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다행히 그레이엄 후작이 휘두른 칼은 원래 노리던 목표물의 목을 찌르지 못했다.
검에 마력을 덧씌운 제라드가 마법진 안에서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마력의 미세한 틈 사이로 예리한 날붙이를 찔러 넣었기 때문이다.
카앙!
고막을 찢을 듯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마력의 반작용이 일어났다.
거기에 휘말린 그레이엄 후작이 휘청였다. 빗나간 칼은 라미엘의 팔에 꽂혔다.
그때 나도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충분히 경악스럽고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다들 마법진 밖으로 나가!”
크게 소리쳐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방의 중앙에서부터 그려진 마법진은 완성한 시간이 꽤 지난 것처럼 갈색으로 말라붙어 있었다.
하지만 나와 기사들이 막 밟고 들어온 문 앞쪽을 포함해 방의 가장자리에 그려진 마법진은 나중에 추가로 덧대지기라도 한 듯이 비교적 선명한 붉은빛으로 그려진 상태였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이대로 다 같이 금단술에 휩쓸려 제물이 될지도 모를 판이었다.
그레이엄 후작이 왜 지난 사흘이나 뜸을 들이다가 우리가 결계를 깨고 들어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금단술을 사용했는지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순히 침입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이 급해져서 마법의 시행을 더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한 것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혹시 처음부터 금단술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우리들까지 인간 제물로 삼을 생각이었던 건가?
“그레이엄 후작! 당장 멈춰……!”
하지만 그런 것치고 그레이엄 후작은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라미엘의 팔뚝에 꽂힌 칼을 다시 뽑아 들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라미엘을 공격하려 했다.
카앙……!
나는 내 마력으로 그레이엄 후작을 둘러싼 두꺼운 마력을 후려쳤다. 바깥의 결계와 달리 이쪽은 금방 깨지지 않았다.
그래도 효과가 아예 없지는 않아서, 타격을 입은 그레이엄 후작이 또 한 번 비틀거렸다.
마력을 빼앗아 힘을 키우는 금단술은 마력의 파장이 맞는 사람을 제물로 삼는 것이 기본 조건이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그레이엄 후작은 라미엘을 그 주요 희생양으로 만들 생각인 듯했다.
아직 마법이 완성되지 않은 것을 보니, 라미엘은 내가 처음에 방 안의 상황을 보고 우려했던 것처럼 숨이 끊어진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 그레이엄 후작이 라미엘을 죽이게 두어서는 안 되었다.
다급한 상황 속에서도 그레이엄 후작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오직 라미엘에게만 관심을 두었다.
그걸 본 내 머릿속에 강한 의혹이 심어졌다.
지금 내 눈에 비친 그레이엄 후작의 모습에서 짙은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는 지금 꼭 무언가에 조종당하는 사람 같았다.
도대체 이 일의 어디까지가 라미엘이 계획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지금 이 상황이 라미엘이 원했던 게 맞기는 한 건가?
뜻하지 않게 라미엘이 사라진 후 사흘이나 공백이 생긴 탓에, 그의 계획에 어느 정도나 오류가 생긴 것인지 현재로서는 쉽게 가늠할 수 없었다.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건, 라미엘이 지금 여기서 그레이엄 후작의 손에 죽고 싶은 생각은 아니었을 거라는 점이다.
하필 그 순간 라미엘의 팔에서 흐른 피가 마법진에 닿았고, 마력의 폭풍은 한결 거세졌다.
“황녀님, 이쪽으로 마력을!”
카가가강!
그때, 제라드가 아까 그랬듯이 사납게 소용돌이치는 마력의 틈을 찾아 검을 휘둘렀다.
나는 제라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채고 그가 검으로 벌려 놓은 틈에 마력을 집중해 쏟아부었다.
콰앙!
마침내 구심점을 잃고 터져나간 마력이 역방향으로 폭발하듯이 움직였다.
그것을 뒤집어쓴 그레이엄 후작에게서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으아아악……!”
눈앞에 벼락이 내려치는 것처럼 빛이 번쩍였다.
마력의 파장을 이기지 못하고 뜯겨 나간 천장과 깨진 유리창의 파편이 사방에서 어지럽게 뒤엉켰다.
그레이엄 후작은 거칠게 날뛰는 마력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비틀거렸다.
부릅뜬 그의 눈에서 섬뜩한 붉은 피가 흘렀다.
나는 그레이엄 후작의 마법이 깨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금단술은 실패했다. 그리고 그 여파는 결코 작지 않았다.
내가 알기로 금단술에 실패했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타격을 입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레이엄 후작은 내가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모습으로 피를 흘리며 서서 불길할 정도로 짙은 마력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레이엄 후작의 핏발 선 눈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오싹 소름이 돋았다.
한순간 예전에 내가 봤던 아르벨라의 최후의 모습과 그레이엄 후작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1황녀님……! 상공에 균열이 열렸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번에도 내 기억과 동일하게 하늘에 균열까지 열렸다.
“그레이엄 후작에게 전부 결박 마법을 사용해!”
기사들에게 명령한 뒤 서둘러 하늘로 마력의 빛을 쏘아 보냈다.
아까 저택 밖의 결계를 깬 것을 첫 번째 신호로 삼아 근처까지 접근해 있던 지원군이 지금의 두 번째 신호를 보고 곧장 움직일 것이었다.
그 후 황실 마법사들에게도 따로 마력으로 만든 전령들을 보내 균열에 대한 소식을 알렸다.
다행히 균열이 완전히 열리려면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고, 주변은 이미 봉쇄를 끝마친 뒤라 추가적인 인명 피해에 대한 우려를 덜 수 있었다.
“크아악……!”
그레이엄 후작이 또다시 날카로운 울부짖음을 쏟아내며 발버둥 쳤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자신을 사방에서 옥죄고 있던 수많은 결박 마법을 한순간 뿌리치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평소의 모습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짐승 같은 민첩한 몸놀림으로 깨진 유리창 밖으로 뛰어내렸다.
당연히 나는 곧장 그레이엄 후작에게 마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시도는 불발로 돌아갔다.
다행히 경황이 없어 다른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지만, 마법을 사용한 순간 마력이 연기처럼 흩어져 버렸다.
“제라드!”
눈을 번뜩인 제라드가 누구보다도 빨리 그레이엄 후작의 뒤를 쫓아 나갔다. 모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른 기사들도 뒤따라 그레이엄 후작을 쫓았다. 그사이에 내 마력도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천만다행스럽게도 일시적인 문제였던 듯했다.
나도 입술을 짓씹으며 부유 마법을 사용해 당장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제라드와 그레이엄 후작은 다행히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1황녀님, 그레이엄 후작을 포박했습니다.”
내가 걱정했던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레이엄 후작을 제압하는 동안 부상을 입은 듯이 팔과 눈가에 찢어진 상처가 보이긴 했지만, 제라드는 멀쩡히 서 있었다.
제라드에게 등을 짓밟힌 채 바닥에 엎어진 그레이엄 후작은 의식이 없어 보였다.
다른 기사들의 놀란 시선이 제라드를 향한 걸 보니, 아무래도 제라드 혼자 그레이엄 후작을 제압한 것 같았다.
나는 주변에 흩어진 익숙한 마력을 느끼고 제라드가 마법을 사용한 걸 알았다.
원래 이단자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건 금기 사항이지만 제라드는 예외였다.
몇 년 전에 라미엘에게 위협당한 일로 제라드는 자신을 보호할 만한 힘을 가지고 싶어 했고, 그래서 채택된 게 검술이었다.
하지만 제라드는 배움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그래서 그가 어깨너머로 마법을 익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도 남들 몰래 그에게 종종 마법을 가르쳐 주곤 했다.
당시의 나는 그저 단순한 변덕이라고 스스로의 이상한 행동을 합리화했으나, 생각해 보면 이미 그때부터 제라드를 옆에 두는 목적이 조금씩 변질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평소에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있어 검에 마력을 입히는 정도에서 그쳤지만, 제라드에게는 그의 부친만큼이나 뛰어난 마법적 재능이 있었다.
“잘했어, 제라드 경. 1황자를 납치해 시해하고 금단술까지 사용한 죄인인 그레이엄 후작을 포박한 그대의 공이 크다.”
그리고 오늘, 나는 제라드에게 마법을 가르치길 잘했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주변에 보는 눈이 많아 나도 의연하게 제라드를 대했지만, 조금 전에는 정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겁도 없이 그레이엄 후작을 혼자 쫓아 나가다니, 그러다가 예전처럼 죽기라도 할까 봐 얼마나 놀랐는지 그가 알까?
아무튼 그렇게 그레이엄 후작은 붙잡혔다.
똑같은 금단술에 실패하고 카뮬리타를 초토화로 만들었던 이전의 아르벨라와 달리 허무하다면 허무한 최후였다.
아무래도 그레이엄 후작의 마법적 재능은 아르벨라와 비교할 수조차 없다 보니 비교적 쉽게 제압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아니면 그레이엄 후작의 생각보다 제물인 라미엘과의 상성이 맞지 않았거나, 제라드를 죽이는 데 성공했던 아르벨라와 달리 그레이엄 후작은 라미엘을 완전한 제물로 삼지 못해서 힘을 얻지 못한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진이 빠졌다.
다른 사람들도 포박당한 그레이엄 후작을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이상하고 희한한 일이었다.
분명 내가 운명을 바꾼 건 아르벨라와 유디트인데, 느닷없이 그레이엄 후작이 금단술로 인한 괴물이 되어 버리다니.
“라미엘, 정신 차려!”
그 해답을 지금 내게 알려 줄 수 있는 건 한 사람밖에 없었다.
다시 저택으로 돌아와, 나는 빛이 꺼진 마법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레이엄 후작을 처리하는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그 안에 쓰러져 있던 라미엘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나는 창백한 얼굴로 의식을 잃고 있는 라미엘을 더 큰 목소리로 불러서 깨웠다.
“라미엘……!”
너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