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황녀님-152화 (168/203)

152화

“유디트 님, 더 이상 세드릭 황제의 권유를 거절하지 마십시오. 베른하르트 소공작과의 약혼을 받아들이세요.”

그러나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은 무엇이든 유디트의 원대로 이루어 주겠다는 말과 달리 그녀의 마음마저 잘라내려 했다.

“저희가 봤을 때도 카뮬리타 안에서는 그자가 가장 낫습니다. 그러니 베른하르트 소공작으로 하세요. 황녀님께서 옆에 거두신 그 기사는 안 됩니다. 격이 맞지 않아요.”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던 자신의 비밀스러운 진심을 그들이 제멋대로 읽고 냉정하게 말했을 때, 유디트는 꼭 그녀가 부정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슬프고 화가 났다.

“격이라니, 그런 걸 누가 정한단 말인가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도 없으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아무리 그대들이어도 용납할 수 없으니까.”

솔렘 왕국 마법사들만으로도 벅찬데, 위에서는 세드릭 황제 또한 유디트를 한시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4황녀, 동부 지역에 또 대규모 균열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쪽에서 직접 네게 도움을 요청했으니 당장 가 보도록 해라.”

“4황녀, 오늘 국무 회의에서 그 미적지근한 태도는 도대체 무엇이냐? 카뮬리타 제국민들이 이제 1황녀 대신 의지하고 있는 것은 너이니, 좀 더 노력해야 하지 않겠느냐?”

“4황녀, 베른하르트 소공작과의 혼약은 왜 자꾸 미루는 거지? 마침 오늘 소공작이 입궁한다 했으니 한번 만나 보아라. 이번에도 또 거부하면 강제로 진행하겠다.”

이렇게 위아래에서 끊임없이 쪼아대니 매일 신경줄이 남아나지를 않았다.

“유디트 황녀님…….”

“4황녀…….”

이제는 그녀를 부르는 소리만 들어도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유디트가 황궁의 정원에서 아르벨라를 만난 것은 그렇게 한참 지쳐 있던 어느 날이었다.

* * *

“1황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 만남은 우연이었다.

참기 어려울 정도로 갑갑한 마음에 잠깐 산책 삼아 바람을 쐬러 나간 황실 정원에서 유디트는 혼자 조용히 앉아 있는 아르벨라를 발견했다.

유디트는 한동안 또 마법사의 열병 증상 때문에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아르벨라를 오랜만에 만난 것이 반가웠다.

그래서 조금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네 밑에 거슬리는 벌레들이 붙어 있구나.”

하지만 아르벨라는 어둡던 얼굴을 살짝 밝게 편 채 자신에게 걸어오는 유디트를 여느 때처럼 서늘한 눈으로 응시하다가 날카롭게 벼려진 말을 꺼냈다.

“아무리 내가 예전 같지 않다고 해도 그늘 속에 숨어 있는 해충들을 청소하는 것쯤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지. 그러니 내 손으로 벌레들을 죄다 터트려 죽여 버리기 전에 주인으로서 단속을 좀 더 잘하는 게 어떻겠어?”

그 순간, 유디트의 얼굴에 잠깐 어렸던 빛이 사그라졌다.

유디트는 아르벨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아르벨라 황녀는 원래도 유디트에게 싸늘했지만 얼마 전부터는 특히나 그러했다.

일전에 아르벨라의 외가인 델피니움 공작가에 문제가 생겨, 노쇠한 테레사 델피니움 공작이 타격을 입고 일선에서 물러난 일이 있었다.

그 후 테레사 델피니움은 몸이 약해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다가, 지난달에 결국 작고했다.

유디트는 아무리 정신없이 바빴다고는 하나, 그 일을 잊고 있던 자신을 속으로 질책했다.

어쩐지 정원에 혼자 앉아 있던 아르벨라에게서 평소보다 쓸쓸하고 삭막한 분위기가 풍기는 듯했는데, 단순히 마법사의 열병을 앓고 나와서 그런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아무래도 아르벨라가 지금 내뱉은 말을 들어 보니, 그녀는 델피니움 공작가의 일이 유디트에게 남몰래 붙어 있는 솔렘 왕국의 사람들이 저지른 소행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러니 지금 아르벨라의 눈에는 자신이 얼마나 가증스러워 보일까?

“1황녀님, 그때의 일은…… 저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앞으로 그들이 또 제 일에 나서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나 대외적으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는 솔렘 왕국 마법사들의 이야기를 두 황녀의 수행원들이 있는 곳에서 공공연하게 꺼낼 수는 없었다.

또 아르벨라에게 그들의 일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기도 했다.

망설이던 유디트가 다른 말을 더 덧붙이려 다시 입을 열었으나, 아르벨라는 그녀를 더 상대하기 싫다는 듯이 매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유디트는 속이 더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를 대하는 아르벨라의 태도에서는 이전보다 더 강한 거부감이 느껴졌다.

아르벨라를 위해 그냥 이대로 자리를 비키는 것이 좋을 것 같았지만, 쉬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유디트는 깊이 고민하다가, 주저함이 깃든 목소리로 아르벨라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1황녀님은…… 요즘 어떠신가요? 몸은 좀 괜찮으신지요?”

유디트도 얼핏 전해 들었을 뿐이지만, 아르벨라에게 깃든 마법사의 열병 증상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고 들었다.

하여 용기를 내서 말을 꺼냈으나, 유디트에게 돌아온 건 날카로운 비소였다.

“이제는 너도 내가 우스워졌더냐?”

유디트는 귓가를 파고든 서릿발 같은 말에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자 한기로 가득 찬 시린 벽안이 그녀를 화살처럼 꿰뚫었다.

“예전에는 고작 멀리서 나를 훔쳐보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듯이 굴던 주제에, 지금은 이처럼 겁 없이 내게 다가와 감히 안부를 묻다니. 네가 나를 우습게 보는 게 아니라면 이럴 수 있을 리가 없지.”

“아니, 아니에요. 1황녀님, 저는…….”

“이렇게 네가 나를 동정하는 것을 보니, 나도 떨어질 때까지 떨어진 모양이구나.”

아르벨라의 그 자조와 냉소로 뒤섞인 얼굴을 본 순간, 유디트도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느새 지그시 깨문 입술에 비린 맛이 느껴지면서, 세게 움켜쥔 손아귀도 저릿해져 왔다.

왜 아르벨라는, 항상 저런 눈으로 자신을 보는 걸까?

사실 유디트도 아르벨라에게 매번 이런 가시 돋친 말을 들을수록 조금씩 지쳐 갔다.

한 번쯤은 아르벨라에게 직접 소리쳐 묻고 싶었다.

당신은 왜 이렇게까지 나를 싫어하는 거야?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나를 거부하는 거야?

“또 그런 식으로 혼자만 무고하고 억울한 척하는 눈으로 나를 보는군.”

하지만 아르벨라의 냉혹한 눈빛이 다시 한번 가슴 한복판을 꿰뚫은 순간.

“너, 솔직히 말해 보렴. 처음 내 소식을 들었을 때, 네 마음에 희열이 한 조각도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목이 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입 밖으로 부정의 말이 한마디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너를 무시하고 깔보던 내가 이제는 이렇게 바닥까지 떨어져서 너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걸 보고, 조금이라도 기분이 좋고 후련했던 적이 없어?”

심장이 망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사정없이 쿵쿵거리며 크게 뛰었다.

“이렇게 내 모든 걸 야금야금 갈취해서 네 걸로 만들고 있는 게, 정말 억지로 남이 시켜서 하는 것뿐이라고? 정말 너는 티끌만큼도 원하지 않았다고 내 앞에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단 말이냐?”

유디트도 가끔 아르벨라에게 서운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불행을 바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마치 정곡을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따끔거리는 건 어째서인지 몰랐다.

“어째서…… 1황녀님은 그렇게 제 마음을 비꼬아서 안 좋게만 생각하시는 거예요?”

결국 유디트는 자신의 가장 깊은 곳까지 관통하는 듯한 푸른 눈을 더 마주하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오히려 저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건 1황녀님이잖아요. 그동안 몇 번이나 저를 죽이려 한 걸 제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세요?”

솔렘 왕국 마법사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 유디트는 진작 아르벨라의 손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디트는 그런 일들을 제 선에서 덮어 왔다.

그녀도 성인군자가 아니라 화가 날 때도 있었고, 몹시 속이 상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아르벨라의 상황을 알기에 어떻게든 그녀를 이해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르벨라는 그런 유디트의 노력마저 무참하게 짓밟아 버렸다.

지금도 아르벨라는 또다시 차갑게 얼어붙은 얼굴로 유디트를 비웃듯이 말했다.

“말했을 텐데. 그건 내가 한 일이 아니다.”

“믿지 않아요. 1황녀님이 지금껏 제게 그래 왔듯이.”

유디트는 처음으로 아르벨라를 향한 싸늘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그래요. 저도 이제는 1황녀님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을게요. 황녀님의 피는 분명 냉정한 황족들 중에서도 가장 짙푸른 색일 거예요. 그러니 이렇게 제가 먼저 1황녀님께 말을 걸고 인사를 드리러 오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그 후 달아나듯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 처음으로 아르벨라가 너무 미워서 죽을 것 같았다.

물론 그녀의 말은 예리하게 가슴을 뚫고 들어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디트가 아르벨라에게 품었던 다른 호의적인 감정들마저 전부 거짓인 건 아니었다.

“요즘 황궁에 흉내쟁이 원숭이가 생겼다고 하던데.”

“이렇게 직접 보니…… 웃음만 나오는군.”

그날처럼 스스로가 너무 부끄럽고 초라해서 눈가가 홧홧해졌다.

제 치부를 가장 보이고 싶지 않은 상대에게, 자신의 가장 더럽고 음습한 부분을 들키고 말았다는 생각에 마음속의 동경과 경외가 미움과 원망으로 변했다.

그럼 차라리 그냥 이대로 아르벨라를 미워하자고 생각했다.

차라리 다른 사람들이 귀가 닳도록 말하던 것처럼, 그녀를 적으로 여기고 이대로 사람들에게서 잊혀 비참하게 죽든 말든 그냥 모른 척하자고.

자신의 우상이 더 이상 예전처럼 환하게 반짝이지 않아도 이제는 마음 아파하지 말자고.

하지만 그날 유디트의 속을 잔인하게 후벼팠던 아르벨라는 얼마 후 온실에서 누구보다도 초라하고 나약해진 모습으로 혼자 섧게 울고 있었다.

그래서 유디트는 아르벨라를 마음껏 미워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유디트를 조롱하기라도 하듯이, 아르벨라는 그녀의 기사를 죽였다.

그리고 스스로 괴물이 되어 카뮬리타를 지옥으로 만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