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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황녀님-156화 (172/203)

156화

“아니, 그동안 애써 묻지 않았지만, 그 전부터 이상하셨습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다시 제라드의 얼굴을 마주했다. 내 손목을 붙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제라드는 내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했다. 잇새에 좀 더 힘을 준 듯이, 그의 턱이 살짝 딱딱하게 조여드는 게 보였다.

이윽고 제라드가 내게 말했다.

“혼자 마음에 숨기고 있는 게 뭔지, 이제는 제게 알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귓가에 속삭여지는 목소리가 내 안 깊숙한 곳에 묻혀 있던 그리움을 자극했다.

그 순간, 진심 어린 마음이 나도 모르게 불쑥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미안해.”

느닷없이 내게 사과를 들은 제라드가 표정을 변화시켰다.

그는 지금의 내 사과가 그의 청에 대한 거절이자 거부의 의미라고 받아들인 듯했다.

“미안해.”

하지만 내가 견디지 못해 또 한 번 꺼낸 말에 곧 그게 아니란 걸 알았는지, 작게 벌려졌던 제라드의 입술이 이내 그대로 다물어졌다.

그 상태로 그는 내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의 눈을 마주하는 동안 나는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이전에, 내가 유디트일 때 아르벨라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만약 나도 저렇게 태어나 저렇게 살았다면, 오늘 저 사람과 같은 모습이 될 수 있었을까?’

그 생각처럼, 나는 아르벨라로 사는 동안 정말 많이 변했던 모양이다.

내게 달라붙어 있던 굴욕적인 마음과 초라한 시절을 전부 잊고, 이 모든 것이 원래부터 주어진 내 것이라 생각하며 사는 동안 나는 예전의 나와 참 많이도 달라졌나 보다.

하지만 설마 그렇다 해도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던 걸까? 어떻게 내가 저들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었던 거지?

예전의 나는 오만하고 당당한 아르벨라를 부러워하면서도 사실 그녀의 어느 부분은 이해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결국은 나도 똑같은 인간이었다. 아니, 어떤 면에서 나는 그녀보다 더 나빴다.

이번에 꾼 꿈을 통해 이제는 확실히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내가 유디트일 때 지켜본 1황녀 아르벨라는 차라리 나를 외면하고 무시했을지언정 뒤에서 비열한 짓을 해 놓고 거짓말하지는 않을 사람이었다.

그녀는 정말 나를 해하려 비겁한 수를 썼던 적이 없었다.

그것은 솔렘 왕국 사람들이 내게 아르벨라에 대한 경계심과 미움을 심기 위해 그녀인 척 저질러 뒤집어씌운 누명이었다.

더군다나 아르벨라가 마지막에 그렇게 철저하게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무너졌던 것 역시, 솔렘 왕국 마법사들이 그녀에게 마법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때, 아르벨라가 제라드를 죽인 것은 분명 온전한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왜 진작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솔렘 왕국의 마법사 중에는 정신을 조종하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자가 있지 않았던가?

아르벨라가 죽은 뒤 다시 가게 되었던 세계의 이면에서 나는 누더기가 된 책을 펼쳐 보았다.

그리고 그때, 아르벨라가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과 만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법사의 열병으로 마력을 잃어 어린아이만큼이나 무력해져 있던 아르벨라는 솔렘 왕국 마법사들의 손을 피하지 못했다.

그들이 아르벨라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녀 안의 비틀린 욕망을 부추겨 잘못된 길을 걷도록.

그리하여 두 번 다시는 카뮬리타 사람들에게 사랑받지도, 용서받지도 못하게 되도록.

그렇게 해서 마땅히 그녀가 가져야 했던 모든 것을, 그들이 숭배해 마지않는 솔렘 왕국의 마지막 후손인 내게 바치려고.

“내가…… 이런 사람밖에 안 돼서 미안해.”

아마 그 일면에는 끝끝내 내 곁을 지키고 있던 제라드를 치워 버리려는 속셈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내가 제라드를 마음에 품고 있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으니까.

운명을 바꿔 아르벨라가 된 나 역시, 또다시 온전한 내 의지로 제라드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이번에 내가 제라드를 옆에 둔 건 그를 죽이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나는…… 그를 두 번이나 나 때문에 죽게 할 뻔했던 것이다.

“황녀님…….”

제라드는 내 거듭된 사과에 얼굴을 굳힌 채 나를 망연히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그와 마주한 동안 서서히 견디기 어려운 감정에 물들다가 지금은 완전히 엉망이 된 내 얼굴을 보고 할 말을 찾지 못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실은 이런 사과 또한 비겁한 짓이었다.

나는 내가 무엇에 죄책감을 느끼는지 지금 그에게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

아니……. 설명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사실은 이렇게 누더기에 불과한 나를……. 아무리 기억이 없었다고는 하나, 결국 내 이기심으로 그를 배신하고 만 나를 알게 하고 싶지 않아서.

제라드는 그렇게 의미도 없는 사과를 반복하는 나를 그저 말없이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결국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찾으러 올 때까지, 아주 오랫동안.

* * *

세드릭 황제는 결국 알현 시간에 늦은 나를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사흘 전 마법사의 축일 때 새벽 전당 안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내 추태에 대해 몸 관리를 어떻게 하는 것이냐며 먼저 한바탕 훈계를 듣고, 또 내 병에 대한 소문이 밖으로 퍼지지 않도록 자신이 어렵게 목격자들의 입막음을 했다며 실컷 생색을 내는 소리를 들어 주어야 했다.

하지만 전부 다 이미 그럴 줄 알고 있던 일이라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래서 다음에는 또 무슨 시답잖은 소리를 할까 하며 사실 반쯤 귀를 닫고 있었는데…….

“송구하지만 지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애석하게도 현실은 내게 오랫동안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을 주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세드릭 황제를 알현하던 중에,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깊은 의구심을 느끼며 반문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귀를 의심했으나, 세드릭 황제는 몹시 불편한 얼굴로 내게 다시 한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1황자가 사라졌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군.

이건 안 좋은 의미로 제법 내 흥미를 끄는 소식이었다.

“라미엘이 사라지다니요?”

“사흘 전, 10월 축제의 첫날 균열이 닫히고 상황이 정리된 이후에도 1황자의 모습이 통 보이지 않더구나. 알아보니 그레이엄 후작의 꼬리를 잡았다는 말을 남기고 그대로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나는 갑자기 두통이 도지는 느낌에 미간을 손으로 꾹꾹 짓눌렀다.

“그러니까…… 그레이엄 후작을 쫓다가 실종되었다는 뜻이군요?”

“그렇다.”

“이후 지금까지도 라미엘의 행적을 찾지 못했고요?”

“그렇다.”

하……. 진짜 라미엘, 이 자식…….

나는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오려 하는 탄식과 짜증을 삼켰다.

분명 내가 그날은 귀찮은 짓 벌이지 말고 그냥 얌전히 황궁으로 돌아가라고 그랬는데, 기어이 마음대로 움직였구나.

라미엘이 갑자기 사라지기는 했지만, 애초에 그에게 꿍꿍이가 있었다는 걸 알아서 그런지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은…….

“1황자가 마지막에 말하기를, 1황녀라면 자신이 어디로 갔는지 알 것이라고 했다더구나.”

세드릭 황제가 찡그린 얼굴로 덧붙인 말을 듣고 나는 더욱이 이 상황이 성가셔졌다.

즉, 라미엘의 행방을 찾기 위해 모두들 지난 사흘간 내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는 뜻이었다.

“미리 말씀해 주셨다면 어제 늦은 저녁에라도 찾아뵈었을 텐데요.”

“그래서 네게 먼저 서신을 보내 두었는데 보지 못했더냐?”

“제가 그걸 바로 확인할 상황이 아니었다는 걸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바마마께서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런 급한 일이 있었다면 번거로우시더라도 다시 한번 연락을 주시는 편이 좋았을 듯합니다.”

“나도 그리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지 않느냐.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하도 많아서 다시 전갈하는 걸 깜빡했다.”

“…….”

그럼 지금 내가 알현하러 왔을 때라도, 훈계와 생색의 과정을 건너뛰고 바로 말했어야지…….

세드릭 황제가 자신의 체면을 차려 줄 자식 외에는 관심이 거의 없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건 좀 심한 게 아닌가 싶었다.

나는 세드릭 황제를 차게 식은 눈으로 보다가 두말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저는 지금 바로 일어나 보겠습니다. 당장 가장 급하게 해결해야 할 일은 라미엘의 문제인 듯하군요.”

아무래도 내 마음 한구석을 찜찜하게 만들던 생각이 맞아떨어진 듯했다.

10월 축제의 첫날이자 마법사의 축일 때 터진 균열이 완전히 정리되기 전에 라미엘이 사라졌다면, 그는 내가 새벽 전당에서 쓰러진 소식을 접하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더군다나 내가 잠깐 의식을 잃은 것도 아니고, 설마 마법사의 열병 때문에 사흘이나 기절해 있을 줄은 몰랐을 테니까…….

‘바보 같은 녀석, 지금 멀쩡하려나.’

마음이 영 불편해서 황제 궁을 나서는 걸음을 서둘렀다.

사실 지금 라미엘에 대한 내 감정은 좀 미묘했다. 왜냐하면…….

“도와 달라고? 내가 너 같은 잡종 계집애를 왜?”

“흠, 그럼 어디 한번 날 설득해 봐. 내가 왜 널 도와줘야 하는지 이유를 들어 보고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면 고려해 볼게.”

사실 유디트를 주인공으로 한 책에 적혀 있던 라미엘의 만행들은 전부 다 내가 당했던 거잖아…….

게다가 솔직히 나는 유디트일 때 라미엘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다른 이복 형제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나를 직접 괴롭힌 적이 있었으니 당연했다.

자신과 똑같은 검은 머리칼을 가진 게 마음에 안 든다고 내 머리카락을 잘라 버리려 한 적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르벨라인 나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굉장히 달랐고, 아르벨라인 내가 그를 보는 시각 역시 유디트일 때와는 달라졌다.

지금의 내게는 그런 부분이 혼란스럽고 모순적이게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지금의 나는 라미엘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일단 다른 문제는 잠깐 뒤로 제쳐 두고 그를 찾으러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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