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마법사의 축일 때, 과로로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줄곧 방문객을 받지 않으시다가 오늘 아바마마께 인사를 올리러 가신다기에 이렇게 급히 달려왔답니다.”
유디트는 제라드의 뒤를 따라 내게 다가오며 친근히 말을 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나를 대하는 유디트를 보자 이상하게도 오히려 목이 더 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마음속에서 요동치는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나도 태연하게 다가오는 사람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랬구나……. 염려해 준 덕분에 지금은 말끔히 나았단다.”
이전에 내가 유디트로서 보아온 게 그러했고, 아르벨라로 다시 살아가면서 행해 온 게 그러했기에.
“그러셨군요. 다행이에요.”
유디트는 여전히 속내를 가늠하기 어려운 얼굴을 하고서 나를 잠깐 말없이 바라보다가 이내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자 가슴이 선득해졌다.
정말 내 생각대로 그녀도 나와 같은 걸 알고 있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녀는 지금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마법사의 축일 때 유디트…… 네가 눈에 띄게 활약했다지?”
“아니에요. 아르벨라 언니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지요.”
“겸손한 소리구나. 네가 아니었다면 그날 피해 규모가 컸을 거라고 들었는데.”
“아르벨라 언니가 그때 몸이 편치 않으셔서 그렇지, 만약 평소와 같았다면 제가 설 자리가 있었겠어요.”
대화를 이어갈수록 심장에 난 거스러미를 하나씩 뜯어내는 것처럼 속이 따끔거렸다.
꼭 유디트가 일부러 나를 겨냥해 말 한마디 한마디를 날카롭게 벼려서 내뱉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예전에 우리의 이름과 모습이 정반대였을 때, 만약 그때도 내 운이 좋지 않았다면 그녀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겠느냐고 이전의 아르벨라가 조소하는 것 같았다.
“언니, 제게 묻고 싶은 게 있지 않으세요?”
엷게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보던 유디트가 이내 다시 입술을 떼 내게 물었다.
제라드는 내 옆에 서서 기이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는 나와 그녀를 조용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소리 없이 주먹을 그러쥐었다. 줄곧 아무것도 모르는 척 태연히 굴더니, 이제야 속내를 터놓고 이야기할 생각인가?
어제 기나긴 꿈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린 후, 나도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과 반드시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에게 지금 이 상황에 대해 마땅히 설명해야 할 책임이 있었고, 그럴 의지 또한 있었다.
만약 지금의 그녀에게 이전의 기억이 있다면, 왜 자신과 내가 바뀌었는지 의혹이 가시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막상 이렇게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자 내 생각보다 더 힘에 부쳤다.
모든 것을 깨달은 직후라 그런지, 나도 아직 마음의 정리가 미처 끝나지 않았나 보다.
지금도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고만 싶었다.
이런 마음은 분명 아르벨라의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내가 버린, 내가 과거에 두고 온 유디트의 마음이었다.
“이제 폐하를 뵈러 가 봐야 해서.”
결국 지금은 내가 먼저 이 상황을 온전히 견디지 못해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지금은 말고…… 좀 더 제대로 시간을 내서 다시 얘기하자.”
그러나 바로 세드릭 황제를 만나러 가야 하는 건 사실이라,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기에 지금은 때와 장소가 적절하지 않은 것도 맞긴 했다.
유디트는 그런 나를 또 물끄러미 보다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요. 좀 더 제대로 시간을 내서 대화해요.”
나는 그런 그녀를 지나쳐 걸어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디트는 먼저 자리를 떠나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 * *
몇 년 전 내가 유디트를 곁에 두기로 결심한 사냥터에서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나도 모르는 새 내 몸 안으로 벌레가 기어들어 온 것 같았다.
검은 개미들이 내 배 속을 갉아먹으며 나를 비웃는 것처럼 키득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는 황제 궁을 향해 걷다가, 과거의 그날처럼 뛰기 시작했다.
“앗, 1황녀님?!”
“잠깐만요……!”
뒤에서 황망하게 나를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행원들은 내가 갑자기 앞으로 달려가자 놀라고 당황스러운 것 같았다.
이제까지 황궁 안에서 내가 이런 식으로 체면 없이 행동한 적이 없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허둥지둥 나를 쫓아오는 수행원들을 뒤로하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그저 하염없이 달렸다.
그렇게 하면 내 마음속에 기어들어 와서 나를 괴롭히는 것들을 떨쳐 낼 수 있을 것 같아서.
“헉, 허억…….”
뺨에 꽃향기를 머금은 바람이 스치고, 밤사이 내린 이슬에 젖은 눅눅한 오전 공기가 폐에 아플 정도로 가득 들어찼다.
“저렇게 초라하고 하찮은 애가 내 걸 다 빼앗아갈 거라고? 이건 진짜 말도 안 되잖아.”
“적어도 유디트는 주제 파악 하나는 잘했는데.”
“어리석은 아이네. 자신을 향한 호의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도 못 하고. 내가 사실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이처럼 무방비하게 나한테 다가오는지.”
하지만 내 안을 파고든 벌레는 여전히 깊은 곳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아르벨라로 살면서 유디트를 보고 모질게 생각했던 것들이 불시에 떠올랐다.
그 아이를 함부로 멸시하고 비웃었던 과거가 해일처럼 나를 덮쳐들었다.
그런 나를 꼭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 같은 눈으로 바라보던 유디트.
그러나 사실 그건 나였다. 사실 그건 아르벨라를 선망하고 갈망하던 내 모습이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런 그녀를 보면서 정말 실소가 날 정도로 미련하고 멍청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내 이기심만으로 그녀의 날개를 꺾어 내 옆에 눌러 앉혀 두려고 했었다.
그래, 내가 그랬었다…….
아,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도대체 뭘까?
내가 나 자신을 부정하고 나 자신을 우습게 여겨, 기어이 스스로를 배신하고 만 것에 대한 수치심과 자괴감일까?
아니면 내가 이 손으로 직접 내 과거의 육신에 가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감히 깔보고 멸시했다는 위선적인 죄책감일까?
“황녀님……!”
그렇게 견딜 수 없는 마음들을 전부 떨쳐 내고 싶어서 달리던 나를 어느 순간 누군가 붙잡아 세웠다.
팔을 움켜쥔 손길에 몸이 돌아가면서 일순간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나를 쫓아온 사람이 비틀대는 나를 더 단단한 손길로 지탱했다.
“괜찮으십니까?”
나만큼은 아니지만, 살짝 흐트러진 숨소리가 이마에 닿았다. 귓가에 울린 목소리에는 안도와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몸도 성치 않으신 분이 왜 갑자기 이렇게 급하게 뛰시는 겁니까?”
나를 따라온 건 제라드뿐이었다.
다른 수행원들은 나를 쫓아오다가 전부 떨어져 나갔는지, 어디에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황궁 외곽의 우거진 나무들 밑에 서 있는 제라드를 올려다보았다.
“결국 실패한 게 문제였던 거야. 그러니 이번에는 성공시키면 돼.”
“아무리 귀족이었다고는 하나, 그래 봤자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그런데 제라드의 얼굴을 눈에 담은 순간, 이번에는 예전에 그를 두고 했던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흠칫해서 나를 붙들고 있는 제라드의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나를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내 팔을 붙잡은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가면서, 나를 응시하는 그의 눈도 한결 더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제라드는 곧 서서히 손에서 힘을 풀며 내게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나도 조금씩 뒷걸음질 쳐 그에게서 거리를 더 벌렸다.
사시사철 피어 있는 장미 덤불이 내 등에 닿았다.
황실 정원사가 신중하게 한 송이 한 송이 가꾼 꽃에 가시가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형체 없는 뾰족한 것이 내 온몸을 따갑게 찌르는 듯했다.
“이번에는 일찍부터 유디트가 아닌 내가 그를 거두어서, 내게 복종하게 만들어야지. 차근차근 그를 길들여, 내가 원할 때 언제든 날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도록. 책 속에서 유디트에게 그가 그랬듯이.”
“만약 그게 어렵다 해도, 최소한 내가 그를 죽이려 할 때 바로 반격할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신뢰를 쌓는 정도는 해야겠지. 방심하고 있으면 더 쉽게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연이어 떠오르는 기억에 나는 몹시도 속이 시리고 아려졌다.
불과 몇 년 전에 내가 품었던 잔인하고 독한 생각들이 이제 와서 나를 찌르고 할퀴며 괴로움에 몸서리치게 했다.
“송구합니다. 좀 더 원하시는 만큼 달리게 해 드리고 싶었지만, 역시 회복이 아직 덜 된 몸으로 격렬히 움직이는 건 좋지 않을 듯해서 무엄한 행동인 걸 알면서도 붙잡았습니다.”
제라드는 내가 그의 무례한 행동에 노해서 이런 반응을 보인다고 생각했는지, 조금 전 내게 손을 댄 것을 사죄했다.
나는 한바탕 정신없이 달린 탓에 가빠진 숨을 고르면서 애써 제라드의 앞에서 표정을 가다듬었다.
“아니야……. 갑작스럽게 길에서 이탈한 내 잘못이지. 수행원들이 황당해하겠구나. 그만 황도로 돌아가자.”
내 본분을 지켜 속에서 요동치는 감정을 갈무리하고 그만 자리를 떠나려 했다.
사실은 제라드와 이렇게 단둘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 조금 버거웠다.
제라드는 말없이 나를 따라왔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다시 손을 뻗어 나를 붙잡았다.
“1황녀님……. 그냥 모른 척해 드리고 싶었는데, 어제부터 이상하십니다.”
내 얼굴을 조용히 주시하는 눈이 속까지 파헤치려는 듯이 다소 예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