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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황녀님-150화 (166/203)

150화

* * *

1황녀 아르벨라의 소식이 온 카뮬리타 제국에 퍼지자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과 비탄에 잠겼다.

생각해 보면 작년 10월 축제, 마법사들이 축일이라 불리는 그날부터 조짐이 있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균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아르벨라가 마법에 실패해 쓰러진 일은 황실에서 갖은 애를 써서 덮은 사고였다.

그러나 그때 새벽 전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워낙에 많았던 탓에, 그 일은 이미 알음알음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간 상태였다.

그 이후 1황녀 아르벨라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외부 일정을 소화했다.

지속적으로 출몰하는 균열과 괴수를 처리하는 일등 공신도 여전히 1황녀 아르벨라였다.

그래서 소문은 유야무야로 덮였으나, 일각에서는 그 사건을 계기로 의심을 품고 1황녀 아르벨라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유디트도 늘 아르벨라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서 전과 다른 어렴풋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설마 그 위화감의 이유가 마법사의 열병 때문이었다니……. 유디트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물론 전부터 아르벨라가 가끔 예고 없이 일정을 취소한 뒤 한동안 1황녀궁에서 두문불출하거나, 어떻게 해도 숨길 수 없는 병색을 얼굴에 드리울 때도 종종 있긴 했지만…….

그래도 마법사의 열병은 너무나 치명적이고도 잔인한 병이었다.

“아바마마, 착오일 것입니다. 1황녀님께서 마법사의 열병에 걸리셨다니, 황궁의가 오진한 것이 분명해요.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이 카뮬리타 곳곳에 퍼져 나가는 것을 막지 않으신 겁니까? 저라도 나서서 사람들이 이런 허튼소리로 더 이상 1황녀님의 명예를 더럽히지 못하게 바로잡겠습니다.”

유디트는 세드릭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놔두어라.”

“하지만 아바마마!”

“언제고 벌어질 일이 생긴 것뿐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오래 버틴 것이지.”

세드릭 황제는 잔뜩 지친 듯한 얼굴로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유디트는 그 말을 듣고 눈을 부릅떴다. 세드릭 황제의 태도를 보아하니, 아르벨라의 상태를 훨씬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듯했다.

그럼 설마…… 아르벨라가 마법사의 열병에 걸렸다는 것도 사실이란 말인가?

“더군다나 이번에는 1황녀가 담당한 균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생긴 돌이킬 수 없는 문제 아니더냐? 1황녀가 성치도 않은 몸으로 고집을 부린 탓에 생긴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니, 눈가림으로 숨기는 것도 이제는 한계다.”

아르벨라에게 어렸을 때부터 1황녀로서의 책임을 앞세워 온갖 일들을 시켜 왔던 건 세드릭 황제였다.

처음 균열이 생긴 이후로 아르벨라가 카뮬리타를 지키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해 왔던 일들도 셀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세드릭 황제는 마치 이번 실수가 아르벨라 혼자만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인해 벌어진 피해인 것처럼 냉혹하게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구나.”

이어서 작게 혀를 찬 세드릭 황제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망연히 있는 유디트에게 다가왔다.

유디트는 그녀의 어깨에 세드릭 황제의 손이 올라오는 순간 몸을 움찔 떨었다.

“1황녀를 대신할 네가 있으니 그 아이도 이제는 편히 쉴 수 있겠어.”

“그게 무슨…….”

“카뮬리타에서 1황녀는 존재만으로도 의미가 남다르지. 특히 균열이라는 골치 아픈 현상 때문에 각국이 골머리를 앓고 있는 지금, 1황녀는 그 자체로 카뮬리타의 강력한 무력과 방어력을 상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카뮬리타에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지. 하지만 그 아이가 마력 한 줌 없는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단명할 것은 이미 진작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사실 이만하면 1황녀도 버틸 만큼 버틴 것이다. 그러니 4황녀. 앞으로는 네가 1황녀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야 한다.”

유디트는 세드릭 황제의 말을 듣고 굳어졌다.

생각보다 아르벨라에 대한 세드릭 황제의 태도가 냉랭한 것에 놀라야 할지, 아니면 그 뒤에 그가 유디트에게 남긴 당부의 말에 놀라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바마마.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제가 어찌 1황녀님을 대신할 수 있단 말입니까?”

“4황녀. 내가 네게 처음 눈길을 주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세드릭 황제는 황망함에 고개를 숙인 유디트를 잠깐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혈통의 특이성 때문이다.”

혈통의 특이성……. 그것은 유디트에게 마력 개화를 일어나게 한 모계 혈통, 즉 솔렘 왕국의 혈통을 일컫는 것이 분명했다.

“물론 네가 내 기대보다 영특해서 마음에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애초에 네게 1황녀와 비견할 정도의 마력이 생겨나지 않았다면 너는 그 냉궁에서 초라하게 살다 죽었을 테지. 그러나 네 마법적 재능은 1황녀에게 결코 뒤처지지 않아. 그러니 앞으로 네 피를 카뮬리타 황실의 핏줄로 이어 간다면 더 강한 후대를 양성할 수도 있겠지.”

유디트의 어깨에 내려앉아 있던 손에 문득 강한 힘이 더해졌다.

“내가 지금 너를 유력한 차기 황위 계승권자로 눈여겨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감히 상상조차 한 적이 없던 말에 유디트는 급히 숨을 들이켰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세드릭 황제의 차가운 푸른 눈에 심장이 덜컹 떨어졌다.

“1황녀는 편치도 않은 몸으로 너무 오랫동안 카뮬리타를 위해 헌신했어. 그러니 네가 1황녀를 진정으로 위한다면 앞으로 더 노력해서 지금도 무리하고 있는 그 아이를 그만 편하게 해 주어라.”

그때 유디트가 느낀 감정은 가슴 벅찬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두려움에 가까웠다.

“아바마마!”

그때 2황녀 클로에가 허락도 없이 황제의 내실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그녀 역시 세간에 떠도는 아르벨라의 소문을 참다못해 세드릭 황제를 찾아온 것 같았다.

그러다 클로에는 세드릭 황제와 함께 있는 유디트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곧 그녀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유디트, 너 정말 기회를 놓치지 않는구나……! 이참에 아바마마한테 알랑거려서 점수라도 따겠다는 거야, 뭐야! 그래 봤자 네가 벨라 언니의 발끝이나마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아?!”

클로에는 민감한 시기에 세드릭 황제를 찾아온 유디트를 보고 오해한 듯했다.

하지만 방금 세드릭 황제가 유디트에게 하고 있던 말을 떠올려 보면, 클로에가 마냥 오해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클로에, 시끄럽게 굴지 말거라. 유디트, 내가 한 말을 유념하고 그만 나가 보아라.”

유디트는 클로에의 비난과 세드릭 황제의 명령에 떠밀려 먼저 그 자리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유디트도 그때 처음 깨달았는지도 몰랐다.

인생의 중요한 무언가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뒤엉키기 시작한 것을.

그러나 비탈길을 하염없이 굴러가기 시작한 눈덩이처럼, 유디트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삶의 궤도를 바로잡을 방법을 알지 못했다.

* * *

역사에도 숱하게 나와 있듯이,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 사람은 제왕이 될 수 없다.

사소한 신체적인 결함이어도 문제가 될 판에, 그 약점이 치유할 방법도 없는 심각한 불치병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베른하르트 소공작과 약혼해라.”

하여 세드릭 황제는 정말 아르벨라를 버리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그는 얼마 전부터 가끔 유디트를 불러 단둘이 만찬 자리를 갖곤 했다.

그때마다 유디트는 꼭 돌을 씹는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차마 황제이자 부친인 세드릭의 명을 거절하지 못해 자리에 참석해 왔다.

“네가 예전에 베른하르트 공작 부인에게 도움을 준 일로 소공작과도 오늘까지 친밀한 관계를 유지 중이라는 얘기는 들었다. 베른하르트 소공작은 모든 면에서 뛰어난 인재지. 그를 네 사람으로 만들면 더 이상 너를 쉽게 볼 자는 없을 것이다. 네가 제법 똑똑한 짓을 했구나.”

“저는…… 그런 생각으로 공작 부인을 도운 게 아닙니다.”

유디트는 갑작스러운 세드릭 황제의 말에 가슴이 싸늘히 식는 것을 느꼈다.

세드릭 황제는 유디트의 말에 그녀를 지그시 쳐다봤다. 그러다가 이내 얕은 실소를 흘렸다.

“결과만 좋다면야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세드릭 황제는 베른하르트 공작가에 일부러 접근한 것이 아니라는 유디트의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유디트는 정말 베른하르트 소공작과 그런 의미로 가까워질 마음이 없었다.

더군다나 소공작인 킬리안 베른하르트는 1황녀 아르벨라와 약혼 논의가 오갔던 관계라고 들었다.

물론 오래된 이야기라고는 하나, 어쨌거나 그런 그를 유디트의 약혼자로 삼는다면 정말 아르벨라의 자리를 탐내고 있노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유디트의 마음에 있는 사람은…….

“아무튼 베른하르트 공작가에는 조만간…….”

“죄송하지만, 아바마마. 그 말씀은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뭐라?”

“송구합니다. 하지만 1황녀님께서는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분이 이대로 무너지실 리가 없어요.”

“아직도 그런 답답한 소리를 하는 것이냐?”

남들이 뭐라 하든, 그것은 맹목적이기까지 한 믿음이었다.

긴 세월 동안 유디트에게 인생의 지침이 되어 온 사람이 이대로 주저앉아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질 리가 없었다.

유디트는 진노한 세드릭 황제를 뒤로한 채 서둘러 만찬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문앞에는 그 자리에 있어선 안 될 사람이 서 있었다.

“1황녀님……!”

오랜만에 본 아르벨라는 전보다 조금 마른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유독 날카로워 보이는 눈이 차가운 광채를 내며 유디트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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