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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황녀님-133화 (149/203)

133화

표면에 쌓인 먼지를 대충 문질러 닦자, 긁힌 자국이 나고 색이 바랜 것을 제외하고는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는 마력석의 모습이 드러났다.

제라드는 그것을 잠깐 내려다보다가, 큰 기대 없이 한번 작동시켜 보았다.

-아르벨라, 꽃구경을 한다더니 거기서 혼자 뭐 하고 있니?

-토끼풀을 찾아요.

하지만 정말 놀랍게도 몇 년 동안이나 방치되었던 마력석은 아무 문제 없이 제대로 작동했다.

생각보다 뛰어난 마력석의 성능에 저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제라드는 어릴 때 처음으로 아르벨라의 존재를 그의 마음속에 각인하는 계기가 된 영상을 잠깐 넋 놓고 보다가, 이내 그 마력석을 가지고 방을 나섰다.

황궁에 있으면서 황족들의 영상 마력석을 구하는 건 몹시 쉬워졌다.

그래서 제라드가 남몰래 가지고 있는 아르벨라의 영상 마력석도 사실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에게 의미가 남다른 물건이었기에 이런 곳에 버려두고 갈 수 없었다.

짧은 감상에서 벗어나 방을 빠져 나온 제라드는 조금 전보다 느린 발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이번에 그가 가려는 곳은, 이 저택에서의 마지막 기억이 있는 장소였다.

제라드가 그의 부친인 글렌 라스너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키지 않는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하듯이, 복도에 찍히는 걸음은 점점 더뎌져만 갔다.

이곳에서 금단술을 시행했던 글렌 라스너는 종신형을 선고받아 아직도 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아르벨라는 예전에 제라드에게 약속한 대로, 글렌 라스너의 소식을 가끔 그에게 들려주곤 했다.

그때마다 제라드는 글렌 라스너인지 아르벨라인지, 명확히 대상을 구분하기 어려운 누군가에게 빚을 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옛 과거의 흔적을 더듬어 기억 속의 장소를 찾게 된 것이다.

꼬인 실타래처럼 줄곧 답답하게 엉켜 있던 마음을 완전히 정리하기 위해서.

또 지금까지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이 기나긴 고민에도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

하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왠지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이곳에 와 봐야만 할 것 같았다.

하여 제라드는 지금도 뒷걸음질 치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고, 눈앞에 보이는 문을 밀어 안으로 들어섰다.

어두운 방 안에 몸을 들이자마자 써늘한 한기가 들이닥쳤다.

검게 변한 얼룩이 바닥과 벽면에 군데군데 눌어붙은 방은 제라드에게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상기하게 했다.

그날, 가물가물한 시야를 비집고 들어오던 불길한 보라색 빛기둥이 다시 한번 눈앞에서 재현되는 것만 같았다.

“미안하다…….”

그를 이곳으로 데려온 아버지가 왜 그런 사과를 해야만 했는지, 얼마 전까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잊고 있던 기억을 되찾은 지금은, 그때 글렌 라스너가 어떤 상황에서 그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 제라드…….”

글렌 라스너는, 단순히 금단술을 시도한 것을 들키면 자식인 제라드도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걸 알았기 때문에 죄책감을 가져 그에게 사과한 것이 아니었다.

제라드는 그에게 잊혔던 그날의 기억을 돌아오게 만든 사건을 떠올렸다.

“차라리 죽여 주게.”

“결국 죽일 수가 없었어. 이 마법을 완성하려면 반드시 이 아이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시도하는 동안, 짐승만도 못한 짓을 하려는 나를 용서할 수가 없어 너무도 간절하게 죽고 싶어졌다네.”

아르벨라와 함께 목격했던 금단술의 현장.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 안에서 자식을 끌어안고 울던 남자를 보았을 때, 제라드는 그가 지금까지 무엇을 잊고 있었는지 깨달아 버렸다.

사실은 이 라스너 저택에서의 마지막 날, 제라드의 부친은 정말 그를 완전히 버렸던 것이다.

글렌 라스너는 죽은 아내를 살리기 위해 시간을 역행하는 금단술을 사용하려 했다.

그리고 다른 무엇도 아닌 제라드를 그 제물로 삼아 죽일 생각이었다.

어머니가 죽은 이후로 아버지로서의 소임을 다해 아들인 제라드를 양육하기는커녕, 늘 방에만 틀어박혀 한 번도 그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던 남자였다.

하지만 그날은, 정말 하나뿐인 자식을 제 손으로 완전히 저버렸다고 할 수 있었다.

차라리 아르벨라와 함께 보았던 그 이름 모를 남자처럼 제라드의 부친 역시 마지막에는 차마 자식을 죽일 수 없어 금단술에 실패한 것이었다면 이런 기분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글렌 라스너는 스스로의 의지로 멈춘 것이 아니었다.

그날, 꼭 글렌 라스너가 금단술을 사용할 걸 알기라도 한 것처럼 마법을 시행하는 도중에 갑자기 다른 사람들이 저택에 들이닥치지 않았다면 정말 그는 제라드를 죽여 제물로 삼았을 것이다.

제라드는 그때 부친에게서 그런 결연한 의지를 읽었고, 그것을 믿고 싶지 않아 그날의 기억을 머리에서 지웠다.

도중에 방해자가 끼어들어 마법이 실패한 순간에도, 그는 제라드가 아니라 마법진 위에 흩어진 죽은 아내의 뼛가루를 보면서 울부짖었었다.

글렌 라스너는 그때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어차피 시간을 되돌리면 죽은 아들도 다시 살아날 것이라 생각해 깊은 죄책감 따위는 느끼지 않았던 걸까?

이렇게 잔상처럼 머릿속에 남아 있던 장소에 다시 발을 들이게 되자, 확실히 뿌연 안개가 서려 있는 듯하던 머리가 한결 맑게 개는 것 같았다.

“미안하다, 제라드…….”

그래. 자신은 고작 그 값싼 사과 한마디에 목줄 걸린 개처럼 발이 묶여, 줄곧 부친과 함께 살던 이곳을 자신이 돌아와야 할 장소라 여기고 있었다.

혹시라도 부친인 글렌 라스너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날 제대로 된 인사조차 나누지 못한 채로 헤어져야만 했던 그를, 다시 만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전부 착각이었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사람을 현혹시키며 어른거리는 신기루일 뿐이었다.

“지금 내 손 잡아.”

“네가 내 마음에 들었거든.”

“갈 곳이 없다면 내 옆에 있어. 너한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야.”

그러니 정말로 이 세상에서 제라드를 원해 준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는 셈이었다.

1황녀궁을 벗어나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도했던 과거의 어느 날, 창살 사이로 보이는 세상을 눈에 담으며 생각했던 것이 맞았다.

이미 한번 낯선 달콤함에 속절없이 빠져들고 나니, 그 속에서 제 발로 헤어 나오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이제는 거기에서 빠져나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냥 그곳에 있어도 되는 게 아닐까……?

처음으로 그를 원해 준 소녀의 곁에서, 무엇이든 그녀가 원하는 모습이 되어 살아도 되는 게 아닐까?

지금까지는 어쩔 수 없는 사정에 의해 아르벨라와 끝이 존재하는 약속을 임시로 맺은 것뿐이라고 한다면, 이제부터는 제라드의 의지로 선택해 언제까지고 기약 없이 아르벨라의 옆에 머물고 싶었다.

저도 모르게 날이 갈수록 욕심이 점점 커져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언젠가부터 그녀를 보면 그 옷자락에라도 닿고 싶었고,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더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은 열망이 생겨났다.

하지만 설령 지금까지처럼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그저 뒤에서 바라봐야만 하는 처지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고 해도, 조금이라도 가까이에서 그녀를 볼 수 있는 게 좋았다.

그래. 그러니 돌아가자, 아르벨라에게. 그리고 돌아가면, 예정된 기한이 끝나도 계속 그녀와 함께 있고 싶다고 말하자.

제라드는 이곳에 오기 전보다 확연히 홀가분해진 마음을 안고, 그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제라드는 지나온 과거를 등 뒤에 둔 채 육중한 문을 닫고 방에서 빠져나왔다.

이대로 곧장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전에 한 군데 더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부친인 글렌 라스너가 하루 종일 틀어박혀 마법을 연구하던 방이었다.

잊고 있던 과거를 떠올릴 때 함께 수면 밑에서 딸려 올라온 그레이엄 후작에 대한 기억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명확하게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글렌 라스너가 금단술을 사용하던 날, 분명 가장 처음 저택에 들이닥쳐 그를 방해한 건 황실 기사단이 아니었다.

그자들은 글렌 라스너가 평생을 준비해 온 일생일대의 기회를 망치고, 그 후에 제라드를 빼돌려 인간 사냥꾼들에게 팔았다.

비록 희미한 기억이기는 하나, 분명히 제라드는 그레이엄 후작의 얼굴을 그 무렵 어디에선가 보았었다.

그리고 또…… 그보다 더 오래전에, 부친인 글렌 라스너의 방에서 몰래 훔쳐봤었던 어떤 편지에서도 쥬논 그레이엄의 이름을 보았던 기억이 깊은 물 밑에서 흐릿한 형체를 띤 채 가물거렸다.

제라드는 잠시 후 그의 방과 마찬가지로 엉망이 된 글렌 라스너의 연구실에 도착해, 넘어진 책상 옆의 벽면을 더듬었다.

아주 어릴 때 호기심에 몰래 방을 엿봐 알게 되었던 방법대로 벽의 어딘가를 손으로 건드리자, 달칵 소리와 함께 구석의 작은 틈이 벌어졌다.

그 안에 든 물건들은 세월을 잊은 듯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예상대로 예전에 연구실을 조사한 사람들은 이 작은 비밀 공간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글렌 라스너는 이 안에 죽은 아내의 유품으로 보이는 물건들과 몇 개의 마력석, 또 한창 연구 중이던 시간 역행 금단술에 대한 자료를 보관해 두었다.

다른 사람이 작성한 듯이 글렌과 필체가 다른 자료들도 거기에 일부 섞여 있었다.

그리고 발신인이 적히지 않은 몇 통의 편지들도 함께 보관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 또한 글렌 라스너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금단술에 대한 것이었다.

제라드는 그것을 차례대로 읽어 내려갔다.

“이건…….”

그리고 잠시 후, 글렌 라스너가 숨겨둔 자료와 편지를 훑어보던 제라드의 얼굴이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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