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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황녀님-151화 (167/203)

151화 [S공금]

유디트는 급히 입술을 뗐다가, 곧 아르벨라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르벨라가 세드릭 황제와의 대화를 얼마나 들었는지 알 수가 없어 쉬이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유디트를 내려다보는 아르벨라의 얼굴에서는 싸늘한 냉기만이 느껴졌다.

그러다 이내, 아르벨라가 먼저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을 열었다.

“4황녀. 주제넘은 짓 하지 마라.”

그 건조한 한마디만을 남긴 채 아르벨라는 유디트를 스쳐 지나갔다. 유디트의 등 뒤에서 쿵,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유디트는 가만히 선 채 몇 번 얕은 숨을 들이마시다가 자리에서 걸음을 뗐다.

수행원들도 분위기를 읽었는지 찍소리조차 하지 않고 유디트의 뒤를 따랐다.

“4황녀님은 1황녀님이 밉지 않으십니까?”

제라드가 유디트에게 조용히 물어온 건 4황녀궁에 들어선 이후였다. 유디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밉지 않아요. 그분이 제게 모질게 구시는 것을 이해합니다.”

“…….”

“그분의 눈에 제가 차지 않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고, 더군다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분에게 제가…….”

그러나 조금씩 잦아들던 말은 미처 끝맺어지지 못한 채 침묵 속에 공허하게 사그라졌다.

애당초 질문을 던진 제라드에게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누구라도 이런 말을 들으면, 유디트를 답답하거나 바보 같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아니면 어떤 사람들이 하는 말처럼, 유디트가 착한 척을 하느라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특히 제라드는 그동안 1황녀 아르벨라가 유디트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며 몇 번이나 모욕을 주는 모습을 봐 왔다.

그러니 제라드의 입장에서는 더군다나 아르벨라에게 원망 한마디 드러내지 않는 유디트를 이해하지 못할 만도 했다.

그날 밤에도 유디트는 밤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황족으로서의 교육을 늦게 받기 시작한 만큼 다른 황자, 황녀들보다 앞서가려면 몇 배는 더 노력할 필요가 있었다.

더군다나 세드릭 황제의 기대를 한 몸에 받기 시작하면서 유디트는 원래 1황녀 아르벨라가 도맡던 일도 일부 넘겨받아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 그녀에게 주어진 외부 일정을 마치고 황궁에 돌아오면, 내부의 남은 일을 끝마치기 위해 거의 밤을 지새우다시피 해야 했다.

하지만 오늘은 유독 피곤했던 탓인지, 그만 깜빡 선잠이 들었던 듯하다.

유디트가 책상에 엎드려 가물가물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어깨에는 누군가 가져다준 듯한 담요가 덮여 있었다.

유디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아직 해가 뜨려면 멀었습니다.”

문가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불빛이 거의 닿지 않는 어스름한 곳에 조용히 서 있는 제라드의 모습이 보였다.

“제라드 경. 계속 거기에 서 있던 거예요? 그냥 깨우지…….”

“죄송합니다. 너무 곤히 주무시기에 깨우지 못했습니다.”

유디트는 시간을 확인한 뒤 제라드에게 더욱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그만 방으로 가서 쉬어요.”

“유디트 님은 들어가지 않으십니까?”

“아직 할 일이 남아서요.”

“요즘 계속 밤에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남은 일은 내일 마저 하시고 오늘만이라도 일찍 침실로 돌아가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유디트는 자신에게 휴식을 권하는 제라드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오늘 쉬면 내일 진도를 따라잡지 못해서 안 돼요.”

“…….”

“제가 그나마 잘하는 게 노력하는 거라서요. 그리고 보기보다 튼튼해서 생각보다 힘들지 않아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은은한 마력석의 불빛이 미소를 띤 유디트의 하얀 얼굴에 부드러운 윤곽을 덧그렸다.

제라드는 유디트의 얼굴을 잠깐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래도 잠도 깰 겸 잠깐 바람을 쐬는 것도 괜찮겠네요. 복도가 어두우니 계단 앞까지 배웅해 줄게요, 제라드 경.”

하지만 유디트는 의자에서 일어나자마자 문제점을 깨달았다.

도대체 언제 벗겨졌는지, 실내용 신발 한 짝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도 선잠이 든 동안에 저도 모르게 신발을 벗어 놓은 듯한데, 잠결에 어디론가 차 버리기라도 한 듯이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사라진 신이 눈에 띄지를 않았다.

유디트는 난처하게 하얗게 드러난 맨발을 뒤로 숨겼다.

제라드가 줄곧 그림자처럼 서 있던 문가에서 움직인 건 그때였다.

그는 책상 옆의 화분 뒤에 가려져 있던 실내용 신발을 찾아 들고 유디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어 몸을 낮추었다.

유디트는 자신의 앞에 머리를 숙인 남자를 내려다보며 숨소리를 죽였다.

곧이어 제라드의 손이 서늘한 한기를 입은 유디트의 발목을 스쳤다. 유디트는 움찔거리면서 발끝을 움츠렸다.

하지만 제라드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묵묵히 그녀에게 신을 신겨 주었다.

“유디트 님은 특이하십니다.”

차갑던 발에 따스한 온기가 덧씌워지고, 밤의 고요함을 입은 나지막한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정말로, 제가 보아 온 누구보다도 카뮬리타의 황족답지 않으십니다.”

그동안 유디트가 다른 사람들에게 수도 없이 들어왔던 말이었다.

그들이 유디트에게 그와 같은 말을 하는 목적은 황족답지 못하게 살아왔던 그녀를 비웃거나 동정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유디트 님은 제가 보아 온 그 누구보다도 황족다운 품격을 지닌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라드는 어떤 경우에도 유디트를 부정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고개를 든 제라드가 유디트의 눈을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엄격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좀 더 제멋대로 구셔도 많은 사람들이 유디트 님을 아끼고 사랑할 겁니다.”

밤하늘의 달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눈은 시린 은회색이었지만, 그 안에는 따뜻한 감정이 녹아 있었다.

“제라드 경도요?”

유디트는 제라드의 눈을 마주하다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정말 마음 놓고 제멋대로 굴어도, 또 아주 오만하고 교활한 사람이 되어도 제 곁에 있어 주실 건가요?”

그러자 평소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제라드에게서 희미한 미소가 피어났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제가 따르고 싶은 건 단 한 분뿐이라고.”

이내 제라드가 유디트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등에 맹세하듯이 이마를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유디트 님이 어떤 사람이어도 저는 기꺼이 당신 곁에 있을 것입니다.”

분명 새와 나무조차 잠든 깊은 밤인데 이상할 정도로 두 사람이 있는 곳만 환하게 느껴졌다.

창밖으로 새어 든 달빛이 몸에 가득 차오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슴이 묘하게 벅찼다.

유디트는 그녀의 기사를 왠지 조금 울고 싶은 기분으로 내려다보다가 손을 움직여 그의 뺨을 감쌌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입술을 열어 속삭였다.

“나도 그래요. 어떤 경우에라도 제라드 경의 옆에 있을게요.”

증인으로 세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것은 이미 그 자체로 경건한 두 사람만의 맹세였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서로를 보는 눈빛에서 그들의 마음이 이어져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서로가 소중해진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언제까지나 이런 시간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유디트 황녀님. 당신은 우리의 하나뿐인 빛. 그리고 우리는 당신의 충실한 종입니다.”

하지만 유디트의 삶은 지금까지 그래 왔던 대로 그녀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당신의 뒤에는 저희가 있다는 걸 기억해 주세요. 황녀님이 원하시는 일은 그게 무엇이든 저희가 반드시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유디트를 향한 솔렘 왕국 마법사들의 기대는 나날이 점점 커져만 갔다.

그들은 유디트에게 매번 다짐하는 대로, 유디트의 이름이 카뮬리타 전역에 알려지도록 뒤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그것은 유디트가 딱히 바라는 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유디트는 그들에게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고 부채감 같은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이 유디트를 위해서 했다는 행동들은 점점 그녀를 숨 막히게 만들었다.

“역시 카뮬리타의 가장 높은 자리에 어울리는 건 유디트 님입니다. 아직도 1황녀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워요. 1황녀는 물론이고 다른 황족들에게도 유디트님과 계승권을 두고 다툴 가치가 없다는 것을 카뮬리타의 모든 사람들이 깨닫게 해 줘야겠습니다.”

“하지 마세요! 얼마 전에도 내 허락 없이 델피니움 공작가를 건드렸잖아요. 그 일로 샤렐 황후님이 쓰러져서 아직 회복되시지도 않았어요. 델피니움 공작가의 권한을 빼앗고 연로한 공작을 일선에서 물러나게 한 것으로는 부족한 거예요?”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유디트에게 충성했다.

하지만 종종 유디트에게 미리 알리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할 때가 있었다.

특히 미유보다는 성정이 불같은 라칸이 그러했다.

유디트가 가끔 견디지 못해 화를 내면 그때는 말귀를 알아들은 듯이 잠잠해졌으나, 그마저도 일시적일 뿐이었다.

“모두 유디트 님을 위해 한 일입니다. 유디트 님의 행복을 바라는 저희의 충심을 알아주십시오.”

처음에는 그들의 신뢰와 기대가 그저 기쁘고 고맙게만 느껴졌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유디트는 점점 목이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제라드와 함께 있는 시간은 달랐다.

“제 모든 것은 유디트 황녀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황녀님을 위해 살고 황녀님을 위해 죽겠습니다.”

그의 맹세는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과 비슷했으나, 제라드는 그들과 달리 그녀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무언가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녀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을 주겠다고 했다.

제라드와 함께 있을 때, 유디트는 비로소 편안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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