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아르벨라 언니가 신경을 많이 쓰신 곳이라고 들었는데…….”
유디트가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인지 굉장히 좋네요. 학생들의 얼굴이 굉장히 밝아 보여요.”
챙이 넓은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리고 있던 손을 내리자, 유디트의 얼굴이 그림자에 반쯤 가려졌다.
“그런데 두 분은 오늘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하신 건가요?”
그래서 가벼운 호선을 그린 유디트의 선홍빛 입술만 눈에 들어왔다.
“아니. 우연히 만난 거야.”
나는 조금 전 상당히 묘한 분위기를 형성했던 킬리안과 내 모습을 떠올렸다.
갑자기 유디트가 나타나서 킬리안과의 대화는 중간에 끊겼지만, 뒤에 이어지려던 그의 말이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유디트의 물음에 조금 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태연한 낯으로 말했다.
“소공작의 친척이 이곳에 재학 중이라 오늘 만나러 왔다는군. 난 알렉스 총장의 청으로 아직 공석인 과목의 교수를 선발하러 온 거고.”
“그러셨군요. 그럼 혹시 언니가 일정을 끝마치실 때까지 제가 기다려도 될까요?”
“상관없지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데?”
“그래도 언니와 같이 돌아가고 싶어요.”
유디트가 여느 때처럼 사랑스러운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언제 나를 멀리했었냐는 듯이, 여전히 티 한 점 없이 맑고 친근한 미소였다.
“소공작님도 아카데미에 더 계실 건가요? 아니면 지금 바로 돌아가세요?”
이어진 유디트의 물음에 킬리안이 잠깐 나를 응시했다. 내 얼굴 위로 떨어지는 시선에 나도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시선이 겹쳐진 순간은 짧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다시 눈길을 돌렸고, 킬리안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네, 아무래도 저는 먼저 자리를 비켜야 할 것 같습니다.”
킬리안도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생각한 듯했다.
“아쉽네요. 그럼 제가 가시는 길까지 대신 배웅할게요. 총장님과 아르벨라 언니는 바쁘신 것 같으니까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마차가 세워진 곳까지의 거리는 가까우니 혼자 가면 됩니다.”
“아니에요. 어차피 저도 교정을 둘러보려던 참이니까요.”
유디트의 제안은 어디로 보나 자연스러웠다. 킬리안은 그런 유디트를 잠깐 말없이 내려다봤다.
여전히 조금은 탐탁지 않은 듯했으나, 그래도 방금처럼 방해꾼 보는 듯한 눈빛까지는 아니었다.
“그럼 1황녀님. 조만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다음에 보지, 소공작.”
곧 킬리안이 내게 정중히 인사했다. 유디트도 웃는 낯으로 말했다.
“저는 소공작님을 배웅하고 올게요. 일정을 마치실 때까지 아카데미를 구경하고 있을 테니 전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러렴. 총장에게 말해 아카데미를 안내해 줄 사람을 붙여 줄게.”
돌아서기 직전, 유디트는 킬리안에게 또 아주 자연스러운 모양새로 손을 내밀었다.
마치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에스코트 받아 본 일이 많은 것처럼, 익숙할 대로 익숙한 움직임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얼마 전이라면 유디트의 이런 모습을 보고 ‘그동안 황족다운 태도를 몸에 익히느라 노력을 많이 했나 보구나. 기특하기도 하지.’라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글쎄.
황실 연회가 있던 날 밤부터 마음속에 피어나기 시작한 어떤 의심만 점점 짙어질 뿐이었다.
킬리안은 마지막까지 내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뒤돌아섰다.
손을 맞잡고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은 겉보기에 꽤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나는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총장실로 향했다.
* * *
“오늘, 날씨가 정말 좋네요.”
“그렇군요.”
유디트와 킬리안은 함께 아카데미의 교정을 거닐었다.
두 사람 모두 발군의 외모를 가지고 있기도 했고, 또 이렇게 나란히 서 있으니 꼭 흑백의 대비처럼 보여 더욱이 눈에 띄는 한 쌍으로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총장과 인사는 나누셨습니까?”
“아직이요.”
“배웅은 괜찮으니 그만 편하게 교정을 둘러보시지요.”
“괜찮아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닌데요.”
하지만 유디트와 킬리안의 대화를 가까이에서 듣는다면 누구나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말았을 것이다.
“베른하르트 소공작님의 친척이 이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1황녀님의 이름을 딴 아카데미에 다닌다니, 좋겠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들의 대화는 무엇을 화제로 하든지 중간에 뚝뚝 끊어지고 길게 이어지는 법이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예의는 있을지언정, 성의는 부족해 보였다.
킬리안은 킬리안대로 조금 전에 만났던 아르벨라를 생각하고 있었고, 유디트도 킬리안에게 이렇다 할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러다 문득 킬리안은 유디트가 왜 굳이 자신을 배웅하겠다고 했는지 의문을 느꼈다.
킬리안이 아는 유디트는 원래 이런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먼저 그를 배웅하겠다고 나선 것치고, 유디트의 말투나 태도에 열의도 없어 보였으니 의구심이 든 것도 당연했다.
‘무엇보다도…… 원래 4황녀가 이런 느낌이었나?’
의혹을 담은 보라색 눈이 유디트의 얼굴로 향했다.
이렇게 그의 옆에서 걷고 있는 유디트에게서 어째서인지 기묘한 익숙함이 느껴졌다.
왠지 그녀의 분위기가 아르벨라와 사뭇 비슷하게 느껴졌던 탓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디트가 초원 위에 핀 들꽃처럼 때 묻지 않은 풋풋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면, 지금의 그녀는 꼭 정원사에 의해 이파리 하나조차 허투루 나지 않은 것처럼 정제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꼭 황족으로서의 몸가짐이 뼛속까지 배어들 때까지 오랫동안 몸에 익히며 살아온 사람처럼.
킬리안은 유디트의 자세나 말투가 아르벨라와 묘하게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바로 옆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 자매이기 때문에 이런 부분도 닮아가는 것일까?
“참, 그러고 보니 소공작께서는 이번 마법사들의 축일 때 축제에 참석하시나요?”
그때, 유디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시군요. 실은 감사하게도 아르벨라 언니가 양보해 주셔서 제가 이번 마법사들의 축일 때 황실 대표로 서게 되었어요.”
“4황녀님이 말입니까?”
“네. 하지만 이런 큰 역할을 맡은 건 처음이라 제가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네요.”
킬리안은 유디트의 말을 듣고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잠깐 얼굴에 떠올랐던 감정을 갈무리하고 유디트에게 말했다.
“4황녀님께서는 잘 해내실 겁니다.”
“그럴까요?”
킬리안의 격려하는 듯한 말에 유디트가 고개를 들었다.
“네. 1황녀님께서 그런 중책을 맡기신 건 4황녀님을 믿기 때문일 테니까요. 그러니 4황녀님도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즉, 유디트를 믿는다기보다는 아르벨라의 안목을 믿는다는 의미였다.
킬리안을 올려다보던 유디트의 입술이 웃는 듯 마는 듯, 미묘하게 오므라졌다.
조금 전부터 바람이 불어 모자를 살짝 잡고 있던 유디트의 손에서 한순간 힘이 풀렸다.
당연히 모자는 그녀의 손에서 빠져나가 가볍게 공중으로 떠올랐다.
“어머나, 아르벨라 언니에게 선물받은 것인데 바람에 날아가 버렸네요. 소공작님이 주워 주시겠어요?”
유디트가 태연히 웃으며 굳이 그녀의 뒤에 있는 수행원들이 아니라 킬리안에게 부탁했다.
킬리안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모자가 떨어진 곳으로 걸어갔다.
“오늘은 바람이 제법 강하니 리본을 제대로 묶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런데 어째서인지 유디트는 킬리안이 모자를 바로 건네받지 않고 그를 빤히 올려다봤다.
그에 킬리안이 또 한 번 두 눈에 의혹을 비쳤을 때쯤, 유디트가 입을 열었다.
“베른하르트 소공작님. 소공작님은 예전에 아르벨라 언니와 약혼 이야기가 오간 적이 있는 상대 중 하나라지요?”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에 킬리안이 멈칫했다.
“하지만 그건 이미 오래전의 일이라고 들었어요. 차라리 그때 혼약했더라면 지금 이렇게 마음 졸이며 애태우시는 일이 없었을 텐데 안타깝네요.”
그러나 유디트의 입술에는 안타까움이라고는 눈곱만큼도 깃들지 않은 싸늘한 미소만 그려져 있었다.
그것을 본 킬리안의 눈에 한순간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혹시 조금 전에 일부러 방해하신 겁니까?”
단순한 의심이라 하기에, 지금 그를 보는 유디트의 눈빛에는 호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소공작님은 아르벨라 언니를 연모하시잖아요.”
킬리안의 물음에 유디트는 굳이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그녀의 입에서는 킬리안이 아르벨라에게 품고 있는 진심이 지독하리만치 무미건조한 어조로 흘러나왔다.
“저는 그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랍니다.”
마침내 킬리안에게서 모자를 받아 든 유디트가 마지막으로 빙그레 웃어 보이며 먼저 돌아섰다.
“소공작님을 위해서도 헛된 기대는 일찌감치 접으시는 게 나을 테고요. 그럼 살펴 돌아가세요, 베른하르트 소공작님.”
검게 흔들리는 유디트의 머리카락 위로 향기를 머금은 아카시아 꽃잎이 떨어졌다.
킬리안의 입술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왠지 이제야 처음으로, 그동안 감춰져 있던 4황녀의 진면목을 본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