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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황녀님-136화 (152/203)

136화

나를 지그시 응시해 오는 시선에 괜히 얼굴이 간지러워져서 손에 든 지팡이를 까딱거렸다.

왠지 별것도 아닌 말에 의미 부여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인데…….

“뭐, 사람마다 마력의 느낌이 다르니까. 소공작도 알겠지만 원래 내 기억력이 좀 좋거든.”

“그렇지요. 1황녀님의 특출함은 물론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선을 긋듯이 내뱉은 내 말을 킬리안이 부드럽게 받았다.

“이안.”

그런 뒤 그가 내 마법으로 구해진 보라색 눈의 소년을 불렀다.

“제 육촌 동생인 이안 비스타스입니다. 저희 베른하르트 가문의 방계인 비스타스 백작가 출신이지요. 1황녀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다친 곳 없이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안, 1황녀님께 다시 한번 정식으로 감사 인사를 드려라.”

“이안 비스타스가 1황녀님께 인사드립니다. 방금은 구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래, 다친 곳이 없다니 다행이구나. 하지만 이제 그런 위험한 장난은 치지 마렴.”

“네, 황녀님……!”

여전히 붉게 상기된 얼굴을 한 소녀처럼 예쁜 소년이 친구들과 언제 허물없이 티격태격했냐는 듯이 얌전히 두 손을 모으고 서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바로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에서 문제가 일어난 황립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던 킬리안의 친척 동생이었다.

더불어 유디트를 아주 잘 따라, 킬리안 베른하르트와 그녀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는 소년이기도 했다.

이안은 킬리안이 시키는 대로 나한테 감사 인사를 한 뒤 들뜬 얼굴로 또다시 후다닥 뛰어서 친구들에게 돌아갔다.

그러고는 다 같이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왁자지껄 시끄럽기도 했다.

“베른하르트 소공작님. 이것 참, 조금 전에는 정말 아찔했습니다. 하마터면 귀하신 공자님이 다칠 뻔했으니.”

“다음에도 오늘 같은 요행이 있으리란 법이 없으니, 이번에 단단히 주의를 주는 편이 좋겠지. 방금 위험한 장난을 친 학생들의 무리에는 이안도 속해 있으니, 아카데미에서 그 아이도 함께 단단히 타일러 주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편해지는군요. 감사합니다. 그럼 이번 일을 벌인 학생들 전부에게 제대로 주의를 주도록 하겠습니다.”

총장은 킬리안이 보는 앞에서 그의 방계 친척 아이에게 벌을 준 것 때문에 혹시 그의 기분이 상했을까 봐 내심 우려하다가 안심한 눈치였다.

킬리안은 총장과 짧은 대화를 마치고 다시 나를 돌아봤다.

“1황녀님께서는 오늘 어쩐 일로 아카데미에 방문하셨습니까?”

“아카데미의 교수 자리 하나가 공석인데, 오늘 면접관으로 초대받아서 방문했지.”

“1황녀님께서 명예 교수로 제안을 받으셨다고 들었는데 거절하셨나 보군요.”

“총장의 권유는 고맙지만 지금은 여유가 없어서.”

“아카데미와 학생들 모두에게 아쉬운 일이겠습니다.”

의외로 킬리안과의 대화에는 불편함이 없었다.

그는 지난번 연회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나한테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 태연하게 굴었다.

“저는 이 황립 아카데미에 방문하는 게 오늘이 처음인데, 교정을 둘러보니 1황녀님의 이름을 딴 아카데미답게 아주 아름답게 꾸며져 있더군요.”

“그렇지요? 1황녀님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알렉스 총장은 킬리안의 말에 반색했다. 킬리안도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특히 1황녀님의 모습을 본뜬 동상이 아주 인상적이던데요.”

“동상……?”

그 순간 내 귀에 박힌 말을 듣고 나는 눈썹을 추어올렸다.

“아직 보지 못하셨습니까? 본관의 교정 앞에 아주 위엄 있는 모습으로 우뚝 세워져 있으니 한번 가 보시지요.”

나는 스산한 눈으로 총장을 돌아보았다.

내가 예전에 분명 동상은 됐다고 했는데 결국 그걸 만들었어?

내 싸늘한 눈빛을 받은 알렉스 총장이 황급히 변명했다.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 동상이 꼭 있어야 비로소 저희 아카데미가 완전해지는 느낌이라……! 앗, 잠깐 저쪽에서 저를 부르는군요. 금방 다녀올 테니, 잠깐 소공작님과 말씀 나누고 계십시오.”

급기야 총장은 내가 당장 동상을 철거하라고 명령을 내릴까 두려웠는지, 다른 핑계를 대면 서둘러 자리를 피하기까지 했다.

어차피 잠시 후에 면접 때문에라도 다시 내 얼굴을 볼 수밖에 없을 텐데 쓸데없는 짓이었다.

“잠깐 산책로를 걸으시겠습니까? 듣자 하니 1황녀님의 탄생화인 아카시아 꽃나무를 아카데미 전체에 심었다고 하던데, 그래서인지 교내 경관이 아주 훌륭합니다.”

“소공작,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나는 능청맞게 권유하는 킬리안을 흘겨봤다.

이런 대화 패턴은 뭔가 익숙했다.

그래서 이 아카데미 곳곳에 새겨진 내 상징물들을 내가 탐탁지 않게 여기는 걸 알고 지금 킬리안이 나를 놀리는 중이라는 걸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킬리안은 그를 곱지 않은 눈으로 보는 나를 향해 빙긋이 웃어 보였다.

“모처럼이니 1황녀님과 함께 아름다운 산책로를 걷고 싶었던 건 진심입니다.”

그런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연회장에서 나를 향한 킬리안의 눈을 보고 그의 마음을 꿰뚫어 봤고, 그럼에도 먼저 돌아선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것으로 내 뜻을 전했다고 생각했는데 킬리안은 또다시 지금까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나를 대했다.

“소공작. 베른하르트 공작 부인이 나에 대해 언질해 주지 않던가?”

잠시 후 나는 조용히 입술을 벌려 킬리안에게 물었다.

베른하르트 공작 부인은 예전에 황실 의료관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물론 금언 마법 때문에 내 병에 대해 아들에게 알릴 수는 없었을 테지만, 나를 대하던 태도를 보면 킬리안의 마음을 알고도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그와 내 관계에 대해 떠보던 사람들조차 마뜩잖게 여기던 공작 부인이었으니.

내 말을 들은 킬리안의 눈빛이 변했다.

귀족 영애들, 더 나아가서 내 여동생들과 황궁의 시녀들조차 찬탄하는 그의 청려한 얼굴이 응달에 잠긴 것처럼 어둑하게 굳어졌다.

“역시 제 어머니께서 일전에 1황녀님께 실례되는 행동을 보이셨나 보군요. 혹여나 마음이 상하셨다면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내게 고개를 숙여 보인 킬리안이 다음 순간 시선을 들어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런데 그 일이, 1황녀님께서 저를 밀어내시려 하는 이유와 연관이 있는 겁니까?”

조금의 틈이라도 보인다면 절대 놓치지 않을 것처럼 집요하고 기민한 눈빛이었다.

나는 킬리안을 잠깐 말없이 쳐다봤다.

지금까지 나한테 있어서 킬리안은 지고 싶지 않은 상대, 내 향상심을 자극하는 남자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나는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나 자신에 대한 애정이 너무 강했다.

방금 전에도 이안 비스타스를 구할 때 킬리안보다 내 마법이 우위를 차지하는 걸 확인하고 내심 흡족한 마음이 들었을 정도란 말이다.

킬리안도 그런 나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호승심을 품은 나를 은근히 약 올리는 걸 즐겨 왔으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그냥 나를 재미있는 흥밋거리 정도로만 여기는 줄 알았는데.

그런데 이 남자는 도대체 언제부터 나를 그런 눈으로 보고 있던 걸까?

“꼭 그렇지는 않아.”

나는 천천히 입술을 열어 말했다. 킬리안은 속마음까지 투영하려는 듯이 가까이에서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1황녀님. 지난 연회 때 1황녀님을 뵙고 돌아가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 마음을 직접 말씀드린 적이 없더군요.”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든 순간 나는 눈매를 움찔 떨고 말았다.

“그런 주제에 황녀님께 저를 알아 달라고 떼쓰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깨달았습니다. 물론 1황녀님께서 제 마음을 모르실 거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역시 이건 순서가 잘못된 것이겠지요.”

이어진 킬리안의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마주한 남자의 눈이 낯설 정도로 진지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사방에서 그윽하게 풍겨져 나오는 아카시아 꽃향기 속에서 이내 킬리안이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1황녀님을…….”

“아르벨라 언니. 여기서 뵙네요.”

새가 노래하는 것 같은 고운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든 건 바로 그 절묘한 순간이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짙게 고여 있던 공기가 그 순간 바늘에 찔린 풍선처럼 바람에 쓸려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자, 하얀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흰 꽃이 떨어지는 아카시아 나무 아래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생화와 레이스로 장식된 챙이 넓은 모자를 살며시 들어 올렸다.

그러자 미소를 짓고 있는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이 시야에 드러났다.

“유디트.”

나는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쉰 뒤, 눈앞에 나타난 뜻밖의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바람에 흩날리는 유디트의 검은 머리칼이 흰 원피스와 흰 꽃에 대비되어, 오늘따라 유독 흑단처럼 새까맣게 보였다.

킬리안도 나를 내려다보던 시선을 돌려 유디트를 응시했다.

그는 잠깐 방해꾼을 보듯이 싸늘한 한기를 눈에 담다가, 곧 감정을 갈무리하고 유디트에게 고개를 숙였다.

“4황녀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오랜만에 뵈어요, 베른하르트 소공작님.”

유디트는 자신에게 인사하는 킬리안에게 화답한 뒤 해사하게 웃는 얼굴을 다시 내게 향했다.

“유디트, 네가 여긴 어쩐 일이니?”

“얼마 전에 황립 아카데미가 새로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궁금해서 와 보았어요.”

혹시 유디트가 조금 전에 킬리안과 내가 나누던 대화를 들었을까?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흔적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런데 말갛게 웃고 있는 유디트를 보자 오전에 들렀던 백야의 전당에서 레반테온에게 들은 말이 떠올랐다.

“유디트가 뭐에 대해 물어봤다고?”

“마법사의 열병이요. 이상하게도 요즘 각별하게 관심을 쏟으시는 것 같던데요?”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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