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 * *
날이 밝자 내 몸을 달구던 열기가 거짓말처럼 다시 가라앉았다.
마법사의 열병 증상이 다시 시작된 것 같았던 게 전부 내 착각일 뿐이었다는 듯이 개운한 아침이었다.
그래서 다행히도 미리 정해 둔 오늘의 일정을 취소하지 않아도 되었다.
“1황녀님! 이 이른 시간부터 백야의 전당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오전 일찍 백야의 전당에 들르자 나를 본 마법사가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떴다.
“어제 유디트가 균열과 괴수에 대한 연구 자료를 열람했다지? 나도 그걸 좀 봤으면 좋겠는데.”
“그러십니까? 이쪽으로 오시지요.”
마법사는 두 황녀가 연달아 같은 자료에 관심을 보이자 의아한 듯했으나, 군말 없이 나를 안내했다.
유디트가 내 그림자 사역마를 없애 그녀를 직접 엿보는 건 어려워졌지만, 그렇다 해서 이 황궁에 내 눈과 귀가 되어 줄 자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유디트가 백야의 전당에서 황실의 허가를 받아 연구 중인 균열과 괴수에 대한 자료에 요즘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실 그 자료들은 내가 가장 먼저 확인해 본 것이지만, 유디트가 특히 어제 오랫동안 집중해 읽었다는 자료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균열에 대한 연구 자료는 황족이라도 직접 신분을 인증해야 열람할 수 있었기에, 이렇게 여유 시간이 났을 때 직접 백야의 전당에 방문한 것이다.
“아이구, 1황녀님이 아니십니까?”
그렇게 길을 안내하는 마법사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걷고 있을 때, 복슬복슬한 하늘색 머리칼과 분홍 눈을 가진 호리호리한 청년이 로브를 헐렁하게 걸친 채 내게 다가왔다.
내가 백야의 전당에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와 본 듯한 레반테온이었다.
“혹시 얼마 전에 제가 말씀드린 마법 실용학 논문에 대해 심도 깊은 논의를 하러 와 주신 건가요?”
다른 때라면 적당히 호응해 줬겠지만, 오늘은 그를 한번 쳐다본 뒤 가차 없이 말했다.
“오늘은 레반테온에게 볼일이 있어서 온 게 아니야.”
“그런 가슴 아픈 말씀을……. 지난 나흘 내내 1황녀님이 백야의 전당에 와 주시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린 제게 너무 냉담하신 게 아닙니까?”
“레반테온이야말로 마법사의 축일 준비 때문에 유디트를 돕느라 바쁜 것 같던데, 한동안 거기에만 집중하는 게 좋지 않겠어?”
“아, 1황녀님도 그 얘기를 들으셨군요.”
레반테온이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나를 따라왔다.
사실 나는 요즘 레반테온에게 감정이 좀 미묘했다.
자신의 연구 외에 귀찮은 일은 질색인 사람이 마법사의 축일처럼 도움도 안 되는 일에 직접 나서겠다고 하다니.
아무래도 레반테온과 유디트의 사이가 생각보다 더 원만한 모양이었다.
스승과 제자나 마찬가지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하지만 나는 생각 이상으로 가까워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왠지 마음이 묘하게 껄끄럽고 또 조금은 언짢아지는 것을 느꼈다.
솔직히 이런 기분은 지금까지 내가 살면서 좀처럼 느껴 보지 못했던 것이라 뭐라고 딱 잘라서 설명하기가 애매했다.
하지만 이게 어린애처럼 속 좁은 마음이란 것은 알았다.
이건 꼭 자기 친구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겨 기분이 나쁜 것이나 다름없는 모양새가 아닌가?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고 나서야, 나는 내가 레반테온을 언젠가부터 친구 비슷한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내색하기에는 어쩐지 좀 겸연쩍고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괜히 혼자 꽁해져 있을 때, 레반테온이 다른 할 말이 더 있는 것처럼 묘하게 망설이는 기색을 내보이다가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침 4황녀님의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요. 혹시 요즘 4황녀님께 무슨 일 있습니까?”
“그런 건 왜 물어?”
“아니요……. 그냥 왠지 4황녀님이 요즘 묘하게 예전하고 좀 달라지신 것 같아서요.”
“달라지다니, 뭐가 말이야?”
“으음, 정확히 뭐라고 설명하기는 어려운데요.”
레반테온은 미묘한 미소를 입가에 띤 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사실 레반테온이 무엇에 의혹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 짐작 가는 부분은 있었다.
나도 얼마 전부터 유디트가 변한 것을 느끼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레반테온에게 굳이 다른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글쎄, 요즘은 나보다 레반테온이 그 애를 더 자주 볼 텐데.”
“하긴, 그렇지요. 1황녀님이 참 많이 바쁘시기는 하지요. 그래도 이렇게 오랜만에 얼굴을 뵙게 되니 좋습니다. 전에 뵈었을 때보다 좀 여위신 것 같은데 바쁘시더라도 끼니는 잘 챙겨 드시고요.”
“지금 남 말 할 상황은 아니지 않나?”
단순하게도, 레반테온이 어울리지 않게 내 몸 걱정을 해 주자 기분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그런 상태는 오래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 레반테온에게 볼일이 있는 게 아니시면 오늘 백야의 전당에는 왜 오신 겁니까? 지금 어딜 가시는 거지요?”
“균열과 괴수에 대한 자료를 열람하려고.”
“아, 요즘 4황녀님께서도 관심을 보이시던데. 흠……. 그러고 보니 저와 수업을 할 때도 균열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더군요. 그것 말고 마법사의 열병에 대해서도 자주 물으시던데…….”
이어진 레반테온의 말에 나도 모르게 걸음이 멈췄다.
그에게 고개를 돌려 지금 내가 들은 것이 맞는지 다시 확인했다.
“유디트가 뭐에 대해 물어봤다고?”
그러나 레반테온의 대답은 변하지 않았고,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의 열병이요. 이상하게도 요즘 각별하게 관심을 쏟으시는 것 같던데요?”
* * *
“어서 오십시오, 1황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가을치고는 따뜻한 오후 시간.
아카데미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마중 나와 있던 총장 알렉스 새뮤얼이 나를 열렬히 환대해 주었다.
나는 익숙한 상황에 예의상의 미소를 머금으며 마차에서 내려섰다.
“총장은 여전하군.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네.”
일전에 내가 완공된 시기에 맞춰 방문했던 이 신축 아카데미는 이번 가을부터 재학생을 받아 운영을 시작한 상태였다.
새로 설립한 황립 아카데미이니만큼 황실에서도 신경을 많이 쓴 곳이었고, 그래서 아카데미가 열린 첫날에는 내가 황족을 대표해 친히 입학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1황녀님께서도 여전히 강건하고 아름다우신 모습입니다! 1황녀님께서 다시 저희 르벨 아카데미에 방문해 주실 날을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총장 알렉스 새뮤얼이 감격 어린 눈망울을 촉촉하게 적시는 모습을 보자 나는 대번에 부담스러워졌다.
‘누가 들으면 내가 엄청 오랜만에 여기에 온 줄 알겠네.’
참고로 내가 반려시켰던 아카데미의 명칭은 결국 내 이름을 딴 ‘르벨’로 지어졌다.
내가 다른 일로 바쁜 사이에 그 이름이 통과되었다는 걸 뒤늦게 알고 이마를 짚었지만, 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은 만족하는 눈치였다.
“면접 시간까지는 아직 조금 여유가 있으니, 총장실로 가시지요. 1황녀님이 다시 아카데미를 찾아 주실 날을 기다리며 이 알렉스 새뮤얼이 잎 한 장이 천금보다 귀하다는 남부 키르토스의 홍차를 구해 놓았답니다!”
나는 총장에게 직접 안내받아 교정을 걷기 시작했다.
오늘 내가 이곳에 온 건, 아직 공석인 아카데미의 ‘마법 실전’ 과목 교수를 선출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학기가 시작된 만큼, 다른 과목은 진작 교수들을 구해서 수업까지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법 실전 과목 하나만 아직까지도 적임자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들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드디어 몇 사람이 물망에 올랐는데, 오늘이 그들의 최종 면접이 있는 날이었다.
마법 실전은 아무래도 꽤나 중요도가 높은 과목이다 보니, 아카데미 측에서 나한테까지 면접관을 요청해 온 것이다.
사실 처음에 총장은 내게 마법 실전 교수를 직접 맡아 줄 것을 부탁했으나 내가 거절했다.
나는 알렉스 총장과 함께 교정을 거닐며 아이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지금은 점심 시간인 듯, 바깥에 나와서 뛰어놀거나 산책을 하며 야외 활동을 즐기는 아이들이 드물지 않게 눈에 띄었다.
“헉! 저, 저기 좀 봐!”
“설마 1황녀님 아니야?”
“맞는 것 같은데?!”
개중에는 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서 서둘러 인사하거나, 긴가민가한 얼굴로 수군거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나는 내게 인사하는 아이들에게 미소를 지어 인사해 주었다.
그러자 내가 1황녀라는 것을 확신한 아이들이 더욱 흥분해서 야단을 떨었다.
“아카데미 분위기가 활기차고 밝아서 보기 좋군.”
“그렇지요! 재학생들 모두 건실하고 모범적인 아이들입니다. 지금은 점심시간이라 밖에 나와 있는 학생들이 많아서 1황녀님이 귀찮지 않으실지 모르겠네요. 특히 사시사철 꽃이 피도록 품종을 개량한 이 아카시아 가로수길이 아주 인기가 좋답니다.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아카데미의 산책로들은 전부 1황녀님의 탄생화인 아카시아를 심었지요!”
알렉스 총장은 또다시 이 아카데미를 자신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단장했는지 내게 자랑스럽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에 올 때마다 이미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내용이라 이제는 별다른 감흥도 없었다.
“참, 마침 베른하르트 소공작 님도 저희 아카데미에 방문해 주셨는데 1황녀님만 괜찮으시다면 총장실로 같이 모셔도 될까요?”
오히려 한참 떠들던 알렉스 총장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꺼낸 말이 더욱 내 주의를 끌었다.
“베른하르트 소공작이 지금 여기에 와 있다고?”
나는 의아해졌다.
킬리안이 여기에 올 일이 뭐가 있지? 설마 아카데미 교수에 지원하려고…… 일 리는 없었다.
이미 이력서를 봤지만, 거기에 킬리안의 이름은 없었으니까. 그럼 진짜 아카데미에 온 이유가 뭘까?
‘설마 날 만나려고 온 건 아니겠지…….’
누가 들으면 자의식이 충만하다고 할 수 있는 생각을 잠깐 스치듯이 머릿속에 떠올렸다가, 이내 고이 접어서 멀찍이 치워 두었다.
‘아, 그러고 보니 하나 있었네. 킬리안이 아카데미에 올 만한 이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