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리리아나가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넘어졌다.
“뭐야! 어느 놈이 감히……! 악!”
유디트는 황당한 듯이 소리치면서 자신을 공격한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려 하는 리리아나의 몸을 마법으로 묶었다.
그런 뒤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갔다.
“너, 너 누구야! 감히 나한테 이런 짓을 하다니 간이 부었지?!”
리리아나는 마법 사슬에 칭칭 동여매진 채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 버둥거렸다.
“캐롤리나! 베릴! 당장 이놈을 붙잡아! 내 말 안 들려……?!”
그녀가 필사적으로 시녀들을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리리아나의 수행원들은 유디트의 마법에 걸려 다른 곳으로 떠난 데다, 이 방에도 방음 마법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유디트의 손이 또다시 새로운 마법 수식을 그렸다.
“헉! 내, 내 눈! 뭐야, 갑자기 안 보여……! 내 눈이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눈에 먹물이라도 뿌린 듯이 앞이 보이지 않자 리리아나는 더 허둥지둥거렸다.
그런 리리아나의 앞으로 작은 발소리가 다가왔다.
굽이 낮은 구두와 가볍게 흔들리는 치맛자락이 리리아나의 머리 위에서 멈췄다.
다가오는 기척을 느낀 리리아나도 그 순간만큼은 살짝 긴장한 듯이 몸을 굳혔다.
“네가 이런 짓을 하고도 멀쩡할 줄 알아?! 너 누구야! 당장 정체를 밝히지 못해?!”
그럼에도 여전히 사납게 소리를 치는 리리아나를 내려다보던 유디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시끄러워, 리리아나.”
맑은 소녀의 목소리가 노래하듯이 머리 위에서 울리자 리리아나의 버둥거림이 멈췄다.
유디트는 그런 리리아나를 향해 이 상황이 지루한 듯이 무미건조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평소에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더러운 걸 보면 눈에까지 흙탕물이 튄 기분이라고. 그래서 아예 보지 못하게 만들어 준 건데 무슨 문제 있어?”
“너, 너……!”
리리아나는 이제야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한 범인이 누구인지 깨달은 듯했다.
그녀는 너무 어이가 없다 못해 얼떨떨한 듯이 헛숨을 내뱉으면서 말했다.
“유디트, 너 미쳤어? 어디서 겁도 없이 감히 이딴 짓을……! 캐롤리나! 거기 아무도 없어?!”
유디트는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찾는 리리아나의 모습을 감상하듯이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햇빛이 방 안을 밝게 물들였다.
그 한가운데에 선 유디트의 모습은 지금 누군가를 모해하고 있는 사람답지 않게 여전히 무해하고 순수해 보였다.
“그렇게 목이 터져라 불러 봤자 아무도 안 와.”
이내 유디트가 작게 손짓했다. 그러자 방에 있는 작은 옷장의 문이 벌컥 열렸다.
또다시 까딱거리는 유디트의 손가락을 따라 리리아나가 허공에 붕 떠올랐다.
“으악……!”
그리고 다음 순간, 좁은 옷장 안으로 리리아나가 처박혔다.
고아원에 자선 활동을 하러 온 사람이라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게 차려입은 리리아나의 드레스와 예쁘게 꾸민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어 흐트러졌다.
“리리아나, 얼마 전에 네가 나한테 하려고 한 짓을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
“뭐, 뭐라고?”
“난 너 같은 바보가 아니거든. 다들 너처럼 지능이 낮다고 생각하면 곤란해.”
사실은 불과 며칠 전에 리리아나가 이런 식으로 유디트를 좁은 창고 같은 곳에 가두려 한 적이 있었다.
물론 유디트는 그런 허접한 술수에 넘어가지 않았다.
애초에 리리아나를 포함한 황녀, 황자들의 괴롭힘이라고 해 봤자 그리 대단한 것도 없었다.
유디트가 아는 대로라면 앞으로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그들이 궁리할 수단 역시 별것 아니리라.
카뮬리타 황실에는 유디트가 경계해야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1황녀 아르벨라를 제외하고는…….
“그, 그래서 지금 그 일로 나한테 복수라도 하려는 거야? 결국 너한테는 아무 일도 없었잖아!”
리리아나는 유디트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이제야 이유를 알아차린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불운하게도 미수로 그친 자신의 저열한 수작질을 유디트에게 사과하는 게 아니라 뻔뻔하게 구는 것을 선택했다.
“그래, 아무 일도 없었지.”
물론 리리아나가 그럴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디트도 별다른 감흥 없이 하려던 일을 계속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먼저 날 건드린 널 봐줘야 할 이유가 되니?”
쾅!
리리아나를 가둔 옷장의 문이 가차 없이 닫혔다.
“야! 너 이거 안 열어? 당장…… 으읍!”
유디트는 계속 귀가 따갑게 꽥꽥거리는 리리아나의 성대까지 금언 마법으로 막아 버렸다.
1황녀 아르벨라처럼 여러 개의 마법식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었지만, 유디트에게는 식은 수프를 먹는 것만큼 간단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유디트가 마력을 개화해 본격적인 마법 수업을 받은 지 몇 달밖에 되지 않았다고 알고 있었고, 분명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유디트에게는 훨씬 오랫동안 마법을 익숙하게 사용했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마력을 움직이거나 마법진을 그리는 데 거침이 없었다.
“으읍! 읍……!”
리리아나가 몸부림을 치고 있는지, 옷장이 덜컹거렸다.
“네가 고아원을 떠나기로 예정된 시간에 시녀가 찾으러 올 거야. 그때까지 그 안에서 혼자 조용히 반성이나 하고 있어.”
유디트는 리리아나를 방에 혼자 남겨 둔 뒤 문을 나섰다.
하지만 유디트가 그린 마법진이 남아 있어서, 모두 3황녀 리리아나를 찾으러 갔다가도 그녀가 있는 방문 앞에 다다르면 다들 갑자기 다른 볼일이 생각났다는 듯이 뒤돌아 자리를 떠날 터였다.
잠시 후 유디트는 아이들이 모여 있는 방에 가서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4황녀님, 다음에 또 동화책 읽어 주세요!”
“또 놀러 오실 거죠?”
“그래, 다음에 또 만나러 올게.”
유디트는 말갛게 웃는 얼굴로 아이들과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하며 인사를 해 준 뒤 밖으로 나왔다.
“4황녀님, 그럼 황궁으로 돌아갈까요?”
“네.”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 유디트는 손에 턱을 괸 채 앉아 창밖을 보았다.
그녀는 언젠가부터 꾸기 시작한 꿈을 떠올렸다.
꼭 꿈이 아니라 직접 겪었던 현실이기라도 한 것처럼 생생하던 그 꿈에서 유디트는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든 자신이 나오는 기이한 미래를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신비로운 보랏빛 공간에 주렁주렁 매달린 새장 속에서 꼭 무언가에 홀린 듯이 책을 하나 꺼내 보게 되었을 때……. 유디트는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이것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이상하게도 유디트가 본 책의 내용과 현실에는 작지 않은 차이가 있었다.
일단 꿈에서 본 책의 내용과 달리, 지금 이 현실에서 유디트를 주로 건드리는 이복형제는 1황자 라미엘와 2황녀 클로에가 아니라 3황녀 리리아나와 2황자 로이드였다.
1황녀 아르벨라도 원래 이맘때부터 유디트에게 적대감을 드러내기 시작해야 했으나, 지금은 전혀 그런 움직임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
얼굴을 기댄 유디트의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굳게 닫혀 있던 입술도 핏기가 비칠 정도로 세게 깨물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짙게 내리깔린 속눈썹 밑으로 옅은 햇빛을 머금고 있던 황금색 눈이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아이는 부황께서 인정하신 우리의 동생이니 황도를 사용할 자격은 충분한 것 같은데.”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였다. 꿈이 아닌 현실의 아르벨라와 유디트의 관계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유디트는 이제는 꽤 긴 시간이 지난 과거의 어느 날, 2황녀 클로에에게서 자신을 두둔해 주었던 아르벨라의 모습을 떠올렸다.
“네 궁엔 시녀 없니?”
“예?”
“다음부터는 시녀랑 같이 다녀.”
그 이후부터 아르벨라는 몇 번이나 유디트를 신경 쓰고 도와주었다.
“냅킨에도 벌레가 앉으려는 것 같아서 내가 쫓아 줬어.”
“그, 그러셨군요.”
“벌레가 꽤 커서 한 번으로는 쫓아내지 못하겠더라고. 다들 봤을 테니 이해하지?”
그때마다 유디트는 처음으로 사탕을 먹어 본 어린애처럼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르벨라이기에, 그녀가 주는 관심은 유독 달고 황홀하게 느껴졌다.
“괜찮아?”
“이쪽은 마법 식물들을 키우는 정원이 있어서 일정 거리 이상 다가가면 안 되는 거 몰라?”
그밖에도 아르벨라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모습들이 아주 많았다.
하나를 떠올리기 시작하자, 그때부터는 리본으로 엮인 사탕 다발을 보물 상자에서 꺼내듯이 아르벨라와의 추억이 줄줄이 딸려 나오기 시작했다.
유디트를 향해 상냥하게 웃어 주는 아르벨라.
다정하게 유디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아 주는 아르벨라.
유디트를 무시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에게서 보호해 주고 지켜 주던 아르벨라.
유디트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래서 아르벨라가 처음부터 자신을 정말 동생으로 아끼고 사랑해 마음을 주었던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고, 지금은 자신을 대하던 아르벨라의 태도가 전부 거짓이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유디트는 더 이상 아르벨라를 예전처럼 대할 수 없었다.
자꾸만 꿈에서 본 장면들이 생각나며 그때의 처절한 회한과 원망, 또 미움과 후회도 같이 떠올랐다.
“4황녀님, 이제 10분쯤 후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이제 다음 일정은…….”
어느새 가까이에서 거대한 황궁이 보이기 시작했다. 유디트는 서늘한 눈으로 창밖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곧 다가올 마법사들의 축일 때, 그녀도 모든 걸 결정지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