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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황녀님-140화 (156/203)

140화

잠시 후 학생들과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졌을 때, 나는 유디트의 뒤를 따르던 수행원들을 돌아봤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앞쪽 줄의 우측에 선 시녀에게 써늘한 시선이 닿았다.

“네 이름이 뭐였지?”

“귀, 귄터 백작가의 이그레스입니다.”

내가 왜 이름을 묻는지 아는 것처럼, 이그레스 귄터 백작 영애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도 세드릭 황제가 직접 유디트에게 보내 준 시녀 중 한 명이었다.

“손버릇이 나쁜 시녀로구나. 내 밑에 있는 아이가 아니니 직접 벌을 주지는 않겠지만, 꽤나 수준 낮은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군.”

내 앞에 고개를 숙인 시녀를 내려다보며 신랄하게 말한 뒤, 다른 추궁은 더 하지 않고 다시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깐 멈칫하는 듯하던 유디트도 조용히 내 뒤를 따랐다.

“혹시…… 목걸이에서 제 시녀의 마력이 나왔나요?”

방금 내가 내뱉은 말로 깨달은 바가 있는지 유디트가 물었다. 나는 ‘그래.’ 하고 짧게 대답했다.

방금 우리가 있던 자리에는 아카데미의 재학생들 말고 황족들의 수행원들도 있었다.

학생들이 자신의 마력을 확인하며 떠들썩할 때, 나는 수행원들의 마력도 따로 조용히 검사했다.

그런데 방금 내가 지적한 유디트의 시녀가 가진 마력과 목걸이에서 나온 마력이 일치했다.

나와 유디트의 마력을 제외하고 가장 최근에 묻어 있던 마력이니, 물건에 발이 달려 있지 않은 이상 그녀가 목걸이를 제 손으로 직접 파르비안의 주머니에 넣어 둔 게 분명했다.

아직 어린 영식들이라 단순해서 깊게 따지지 않고 그냥 넘어갔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황실 시녀가 이상한 짓거리를 한 것이 만천하에 알려질 뻔했다.

“시녀가 나잇값도 못 하고 어린아이를 상대로 심술궂은 장난을 친 게 아니라면, 네게 이상한 방식으로 충성하고 싶었던 모양이구나.”

마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오늘 아카데미에서의 일로 유디트는 평민 아이를 감싸 주고 시녀의 실수를 대신 직접 사과하기까지 한 다정하고 상냥한 황녀님으로 보여졌을 것이다.

만약 내가 나서지 않아 아카데미의 평민 학생인 파르비안이라는 소년이 유디트의 목걸이를 훔친 범인이 되고, 그럼에도 유디트가 그의 죄를 자애롭게 덮어준 그림이 되었다면 더욱이 그랬을 테지.

그래,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에서처럼 말이다.

“제가 시녀들의 관리에 소홀했던 것 같네요. 이번 일은 언니가 더 신경 쓰실 필요 없게 제가 잘 처리할게요.”

유디트는 당황스러운 듯했지만, 그래도 마음을 다잡은 얼굴로 말했다.

과연 황족으로서 흠잡을 곳 없는 깔끔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녀의 태도에 의구심을 느꼈다.

요즘의 유디트는 말투, 행동, 태도 전부가 내가 알던 그녀가 아닌 것 같았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황실에서의 위치가 이전과 달라졌기 때문에 이런 낯선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그리고…… 저 시녀는 정말 유디트의 의사와 상관없이 혼자 이런 짓을 벌였을까?

그러나 굳이 내 안에 생긴 의혹을 지금 이 자리에서 꺼내지는 않았다.

마음 한편으로 내 이런 의심이 비약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또 어차피 진실이 어느 쪽이든 이 일의 범인은 유디트의 시녀가 될 것이다.

내가 그렇게 결정했기 때문이다.

“오늘 보니 아바마마께서 보내 주신 시녀들이 새로운 궁 생활에 영 적응을 못 하는 것 같구나. 그래도 엄선해서 선출된 만큼 다들 누구나 인정할 만한 훌륭한 인재들일 텐데, 이왕이면 좀 더 제대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으로 보내 주는 것도 괜찮겠다.”

먼저 마차에 오르며 지나가듯이 말하자 유디트가 내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다가 이내 그녀가 입술에 엷은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네, 언니.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유디트와 나를 태운 마차가 황궁으로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아카시아 꽃잎이 흰 눈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25.5 동화 속의 주인공처럼 착하고 아름다운 황녀님

유디트는 아침부터 밤까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다듬어지고 또 다듬어지고 있었다.

모친의 유품인 낡은 목걸이 하나와 갑자기 개화한 마력.

그것들은 유디트에게 날개를 달아 저 높이, 별이 반짝이는 곳까지 그녀를 데려다주었다.

한동안은 하루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잠깐의 틈조차 내기 어려울 만큼 매일 빡빡하게 일정이 짜여져, 넋을 놓은 채 이리 끌려가고 저리 끌려가 시키는 일을 하고 나면 어느새 밤이 왔다.

“이 이야기는 오랫동안 가시덤불 성에 갇혀 혼자 외롭게 살아야 했던 한 아름다운 소녀와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고아원에 와서 봉사 활동을 하는 것도 일주일에 한 번, 두 시간씩 유디트의 일정에 속해 있었다.

유디트는 맞은편에 있는 사람이 신호한 것을 보고, 고아원의 아이들에게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동화책을 읽어 주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황실에는 이렇게 황족들 각각의 특성과 매력을 중점적으로 살려 제국민들에게 장점만 부각시킬 수 있도록 대신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유디트에게 요구한 건 때 묻지 않은 소박함과 순수함이었다.

작은 것에도 쉽게 감동하고 또 감사해하는, 그런 가련하고 정감이 가는 모습을 제국민들 앞에서 연출하면 더 좋다고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너무 빈티가 나 보이면 황족의 위엄이 상할 수 있으니, 적절히 고아하고 청량한 분위기를 풍기는 걸 잊지 말라고 하던데…….

전부 기묘하고 모순된 요구사항이었다.

어쨌든, 귀족들 앞에서는 얕잡아 보이지 않도록 화려하고 위세 있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지만 제국민들 앞에서는 최대한 허영심 없는 모습을 보이라는 게 요점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유디트는 일부러 고아원에 봉사 활동을 나와 그 모습을 굳이 영상 마력석에 담고 있었다.

“그래서 소녀는 마녀의 꼬임에 넘어가 그만 바구니에 든 붉은 석류알을 먹고 말았어요…….”

유디트를 돕기 위해 황실에서 함께 파견을 나온 담당자는 어린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채 동화책을 읽어 주는 유디트의 모습을 보고 ‘그림이 된다’면서 만족스럽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 말처럼, 햇빛이 하얗게 내리쪼이는 잔디밭에 앉아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는 유디트는 당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상냥하고 예쁜 이웃집 언니나 누나처럼 보이면서도, 꼭 온화하고 성스러운 성서 속의 소녀 같은 숭고한 느낌을 풍기기도 했다.

“얘들아, 간식 시간이다!”

“와아아!”

그러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 간식을 먹을 때가 되자, 유디트와 같이 있던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 건물 안으로 달려갔다.

유디트는 멀어지는 아이들을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았다.

“4황녀님도 안으로 들어가서 좀 쉬시죠.”

“전 여기에 있을래요. 날씨가 좋아서 좀 더 햇빛을 쬐고 싶어요.”

“그러시겠어요? 캬아, 오늘 영상 하나 제대로 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역시 4황녀님께는 이렇게 맑고 깨끗한 청정수 같은 분위기가 잘 어울려요. 왠지 저 나무 뒤에서 유니콘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니까요?”

유디트의 영상을 마력석에 담던 사람도 칭찬하며 자리를 떠난 뒤, 그곳에는 유디트 혼자만 남게 되었다.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가던 잔디밭 위에 풀잎과 들꽃이 사부작거리며 흔들리는 소리만 내려앉았다.

유디트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얼굴로 바람 부는 잔디밭을 보며 살랑살랑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잠시 후, 그녀의 속눈썹이 살짝 밑으로 내리깔렸다. 유디트는 조금 전 아이들에게 읽어 주던 동화책을 다시 시야에 담았다.

바람에 팔락여 넘어간 책장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마녀에게 속아 지옥의 석류알을 먹고 이 세상에서 죽은 존재가 되어,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고 누구의 손에도 닿지 않는 외톨이로 평생을 살게 된 소녀의 모습이었다.

유디트는 말없이 책장을 뒤로 넘겼다. 워낙 유명한 동화였기에, 이 이야기의 결말은 유디트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마녀의 저주를 받은 소녀는 그럼에도 미움과 원망의 감정을 배우지 않고, 슬픔 속에서도 자신을 돌아봐 주지 않는 사람들을 사랑했다.

하여 마지막에는 이 땅의 대기가 되어, 죽어서까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켰다는 이야기였다.

어린아이들이 보는 동화책치고는 잔인한 결말이었지만, 원래 옛이야기 속에는 이런 것이 많았다.

유디트는 왜 다들 이런 재미도 교훈도 없는 이야기를 감동적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 동화뿐만이 아니라 이런 종류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에게는 늘 비슷한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사람들이 유디트를 두고 마음대로 그들의 환상을 투영해 떠드는 소리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떤 역경과 고난을 겪어도, 아무리 핍박받고 괴롭힘당해도 늘 맑고 순수하고 아름답게…….

어떤 경우에도 선량함과 다정함을 잃지 않은 착하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해,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

유디트의 입술에서 싸늘한 조소가 흘러나왔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부스럭! 어여쁜 소녀가 그려져 있던 동화책이 유디트의 손 안에서 무참히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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