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황녀님-143화 (159/203)

143화

26. 드러난 진실

“시간 됐다. 이제 그만 떨어져.”

-후잉, 싫어. 가지 마아.

내 품에 안겨 있던 말랑한 생물체가 불만스럽게 꿈틀거렸다.

괴물 녀석이 오늘따라 끈질기게 매달리며 또 한차례 칭얼거렸지만, 나는 나한테 찰싹 달라붙어 있던 놈을 단칼에 떼어냈다.

녀석의 말랑말랑한 감촉은 만지면 만질수록 기이한 중독성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만 해도 벌써 몇 번이나 이런 식으로 질척거리는 녀석에게 그냥 넘어가 주었던 탓에, 이제는 정말 더 이상 늦장을 부릴 수 없을 지경까지 시간이 촉박해졌다.

-나, 나 아직 무서워. 다른 데 가지 말고 그냥 나랑 같이 있어 줘라. 응?

나는 절박하기까지 한 녀석의 애원을 듣고 침실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었다.

“그러니까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건지 말해 보라고 했잖아.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다니까.”

그러나 녀석은 이상한 데서 기분이 나쁠 정도로 단호했다.

-너, 해결 못 한다. 넌 무서운 동족이지만 최고의 동족은 아니다. 그래서 난 말 안 하고 혼자 무서워한다! 그러니까 넌 나한테 감사해야 해!

“이게 자꾸 이 주인님을 은근슬쩍 무시하네.”

놈은 별 얼굴 같지도 않은 얼굴에 짐짓 엄숙한 표정을 그리며 고개를 젓듯이 몸통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꼴을 보니 진짜로 기분이 좀 구려지려고 했다.

괴물 녀석은 나한테 같이 있어 달라고 더 우겨도 소용이 없을 걸 알았는지, 입을 꾹 다물고 다시 비실비실 움직여 스스로 구석에 틀어박혔다.

마리나가 요즘 기운이 없어 보이는 괴물을 보고 나름대로 신경 써서 마련해 준 애완동물들의 보금자리……. 간단히 말해서 개집이라 할 수 있는 것을 가져다줬더니 그게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녀석은 이후로 계속 거기에 틀어박혀서 내가 부르기 전까지는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그래도 나름대로 정이 붙어서 그런지, 저러고 있는 걸 보니 내 마음도 마냥 편치는 못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남 걱정할 때는 아니었다.

“1황녀님……. 오늘도 몸 상태가 좋지 않으신 것 같은데 역시 행사에는 불참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오늘의 외부 일정을 위해 단장하던 중에 마리나가 내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권유했다.

나는 눈을 뜨고 거울 속의 얼굴을 보았다.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평소보다 핏기가 없어 보이긴 했다.

“아니. 그럴 수야 있나. 모처럼 유디트가 나서는 자리인데.”

사실 마리나의 걱정은 타당했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나도 이게 불길한 조짐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단순한 직감이 아니더라도, 이번 마법사의 축일인 이 10월 축제 때 내게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는 미래를 담은 그 책을 통해서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카뮬리타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국가적인 행사 중 하나인 만큼, 1황녀의 신분으로 축제에 불참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검은색 보석함을 가져와.”

나는 마리나에게 명령해 가져온 보석함에서 일전에 특별히 제작했던 장신구들을 꺼냈다.

내 마력을 담은 보석으로 만든 마법 보조용 장신구였다.

화려한 착상이 가능한 자리였기에 머리 장식, 귀걸이, 목걸이, 팔찌, 브로치 등을 마음껏 사용한 데 이어, 드레스 자락에도 마력을 담은 보석을 아낌없이 달게 했다.

“정말 아름다우세요! 오늘 1황녀님만 눈에 보일 것 같아요.”

은밀히 가공한 보석이라 시녀들은 이게 마력 보조용인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저 내가 오랜만에 작정하고 꾸몄다는 사실에만 행복해했다.

똑똑.

“1황녀님,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러던 중에, 내 방에 다른 시녀가 방문했다.

외출 준비 중인 나 대신 문 앞으로 나가 시녀를 만나고 돌아온 마리나의 손에는 봉투가 든 쟁반이 들려 있었다.

“1황녀님. 긴급 전보입니다.”

긴급 전보?

나는 의아함을 느끼며 마리나가 들고 온 봉투를 열어 보았다. 그 직후, 곧바로 얼굴이 굳었다.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생각과 작지 않은 동요가 내 머리와 가슴을 파도처럼 훑고 지나갔다.

그러다 이내, 나는 손안에서 구겨진 종이를 쟁반 위에 다시 내려놓았다.

[글렌 라스너 사망.]

거기에 적힌 내용은 제라드의 부친, 글렌 라스너 전 백작이 형무소에서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 * *

흔들림 하나 없는 마차 안에서 나는 손가락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1황녀궁에서 나오기 직전에 본 전보의 내용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글렌 라스너가 죽은 시기는 원래 이맘때가 아니었는데, 어째서인지 예상보다 시기가 빨랐다.

제라드가 돌아오면 뭐라고 말해 줘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어 조용히 창밖만 보게 됐다.

‘많이 충격받고…… 또 슬퍼하겠지?’

나는 제라드와 황궁 온실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황궁에서 나가면 어디로 가려고?”

“……어디든.”

그때 빈 새장이 걸린 초록빛 온실에서 보았던 앳된 소년의 얼굴과 당시에 내 두 귀를 파고들었던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당장 어제 있었던 일인 것처럼 지금도 선명하게 어른거리는 듯했다.

“나를 원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 갈 거야.”

“그리고…… 아버지를 구하러 가야 돼.”

누구에게나 부모란 존재는 무릇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제라드에게도 그의 부친인 글렌 라스너는 그 의미가 남다른 듯했다.

그러니까 내가 꿈에서 본 책에서도 슬픔에 잠겨 밤새 검을 휘두르다가 유디트에게 안겨 위로받는 장면이 있었겠지.

사실 글렌 라스너의 죽음이 이미 예정된 일이라는 사실을 예전부터 알았던 만큼, 이번에도 시기가 조금 이르다는 것 외에는 그의 부고에 딱히 놀랄 만한 부분은 없었다.

제라드를 거두었을 때부터 언제고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예상했으니 말이다.

다만 그때 당시에는 무감흥했던 글렌 라스너의 죽음이 지금 이처럼 내게서 작은 동요나마 이끌어낸 것은, 아마 제라드가 나한테 예전과는 다른 의미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라드가 제 부친의 죽음에 상처받을 거라고 생각하니 내 마음도 덩달아 모래가 낀 듯이 껄끄러워지는 것 같았다.

‘차라리 녀석이 지금 여기에 없는 게 다행인 건가? 그래도 조금이나마 늦게 소식을 전할 수 있으니까…….’

물론 그래봤자, 어차피 고작 하루 이틀 정도의 차이이긴 했다. 제라드가 도착할 시간이 가까워진 듯했으니 말이다.

사실 제라드와는 종속 각인으로 묶여 있었지만, 이틀 전부터 그와의 연결이 흐릿하게 느껴졌다.

중간중간 아예 연결이 끊긴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와 이렇게 멀리 떨어져 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아무래도 마법사의 열병 증상이 발발하는 시기에는 내 마력 자체가 제어하기 어려워지는 만큼 각인으로 인한 연결고리도 느슨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제라드가 라스너 백작가를 떠나 황궁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1황녀님, 도착했습니다.”

그때, 마법사들의 축일 행사가 열리는 장소에 도착했다. 나는 생각하던 것을 멈추고 마차에서 내려섰다.

* * *

한낮임에도 하늘에는 반짝이는 보석들이 박혀 꼭 아름다운 은하수가 펼쳐진 것처럼 보였다.

오늘 마법사의 축일인 10월 축제를 기념해 일반 참석자들에게도 소지를 허가한 마력석이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작동하며 별의 강물처럼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법사들의 축일은 일반적인 축제와는 결이 달랐다.

마법 강국인 카뮬리타에서는 특히나 그 상징성 때문에 한 손에 꼽을 정도로 규모가 큰 행사였다.

그래서 축제의 첫 축포가 터지는 이 ‘새벽 전당’은 벌써부터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참고로 황실 마법사들의 집단인 ‘백야의 전당’은 이 새벽 전당에서 이름을 딴 것이었다.

그만큼 마법사들에게는 의미가 남다른 장소라는 의미와도 상통했다.

새벽 전당은 카뮬리타 최초의 대마법사인 리베라 황제가 그 당시 인간의 한계라 여겨졌던 최후의 경지를 한 단계 더 뛰어넘은 뒤 역사적인 첫 발자국을 남긴 곳이었다.

그런 장소에 세워진 이 유백색 건물은 마법사들의 신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후로 카뮬리타 사람들에게 신성한 공간으로 취급되며 이 마법사들의 축일에만 개방되곤 했다.

“1황녀 전하, 오셨습니까. 카뮬리타의 축복과 가호가 함께하시어 제국의 광영을 무구히 빛낼 이 시대의 첫 번째 창과 방패가 되시기를. 지성에서 태어난 지고하고도 유일한 태양의 딸로서 최고의 홍복을 누리소서.”

나는 황족이었기에 가장 아랫단에서 축제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지나 새벽 전당의 계단을 올라갔다.

황궁만큼이나 넓고 긴, 웅장한 계단의 양옆에는 오늘 귀빈을 맞기 위해 선출된 궁인들이 일렬로 대기하고 서 있었다.

나는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황족석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행사를 위해 외부에 마련된 지정석으로 바로 가지 않고, 새벽 전당의 내부로 향했다.

“벨라 언니, 유디트한테 가려는 거야?”

그러던 중에 황궁 밖에서 오랜만에 보는 클로에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너였구나, 클로에. 그래, 축제가 시작되기 전에 잠깐 유디트의 얼굴이나 볼 생각인데.”

내가 그레이엄 후작가를 뒤져 금단술의 흔적을 발견한 일로 처음에는 클로에와도 조금 서먹했었다.

하지만 그래도 클로에가 마음 쓰여서 먼저 2황녀궁에 찾아가 보았더니, 의외로 그녀는 나한테 반감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후로는 종종 2황녀궁에서 클로에와 만나 짧게나마 담소를 나눌 때도 있었다.

물론 내 일정이 요즘 포화 지경이었기 때문에, 지난 황실 연회 직전에 만난 이후로 그녀와 얼굴을 따로 마주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사이에 황족들끼리 갖는 식사 자리에서 클로에를 본 적이 있긴 했지.’

하지만 이렇게 그녀와 둘이서 만나 이야기를 나눈 건 아니었으니 그건 제외하기로 했다.

아무튼, 라미엘이야 나와 함께 그레이엄 후작의 추적을 맡아 정당하게 밖을 돌아다닐 때가 있다지만, 클로에는 그것도 아니라 2황비 카타리나와 함께 자신의 궁에서 거의 근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마법사들의 축일이라서 모처럼 부황에게 외출을 허락받은 모양이었다.

“사실 이걸 말할지 말지 그동안 좀 고민했는데……. 역시 그냥 넘어가기에는 좀 찝찝해서.”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클로에는 내 앞에 서서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주저했다.

그러다가 이내 그녀가 결심한 듯이 입을 열어 꺼낸 말을 듣고 나는 눈을 빛낼 수밖에 없었다.

“밀리엄을 납치한 죄인이 지하 감옥에서 자결한 황궁 연회 날 있잖아. 그때 내가 뭘 좀 봤거든. 거기에 대해 할 말이 있으니까 잠깐만 시간 좀 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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