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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황녀님-145화 (161/203)

145화

나는 흰 꽃이 뿌려진 푸른 카펫을 밟고 걸어오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킬리안 베른하르트?”

“백야의 전당에 소속된 마법사가 아니라 베른하르트 소공작이 4황녀님의 옆에 있다고?”

나와 마찬가지로 킬리안이 유디트를 에스코트할 줄 몰랐던 황족과 귀족들이 작게 웅성거렸다.

그들의 말마따나, 원래 나도 오늘 유디트를 옆에서 보필할 사람은 그녀의 마법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레반테온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레반테온은 백야의 전당 소속 마법사들을 위해 준비된 자리에 섞여 앉아 오늘도 아주 피곤한 모습으로 제 앞에 놓인 다디단 과자를 폭풍 흡입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오늘 축제의 첫날 유디트와 동행하는 번잡한 일은 추호도 상상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아주 태만해 보였다.

물론 유디트가 킬리안에게 먼저 에스코트를 제안했다고 하기는 했지만, 레반테온도 지금의 위치가 아주 만족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서열순으로 좌석이 배치되어 내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던 라미엘이 비딱한 미소를 입가에 그리며 내게 속닥거렸다.

“킬리안 베른하르트네. 아르벨라. 너, 네 예비 약혼자가 네가 거둔 여동생이랑 놀아나는 거 알고 있었어?”

“예비 약혼자라니, 헛소문 퍼트리지 마. 그 비슷한 말이 오갔던 게 벌써 10년쯤 전인데 언제 적 얘기를 하고 있어?”

조금 전 킬리안과 만나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이 떠올라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일 뿐이었고, 곧 라미엘의 말에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그 찰나의 간극을 읽었는지, 라미엘이 살짝 가느스름하게 뜬 눈으로 나를 재듯이 쳐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그의 얼굴에 내가 알고 있는 익숙한 미소가 느슨하게 떠올랐다.

“그래도 생각해 보니까, 오늘 아르벨라 네가 저기에 서 있지 않은 게 그렇게 나쁘기만 한 일은 아니네. 이렇게 나랑 옆에 같이 앉아 있을 수도 있고.”

“나하고 나란히 앉아 축제의 첫날을 보낼 수 있어서 너한테 영광스럽고 기쁜 일이겠지.”

당연히 나는 라미엘의 말에 코웃음만 쳤다.

라미엘과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는 사이, 유디트와 킬리안이 귀빈석 앞을 지나갔다.

“그럼 우리 둘 다 좋은 걸로 치자고.”

그렇게 잠깐 티격태격하다가 라미엘이 타협하자는 듯이 말했다.

웃겨. 둘 다 좋은 걸로 치자니, 어디로 봐도 내가 손해잖아.

하지만 오늘 몸 상태가 영 별로인 나와 마찬가지로 라미엘의 얼굴에도 오늘따라 유독 핏기가 없어 보여, 괜히 서로 기운 빠지게 더 따지지 않고 그냥 봐주기로 했다.

만약 지금 누군가 라미엘과 나를 유심히 본다면 황위 계승 서열 1, 2위인 두 황녀와 황자가 나란히 골골거린다고 이 나라의 미래를 걱정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아르벨라. 오늘은 너도 괜히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않는 게 나을 테니까…….”

그런데 이어서 귓가를 짧게 스친 라미엘의 말이 내 심중의 한 부분을 건드렸다.

귀에 맺힐 새도 없이 가볍게 흘러간 말이었으나 왠지 나는 기분이 싸해졌다.

어쩌면 이건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처럼, 오늘 일어나기로 예정된 사건을 내가 아침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던 탓에 괜히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라미엘에게서 이런 묘한 소리를 듣게 되니, 설마 오늘 일어날 일에 대해 그도 무언가를 알고 있는 건 아닌지 의혹 어린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확률상으로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라미엘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말이다.

아니면 혹시……. 오늘 뭐 다른 일이라도 꾸미고 있는 건가?

그렇게 의심을 담은 눈으로 내가 쳐다본 순간, 라미엘이 눈매를 가늘게 접어 여우처럼 웃었다.

그 꿍꿍이 가득해 보이는 얼굴에 불길한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오면서 왠지 골치가 아파졌다.

야야, 네가 뭘 할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아니야. 그동안 가만히 있다가 왜 하필 오늘 이래?

그러나 내가 막 라미엘을 향해 입을 연 순간, 마법사들의 축일을 기념하러 나온 관중들에게서 뜨거운 함성이 터져 나와 내 말을 가로막았다.

“우와아아……!”

“4황녀님이 나오셨다!”

“여기 좀 봐 주세요, 황녀님!”

새벽 전당의 넓고 높은 계단 위에 위치한 귀빈석과 달리 제국민들은 아래의 넓은 광장에 서서 축제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디트와 킬리안이 계단 앞까지 걸어가자 그제야 제국민들이 그들을 발견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허공에 둥실 떠 있는 영상 마력석들이 내 얼굴을 담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문 뒤 찡그린 표정을 폈다.

오늘 마법사들의 축일 때 유디트가 황족 대표로 사람들의 앞에 선다는 사실은 외부에 진작 공표되어 있었다.

이미 유디트가 10월 축제를 준비하며 마법을 시연하는 광경을 마력석에 담아 황궁 밖에 뿌리기까지 했으니, 이만하면 황실에서도 유디트를 최대한 알뜰하게 써먹은 셈이었다.

유디트가 생긋이 웃으며 그녀를 열렬히 환대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줬다.

그 모습은 특별히 긴장하거나 불편해하는 기색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굉장히 자연스러워 보였다.

반면 킬리안의 얼굴은 그저 예의를 갖춘 수준으로만 느껴질 정도로 아주 무표정해서, 저 남자가 조금 전 새벽 전당 안에서 그렇게 달콤한 미소로 나를 꼬드기려 했던 남자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나는 그런 킬리안에게 작게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왕 유디트와 같이 사람들의 앞에 선 김에 한 번 웃어 주기라도 하면 다들 더 좋아할 텐데 말이다.

그들은 손을 잡고 좀 더 걸어가, 새벽 전당 안에서도 리베라 황제의 발자국이 찍혀 있는 석판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거기에서 킬리안은 물러나고, 유디트는 황족 대표로서 마법사들의 축일을 기념해 마법을 선보일 준비에 들어갔다.

나는 유디트가 웅장한 새벽 전당 한가운데에 혼자 당당하게 우뚝 서서 순백색의 예식용 지팡이를 들어 올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새벽 전당 곳곳에 꽃을 뿌려놓아 은은한 향기로 가득 찬 공기 중에 서서히 유디트의 마력이 모여들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새벽 전당 안에 유디트가 입은 흰 드레스가 서서히 흩날리고, 그녀의 검은 머리칼도 혼자 하늘하늘 나부끼기 시작했다.

푸른 카펫 위에 깔려 있던 꽃송이들이 춤을 추듯이 빙글빙글 돌며 천천히 떠올랐다.

조금씩 큰 원을 그리면서 움직이는 꽃의 모양이 꼭 호수 위에 퍼져 나가는 물결 같았다.

꼭 꽃들의 왈츠 같은 그 신비로운 광경에 사람들도 숨소리를 죽였다.

팟!

바로 다음 순간, 유디트의 마력이 새벽 전당의 안과 밖을 모조리 파도처럼 휩쓸었다.

동시에 유디트의 주위에 모여든 꽃송이들이 빛을 흩뿌리며 사방으로 하얗게 터져나갔다.

“차가워!”

“어? 눈인가?”

한참이나 때 이른 갑작스러운 함박눈에 축제에 참석한 사람들이 신기한 듯이 감탄했다.

화려하게 반짝이며 떨어지는 눈은 꼭 한낮에 추락하는 별 조각을 보는 듯했다.

날씨 변환 마법은 상당한 고난이도 마법이었다.

아직 열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황녀가 선보이기에는 놀라운 성취였고, 10월 축제의 서막을 열기에도 충분한 마법이었다.

“와아……!”

그렇게 막 박수 소리가 나오던 때, 하늘에서 반짝이며 떨어지던 얼음 결정이 ‘퐁!’ 하고 갑자기 부피를 키웠다.

차가운 흰 눈송이는 순식간에 허공에서 피어나 만개한 꽃송이가 되어 사람들의 위로 보송보송 떨어져 내렸다.

새벽 전당에 화려한 꽃비가 쏟아졌다.

바닥과 계단에 쭉 깔려 있던 카펫이 오색 빛의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며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환영했다.

아름다운 꽃과 나비에 둘러싸인 유디트가 맑게 미소를 짓고, 사람들의 환호성은 더 커졌다.

만약 이대로 끝났다면, 제법 성공적인 마법 선보이기라 할 수 있었다.

우웅.

그러나 그 순간 기이한 마력의 파장이 새벽 전당 위로 찬 서리처럼 내려앉았다.

“……뭐지?”

뛰어난 마법사들이 수두룩하게 모인 자리이니만큼, 나와 엇비슷하게 이상함을 감지한 사람들이 많았다.

덜컹!

“설마……!”

백야의 전당 소속 마법사 중 가장 많은 월계수 잎을 단 마법사들이 맨 처음 눈에 띄는 반응을 보였다.

누군가 급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뒤로 넘어간 의자가 큰 소리를 냈으나, 새벽 전당 안에 가득히 울리는 제국민들의 함성에 묻혀 사라졌다.

삐삣!

내 분홍 새가 갑자기 나타나서 부리를 열고 삑삑거렸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삐이이이이……!

딸랑, 딸랑!

“뭐, 뭐야?”

마법사들이 긴급한 상황에 신호가 오도록 제각각 설정해 둔 마법 알람음이 여름철 숲속에 울리는 매미 소리처럼 새벽 전당 안에 불길할 정도로 장엄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구름이 기묘한 모양으로 소용돌이치기 시작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만약 오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요행은 역시 일어나지 않을 것인가 보다.

게다가 내 생각보다 새벽 전당 위를 뒤덮은 마력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다시 고개를 내려 사람들 앞에 선 유디트를 보았다.

유디트도 이변을 눈치챈 듯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도 놀란 기색은 없었다.

그러다 이내, 유디트가 눈길을 돌려 나를 쳐다봤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원래 내가 세계의 이면에서 본 책에 의하면, 이맘때는 유디트와 적대하던 1황녀 아르벨라의 약점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번 마법사의 축일은, 카뮬리타의 제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내가 마법사의 열병 증상을 처음으로 드러내게 될 끔찍한 날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오늘 마법사의 축일 때 황족 대표로 사람들의 앞에 서게 될 건 나였다.

1황녀 아르벨라는 지금 유디트가 서 있는 자리에서 갑작스럽게 열린 대규모 균열을 처리하기 위해 마법을 사용하고, 충격적이게도 그 대규모 마법에 보란 듯이 실패했다.

그리고 그 반작용으로 피를 흘리며 쓰러져 무력한 상태가 된 아르벨라 대신, 그녀만큼이나 뛰어난 마법으로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축제의 참관객들을 보호한 것이 바로 유디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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