈수록 유디트의 얼굴은 싸늘하게 식어 갔다.
“저희는 유디트 님을 위해 살고 유디트 님을 위해 죽을 것입니다. 유디트 님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으니, 언제든 주저 없이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다른 마법사들도 라칸의 말에 동의하며 한목소리로 유디트에게 충성스러운 마음을 드러냈다.
“나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다 하겠다고요?”
“물론입니다!”
어쩐지 한기 어린 눈으로 그런 마법사들을 내려다보던 유디트의 입술이 이내 미묘하게 비틀렸다.
“정말 개 같네.”
“예?”
혼잣말하듯이 낮게 읊조려진 신랄한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라칸과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당신들, 정말 충성스러운 개 같다고요.”
첫 마디의 어감이 좀 미묘하게 느껴져서 한순간 그들의 주인이 욕을 한 것인가 싶었으나, 고개를 들어 마주한 얼굴에는 여전히 순수하고 맑은 빛만이 가득했다.
이런 선량하고 상냥한 얼굴을 한 소녀가 욕설을 내뱉는 광경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감사합니다, 유디트 황녀님! 앞으로 더 깊은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그래서 라칸과 다른 마법사들은 유디트의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이고 한결 더 감복해서 큰소리로 외쳤다.
유디트는 그런 마법사들을 지나쳐 그녀를 위해 준비된 상석의 의자에 앉았다.
한편, 하이어스 백작 가문에 숨어들어 황실 시녀로 일했던 솔렘 왕국의 마법사 미유는 유디트가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다.
아니, 스스로조차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불안감이 시작된 건 유디트가 이렇게 그들을 직접 찾아와 얼굴을 보이기 전부터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유디트의 도움을 받아 황실의 지하 감옥을 탈출했다는 라칸이 갑자기 돌아와 1황녀 아르벨라에게 감금되어 있던 그들을 구출해 주었을 때부터…….
이미 그때부터 미유의 불안함과 두려움은 시작되어 있었다.
물가에 고인 안개처럼 소리 없이 밀려든 감정이 지금도 그녀의 뒷덜미에 소름을 돋아나게 했다.
그동안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이 애타게 기다려 왔던 주인을 이제야 마침내 눈앞에 두게 되었는데, 기쁘고 감동적인 마음이 들기보다 꼭 사냥꾼에게 올가미로 묶인 짐승이라도 된 것처럼 온몸의 솜털이 바짝 곤두섰다.
미유는 까닭 모를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며 의자에 앉은 유디트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유디트 황녀님, 얼마 전 열린 카뮬리타 제국민들의 축일 때 황녀님이 뛰어난 기량을 보이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유디트 황녀님은 역시 저희 솔렘 왕국의 희망이신 분. 허영심에 찌들어 화려한 외관만 갈고 닦을 뿐, 정작 실속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카뮬리타의 다른 황족들과는 역시 격이 달라도 한참 다르십니다.”
반면 라칸은 이미 유디트에게 매료되어 눈이 먼 듯했다.
그는 미유가 느끼는 기이한 위기감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듯이 유디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입안의 혀처럼 그녀를 치켜세우기 시작했다.
“1황녀도 그 자리에 있었지만 특별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걸 보니, 역시 유디트 황녀님에게 밀려 활약하지 못했던 게지요. 실제로 유디트 황녀님이 제게 주신 마력석으로 1황녀의 결계를 손쉽게 깨지 않았습니까? 이제 보니 대단하다고 소문난 1황녀도 거품이었을 뿐, 생각보다 별것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별것 아닌 1황녀에게 완전히 압살당해 굴욕적인 꼴을 당한 데다, 이후 지하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다가 죽을 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라칸이 1황녀 아르벨라에 대한 악의가 물씬 밴 말을 지껄이는 동안 유디트의 입술에 그려진 싸늘한 미소도 점점 짙어졌다.
라칸은 유디트가 자신의 말에 즐거워하고 있다고 생각해 더 적극적으로 입을 놀렸다.
“그래서 유디트 황녀님, 저희는 언제부터 움직이면 될까요?”
“움직이다니?”
“1황녀에게 복수해야 할 것 아닙니까.”
라칸은 유디트가 1황녀에 대한 처단을 명령할 것이라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유디트는 말없이 그런 라칸의 얼굴을 응시했다. 미유는 한결 짙어진 불안감에 남몰래 식은땀을 흘렸다.
유디트의 얼굴은 여전히 온화하기만 했다. 라칸을 향한 그녀의 눈도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했다.
그런데 왜 이런 불길한 느낌이 드는 것인지 미유는 알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유디트의 입술이 다시 천천히 떼어졌다.
“누구를 건드린다고?”
“사악한 1황녀 말입니다.”
라칸은 왜 유디트가 자꾸 같은 것을 묻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힐끗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지하 감옥에서 저를 꺼내 주실 때, 저희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을 가두고 겁박한 1황녀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분노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그는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은 듯이, 한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 물론 유디트 황녀님은 마음이 여리시니, 이렇게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하는 일을 꺼리며 망설이시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1황녀의 성격은 모질고 잔인해서 만약 그녀의 손에서 저희를 빼돌린 것이 유디트 황녀님이라는 사실을 알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신하가 되어 어떻게 주인이 위협받는 것을 무시할 수 있겠느냐며, 라칸은 결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유디트 황녀님은 굳이 이런 일로 손을 더럽히실 필요 없습니다. 1황녀를 처치하는 건 저와 다른 마법사들이 할 테니, 유디트 황녀님은 그저 잠시만 눈을 감고 지금까지처럼 깨끗하게…….”
“무슨 같잖은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이 멍청한 놈아.”
바로 그 순간, 유디트의 입에서 나왔다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갑고 날카로운 말이 방 안의 공기를 쩡 하니 얼어붙게 만들었다.
“너희는 정말 한결같구나. 내가 언제 너한테 그 애를 죽이라고 했지? 이제 보니 솔렘 왕국에는 내 생각보다 더한 머저리들만 모여 있나 보구나.”
비웃음마저 어린 신랄한 목소리에 라칸은 말문이 막힌 듯했다.
처음으로 본 유디트의 낯선 모습에 입술을 벙긋거리던 라칸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유디트 황녀님……! 감히 황녀님의 생각을 마음대로 추측해 입을 놀리다니,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자신의 말실수로 주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상태에서도 앞에서 느껴지는 써늘한 시선에 정수리가 따가웠다.
“멍청한 것. 그때 내가 짜증이 났던 건 그 애가 여전히 무르단 걸 알게 돼서 그런 거야.”
그러나 이어진 유디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은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지금은 잘됐다고 생각해. 너희가 그때 전부 죽기라도 했으면 나한테 기회가 없었을 것 아니야? 그럼 지금 내가 얼마나 서운했을까.”
그 순간 등줄기를 스친 본능적인 경계심에 마법사들이 고개를 들었다.
“넌 멍청하지만 한 가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도 있구나.”
그들의 시야에 여전히 말간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는 유디트의 얼굴이 비쳤다.
“네 말처럼 1황녀는 모질고 잔인해서 절대로 원한을 잊지 않는단다.”
다정하게까지 들리는 나긋한 목소리와 흰 얼굴에 그려진 선명한 미소에 이상하게 소름이 돋았다.
다음 순간, 유디트가 꼭 연주를 지휘하는 악단의 지휘자처럼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것이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이 기억하는 유디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